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는 "15년전의 흘러간 댄스곡들 모음" 처럼, 요즘에는 잘 연주도 안되고, 가수도 상당히 잊혀졌고, 역사적인 위치도 별로 평가 받고 있지 못한, 흘러간 댄스 곡들을 몇 곡 모아보려고 했더랬습니다. 하지만 80년대 말만 해도 자료가 별로 없어서,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금으로부터 20년전. 그러니까 1988년의 댄스곡들을 유행했던 것 중심으로 모으고 글을 좀 덧붙여 보았습니다. 1988년 365일에 한정하기에는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삼을지 애매해서, 임의로 1988년을 기준으로 1년차이를 포함해서, 1987년곡들과 1989년의 댄스곡들도 함께 다루었습니다. 몇몇 중요한 댄스곡들, 정말로 흘러가버려서 잊혀진 댄스곡들이 분명히 더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료를 찾는데 실패해서 유명한 것들 위주로만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하의 모든 영상들은 다음TV팟 에 올라와 있고, 퍼가기를 할 수 있게 허용되어 있는 것들을, 다음에서 지원하고 있는 퍼가기 기능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대를 사랑해 - 세또래 88년도의 반짝 가수로 살짝 인기를 끌고, 별다른 인정도 못받고, 이후에 영향도 크게 끼치 못한채 사라진 가수로는 단연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세또래"입니다. "세또래" 이야기를 하자면, 뭐니뭐니해도 한국 가요계의 유구한 풍습인 일본 가수 모방해먹기 전통에 따라, 일본 가수 이야기를 해야할 것입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일본 대중음악이 공식적으로 유통되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이래저래 비공식적으로 유통되어 인기를 끌던 일본 가수들이 몇 있었는데, 80년대에 소리소문없이 인기를 끌던 일본 가수로 "소녀대"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10대 소녀 세 명으로 팀을 만들어서 발랄한 모습으로 경쾌한 춤을 추게한 것으로, "소녀대"는 그 결성을 따져보자면, "소년대"의 자매팀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의 "소녀대"는 86아시안게임 - 88올림픽에 발맞추어, 서울가요제에서 노래를 부르고, "Korea" 라는 곡을 유행시키면서, 국내에서 인기를 더욱 굳히게 됩니다. "소녀대"는 이처럼 한국 홍콩, 대만 등지에서 인기를 끌어서, 중국어권판 "소녀대" 모방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의 결과로, 한국에서는 지금 소개해드리는 소녀대 모방팀 "세또래"가 생겼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세또래"는 "소녀대"와 딱히 다른 개성을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찌보면 좀 무모한 모방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위의 노래 "그대를 사랑해"도 일본어 번역투 가사에, "소녀대"의 일본 노래풍 작곡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가사 자체가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되어 있습니다. "세또래"는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10대 소녀 가수로서 상당한 화제거리였습니다만, 결국 여러 한계로 1년여만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세또래 중 한 사람이 거의 10년후인 90년대 중반에, 또다시 유명한 모 10대 소녀 가수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묘기에 가까운 "나이 속이기"를 펼친 놀라운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한국 가요계에서, 이후, SES, 핑클, 지금의 소녀시대, 원더걸스 까지 계보를 그려볼 수 있는 그 꼭대기 위치에 일본의 "소녀대"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또래"는 그 첫 모방시도라는 정도의 의의로 기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어 - 소방차 일본의 "소녀대"를 모방한 팀이 "세또래"라면, 일본의 "소년대"를 모방한 팀이 "소방차"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또래"와 달리 "소방차"는 대부분의 노래들에 국내 유명 제작진이 참여하여 더 성의있게 제작했고, 또 10대 여중고생 인기몰이에 초반부터 성공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소방차"는 단순히 일본의 "소년대"만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소녀대"등 다른 일본 10대 팀의 다양한 특징들을 골라낸 뒤 비빔밥 처럼 비벼서 모방해버리면서, 표절시비 속에서도 나름대로 개성도 있고, 질 좋은 노래를 뽑아내는 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그 팀원인 김태형, 정원관 등은 개인기 로도 충분히 실력이 있어서, 결국 소방차는 80년대 후반을 휩쓸던 최고의 댄스가수팀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소방차는 87,88,89,90년 동안 꾸준히 열광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양한 곡들을 자랑했습니다. 일본 가수들의 모습을 잘 모방해 짜집기한 멋진 춤에, 썩 잘어울리는 괜찮은 노래 솜씨, 그럴싸한 화음, 단박에 인상을 남기는 특유의 서커스 스러운 묘기와 무대 연출력까지 어우러지는 재주를 보여줬습니다. "소방차"는 결국 80년대 일본 댄스곡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노래들을 재미나게 펼쳐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방차는 헬스 클럽에서 만난 세 젊은이가 의기투합해서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기획사에서 이 세사람을 "소년대" 모방작으로 만들어보자라는 작전에 부합해서 데뷔를 했는데, 그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실력을 보여준 팀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방차는 중간에 팀원이 한 번 교체되기도 했지만, 1995년 "G까페"를 화려하게 성공시키며 탄탄한 실력과 인기를 과시했습니다. 팀원 중 한 명은 성폭행 혐의의 누명을 써버려서(결국 무혐의 판결), 인생이 반쯤 풍비박산 나버리는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만, 정원관은 여러가지 사업을 하면서,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TV버라이어티쇼에서 활약하고 있고, 김태형은 NRG로 유명한 소속사의 사장으로 활동중입니다. 널 그리며 - 박남정 "소방차"가 10대들의 인기를 받은 팀이었다면, 가수 단독으로 10대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넓은 층의 인기를 받은 가수로는 박남정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개해드리는 "널 그리며"는 한국 댄스곡 역사 안무의 전설로 남아 있는 ㄱ ㄴ 춤을 남기면서, 거의 88년도 댄스곡의 화신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들리는 이야기에는 ㄱ ㄴ 춤은 처음에는 고대 이집트 벽화, 상형문자에서 착안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박남정의 특징은 "널 그리며"에도 나오듯이, 노래 자체가 요즘도 한국에서는 "코요태"등의 노래를 통해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트로트 댄스 - 댄스 트로트 노래 성격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 "널 그리며"도 그런식으로 되어 있고, 박남정의 노래 부르는 창법도 그런 노래에 무척 적합합니다. 박남정의 기묘한 점은 바로 이 댄스 트로트 - 트로트 댄스에 당시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던 마이클 잭슨을 잘 모방해 접목시켜버렸다는 것입니다. "널 그리며"의 노래가 빠르다는 점을 이용해서, 별로 안어울릴수도 있을 듯한, 마이클 잭슨 계열 춤을 현란하게 연결시켜서 색다른 댄스곡을 만들어냈고, 의상, 안무에서 조명, 백댄서 까지 마이클 잭슨 의 여러 요소들을 잘 모방해서 그럴싸하게 써먹었습니다. 박남정은 "널 그리며"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서 비교적 데뷔가 잘 안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도, 첫 데뷔와는 달리 "널 그리며"에서 트로트 댄스 - 댄스 트로트 에 마이클 잭슨 을 잘 결합했는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남정은 "전국 디스코 경연대회" 수상자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있고, 급성장한 후에도 80년대가 끝나기까지, 후속곡을 유행시키면서 충실하게 인기를 유지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라는 다소간 과장된 별명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 10대 중심 가수들이 인기를 끄는 세태에서, 박남정은 비교적 다양한 연령대의 취향을 넘나드는 TV/밤무대에 동시에 적응한 댄스 가수라서, 적응하기에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곧 "서태지와 아이들" 태풍을 견디지 못하면서, 박남정은 최일선에서 완전히 물러서게 됩니다. 나홀로 뜰앞에서/ 리듬 속에 그 춤을 - 김완선 적어도 80년대 한국에서는, 세계 댄스곡 최고의 남자가수는 마이클 잭슨이었고, 여자가수는 마돈나 였다고 보는 것이 정설일 것입니다.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사람이 박남정이라면, "한국의 마돈나"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은 단연 김완선일 것입니다. 춤재능과 춤의 개성으로만 따지면,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누렸던 가수로, "'춤 잘추는 여자가수'로서는 지금까지도 자신있게 김완선을 능가했다고 할 수 있는사람이 있겠는가?" 라고 말할만큼 재능을 거의 충격에 가깝게 뽐낸 가수라고 생각합니다. 김완선은 10대의 나이에 진작 부터 연예계에 뛰어들어서, 처음에는 인순이의 백댄서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어린 나이이던, 87년 무렵부터, 매우 개성이 강한 기묘한 창법과 인상을 팍팍 남기는 얼굴 표정, 눈빛, 가히 파괴적인 춤실력 등으로 단숨에 인기곡들을 연달아 유행시키게 됩니다. 재미난 것은, 박남정이 트로트 댄스 - 댄스 트로트 에 바탕이 있었다면, 김완선은 한국에서 록음악 작곡하던 사람들이 만든 록음악을 바탕으로한 곡을 종종 응용했다는 것입니다. 김완선은 이런 곡들에 들어 있는 80년대말 유행에 푹 빠진 전자음악 요소들을 이용해서, 자극적이고 살짝 어둡고 퇴폐적인 매력을 내뿜는 음악들을 화려한 춤에 맞춰내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표곡이 여기 소개해드리는 "리듬 속에 그 춤을" 입니다. 이 노래는 한국 록 음악 최고의 음악가로 불리우는 신중현 선생의 작곡입니다. 신중현 선생 본인 이야기에 따르면, 신중현이 활동을 재개해서 록음악을 연주하고 다니다 보니, 당시 유행하던 댄스곡에 어울리지 않아서, 밤무대 업소마다 "당신 노래는 발이 안맞는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해서 밤무대에서 쫓겨난 신중현 선생이 백수신세로 암담하게 있을 때, 김완선 쪽에서 곡을 써달라고 하기에, "이번에는 발이 좀 맞도록" 만들어준 노래가 "리듬 속에 그 춤을" 이라고 합니다. 신중현은 이 노래가 "김완선을 보고 느낀 것'을 노래로 꾸민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고보면, 김완선은 자기 자신을 묘사하는 노래를 부른 셈입니다. 이 노래의 기타 연주는 신대철이 했다고 하는데, 신중현이 김완선을 보고 작사 작곡한 노래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노래가사가 또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현대 음율속에서 순간속에 보이는- 너의 새로운 춤에 마음을 뺏긴다오-") 김완선은 자신만의 강렬한 개성과, 화려한 춤실력 덕분에,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등의 곡으로 90년대 초반까지도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서태지와 아이들 태풍은 위기였고, 업친데 덥친격으로 무슨 재벌 남자와 어쩌고 저쩌고 하는 해괴한 소문에 시달리면서 주저 앉게 됩니다. 그래서 잠시 대만 등지에서 활동하며 최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잠시 다시 한국 가요계에 돌아와서도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밤무대의 모습이 달라지고, 가수가 버라이어티쇼 등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하는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는데는 실패해서 결국 현재 사실상 은퇴상태 입니다. 난 아직 사랑을 몰라 - 이지연 김완선이 "어둠의 여왕"스러운 모습으로 나이 따위는 조금대 개의치 않고, 모든 연령대를 자극하며 대활약한 10대 소녀 가수였다면, 이지연은 전형적인 10대 소녀 가수 스러운 모습으로, 명랑하고 밝은 모습을 무기로 활약한 가수 였습니다. 이지연은 그런 노래들이 어울리는 외모로 매력을 끌어냈고, 그러면서도 록밴드 리드보컬 스러운 안정된 노래 솜씨도 꽤 괜찮아서 금새 정상에 도전할 수 있었던 가수 였습니다. 이지연은 고등학교 록밴드에서 활동하다가 록밴드 백두산의 유현상 눈에 들면서 발탁되었다고 합니다. 유현상은 돈좀 벌어보자고, 이지연의 기획사+매니저를 자처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지연은 처음에는 표지 모델 같은 것을 하면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지연이 인기 가수 대열에 합류하는 계기는 전영록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연예계 데뷔 후,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친분으로 전영록이 이지연에게 곡을 만들어 주면서, 이지연은 전영록이 만든 노래들을 자기 실력껏 소화해 내며 인기를 끌게 되고, 전영록은 여기에 감탄해 계속 도움을 준 것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지연은 아름다운 모습, 맑은 음악, 괜찮은 노래 솜씨 세 부분 모두에서 워낙 강했기에 , 각종 광고, TV프로그램 등을 곧잘 따내며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만큼, 이지연은 온갖 구설수,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자꾸 대상을 바꾸며 마치 도시전설 처럼 떠도는 "연예인 누가 연예인 누구랑 머리끄댕이 쥐어 뜯고 싸웠다더라", "라디오에서 방송 나가는 줄 모르고 상스러운 말을 한 것이 방송에 나갔다더라" 이런 소문들을 20년전의 이지연이 겪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다른 스캔들도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이지연은 이런 삶에 회의를 느꼈는지, 돌연 밤무대에서 같이 노래하던 동료와 함께 일종의 "사랑의 도피"처럼 미국으로 건너가서 결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지연은 90년대의 시작과 거의 동시에 은퇴하게 됩니다. 지금 소개해 드리는 노래는 88년에 유행했던, "난 아직 사랑을 몰라" 입니다. 영상에서 보면, 전영록과 80년대 일본 10대 여자 가수 처럼 하고다니는 이지연이 함께 노래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말하자면, 원더걸스 와 박진영 이 한 무대에선 모습 비슷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널리 애창되는 명곡인 "바람아 멈추어다오" 를 비롯한 후속곡의 드높은 인기 때문에, 사실 이 노래, "난 아직 사랑을 몰라"는 상대적으로 잊혀진 노래였습니다. 그렇습니다만, 21세기 들어서, 문근영이 "문근영 효과"를 마음껏 뽐내던 시절에 영화 삽입곡으로 다시 들고 나오면서 요즘에도 쉽게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지연은 88년의 "밝고 명랑한 어린 여자 가수" 중에서는 당시에 얼굴, 목소리, 무대연출 어떤 것의 아름다움으로도 경쟁자가 덤비기 어려운 존재였다고 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지연은 겉모습이며, 노래며, 무대연출이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방향에서 등장한 , 상당히 엉뚱한 라이벌 여자 가수의 등장으로 위태로운 도전을 받게 됩니다. 담다디 - 이상은 이상은은 강변가요제 를 통해서 그야말로 혜성 처럼 갑자기 확 튀어나온 가수였다고 할만합니다. 이상은은 기성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운 80년대 젊은이의 대표격으로 종종 인용되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첫 인기곡인 "담다디"는 단박에 호기심을 확 불러오는 제목부터, 노래부르는 태도, 의상, 가수의 모습까지 상당히 특이하고 괴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하자마자 이상은은 인상을 주는데 성공했습니다. "담다디"의 재미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 자체는 비교적 고전적이고, 가사도 쉽고, 곡조도 반복이 잦은 매우 기억에 남기 좋은 곡으로 아주 편안한 것이었습니다. 80년대말 방식으로 좀 풍성하게 연주를 해서 그렇지, 노래 악보 자체만 놓고보면, "담다디"는 김세환이 부르던 70년대 포크 노래에서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상은의 담다디는 평화롭고 조용한 노래지만 재미난 느낌을 주는 그 통기타 포크송 비슷한 방식으로 친숙한 느낌과 신선한 느낌을 동시에 모두 갖추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상은의 "담다디"는 넓은 연령층에 호소하는데 성공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혀 안 어울릴 듯한 반바지를 이상하게 입고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춤 답지도 않은 춤을 또 묘하게 재미있게 춤으로 보여주는 재주도 성공을 거두었고, 언제나 명랑한 모습에 고정된 성별의 틀을 넘나들며 항상 자신있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상은은 이렇게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즐거운 대학생"의 상징이 되면서 영화에 출연하는가 하면, 광고도 많이 찍을 수 있었습니다. 이상은은 이후 표절시비에 한 번 시달린 뒤,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돌연 새로운 도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언젠가는" 같은 곡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흥행을 일정 부분 무시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하면서, "가요" 외에도 다양한 음악들을 만드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이상은은 그러한 음악으로 아직까지 꾸준히 작업하고 있습니다. 90년대 말에 나온, "공무도하가", "새" 같은 곡도 88년의 폭발적인 인기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았다 할만큼 인기를 끌었습니다. 달빛 창가에서 - 도시의 아이들 이상은이나 이지연이 바람처럼 인기몰이를 한 젊은 가수들이었다면, 꾸준하게 자라온 가수로는 "도시의 아이들", 그 중에서도 노래 작곡에서 더 활약했던 김창남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김창남은 대학가요제 등에서 수상하면서, 가요판에 발을 디딘 사람입니다. 김창남은 노래도 노래지만, 작곡을 잘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창남은 재빠르고 재치있게 곡을 만드는데, 엄청난 명곡을 만들어낸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간단하면서도 듣기 재미나고, 충분히 흥겹고 신나는 곡들을 실수 없이 만들어내는데 빼어난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곡조 자체는 좀 싱겁다 하더라도, 가사와 곡조를 잘 맞아 떨어지게 배치해서, 노래를 듣기에 인상깊고, 부르기에 즐겁도록 만든 경우가 많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김창남은 "도시의 아이들"을 결성해서, 박일서와 함께 이런 노래들을 좋은 화음으로 잘 불렀습니다. 특히, "도시의 아이들"은 한국에서는 다소 남용된 감도 있는 80년대말의 전자음악과 신서사이저 소리를, 그 유행을 이끌어갈만큼 멋드러진 형태로 팍팍 드러나게 활용했습니다. 그리하여 "도시의 아이들" 노래는 음악이 다소간 경박한 면도 개인적이고 가벼운 감상을 읊어대는 곡입니다만, 묘하게도 가사와 곡이 어울릴 때는 시적인 표현이나 단어가 잘 살아나도록 되어서 살짝 예스러운 면이 멋드러진 것도 있었습니다. 김창남은 그 작곡실력으로 "작곡을 소재로하는 버라이어티쇼 코메디" 같은 것을 TV방송에서 잠깐씩 보여주는 경지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는 자신의 노래로 다시 한 번 인기를 얻은 "선녀와 나뭇꾼"을 비롯하여, 90년대에도 작곡가로서 매우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김창남은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등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이며, 얼마전까지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김창남은 21세기 들어서 갑자기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김창남은 갑작스럽게 간암 진단을 받았고, 그 어떤 유행 변화나 인기의 흔들림보다 더 무서운 운명의 손에 그만 붙잡히게 됩니다. 여전히 좋은 노래를 들려줄만한 힘이 있어보이던 김창남은, 애석하게도, 지난 2005년 40대의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인디안 인형처럼 - 나미 댄스곡 이라는 것이 90년대에 갑자기 생겼으며, 이전의 가요와는 단절되어 있다는 설에 대해서, 반례로 종종 제시되는 사람이 바로 나미 입니다. 나미는 이미 70년대말에 "영원한 친구" 같은 인기곡을 불렀고, 80년대 초중반 부터, 주로 댄스곡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빙글빙글", "보이네" 같은 댄스곡들을 짭짤하게 유행시켰습니다. 특히, "빙글빙글" 같은 곡은 80년대 초중반을 수놓은 명곡으로 인정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미는 88년도에는 이미 꽤 경륜을 갖고 있는 중견가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미는 이무렵 "인디언 인형처럼"을 유행시켰는데, 이곡은 타악기 소리의 강한 박자감각이 잘 살아나는 곡으로, 그런 곡조의 강세가 노래 가사를 한껏 살려주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는 따지고 보면 매우 울적한 가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나미 특유의 창법과 어울리면서, 별 요란한 꾸밈이 없으면서도, 경쾌하고 박력있는 입체적인 댄스곡의 면모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노래, "인디안 인형처럼"은 그렇게 별 요란한 꾸밈이 없이 단촐하지만, 힘있는 댄스곡이고, 노래의 성격이 입체적인 맛이 있었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여러 댄스 가수들이 자주 불러보거나 다시 녹음하는 곡이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나미는 "인디안 인형처럼" 시기가 거의 마지막입니다. 나미가 모 기획사 사장과 사실혼 관계이며, 그 사이에 아들이 있다는 일이 스캔들로 비화되면서, 활동이 저물어갔던 것입니다. 짚시여인 - 이치현과 벗님들 이곡은 사실 댄스곡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당시 밤무대 등지에서 왠만한 댄스곡 보다 더 댄스곡으로 잘 활용되었던 곡이기에 여기에서 언급합니다. 이 곡을 부른 이치현은 70년대말에 이미 데뷔한 가수 인데, 김건모가 부른 판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당신만이" 같은 곡으로도 유명합니다. 이치현의 특색은 멕시코, 남미,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스페인어권, 라틴문화권 의 음악들을 잘 도입해서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음악들을 한국에서 연주하기 좋게 만들어서 좋은 가사로 잘 뽑아내는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 "짚시여인"도 그런 노래인데, 노래 가사의 운율과 대구가 곡조와 정석대로 멋지게 딱딱 떨어지는 곡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류의 노래를 좋아하느냐 마느냐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기억하게 되는 곡입니다. 이런류의 설득력 때문에, "짚시여인"은 노래 자체를 사랑하느냐 마느냐와는 별도로 80년대말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노래 내용은 그냥 집시 생활에 대한 묘사이지만, 그렇게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그냥 묘사만 단순하게 하는 내용이, 오히려, 한국 현실 사회에서 어느날 느낀 가수의 감정에 대한 어떤 상징이나, 암시라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남기는 효과도 생겼습니다. 덕분에, 이노래는 최정상의 위치에는 올라본적이 없는 이치현에게는 거의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 되었습니다. 이치현은 90년대 들어서 카페 클럽 무대 등에서 활동하며, "미사리 카페" 문화의 기관차로서 맹활약했습니다. 그 활동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해 드린 동영상은, 최근에 다시 연주한 판입니다. 호랑나비 - 김흥국 영국과 미국에서 콧수염의 상징은 아마도 찰리 채플린일 것이고, 독일에서라면, 빌헬름 황제나 옛 총통이 콧수염의 상징일 것입니다. 러시아나 옛 소련권에서는 스탈린을 콧수염의 상징으로 꼽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수 김흥국이 콧수염의 상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호랑나비"라는 이 한 곡의 노래에 연원을 두고 있습니다. 김흥국은 고등학교 밴드를 거친 뒤, 졸업후 주로 록큰롤에 관심을 갖고 록밴드의 일원으로서 여러 밤무대 활동을 하며,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약 10년간 그렇게 저렇게 일하면서, 왠갖 다양한 노래들을 익히게 되고, 그러다가 별 큰 반향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팔리기는 했던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습니다. 김흥국이 이처럼 다양한 음악을 소화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과, "흑인 음악"이라 불리우는 소울, 블루스, 재즈 계통의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 법한 특징 때문에 좀 더 공들인 후속작을 내는데 성곡합니다. 이것이 바로, 명작곡가 이혜민 작사 작곡의 "호랑나비" 입니다. "호랑나비"는 괴상한 노래, 괴상한 가사, 괴상한 가수, 괴상한 춤 으로, TV 전파를 타자마자, 바로 시청자들에게 곡을 각인시킨 강렬한 노래였습니다. 특별한 내용 없이 그냥 호랑나비가 꽃 밭에 앉아 있다는 지극히 간단한 가사를 노래합니다. 그런데, 그 가사가 즉흥연주가 끼어들기 좋은 약간은 낯설기도 한 소울-블루스 계통의 곡조로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게 또 당시 유행하던 한국 댄스곡 풍으로 연주되는 것이 참 절묘했습니다. 여기에 이런 노래를 김흥국이, 김흥국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김흥국 만의 해학을 담아 신나고 즐거우면서도 구성지게 뽑아냈던 것입니다. 김흥국의 해학과 노래가 결합하다보니, 극히 단순한 호랑나비의 가사와 곡이, 그 단순함 때문에 오묘하게도 상징적인 느낌이 나면서, 어떤 상황에도 들어 맞는 암시가 될 수 있는 뜻있는 노래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이런면은 같은 시기 유행했던 이남이의 "울고싶어라"에서도 보이는 것인데, 김흥국의 재능과 댄스곡의 유행, "호랑나비"의 특이한 정도가 훨씬 더 강했습니다. 다리를 다친 사람이 깁스를 한채 춤을 추려다가 실수하는 모습에서 착안했다는, 이전까지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넘어질듯말듯한 춤을 선보였습니다. 이 이상한 춤을 노래에 결합했고, 김흥국의 웃음소리까지 노래에 끼어들면서 이 노래는 아주 제대로 희한해 집니다. 넓게보면, "아빠의 청춘"이나, "해뜰날" 같은 노래처럼, 해학이 가미된, 한국 가요의 계보에 편입되는 노래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같은 계통으로 뒤에 나온 김흥국의 "흔들흔들"만 봐도 대조 되듯이, "호랑나비"는 그런 노래 중에서도 직접적으로 주제가 드러나는 부분이 특히나 없는 곡입니다. 또한 언어유희에 노골적으로 치중하는 면이 있는등, 훨씬 더 순수한 해학을 지향한 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러다가 도리어 더 심오해진 면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여러 특징 때문에, 80년대말 댄스곡의 쉽게 즐기는 재미가 더욱 신나게 살아났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요소 때문에, 김흥국은 춤 흉내내는 어린이들에서부터, 콧수염 가수의 흥겨운 웃음을 지켜보는 노인층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면서 막강한 지지를 얻었고, 10년 무명시절 동안 고생한 가수가 이 노래 딱 한 곡으로 단숨에 절정의 인기로 치솟게 됩니다. "호랑나비"는 아직까지도 널리 기억되는 명곡으로 자리잡았고, 별상관 없는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선수 김응국이 괜히 "호랑나비"라는 별명을 얻는 등, 일견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는 작은 곡치고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김흥국은, 이후 TV 버라이어티 코메디 쇼에서 주병진, 이경규 등의 코메디언과 화려한 호흡을 과시하며, 훌륭한 코메디 재능을 선보였습니다. 김흥국은 결국 노래 자체의 발전보다는 TV 버라이어티 코메디 쇼 방향으로 선회해서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김흥국의 모습은 한국 가요계에서는 요즘의 탁재훈, 신정환, 김종민 같은 가수들의 선배로서 가장 먼저 안착한 경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서 소개해 드리는 곡은, 그 김흥국이 같은 시기에 인기의 절정을 누렸던 동료 가수인 박남정과 함께 오랫만에 다시 불러보는 최근의 영상입니다. 변치 않은 김흥국의 소울-블루스 느낌이 나는 목소리와 함께, 박남정이 보여주는 마이클 잭슨 문워크도 놓치지 마시기 바립니다. - 이것으로 제가 들려드리는 이야기는 끝입니다. 다른 노래 자료 찾아내신 분 있으십니까? 당시 기억나는 사연이나 개인적인 추억담 들려 주셔도 감사하게 읽겠습니다. 일전에 많은 분들이 도움 주신대로, 노래들의 모방-표절 관계나, 가수들의 뒷이야기, 당시 돌았던 소문 같은 정보도 올려주시면 매우 감사하게 읽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