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재킷 The Jacket 영화

죽음의 위기를 겪은 후, 뇌에 가끔 발작 비슷한 것이 일어나는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환청, 환각 같은 것을 보기도 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게 됩니다. 1992년, 정신병원에 갇힌 주인공은 특정한 계기로 2007년의 미래를 보고 듣게 됩니다. 당연히, 이게 정말로 주인공이 신비한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미친 놈 헛소리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주인공은 이 꿈같은 몽롱한 환영을 오가면서, 간절한 사랑을 만나고, 과거와 미래의 인과관계에 얽힌 운명의 장난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내 말을 믿어줘. 난 미래에 가봤다고.)

줄거리와 전체적인 이야기를 구성한 형태를 놓고 보면, "더 재킷"은 1995년작, "12 몽키즈 (Twelve Monkeys)"의 자매편에 해당하는 이야기 입니다.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브루스 윌리스, 브래드 피드가 쌍으로 출연했고, 테리 길리암이 감독을 맡았다는 이유 때문에 상당히 널리 알려진 영화인데, 전체적인 내용과 갈등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이 영화는 "더 재킷"과 아주 많이 비슷합니다.

두 영화 모두, 단순한 정신병적인 환영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인지, 하는 모호함을 중요한 소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까닭으로, 두 영화 모두, 시간 여행 이야기지만, 아슬아슬하고 신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짝 우울한 착 가라앉은 느낌의 영화입니다. 이런 점은 "사랑의 은하수" (Somewhere in Time) 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시간 여행을 하는 횟수나, 시간 여행을 거듭함에 따라 사건이 변해가는 모양을 보면, 확실히 "더 재킷"은 "12 몽키즈"와 가장 닮았습니다. 영화의 장면장면에, 호기심 돋구는 소재, 수수께끼 거리를 던져줘서 흥미가 생기게 합니다. 하지만, 명확하게 음모를 밝히고 비밀을 보여주며 넘어가기 보다는, 호기심과 고민만 제시한 뒤에, 정신병적인 분위기를 이용해서, 이야기의 초점을 이리저리 휘청휘청 격하게 흔들면서 이야기가 오락가락 환상적으로 자유롭게 변해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는 증거로, 증언을 제시하는 방법도 상당히 흡사합니다. 특히나, 담당 여자의사와 남자 주인공이 점점 가까워 지고, 담당 여자의사가 정신병원에 갇힌 남자 주인공의 말을 신비롭게 여기며, 서서히 믿게 된다는 점은 좀 지나치게 비슷할 정도입니다. 절정 장면 직전에, 벌어지는 사건에서, 관객들에게 조마조마한 느낌을 크게 키울수 있도록 어린이의 운명과 관계된 일을 벌이는 점도 참 닮아 보입니다. "12 몽키즈"는 실종된 어린이 사건이고, 이 영화는 실어증 증세에 빠진 어린이 건입니다.


(의사는 지금 뒷모습 보이는 분입니다)

두 영화의 줄거리에서 다른 점은 영화의 결말에 맺혀 있는 초점 입니다. "12 몽키즈"는 인류 멸망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막기 위해 주인공이 설치는 신화적인 환상으로 이야기가 화끈하게 커집니다. 또 영화 속의 시간 여행 장면은 공상적이고 미술적인 치장으로 재미나게 장식되어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더 재킷"은 정반대로 한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서만 다룰 뿐입니다. 시간 여행을 통해 주인공이 큰 재해를 막으려 하지도 않고, 역사, 미국의 운명을 막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남녀 주인공의 삶에 대해서만 위기와 수수께끼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만큼, 영화 속의 시간 여행에 대한 환영도 좀 더 생생한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중심으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2 몽키즈"에 비해 "더 재킷"의 장면들은 좀 더 가깝게 느껴질 수 있는 감각을 묘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이 경험하는 촉각, 시각, 청각을 세세하게 관객들에게 전해주는데 더 공을 들였습니다. 그런까닭인지, "12 몽키즈"는 이야기가 신화나 우화 같은 상징적인 이야기로 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하면, "더 재킷"은 평화로운 심성을 그려내는 건전하고 계몽스러운 영화 성격이 좀 더 강한 맛도 처음에는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초점을 개인적인 문제로 옮겨간 것은 이 영화의 분명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줄거리 속에서도 나름대로 이 영화, "더 재킷"은 단순한 아류적이 아니라, 이 영화만의 개성을 생기게 한 면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더 재킷"은 영화를 보여주는 방식이 훨씬 더 바싹 달라 붙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주인공의 헷갈리는 정신 상태와, 환청, 환각 같은 것을 직접 영화로 많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뛰어넘는 연결장면들과 그때 주인공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훨씬 더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빠르게 화면을 바꾸면서 주인공의 감각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주인공의 심정은?)

예를 들면, 주인공이 정신병원 간호사들에게 제압당하여 강제로 묶이는 장면을 보여 줄 때,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간호사들의 얼굴, 간호사들이 자신을 억누르는 팔, 등등을 정신없을 정도로 빠르게 바꿔가며 비춰 줍니다. 주인공이 줄에 묶일 때는, 화면에 주인공을 묶는 줄만 커다랗게 보여주고, 주인공이 소리내어 신음할 때, 화면은 급격히 바뀌어서 주인공의 괴로운 표정을 한가득 비춰줍니다. 그러다가, 간호사들이 주인공의 팔에 주사를 놓을 때는, 팔에 들어가는 주사 바늘과 새어 나오는 핏방울만 큼지막하게 보여줍니다.

주인공이 몸부림치며 묶이는 짧은 시간 동안 느끼는 오감의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이 모든 서로 다른 부위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휘리릭 지나가 버립니다. 혼란스러운 느낌과 정신적인 혼란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겪는 감각적인 충격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대여섯 장면 정도는 정신병적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화면 전환이 너무 급박하게 되는 바람에, 무슨 "잠재의식 광고 음모론 영상" 같은 것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납니다. 공포물에서 너무 남용하는 것이라서 좀 지겨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적절한 수준이라서 대체로 나쁘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이 좁은 "관"속에 갖혀서 공포감을 느끼는 부분은 가장 강도 높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강제로 묶이는 주인공)

이런 류의 표현 중에서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충실한 장점은 음향 녹음이 잘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뻔한 수법만 썼다면 다음과 같은 장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언뜻 언뜻 생각이 날듯 말듯한 장면에서, 조각 조각 잘린 장면들이 잠시 지나가고, 장면 바뀔 때마다, 무슨 바람 가르는 소리 같은 "슈욱-" "슈욱-" 하는 소리를 끼워 넣는 것은 요즘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도 그런 진부한 수법을 써먹는 대목도 많습니다. 하지만, 더 재미난 다양한 소리를 각양각색으로 집어 넣은 부분이 아주 많아서 꽤 들을 거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요즘 영화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다채널 음향을 꽤 잘 써먹고 있습니다. 왼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정신없이 바꿔가며 화려하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나, 멀리서 부르는 소리, 불길하게 중얼거리는 말소리 같은 것을 매우 풍부하게 집어 넣었습니다. 단연 환청 같은 느낌이 물씬납니다. 잘 써먹어서, 기묘하고 괴이한 느낌을 주는데 큰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처음으로 시간을 초월하는 부분은 무슨 공포 영화 같은 느낌마저 날 정도 입니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영화인데, 주인공의 정신적 혼란과, 정신병원의 불길한 분위기가 이처럼 잘 묘사되어 있으니, 잠깐 동안은 꼭 무슨 공포 영화 분위기가 감도는 대목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관객의 정신을 자극하는 과격한 번쩍이는 화면과 휘몰아치는 음향이 귀를 울려대면, 주인공이 겪는 무서움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한 맛을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을만 합니다.


(이심전심?)

개인에게 집중한 덕에 영화는 역설적인 대조를 잘 꾸며내는 효과도 더 잘 살아 났습니다. 주인공이 경험하는 생생한 현실은 음울한 정신병원과 괴상한 의사, 간호사들을 상대하는 어둡고 고달픈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경험하는 "시간 여행"은 훨씬 더 따뜻하고, 평화롭고, 주인공을 사랑하는 운명적인 상대방까지 있는 세계 입니다.

여기까지는 단순한 현실도피, "꿈으로 숨을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 같은 정도 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이 달콤한 "시간 여행"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그 체험하는 동안 현실 세계에서는 고통스런 일을 겪고 있여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영화 속의 현실은 1992년~1993년이고, 영화 속의 환영이 2007년~2008년인 까닭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현실감과 환영은 또 한번 뒤집어져서 다가오게 됩니다. 관객 입장에서, 주인공이 겪는 현실은 일상 생활에서 거리가 있는 좀 이상한 정신 병원이고, 주인공이 보는 환영은 관객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연애하고 샌드위치 만들어 먹는 일상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설적으로 꾸며 놓은 내용은, "구운몽" 이나 "조신의 꿈" 이야기처럼, 전통적인 몽자류 소설 스러운 고전적인 주제를 보여주고 들어가게 됩니다. 환영과 실제가 모호하게 느껴지는 느낌을 이용해서, 철학 문제들과, 인생에 대한 성찰을 해 보게하는 느낌이 일단 바탕에 깔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주인공이 죽음에 다가서는 느낌이나, 시체 보관함에 갇히게 된다거나, 살인 사건에 엮인다거나 하는 일을 겪으면서, 삶과 죽음의 관계, 한 사람이 한정되어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서 여러가지 비유를 보여주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그냥 막연하기도 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 상징이 가득한 그림책 같은 느낌이 애잔한 감상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표현과 짜임이 부족해서 명확하게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은근하게 표현되는 그런 감상을 좋게 본다면, 이 영화는 "
그 티없이 맑았던 마음의 영원한 햇살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http://gerecter.egloos.com/2344385
같은 영화의 비슷한 점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 안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이 영화는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좀 더 평화롭고 안락한 분위기로 바뀝니다. 주인공은 이제 삶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 대강 초탈한 상태이고, 환영과 현실을 넘나들며 벌어지는 일 속에서, 나름대로 평화롭고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주인공은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이 시간여행 비슷한 것을 하는 상황을 이용해서, 목숨이 위태로운 가운데 희생에 가까운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그때까지 "나와는 상관 없이 행복하게 세상이 돌아가는 쓸쓸한 느낌"을 보여주는데 활용했던 크리스마스 관련 소재가 조금씩 긍정적으로 비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주인공은 종교적인 상징/희생이라는 느낌도 사뭇 많이 생기게 됩니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면서, 주인공은 점차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둘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영웅스러운 모습을 점차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분명히 종교적인 상징을 떠올리는 사람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이 영화가 주인공의 감성에 밀착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사건이 해결되어 가는 국면에서는, 관객들이 해소감이라는 느낌을 좀 더 강하게 느끼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러 뛰어다녀라)

그 대신, 이 영화는 그만큼 막판에 부실한 면도 좀 생겼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 영화 중반 이후로 가장 중대한 문제에 대해 매우 터무니 없는 답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미래에서 발견한, 중대한 사건이 대체 왜 일어났는지 궁금해서 조사하러 다니는 것이 중반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결말을 끝까지 보면, 이 중대한 사건은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이유 때문에 벌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따지고 보자면, 아예 그 이유를 안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다른 문제들은, 선과 악이 어지럽게 뒤집히고, 현실과 꿈의 경계가 마구 넘나들며 헷갈리는 느낌을 보여줬던 영화치고, 결말이 아주 간단한 권선징악, 행복한 결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백할 정도의 밝은 장면들을 보여주자니, 잠깐 동안 공포영화 같기도 했던 영화가 너무 급격하게 착하고 아름다워져 버리게 됩니다. 곱게 보고 평화롭고 아름다움을 느끼기 좋은 부분도 있겠지만, 도저히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또 있을 것입니다. 특히, 알콜중독자 더하기 니코틴중독자로서 막 사는 폐인이었던 사람이, 어느 길가던 미친 사람이 적어준 편지 두 장 읽어보고, 갑자기 삶을 깨달아 인생을 바꾸고 환골탈태 해서 새사람이 되는 대목은 억지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12 몽키즈"에서는, 영화 내내 보여주었던,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는 듯한 분위기와, 환상적인 도플갱어 전설을 뒤섞으면서, 막판에 역설을 극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렇게해서, 그 장중한 결말을 거창하게 드러내면서 강렬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에 비하면, "더 재킷"은 차분하게 착한 사람의 노력으로 세상이 밝아지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물론, 영화의 이야기 구조상, 이 모든것이 주인공의 망상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단지 불쌍한 정신병자가 꿈꾼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을 관객이 실존주의 우화 스러운 이야기 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좀 더 복합적인 느낌은 생깁니다. 하지만, 그렇기는 해도, 일단 화면과 대사가 전달하는 분위기 자체가 너무 평화롭고 명랑하게 돌변하기에, 당장 느껴지는 감상은 확실히 싱겁습니다.


(안락한 집)

에드리언 브로디는 성실하고 착한 젊은이를 연기하기에 아주 적역은 아닙니다. 하지만, 특유의 좀 비실비실해 보이는 모습과 충실한 연기 실력 때문에, 정신적인 피폐에 시달리는 좀 불쌍한 사람이라는 느낌은 아주 잘 전달되고 있습니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껄렁하고 울적한 술에 쩔어 사는 인간을 연기하는데, 그런 모습을 정말 사실적으로 연기했다는 느낌은 안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장면에서 열심히 하고 있어서, 어색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른 조연들도 대부분 훌륭합니다. 특히 마지막으로 어린이의 간질 발작 치료에 도전해보는 의사의 모습은 사소해도 훌륭합니다. 대사 설정과 감정 표현이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게 짜여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용하는 장비와 이론이 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인데도, 대사며 태도는 매우 설득력 있어서, 우리나라 TV의 의사나오는 장면들과 대조적입니다.

그런저런 조연들 중에서도 가장 연기를 잘한 배우로 저는 다니엘 크레이그를 꼽고 싶습니다. 이 양반은 좀 위험해 보이고, 좀 멍청해 보이는 주인공 친구 정신병자를 연기하고 있습니다. "12 몽키즈"에서는 주인공은 브루스 윌리스이고, 좀 위험해 보이고, 좀 멍청해 보이는 주인공 친구 정신병자는 브레드 피드 였습니다. 그런데, "더 재킷"에서는 브레드 피드가 했던 영구 친구 역할을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가 하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주먹 한 번 휘두르면 진짜 큰일나겠다 싶은 느낌과, 순박한 느낌, 살벌하고 날카로운 모습과 어정쩡하게 멍청한 모습, 묘하게 웃긴 면모 등등이 아주 잘 조화되어 있습니다.


(09가 된 007: 다니엘 크레이그)

"더 재킷"은 심각하면서도 상당히 재미난 영화지만, 굉장히 비슷한 영화인 "12 몽키즈" 에 만일 비교된다면, 살짝 못한 영화가 되겠다는 것이 제 감상이었습니다. 음악도 좀 떨어지는 듯 하고, "12 몽키즈"에 요소요소 스며 들어 있는 기묘한 농담에 해당하는, 그런 양념 거리들이 없다는 점도 영화가 조금 밋밋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더 재킷"에는 상스러운 욕과 섞어지는 좀 추레한 언어 유희 하나를 주인공이 읊조리는 장면이 하나 있기는 한데, 이건 어찌보면 안하니만 못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차라리, 등 뒤에서 의사가 나타나며, "내가 한 말이네" 하는 부분이 음향효과와 어울리면서 조금이나마 웃겼습니다.

대신에 "더 재킷"은 충분히 기본기가 충실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현대 기술로 자유롭게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화려하고 빠른 화면 전환, 과감한 화면 구성과 정신없는 영상 변형, 날아다니는 풍성한 소리들은, 정신병적인 상황을 감상하기 좋도록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객의 흥미를 끄는데에도 효과가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경찰이 차를 세운 뒤에, 갑자기 기억이 사라지고, 재판 장면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정교했습니다. 사건이 갑자기 도약해버려서, 관객들은 무슨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궁금해 집니다. 이런 상화에서 어지럽게 대화들이 환청처럼 들리고, 주인공이 정신을 못차리는 가운데 정신병에 시달리는 느낌을 표현한 것이 명쾌했습니다. 혼란스러운 주인공의 감각을 풍부하게 표현하면서도,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고자하는 사건들은 환청을 통해 똑똑히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극중 호기심을 위해 가려야 하는 사실은 슬쩍 다 가리고 있어서, 앞으로 사건의 내막이 드러나기를 기대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복선의 활용도 꽤 좋은 영화 입니다. 사소한 것을 뒤지자면, 이 영화는 주인공이 어린이에게 무척 친절하고, 자신보다 나이가 좀 어린 여자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 중간에 괜히 변태살인마의 이야기를 하나 언급하게 해서, 어딘지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를 생기게 했습니다. 막상 큰 일이 일어날 구체적인 정황은 전혀 없습니다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내용마저 주인공의 망상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효과를 거둘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착한 주인공)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이 4차원 적으로 연결되는, "빽 투 더 퓨처" 때 한 껏 활용해 먹은 여러가지 역설적인 시간여행 사건 꾸미기도 어느 정도 기본은 맛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아쉽게도, "빽 투 더 퓨처 2"의 환상적인 명장면인 수십년 묵은 편지 전해주기 에 상대될 만한 대목은 없습니다. 그래도, "환자 이름 듣기", "어릴 때 집 주소 물어보기" 등등은 충분히 재밌습니다. 초장에 잠깐 등장하는 걸프전 소재도 닳고 닳은 방식이긴해도, 그 많이 보던 수법 자체가 노련한 편입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이라크에 떨어지는 폭격 장면, 폭파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 부조리를 강조하는 장면이 시작 장면입니다. 이것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비슷한 묘사와 비교해 보아도 큰 부실함은 없습니다.

가장 눈에 뜨이는 복선인 "군번줄"을 이용하는 수법은 그야말로 모범적입니다. 두 번에 걸쳐 재미나게 써먹는데, 군번줄 자체의 용도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까지 곁들여져서 충실하게 응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최근 국내 개봉되었습니다만, 원래 2005년에 나온 영화라고 합니다.

"아니, 제임스 본드가 영구로 나오다니..." 하는 생각이 드신 분들 계시다면, 영화 끝나고 자막 올라갈 때 나오는 배경 음악이 무엇인지 유심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음악, 옛날에 무슨 영화에서 나왔는지 혹시 기억 나십니까?

이 음악의 노래 가사와 제목을 떠올려 보는 것도 재미날 것입니다.

스포일러 일 수 있겠습니다만,

이 영화는 정신 병원에 애초에 가는 것 부터, 이 모든 것이, 죽기 직전 주인공의 환상에 불과할 가능성도 어느 정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머리를 다시 다치는 경위가 비현실적으로 매우 허무 하다는 것과, 처음 주인공이 죽음을 앞두고 읊는 독백과, 마지막으로 나오는 독백이 수미쌍관으로 같다는 점, 도저히 현실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 몇 있다는 점 등등이 이 가능성에 대한 지지 증거 입니다.

이 영화는 "심야특선 - 어둡고 이상한 이야기 9선 http://gerecter.egloos.com/3527633 " 에서 소개해 드렸던, 5번 이야기와 9번 이야기를 합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핑백

  • 게렉터블로그 : "더 재킷"에 관한 여섯가지 수수께끼 2008-01-16 21:29:43 #

    ... 영화에 대한 좀 더 알찬 이야기는 이미, "더 재킷 The Jacket http://gerecter.egloos.com/3574496 " 을 소개하는 글에서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래 여섯가지 문제에 대한 이야기만 길게 해 보려고 합니다. 1. 이 영 ... more

  • 게렉터블로그 : 원스 어폰 어 타임 2008-03-06 00:01:29 #

    ... 봤을 것입니다. 본래는 "점퍼"를 보러 갔다가 시간이 안맞아서 본 영화였습니다. 하필이면 "점퍼"를 보려고 했던 이유는 지난번에 같은 극장에서 "더 재킷" http://gerecter.egloos.com/3574496 을 봤기 때문입니다. 동행했던 사람이 말하기로: "재킷 다음에는 점퍼 아냐? 날씨도 추운데 두툼하니 입어야지." ... more

  • 게렉터블로그 : 소스 코드 Source Code 2011-05-09 23:59:56 #

    ... 이야기를 풀어 놓던 한계를 넘어서서, 간명한 이야기를 조촐하게 하면서도 무게는 잃지 않는 멋을 보여 줬다고 느꼈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보자면, "더 재킷" http://gerecter.egloos.com/3574496 같은 영화가 지나치게 어둡고 신비로운 이야기로만 나아간 데 비하면, 이 영화는 신나고 밝은 이야기로 끌고 가면서도 이야기 앞뒤가 보다 선 ... more

  • 게렉터블로그 : 게렉터블로그 가나다순 영화목록 (2014년 10월초 정리) 2014-10-06 18:51:27 #

    ... Drink With Me, 방랑의 결투 대행동 (城市特警, 성시특경, The Big Heat) 더 록 The Rock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더 재킷 The Jacket 더 테러 라이브 (2013) 더블 스파이 Duplicity 데스스토커 Deathstalker (죽음의 사냥꾼) 데스페라도 Desperado 도둑들 (2012) ... more

덧글

  • 박민성 2008/01/13 04:09 # 삭제 답글

    이번글에도 제가 첫번째 리플을 달게 되네요.
    아무도 밟지 않은 흰눈에 살포시 자국을 남기는 기분입니다.
  • skysurfr 2008/01/13 06:12 # 답글

    가장 좋아하는 영화중에 하나가 12몽키즈입니다.
    이 영화도 주목해 봐야겠네요.
  • Chriel 2008/01/13 12:40 # 답글

    일단 배우부터 정말 좋아하는 배우들이군요.

    피아니스트에서 정말로 호연을 펼쳤던 에드리안 브로디에,

    오만과 편견의 키이라 나이틀리. 우와!
  • 토끼 2008/01/13 14:27 # 답글

    12몽키즈를 봐놓고도 두 영화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 영화부터 다시 찾아봐야겠군요.
    친절한 설명 잼있게 읽었습니다. ^^
  • delius 2008/01/13 15:11 # 답글

    와 저도 [12몽키즈]와 두 영화를 비슷하다고 생각을 못했네요~ 나름 재미있게 봤지만 좀 이상하네..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 글 보니까 잘 정리가 되네요~ ;-)
  • 닥슈나이더 2008/01/13 20:40 # 답글

    봐야겠군요...
  • 게렉터 2008/01/13 23:27 # 답글

    박민성/ 항상 자주 들러주셔서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계속계속 많이많이 들러 주십시오!

    skysurfr, delius, 토끼/ "12 몽키즈"와 너무 비슷해서, 오히려 실망할 가능성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대로, 가닥으로 잡은 중심선이 또 다르기 때문에 다른 점, 전혀 다른 형식에 초점을 맞추면서 뿜어내는 개성을 눈여겨 보시면, 더 재미날 수도 있겠습니다.

    Chriel/ 키이라 나이틀리는 그냥 열심히 하고 있고, 에드리안 브로디가 좀 잘합니다. 자기한테 좀 안어울리는 배역, 어색한 대사가 주어져도 잘 소화해 내는게 그럴싸해 보였습니다. 조연들은 두 주인공들보다 대체로 훨씬 더 잘합니다.

    닥슈나이더/ 의외로 국내평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닙니다만, 실망만 할 정도로 재미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 썬데이뉴욕 2008/01/14 05:54 # 답글

    오~ 이 영화 엊그제 구해다 놨는데, 좋은 리뷰를 올려주셨군요. 일단은 영화 먼저 보려고 대강만 훑었습니다.
    영화보고 와서 다시 읽을께요. 저도 12몽키즈를 좋아했는데, 너무 아류작같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 심리 2008/01/14 21:01 # 답글

    그런데 "모든 게 꿈이었다!" 그러면 좀 허무할 것 같습니다. 꿈 이야기라는 설정의 경우, 그 설정이 독자나 관객에게 의미를 주어야 하지요. 구운몽처럼요. 그렇지 않고 뜬금없이 "모든 게 꿈이었다!"고 하면, 그 때는 만화 <아마겟돈>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최악의 결말이라고 하지요. 꿈이라는 건 그야말로 '의미 없는 공상'이라는 뜻이니까요.
  • 강설 2008/01/14 21:08 # 답글

    처음네줄읽고 바로 12몽키즈를 떠올렸습니다. 영화제목인 '재킷'은 구속복(스트레이트 재킷)에서 따온걸까요?
    옛날영화인줄알았는데 의외로 요즘 영화더군요 ^^;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