괴인괴사 (怪人怪事, A Mad World of Fools, 1974) 영화

1974년작 "괴인괴사"는 소재가 무엇인지, 어떤 내용일지도 전혀 모른채 영화를 본다면, 나름대로 놀라운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70년대 초반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인데, 강대위가 주인공이고 장철이 제작자입니다. 여기까지만 얼핏보면, "철수무정"이나 "보표" 같은 복수한다고 칼부림하는 무술 영화 같은 것이 나올 법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시작할 때 보면, 현대가 배경입니다. 약간 어긋난다 싶지만, 그래도 한 남자가 한 여자의 행동을 몰래 엿보며 미행하는 것이 시작장면입니다. 역시 싸움질하는 범죄물일 듯 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이 남자는 무슨 복수나, 거대한 음모 때문에 여자를 미행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길게 이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일줄 알았는데, 시작한지 십몇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결말이 맺어져 버립니다. 이게 뭡니까? 아직 한시간이 훌쩍 넘게 상영시간이 남았는데 왜 끝이 난 것입니까. 계속 영화를 지켜보면, 다짜고짜 강대위가 왠 공상적인 무대에 나타나서 식탁 앞에 앉아 여유롭게 저녁을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본 이야기에 대해, 관객을 보면서 해설 비슷한 말을 해 줍니다.


(저녁 먹으며 이야기를 소개하는 강대위)

그제서야 이 영화의 기묘한 형식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범죄물도 아니고, 무술 영화도 아닙니다. 짤막짤막한 웃긴 상황극 예닐곱개를 차례로 보여주는 코메디 영화인 것입니다. 대도시 홍콩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코메디 사연들을 하나둘 보여주고, 그 사이사이에 관객들과 함께 이 이야기를 지켜보면서, 여유롭게 저녁을 먹고 있는 강대위가 재치있는 해설을 곁들이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연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렇게 소개해 주는 이야기들 중에 "변태"들을 소재로 삼는 것이 많다는 점이 있고, 그래서, 다소간 건전하지 못한 주제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심각한 수준과는 거리가 멀고 충격적인 내용을 다루는 느낌도 전혀 아닙니다. 그냥 망가지는 코메디를 위해서 일종의 "영구"의 모습으로 이런 인물들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요즘 한국 TV코메디에도 엉뚱한짓하는 여장남자나, 지나치게 폭력적은 행동을 한다거나 추한 옷차림을 한 코메디언이 등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형식으로 제작된 영화들이 몇 있습니다. 최근작 중에는 영화는 아니지만, 같은 형식으로 제작된 한국의 "이선정의 아색기가"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선정, 김경식 나오는 것으로 케이블 TV 방송에 주목적을 두고 제작된 것인데, 이선정의 사소한 노출 장면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입니다. 내용은 과장된 사연들을 좀 허무맹랑한 코메디로 꾸며서 짤막짤막하게 짧은 이야기들을 차례로 보여주고, 그 사이사이에 이선정이 어림없는 해설 한두마디를 나래이션으로 읊게 만든 것입니다.

형식은 조금 다르지만, 1960년대 초에 제작된 소피아 로렌 나오는 "복카치오 70" 같은 영화도 한데 엮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복카치오 70" 같은 경우에는 영향이 꽤 커서 한국에서 90년대에 모방작 트래쉬 무비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역시 연결 방식은 다소 다르지만 후에나온 미국 영화들 중에 "The Kentucky Fried Movie"나 "Amazon Women on the Moon" 도 비슷한 부류입니다.

구체적으로, "괴인괴사"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느 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엿보며 미행하고 있습니다.
2. 거리에서 지나가는 여자들이 모두 감탄하는 멋쟁이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3. 동네에서 난리를 부리는 바바리 코트 입은 노출광이 나타납니다.
4. 무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애인과 함께 있을 때 불량배를 물리치는 공상에 빠집니다.
5. 비서, 애인, 처, 첩 등등이 몰려드는 한 돈많은 중년 남자가 있는데, 이 중년남자는 왠지 관심이 없습니다.
6. 텔레비전에 너무 빠져서 집에 오자마자 텔레비전만 계속 보고 아내는 쳐다도 보지 않는 남자가 있습니다.
7. 한 늙수레하고 까다로워 보이는 회사의 중역이 접대를 받습니다.
8. 전통적인 홍콩 시부모가 노출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유럽계 며느리를 맞이하게 되어 당황합니다.
9. 상점가를 배회하는 소매치기 인 듯한 사람이 나오는데, 무슨 배경이 있는 듯 보입니다.


(다 웃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이 영화에 나오는 위 이야기들은 대체로 각본이 매우 단순합니다. 위에 소개한 번호 대로 해서, 2, 3, 4, 5, 7 같은 것은 코메디를 위한 딱 한가지 반전만 있는 것들 입니다. 이 이야기들의 내용은 "만화 그리는 법" 책에 나오는 네컷 만화 그리기 예시와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웃긴 줄거리는 마지막 네번째 칸 에 해당하는 딱 한가지 순간 뿐이고, 나머지 시간들은 별 변화 없이 그냥 천천히 배경과 인물을 제시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이 이야기들이 제시하는 반전이라는 것이 아주 전형적인 고전 코메디 반전 수법 그대로 입니다. 그래서 줄거리가 참신할 것도 없고, 의외성은 전혀 없고, 별로 크게 웃기지도 않습니다. 막판에 딱 하나 웃기는 장면이 나오는 것에 집중하는 것들이다보니, 그 전개 과정에서 재담이나 재치있는 몸짓, 흥겨운 코메디 주고받기 등등도 나오지 않습니다.

한편, 그 외에 1,6,8,9 같은 이야기들은 특별한 기-승-전-결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그냥 그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여러가지 정해진 시각 동안 보여주는 것 뿐입니다. 특별한 전환도 없고, 반전도 없고. 그냥 주어진 이상한 상황과 이상한 인물의 행동을 차분하게 보여주고 뚝 끝이 나는 심심한 이야기 들입니다. 예를 들면, "4. 텔레비전에 너무 빠져서 집에 오자마자 텔레비전만 계속 보는 사람"은 이 사람이 계속 텔레비전에 심하게 빠져 있는 모습을 주욱 보여주다가 그냥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런게 뭐 재밌겠습니까?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일단 다루고 있는 소재들이 비도덕적인 이상한 인간들, 변태적인 행동들을 주로 택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자극적인 맛이 호기심을 끌어 줍니다. 이런 내용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다루면 너무 무거워질 수 있는데, 끽해야 한 사연에 10분 정도인 이야기 속에서 그냥 편안하게 코메디로 펼치니까 별 감정 동요 없이 내용을 다룰 수 있습니다.

물론, 때문에 소재를 너무 케케묵은 고정관념으로만 표현하는 한계가 있고, 너무 진부해져 버린 점은 치명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여러가지 호기심 끄는 것들을 별무리없이 많이 보여줘서 시선을 끌었다는 자체는 장점이 됩니다. 이런 점은 "이선정의 아색기가"가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저 여기까지 였다면, 이 영화도 그냥 "소재는 재밌었다"에 그치는 트래쉬 무비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사실, 줄거리만 따지자면, 트래쉬 무비의 대강 만든 줄거리라고 볼 소지도 다분합니다. 80년대 "유머 일번지"에서 정보부나 청와대에서 전화와서 방송금지 당해버린 부분이 생길 때, 급하게 대강 만들어 때워 넣는 무성의한 코메디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괴인괴사"는 그런 거의 있으나 마나한 줄거리 속에서 표현한 방식들이 꽤나 이목을 끄는 면이 있습니다.

일단, 이 영화는 음악이 아주 좋습니다. 록큰롤이 다양하게 어울린 아주 현대적인 재즈 풍의 음악을 주제곡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영화 화면의 전환점 마다, 영화의 중요한 장면마다 곡조가 착착 들어맞도록 영화를 꾸며 놓았습니다. 그래서 가볍고 장난스러우면서도 여유만만한 이 음악이, 영화의 분위기를 한껏 돋구어 줍니다.

음악 덕분에, 별로 웃기지 않은 것도 은근히 유쾌해 보이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냥 추레한 영구 코메디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도시인들의 정신병리와 문화적 적응기제" 따위의 주제까지 괜히 생각해보게 하는 그럴싸한 느낌도 만들어 줍니다. 그냥 추한짓 해서 웃기고 마는 장면이, 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짧게 끝을 맺으니, 꼭 무슨 홍콩 사회의 어떤 단면을 형상화한 예술적 상징 같은 느낌이 나버리는 것입니다. 음악이 좋고, 연주가 좋고, 화면과 부드럽게 어울리는 모양도 좋습니다. 그 정도로 이 영화의 음악은 꽤 잘 들어가 있는 편입니다.


(이림림과 직접 에피소드에도 출연한 강대위)

두번째로,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 실력도 출중합니다. 일단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은 배역의 한심함과 내용의 단순함에 비해서, 모두 실력 좋고 노련한 사람들입니다. 어색한 표정, 어색한 동작은 눈에 뜨이지 않고, 모두 다 진짜 같이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이런 사소한 저예산 코메디 물에서 좀체로 발견하기 어려운 멋입니다.

연출은 본 받을만한 부분이 많다고 할 정도 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 영화는 대사가 매우 적게 사용된 영화입니다. 중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마 어지간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연들의 내용을 전부다 이해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시각적인 표현, 화면만으로 전달해 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 코메디의 특징을 아주 잘 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표정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어떤 동작을 어떤 차례로 보여줄 것인가 하는 부분을 잘 조율해서 편집하여 구성해 놓았습니다. 대사 없이도, 상황과 감정, 줄거리와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배우들의 행동과 연기는 무언극 처럼 꾸며진 부분이 많습니다. "미스터 빈"이나 90년대 초에 MBC에서 코메디언 김상호가 흉내냈던 "미스터 뚱"처럼 대사 없이 행동을 보는 것 만으로 내용을 전달하도록 짜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미스터 빈"을 넘어서서, 훨씬 박진감 넘치고 빠른 편집을 구사하며, 과감하게 확대해 보여준다거나, 화면이 역동적으로 다가가거나 멀어지며, 움직이거나 건너뛰며 보여주는 여러가지 화려한 기술도 많습니다. 연극 무대를 그대로 화면에 담아낸다는 느낌이 강한 "미스터 빈"에 비하면, 이 영화는 보다 다양하게 화면을 조합하고 화면이 재미나게 바뀌어 갑니다. 그 정도는 비슷한 보통 코메디 영화보다 더 화려할 정도입니다.

이 영화는 중간중간에 나오는 강대위가 저녁 먹으면서 해설하는 부분은 전형적인 무대 연출로 연극처럼 꾸몄고, 코메디극 자체는 대부분 야외 촬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번갈아 나오니 도시의 각양각색을 둘러본다는 느낌이 더 살아납니다. 더군다나 야외촬영 장면에서는, 넓은 야외를 무대로 할 때 찍을 수 있는 특유의 경치라든가, 야외의 배경과 등장 인물을 가까이서 찍는 모습을 대비해서 표현하는 등의 느낌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동감 있는 화면 구성은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옛날 무성영화와 아주 대조적인 이 영화의 멋이라 할만합니다.


(공동묘지를 배경으로 추격전)

워낙에, 자극적인 소재를 진부하게 풀어 놓을뿐인 중심줄기가 힘이 없어서, 한계는 뻔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70년대 초반 홍콩의 빈민, 부자, 남녀노소 여러계층의 인물들이, 중심가, 교외, 공동묘지, 골목길 등등의 여러 다양한 지역을 보여주며 펼쳐지는 이야기에다가, 좋은 연출에 섞이니 확실한 구경거리가 되어 줍니다. 요지경으로 돌아가는 대도시의 면면을 이어지는 꽁트들로 엮어서 보여준다는 시도에 대강 접근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마지막 이야기가 영화 전체의 1/4을 차지할 정도로 긴데 비해서, 절정과 결말이 흐지부지 한 것은 좀 균형을 깨뜨리는 듯 합니다.


그 밖에...

70년대 홍콩에서 흥행 목적으로 만든 쇼브라더스 영화가 상당히 자유롭게 소재를 선택했다는 예시가 될 수도 있는 영화입니다. 그런가 하면, 쇠퇴기에 접어든 쇼브라더스가 자극적인 소재나 노출장면을 남발하던 시기의 영화 예시로도 꼽아볼 수 있습니다.

4.에서 강대위 애인으로 나오는 이림림(李琳琳)은 실제로 강대위 애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대위와 결혼했는데, 이 영화가 결혼하던 해에 나온 영화입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사용하는 속임수는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감독을 맡은 요즘 영화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위슬리 시리즈 http://gerecter.egloos.com/3003802 등으로 중국어권 SF작가로 명망이 있는 예광이 각본의 상당부분을 맡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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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措大 2007/11/14 19:44 # 답글

    늘 그렇지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어디서 볼 수 있으려나요;)
  • 게렉터 2007/11/14 19:51 # 답글

    "이글루스 첫화면이 바뀌었구만..."하고 한 마디 쓰려 했더니, 왜 이런 글이 이글루스 바뀐 첫날 첫화면에 나온 것입니까?

    제 컴퓨터에서만 "괴인괴사"가 이글루스 첫화면에 뜨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블로그에서도 건전하고 참신한 글 나름대로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건만, 하필이면 첫화면 시작을 뒤덮는 글이 이 글이라니. 어쨌거나, 이 기회에 널리 알려주신 것이라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 게렉터 2007/11/14 19:51 # 답글

    措大/ 천영오락 에서 DVD로 찍어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yesaisa.com 같은 사이트에 가셔서 주문을 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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