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도적(鑽石艷盜, Venus' Tear Diamond, 1970) 영화

항간에 종종 떠도는 비판 중에 우리 정부가 1988년에 서울올림픽으로 "업적"과 "선전"을 억지로 만들어 냈고, 1993년에는 뒤이어 "대전엑스포93"으로 "업적"과 "선전"을 이루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류의 비판이야기 중에는 일본에서 수입해 온 것이 꽤 많은데, 바로 1964년 "도쿄올림픽"과 1970년 "일본 엑스포 70"이 그 원본입니다. 실제로 1970년을 전후로 해서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개최된 세계박람회인 일본 엑스포 70 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한국에는 박노식, 윤미라, 오지명, 문정숙이 나오고 최인현이 감독을 맡은 첩보물 "EXPO 70 동경전선"이라는 영화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홍콩에서는 하리리(何莉莉), 능운(淩雲) 주연에 한국배우들이 우르르 나오는 "연애도적(찬석염도, 鑽石艷盜, Venus' Tear Diamond, 1970)" 이라는 영화도 나왔습니다.


(문제의 다이아몬드(鑽石))

(일본 엑스포 70)

1960년대에는 일본의 신간선을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라 선전했습니다. 이 영화는 신간선 분위기가 풍기도록 들판을 달리는 열차를 보여주면서 출발합니다. 이 열차에는 하리리와 한국배우 박지현이 타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유명한 보석 도둑으로 별명이 야래향(夜來香) 입니다. 곧이어 화면이 바뀌어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배우들은 능운과 한국배우 트위스트 김으로, 마카오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 역시 유명한 보석 도둑으로, 별명이 야백작(영화속 중국어로는 夜爵士) 입니다. 쌍쌍 두 도둑 일당은 공교롭게도 둘 다 일본의 엑스포 70 회장 일대에서 열리는 "동남아시아 가요제"에 출전하러 가는 길입니다.


(천재 보석 도둑 야래향: 하리리, 박지현)

(천재 보석 도둑 야백작: 트위스트 김, 능운)

도둑들이 갑자기 왜 "동남아시아 가요제"에 출전하는고 하니, 일단은 두 사람이 둘 다 노래를 썩 잘부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 부른다 한들, 도둑이면서 국제대회에 출전할 가수까지 겸업할 수 있는지는 좀 이상합니다만, 하여간, 영화 속에서는 이상하게도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 다 도둑질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것은 두 도둑들이 겉으로 내세운 핑계일 뿐입니다. 이 사람들의 진짜 목적은 가요제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라, 가요제에 온 한 귀부인의 "비너스의 눈물 다이아몬드"를 훔치는 것입니다. 즉, 도둑 "야래향"과 "야백작"이 동남아시아 가요제에 온 이유는, 한국배우 최지숙이 연기하는 백만장자 부인이 어마어마하게 큰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를 걸고 가요제 회장을 돌아다닐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입니다.


(비너스의 눈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있는 귀부인, 최지숙. 코메디 조연인 이곤(李昆)이 옆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중심 줄기는 두 일류 도둑이 서로 먼저 다이아몬드를 훔치기 위해 경쟁하듯 애쓰는 이야기입니다. 거기다가, 남녀 주인공들은 무조건 눈맞아버리는 영화 속 법칙에 따라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서 알콩달콩 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은 듯 합니다. 영화 다운 교묘한 우연에 따라 보석 하나를 두고 큰 도둑들이 한 장소에 몰려들어 업치락 뒤치락하는 것은 흥미로운 이야기거리가 될만합니다.


(야백작 - 보석 - 야래향)

영화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거기에 왜, 갑자기 "가요제"가 끼어든 것입니까? 더군다나 왜 주인공들을 굳이 가수 겸 도둑으로 한 것입니까? 그냥 가요제 든 뭐든 행사에, 도둑이 자연스럽게 변장/가장 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관람객이나, 투자자, 하다 못해 연예기획사 담당자 같은 사람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굳이 이 영화는 도둑들이 국제 가요제의 대표선수로 되어 있고 그대로 참가하기 때문에, 특별한 변장/가장 장면이 없어졌습니다. 더우기 두 도둑 모두 애초부터 일류 가수로 노래를 아주 잘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특별히 정체를 숨기는 느낌도 잘 살아나지도 않았습니다.


(노래하는 하리리)

이렇게 만든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란, 이 영화가 절반쯤은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 헐리우드에서는 뮤지컬 유행이 저물고 있었지만,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사에서는 뮤지컬을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만들어서 흥행시킨 것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감독을 맡은 일본 감독, 이노우에 우메지(井上梅次) 도 홍콩 쇼브라더스에서 뮤지컬 영화들을 몇편 연출하여 그 기량을 뽐낸바 있습니다. 바로 이 영화는 그 이노우에 우메지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손을 댄 쇼브라더스 시절 후기작 영화인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영화는 몇년 앞서 나온 홍콩 쇼브라더스 사의 흥행작 "대도가왕(大盜歌王, The Singing Theif)"과 궤를 같이 하는 영화 입니다. "대도가왕"도 유쾌한 도둑이 여유만만하게 범죄를 저지르며 신출귀몰하는 신나는 이야기가 중심 줄거리입니다. 바로 "대도가왕"에서 그 유쾌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에 흥겹고 화려한 뮤지컬을 결합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괴도 뤼팽"이 음악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되어 있는 점이라든가, 일본의 "루팡 3세"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음악이 아주 훌륭한 것만 봐도 이런 결합은 떠올릴 수 있을만한 것입니다. "대도가왕"에서는 주인공이 낮에는 쇼무대의 가수인냥하지만, 사실 본업은 도둑이라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영화도 그 비슷한 느낌으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궁리했고, 그래서 짜낸 것이, 국제 가요제 참가자가 전문 도둑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연애/대결 구도까지 꾸며넣기 위해서 그런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다소 혼란스러운 내용을 꾸리게 된 것입니다.


(노래하는 능운)

이렇게 좀 억지로 이야기를 섞어 버린 탓에 이야기는 손해를 입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가장 엉성한 것은 이렇게 하다보니, 국제 가요제가 제목에 걸맞지 않게 무척 초라해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귀부인을 파티에 만나서 슬쩍 호감을 산 뒤에 춤을 추며 보석을 훔치는 괴도 뤼팽스러운 수법의 정석을 많은 장면에 써먹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의 국제 가요제라는 것은, 무대 위에서 참가자가 노래를 부르면, 다른 사람들은 그 노래에 맞춰 저녁 식사를 하면서 춤을 추는 파티 형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야 귀부인과 춤추며 보석에 눈독들이는 장면을 넣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즉, 국제 가요제 경연대회라는 거창한 제목에 걸맞잖게, 이 영화 속의 행사 모습은 그냥 클럽의 저녁 쇼무대 같아 보일 뿐입니다.


(가요제에 참석한 능운과 트위스트 김)

이 영화는 그렇게 가요제는 가요제대로 도둑 이야기는 도둑 이야기대로 꿰어 맞추느라, 영화 줄거리의 재미난 요소도 살리지를 못한 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 영화에서는 경쟁 관계에 있는 도둑들이 저마다 노래를 부르고, 다른 참가자들도 다들 노래를 부릅니다. 그렇다면, 노래를 부르는 행동이나, 노래 가사, 노래 멜로디 같은 것들이 "도둑질"이나 "추리" 자체와 연관되는 편이 재미있고 극적일 것입니다. "대취협" http://gerecter.egloos.com/2987678 처럼 노래에 어떤 암호가 숨겨져 있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고,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독을 맡은 "영 앤 이노센트" http://gerecter.egloos.com/2259889 나 "나는 비밀을 안다" 같은 영화처럼, 노래 연주의 순간이 어떤 범죄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도 흥미있을 것입니다. 혹은,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이 노래부르기와 도둑질 사이에서 안절부절 하는 갈등장면 같은 것이 어떻게 들어가도 재미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것이 거의 전혀 없습니다.


("동남아 가요대회" 표지판)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는, 가요제에 참가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그냥 배경음악의 역할만 할 뿐입니다. 활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리리가 연기하는 야래향이 몰래 방에 침입해 긴박하게 보석을 뒤지는 장면 같은 것은 좋습니다. 이 부분에서 하리리는 숨을 죽이고 긴박하게 움직이며 보석을 뒤지고 있는데, 같은 시각 무대 위에서는 가요제 참가자가 여유롭게 큰 목소리를 자랑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두 장면은 번갈아 나옵니다. 관중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가수와 살금살금 숨어드는 하리리가 대조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는 하리리가 급하게 뒤지고 있는데, 노래가 흘러나오니, 시간이 노래에 맞춰 째깍째깍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잘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리리의 초조하고 급한 상황도 강조되어 잘 표현됩니다. 적당한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끌벅쩍 가요제)

(살금살금 잠입 )

하지만, 이 정도로 활용한다면, 이렇게 거창하게 꾸밀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애금귀서(처녀수첩)" http://gerecter.egloos.com/3470514 같은 영화에 나오듯 그냥, 클럽 무대 정도에서 연주하는 연주자 한 명만 출연 시키면 충분합니다. 거창하게 국제 대회를 열 필요도 없고, 더군다나, 두 주인공이 직접 국제 대회 참가자로 나오게 할만한 이유도 더욱 없었습니다. 이야기의 갈등축이자, 경쟁상대이 두 주인공이 직접 노래를 부르는 장면들은 아예 배경음악 구실 외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이 영화에서 굳이 국제 가요제에 참여한다고 한 것은 괜히 "국제 가요제가 뭐 이렇게 초라한가"하는 공감하기 어려운 엉성한 느낌을 주는 부작용이 클 뿐,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더 치명적인 것은, 이렇게 해서 집어 넣은 노래의 질이 별로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OST로 따로 뜯어서 듣는다면 나쁜 수준은 아닙니다. 좋은 곡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래가 60년대에 유행해서 이미 좀 철이 지나가고 있는 전형적인 당시 한국 트로트 풍과 비슷한 느낌으로 되어 있습니다. 노래가 다양하지 못해서 심심한 것도 문제이고, 특유의 곱고 가녀린 창법은 영화에 안맞게 어색할때가 많습니다. 여유 부리며 화려한 무대를 날뛰는 보석 도적들의 휘황찬란한 모습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나마 하리리는 좀 낫습니다. 강하고 빈틈없는 대도인 "야백작" 능운이 마치 "이별의 부산정거장"등을 부른 남인수 선생처럼 노래하는 모습은 사실 종종 우스꽝스럽습니다. 가짜 더빙이 안 들어맞는다는 점도 더 추레하게 드러납니다.


(영화속 국제 가요제의 모습. 무대에는 빨강 한복입은 한국 대표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리리, 능운의 노래 장면 동영상)

이런 노래들이 아주 쓸모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는 두 도둑이 사랑에 빠지고, 상대방이 도둑임을 모르는 두 사람이 둘 다 자신의 정체가 도둑임을 비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사랑의 순정이 잘 표현되어야 묘미가 사는 부분입니다. 이런 장면에서는 이 영화의 이런 노래들이 대강 들어 맞습니다. 또 가요제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의 모습을 단순히 비춰주는 것 외에, 정말 "뮤지컬" 스럽게, 두 등장인물이 노래로 대화를 하거나 하는 부분들이 조금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분량은 적지만, 그래도 노래가 "OST 판매용"으로 따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내용에 잘 들어맞도록 조율되어 있는 듯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좀 괴이한 연출이 한 두 군데 나와서 이런 장점도 완벽하게 살아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색상이 찬란하면서도 개성적인 모습을 잡기 위해 이 영화에는 야밤의 수영장에서 고무 튜브를 타고 있는 두 사람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린이 장난을 위한 것인 듯 보이는 고무 튜브의 색깔과 야간 조명을 받은 수영장은 그 빛깔은 확실히 화면에 담기면 멋지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런 튜브 위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노래"를 하게 해 버렸습니다. 차라리 이런 느낌을 코메디로 살리면 재미있었을 텐데, 말씀드렸다시피 노래와 연기는 좀 묵직해서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이상한 느낌만 날 뿐입니다.


(슬픈 사랑의 노래...)

비슷하게 이 영화에서는 사랑의 기쁨에 구름속을 날고 있다가, 자신의 정체가 도둑임을 깨닫고 땅으로 떨어져 버리는 악몽을 꾸는 장면이 있습니다. 구름을 날아다니고, 구름 속에서 땅으로 추락하고 하는 광경은 환상적인 모습으로 꾸미면 꽤 재미난 뮤지컬 쇼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야말로, "무지개 위에 그대와 함께 앉아 세상이 다 내 손안에 있는 듯한" 그 기쁨을 공상적인 미술로 재미나고도 유쾌하게 담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알라딘"에 나오는 "A Whole New World" 는 대표적인 예 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특수촬영 기술의 한계가 명백하고, 미술에도 별 공을 들이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거기에다가 너무 진지한 노래가 겹쳐서 좀 재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나마 화면이 빙글빙글 도는 부분이라든가, 화면이 이동하면서 안개 효과와 솜으로 된 구름 사이를 잘 지나다니고 있어서 최소한의 의미 전달은 분명히 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환상적인 뮤지컬 장면)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노래 부분 말고, 보석을 두고 쫓고 쫓기는 그 소동 자체가 잘 묘사되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일단 이 영화에서는 보석과 관련한 아슬아슬한 이야기는 "잠입/탈출할 때 고층 건물 벽을 타기 때문에 떨어질까봐 조마조마하다" 한 가지만 계속 반복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장면들은 건물 내부와 바깥 장면을 교대로 보여주면서 벽에 매달려 아슬아슬하게 숨어 있는 사람을 재미거리로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조금 밖에 없습니다. 또 벽에서 떨어질까 말까 비틀거리는 연기가 가짜 같아서 긴장감도 적습니다. 무엇보다 벽타는 것 하나만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므로 너무 지겹습니다. 천하제일의 도둑 인 것 처럼 나오더니, 고작 기술이라고 보여주는 것이 벽타는 것 뿐이라서 심심한 것입니다.


(벽타기)

(다시 벽타기)

(또 벽타기)

(계속 벽타기)

(끝가지 벽타기)

(끝없는 벽타기)

이 영화 속에는 벽타기 외에도 "진짜 보석"/"가짜 보석" 바꿔치기 라든가, 보석의 행방,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는 상황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이 보석을 찾아 헤메는 도둑들 사이에서 이야기의 발단/전개/절정/결말 상황을 결정 짓기도 하고, 반전 거리도 되는 것입니다. 즉 언제 어떻게 해서 저 도둑 손에 진짜 보석이 넘어갔고 내 손에는 가짜 보석 밖에 없는가, 하는 그 영문을 모르는 수수께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름대로 탄탄한 줄거리 기둥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는 정말로 "영문을 안 가르쳐 줘버리는" 과감한 각본 때문에 흐지부지 됩니다. 보석을 서로 훔치려고 하고 행방이 묘연한 그 복잡한 상황이 갑자기 생기기도 하고, 갑자기 해결되기도 합니다. 영화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어째서 그렇게 된 사연인지 장황하게 이야기는 해줍니다. 하지만 설득력이 너무 적습니다. 역시나 "영문을 안 가르쳐 줬다"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또 중간에 볼거리로 주인공 일행이 엑스포 70 을 구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이것은 말그대로 그냥 동떨어진 엑스포 70 소개 장면일 뿐입니다. 앞 이야기와 상관없이 갑자기 구경하러 나가버리고, 뒷이야기와도 별 소재 연결이 없습니다.


(일본 엑스포 70)

(엑스포 70 한국관에서 펼쳐지는 공연)

결국 이야기를 지탱해 주는 것은 주인공 배우들의 모습입니다. 하리리와 능운, 두 사람 모두 멋진 모습의 배우들이고, 유쾌한 대형 보석 도둑 연기를 잘 해내고 있어서 썩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이 배우들의 도우미인 트위스트 김과 박지현도 방자와 향단이로서 역할을 아주 잘 해주고 있습니다.

네 배우 모두, 조금 비현실적인 사연을 다루는 과장된 뮤지컬풍의 이야기 속에서, 연기를 알기쉽고 보기 쉽게 고장하는 몸짓, 손짓 연기가 자유스럽습니다. 박지현이 기분이 좋아서 빙글빙글 돌며 즐거워하는 부분 같은 경우는 좀 과한 듯 하기는 하고, 트위스트 김은 연기 실력과 대사의 분량에 비해서, 막상 결정적인 활약은 없어서 비중이 약간 엉성하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두 도둑이 거물급 도둑인데, 사랑에 빠져서 흔들리고 있다는 점 자체는 이 조연 도우미 두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잘 짜여 있습니다.


(향단이의 역할)

주인공 둘인, 하리리와 능운을 비교하면, 하리리가 더 낫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영화는 기술좋은 천재 도둑 두 사람이 기량을 겨루는 영화지만, 막상 두 도둑의 기량은 벽타기 밖에 안나옵니다. 두 도둑은 전문도둑다운 여유나 예리함을 드러내는 장면이 없고, 도리어 평범한 사람처럼 당황하고 놀라는 감정을 살려 보여주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이 뭔가 정말로 대단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부분은, 턱시도나 정장을 차려 입고, 근사한 사람인냥 대사하고 표정짓는 순간순간 뿐입니다. 이 영화는 하리리의 분량이 더 많기 때문에, 하리리에게 이런 순간순간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영화 내용을 봐도, 하리리가 능운보다 한 발 먼저 상황을 알아채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건의 전환점들도 다 하리리의 몫입니다. 이 영화는 중대한 전환점 몇개 이외에는 보석 절도 이야기를 따로 말할 것도 없이 싱겁습니다. 그런데 전환점들을 하리리가 다 가져갔으므로, 능운의 실제적인 역할은 더욱 작아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서 능운은 말이 천재 보석 도둑 "야백작"이지, 사실 아무 하는 일 없이, 그냥 멋있는 표정 지으며 "언제 훔칠까?" "언제 훔칠까?" 하는 대사만 반복하고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능운이 심심하고 하는일 없는데 비하면, 하리리는 좀 더 낫게 나 왔다는 것입니다.


(능운 대 하리리)

보석을 두고, 남녀 전문 도둑들이 서로 경쟁한다는 구도 자체는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이 하나 둘 소개되는 도입부는 적당히 흥미진진 합니다. 가요제가 열리는 호텔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숨고, 숨기고, 거짓말로 둘러대고, 당황하며 허둥대는 모습은 고전적인 코메디의 느낌이 괜찮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이나 영화 "오스카", "해변의 사생활" http://gerecter.egloos.com/3105731 같은 저택을 배경으로하는 소극(笑劇, farce) 느낌이 잘 서려 있습니다.

앞 부분에서 우스꽝스러운 형사, 보석을 가진 갑부를 노리고 온 도둑, 배경이 되는 호텔 같은 구도는 "핑크 팬더" http://gerecter.egloos.com/3079875 의 영향이 보이기도 합니다. 또, 남녀 도둑의 대결을 묘사할 때 화면 분할을 통해 두 사람의 상황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재치있는 웃음서린 장면을 만들어내는 등등의 수법은 60년대 이전에 나왔던 "성대결"을 소재로 하는 헐리우드 코메디물의 수법을 잘 배워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서로 속고 속이는 혼란상을 소개하기 위한 속임수와 반전들을 좀 더 충실하게 살렸다면, 또 두 도둑들이 재치나 기술을 과시할 수 있는 부분이 좀 더 있었다면하는 생각이 계속 남습니다.


(화면 분할)

좋은 면을 보자면, 영화가 끝까지 유쾌한 느낌 자체는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사랑이면 다 좋다"는 낙천적인 이야기에 뮤지컬 다운 발랄한 느낌을 버무려 놓은 것이 효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몇분간 계속되는 긴긴 입맞춤으로 끝나는 그야말로 영화 같은 결말까지 느긋하게 밝은 이야기를 즐기는 맛은 살아 있는 영화입니다. 이 밝은 이야기를 위해, 하리리, 능운, 박지현, 트위스트 김은 처음부터 끝까지 명랑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입맞춤)

그 밖에...

일본의 이노우에 우메지가 감독을 맡고, 한국의 트위스트 김, 최지숙이 출연하며,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사에서 제작된 영화로는 이 영화 외에 "아애금귀서(처녀수첩)"도 있습니다. 같은 해에 나온 영화로 기록되어 있는데, 둘다, 하리리와 능운이 주인공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 "연애도적"과 자매편 관계에 있는 영화입니다. 여기에 대한 사연은 "아애금귀서(처녀수첩)"에 대해 썼던 내용 http://gerecter.egloos.com/3470514 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는 이 영화 "연애도적"이 먼저 소개되고, 수년 후에 "아애금귀서(처녀수첩)"가 소개 되었습니다.

"아애금귀서(처녀수첩)"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될 때는 신상옥이 한국쪽 감독을 맡았다고 소개 했고, "일본인 감독"을 숨기려는 속임수로 엉뚱한 다른 홍콩 감독인 엄준을 감독으로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거의 전적으로 이노우에 우메지가 감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제목은 "찬석염도(鑽石艷盜)"로, "연애도적"은 당시 한국 개봉 제목입니다. 한국판에서는 야백작이 마카오의 도둑이 아니라 한국의 도둑으로 나옵니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한국배우 박지현은 "철낭자(鳳飛飛, Lady with a Sword)"에도 비슷한 시기에 하리리와 함께 출연했습니다. 비중은 훨씬 적습니다만, 우라나라에서는 하리리의 대표작으로 가끔 꼽히기도 합니다. 박지현은 활극, 코메디물 등에서 활약했는데,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로는 괴기물 느낌이 물씬 나는 영화인 "태음지(太阴指, Finger of Doom, 1972)"가 가장 유명하다 할만하고, 한국영화 중에 유명한 것은 정창화가 감독을 맡은 "황혼의 검객", 남정임 나오는 "공주님의 짝사랑" 등에서 조연을 맡은 것들입니다. 박지현은 제목만 들어도 아류작 느낌이 화끈하게 풍기는 "나는 비밀이 '있다'", "'남남서'로 '직행'하라" 등의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엑스포 70 은 대만이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한 마지막 공식 세계 박람회 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중화민국관"이 한 번 나옵니다.


(중화민국관. 남자주인공 능운이 대만출신입니다.)

이전에 "아애금귀서(처녀수첩)" 소개를 할 때, 주인공으로 나온 배우 "최지숙"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이 영화 연애도적과 출연자 명단을 비교하다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뭐가 문제였는고하니, 한 중국 웹사이트의 자료를 참고했는데 거기서 최지숙과 진의령의 정보가 뒤바뀌어 게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애금귀서"에서 처음 최지숙이라고 소개했던 배우가 진의령이고 진의령이라고 소개했던 배우가 최지숙인 것입니다. 지금은 수정해 두었습니다.

이렇게 바꿔놓고 살펴보니, 이제 아귀가 들어맞습니다. 최지숙은 한국영화 "이조괴담"에 나온 그 최지숙이고, 테렌스 영이 감독했던 악명 높은 "인천"에도 출연한 적이 있는 바로 그 배우입니다. 진의령 역시, "연경인(年輕人, Young People, 1972)" 등의 영화에서 동생 진미령과 함께 나왔던 홍콩 배우 진의령입니다. 진의령의 동생 진미령이 일본에서 "아그네스 찬"이라는 이름으로 성공한 유명가수라서 진의령도 더 잘 알려진 배우인데,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출연작을 다룰 때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트위스트 김은 이번에도 본명 김한섭(金漢燮)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트위스트 김의 쾌유를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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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렉터블로그 : 쇼브라더스 고전 홍콩 영화 목록 2014-10-05 00:19:41 #

    ... 噴火美人魚, 1969) 신검진강호(神劍震江湖, 1967) 여교춘색(女校春色, Whose Baby Is In The Classroom?, 1970) 연애도적(鑽石?盜, Venus' Tear Diamond, 1970) 오독천라 (五毒天羅, The Web of Death, 1976) 오둔인술 (五遁忍術, Five Element Ninja, Chinese Su ... more

덧글

  • rumic71 2007/11/19 13:54 # 답글

    돌이켜 생각해보면, 몇 년도인지는 잊었지만 서울 국제 가요제의 전야제가 저런 클럽 분위기로 진행된 적은 있었습니다.
  • 게렉터 2007/11/19 13:57 # 답글

    rumic71/ 사실 전야제는 물론이요, 요즘 "연예대상"류의 상은 본상까지도 분위기가 느슨한 것이 많기는 합니다.

    그런데, 노래 실력을 겨루는 행사에, 주인공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누구는 밥먹고 있고, 누구는 춤추고 있고 하는 장면이 난잡하게 엮이는 것은 상당히 이상했습니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보통 뮤지컬 영화에서는 진짜 클럽의 저녁 쇼라고 해도, 주인공이 노래 실력을 과시하는 장면이 나오면, 좌중의 이목이 집중되고, 대단한 실력에 사람들이 감탄하면서, 거의 리사이틀 공연 분위기로 서서히 돌변하지 않습니까? 이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 다소간 혼란스러웠습니다.
  • 심리 2007/11/19 17:19 # 답글

    남녀 도둑 영화라면 헐리우드의 숀 코너리와 캐서린 제타 존스의 <엔트랩먼트>를 감명 깊게 본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 보면 요즘 나오는 영화들의 선구가 되는 고전들이 다 있는 셈이군요. 같은 소재라도 어떻게 생생하게 잘 살려내느냐가 관건이겠군요.

    <연애도적>에 나오시는 배우들은 멋져보이는데, 내용상 화려한 도둑질 기술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게 아쉽군요. 그랬다면 명작이 되었을지도 모를텐데요. 가요제도 뭔가 화려하게 꾸몄다면.....
  • 게렉터 2007/11/20 18:04 # 답글

    심리/ 보다보면, "동남아시아 가요제"이기 때문에 각 나라 분위기를 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가요제를 충분히 마음껏 연출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좀 듭니다. 훨씬 더 화려하게 꾸민 비슷한 시기 홍콩 쇼브라더스 뮤지컬 도 꽤 많기 때문입니다.
  • dramania 2008/10/28 19:43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오래 된 홍콩 영화 팬인데요.. 이 영화에 나오는 링윈과 후옌니가 주연한 애가라는 영화 정보 좀 알수 없을까 해서 댓글 남깁니다.
  • 게렉터 2008/11/07 11:01 # 답글

    dramania/ 능운과 호연니 주연의 영화 중에 유명한 것은 1970년작 "신불료정(新不了情)"이라는 영화로 영어 제목은 "Love Without End" 이며, 이 영화는 DVD도 나와 있으므로, YesAsia등의 아시아권 DVD 판매 사이트에서 검색하시면 좀 더 정보를 얻으실 수 있지 싶습니다. 이 영화의 한국판 제목이 "애가" 아닌가 싶은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한번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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