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임웨이브 (Crimewave, 1985) 영화

"크라임웨이브"는 난데없이 왠 수녀들이 자동차를 타고 밤거리를 폭주하는 우스꽝러운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딘지 이상하게도 막상 본론은 이 수녀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도시의 새로운 호텔에 자리잡은 한 여자주인공과, 이 아가씨에게 한 눈에 반한 남자 주인공, 도시 한쪽 구석의 어느 가게와, 어느 작은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번갈아가면서 소개됩니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어느날 밤, 도시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사연들을 하나 둘 보여주면서 진행됩니다.


(무슨 사연인지?)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영화를 절반 정도 볼 때까지, 대체 전체적으로 무슨 줄거리가 중심이 되는 영화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영화입니다. "크라임웨이브"는 마치 이전에 나온 "1941"이나, 한참 후에 나오는 "러브 액추얼리" 처럼, 서로 다른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시켜 나가는 듯 합니다. 1941이 2차대전 초기 무렵의 LA 일대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면, "크라임웨이브"는 1940년대나 1950년대의 범죄영화, 느와르 영화 분위기를 소재로 삼는듯 보입니다.


(느와르 브루스)

얼핏 시작할 때 배경만 보면 확실히 그래 보입니다. 도시의 뒷골목, 남자 주인공의 독백 나래이션도 들려 옵니다. 그렇습니다만, 막상 좀 더 영화를 지켜보면, 이 영화는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일단 배경부터가 1940년대나 1950년대로 고정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남녀 주인공급 배우들의 복장이나 행동은 분명히 그런 옛날 느와르 영화 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거리 풍경이나, 다른 조연 배우들은 시대를 종잡을 수 없습니다. 가끔은 옛날 영화 분위기를 한껏 부리다가, 또 그냥 영화가 나오던 1980년대 중반 모습이 그대로 나오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40년대 클럽 같지만, 사용되는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는 80년대)

때문에 막상 영화의 핵심은 범죄물이나 느와르 영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짤막한 코메디들인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정상에서 크게 과장되어 있거나, 아예 제정신이 아닌 인간들이고, 영화 속에 묘사되는 세상의 모습도 좀 정신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입니다. 특히 조연을 맡은 브루스 캠벨은 만화에나 나올법한 과장된 표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개인기를 마구 작렬시킵니다. 매우 싱거운 언어유희로 농담을 이끌어 내는가하면, 도시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소재로 넘어지고 자빠지고 영구짓하고 바보짓 하는 내용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중반까지 여러 등장인물들과 여러 곳의 상황을 돌아가면서 펼쳐내면서, 그때마다 한 토막씩 끊어지는 코메디물을 여러개 보여주는 형태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짧은 단편 코메디 영화들이나, "Three Stooges"의 영구 어릿광대쇼를 서로 다른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만 합니다. 제작진들이 떠오르는 코메디 아이디어 소재들을 이리저리 늘어놓고 싶은데, 옛날 느와르 영화도 좋아하다보니, 그런 분위기 속에서 소재들을 하나 둘 내키는대로 내밀어 놓은 듯한 느낌이 날 정도 입니다. 이 영화는 이런 단편 코메디들의 내용을 계속 제시하면서, 막판에 조합하고 다듬어서, 지켜보다보면, 하나의 연결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연결장면을 만들어서 대체로, 전체적으로 앞쪽 코메디와 뒤쪽 코메디가 인과관계를 갖고 흐름도록,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브루스 캠벨 표정)

일단, 이 단편 코메디 하나 하나만 놓고보면, 나쁜 편은 아닙니다. 아주 재미 없는 것은 없고, 나름대로 그 재치가 감탄할 만한 것도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연기는 누구 하나 빠짐없이 충실하고, 모두들 확실히 적역을 맡고 있습니다. 갑자기 한눈에 현실적이고 냉랭한 여자주인공에게 빠져버린 좀 순박하고, 좀 성실하고, 좀 어리숙하고, 하지만 착하고 낙천적인 남자 주인공이라는 구도는 이런 배우들의 연기 덕택에 왔다갔다하는 이야기 속에서도 잘 살아 남고 있습니다.

코메디 연출 자체도 이런 코메디를 재미나게 잘 보여줄 수 있도록 화면이 짜여져 있어서, 40, 50년대의 자빠지고 넘어지는 코메디의 평균 정도는 느낄수 있을만 합니다. 이 영화 속에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이 위기에 빠져 있는줄 모르고 태평하게 사랑고민을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대목의 긴장감은 비슷한 영화의 정수 그대로 입니다. 문 하나를 두고 한쪽에는 목숨을 날릴 위기에 처한 여자 주인공이 있고, 문 반대편에는 사랑의 설레임에 느릿느릿 떨리는 독백을 읊는 남자 주인공이 있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는지 남자 주인공은 모릅니다. 그래서, 남자 주인공의 대사가 속터지게도 소리로 들려오는 가운데, 동시에 영화 화면으로는 여자 주인공이 답답해하고 무서워하는 표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대조와 역설적인 상황을 잘 이용하면 재미난 코메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자 주인공)

(밤거리의 남녀주인공)

특히 이 영화에는 그 와중에 가끔가다가 환상적인 괴상한 아이디어가 영화에 끼어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차피 앞뒤 연결이 좀 어렵게 돌아가는 영화다 보니, 내키는대로 비현실적이고 이상한 것이라도 재밌겠다 싶으면 집어 넣은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지루함을 날려 줍니다. 이 영화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시대배경이나 형식을 좀 무시하고 과감하고 이상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망치로 두들겨 맞아도 끄떡 없는 악당이라든가, 5층에서 떨어져 머리를 땅에 찧은 뒤에 갑자기 일어나 히죽히죽 웃으며 걸어다니는 인간이 나오는등, 해괴한 장면이 가끔 나와서 호기심을 돋구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장면 중에는 등장인물이 문을 열면, 문 앞에 또 문이 나오고, 그 문을 열면, 또 문이 나오고, 그 문을 열면 다시 문이 나오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무대가 펼쳐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몇몇 장면들은 분명히 장면의 소재가 신기하다는 면에서 눈길을 끌어 줍니다.


(겹겹의 문)

그렇지만, 반대로 또, 영화의 이런 이야기들이 정말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것이냐 하면 또 그렇다고는 하기는 좀 어렵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일단, 이 영화에서 악당 역할을 하는 인간들이 "무식하고, 지저분한 폭력배" 이상의 개성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흥미진진하게 대결과 싸움에 몰입하게 된다는 생각은 하기 어렵습니다. 이점은 주인공쪽도 마찬가지 입니다. 갈등하는 심리를 표현하는 여자주인공 배우의 개인기 스러운 연기 일부를 제외하면, 별로 와닿을 것은 없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그냥 뻔하고 답답한 옛날 영화속의 찰리 채플린 같은 낙천적인 순정파 인물을 흉내낼 뿐으로 별다른 개성이나 사연이 와닿지는 않습니다.

또, 영화의 코메디 아이디어들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괴상한 요소들도 그다지 독창적이지 않다는 점 역시 좀 아쉽습니다. 악당이 아파트로 처들어오고, 정의의 용사가 악당을 물리치러 오는 등등의 전형적인 내용이 모범적으로 진행될 뿐입니다. 물론 영화의 아슬아슬한 순간은 멋지고, 갈등이 고조되는 재미는 충분히 지켜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정말 과감하고 화려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괴상한 소재들이 자꾸 터져나오면서 시선은 끕니다만, 거기에 특별히 인상적인 풍자나 강렬하게 연결되는 심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안돼애애애애애애- :이런 화면)

"크라임웨이브" 속에는 정신병적인 짓, 정신병적인 대사를 하는 등장인물들이 자꾸 등장합니다. 또 흉악한 범죄자가 가벼운 코메디 수법으로 우스꽝스럽게 영화속에 끼어듭니다. 이런 점은 "델리카트슨 사람들 Delicatessen" 같은 영화와 비슷한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크라임웨이브"의 괴상한 소재와 그 활용 방식이 "델리카트슨 사람들"이나 비슷한 다른 영화들보다 좀 처지는 점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출 방식이 극적으로 연결되고 있지도 않고, 그런 괴상한 소재들이 영화 전체의 이야기 전개에 결정적인 재료가 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여인의 음모 Brazil"이나, "카프카" 같은 영화는 영화의 기괴한 건물과 독특한 조명이 암울하면서도 괴기스러운 영화 이야기에 절묘하게 들어맞습니다. "블레이드 러너"나 "로보캅" 같은 SF물의 공상적인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이런 부류와 비교해보면, "크라임웨이브"는 그런 정도로 충실하게 소재와 전체 영화가 어울어진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이 영화속에는 등장인물의 얼굴을 화면 앞에 커다랗게 잡고, 그것을 또 이리저리 굽어진 렌즈로 왜곡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런 것들도, 일그러진 얼굴이 정신나간 느낌을 드러내는 강조효과가 생겨서 지루함은 가시게 해 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게 사용되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얼굴)

결국 이 영화는 후반부와 결말이 영화의 가치를 한층 더 높여 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기에 아무런 기대 없이 본다면 더욱 재미있는 요소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영화는 별 상관없이 조각 조각 흩어져서 웃긴 이야기 하나씩만 보여줬던 것이, 막판으로 가면서 하나로 합쳐집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1941"이나, "러브 액추얼리"와 같은 방식을 쓰면서 결말로 치닫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후반부에서는 영화를 진행하며 설명되어온 주인공의 성격을 잘 살리고, 막판에는 재미난 복선들을 단순하고도 화려하게 활용해먹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부류의, 나뉘어진 이야기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끝나는 영화중에서도, 이 영화는 그 이야기를 엮는 기교가 꽤 괜찮게 느껴질 정도 입니다. 결말 부분에 이르면, 이 영화는 과거 회상으로 시작했다가, 현재로 되돌아와서 끝나곤 하는 옛 느와르 영화의 그 시간 왔다갔다하기 특징도 그대로 잘 써먹고 있습니다.

영화 앞부분과 중반부는 좀 난잡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알아먹는데 방해가 될만큼 혼란스러웠습니다. 짧은 코메디가 한자락 한자락 씩 그냥 별 상관없이 재생된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탓에, 그런 이야기들을 가지치기 해버리고 말끔하게 정리하면서, 빠르고 결정적인 하나의 갈등구도로 내달리는 결말부분은, 그만큼 더 극적이고 화끈하게 느껴지는 묘미도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룻밤 속에 생기는 소동이 하나둘 꼬여서 결국 일생일대의 커다란 액션활극으로 치달아버리는, 그 대소동극의 소란스러운 즐거움도 꽤 잘 전해줍니다.


(아주 저예산도 아님)

이 영화 초반부는 대체 뭔 일이 벌어지는지,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되려고 저런 막무가내 악당이 설치고 돌아다니는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짧은 이야기 하나 하나로 끊기면서 넘어가는 순간순간들이 어떻게 2시간을 때우는 영화가 될지 걱정스럽기 까지 한 것이 영화 전반부 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복잡하고 헷갈리는 상황들이 막판에는 깨끗하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악당-악당에게 붙잡힌 여자 주인공-여자주인공을 구출하려는 남자주인공의 단순하고 간단한 액션 활극으로 내달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액션 장면에서 관객은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고, 하나로 초점이 집중된 이야기 구조 때문에 그 긴장감의 재미가 좀 더 살아나게 된듯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화질이나, 녹음 기술 등에는 저예산 영화 느낌이 많이 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꽤 멀쩡한 특수효과들이 잘 등장하고, 막판을 장식하는 자동차 추격전 장면은 예산 많이 때려 넣은 영화의 스턴트 장면들에 비해 그다지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특수 촬영 기술이 약간 부실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대신에 영화의 화질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눈에 뜨이지도 않아서, 무난해 보입니다. 반면에 녹음은 좀 아쉽습니다. 영화 음악이 영화의 무성 영화 코메디 같은 느낌을 아주 잘 살려주고, 화면에 펼쳐지는 이야기에 뮤지컬 처럼 착착 맞아드는데 비하면, 연주/음향기술/음질 모두 상당히 부실합니다.

도시의 밤을 보여주기 위해, 안개속에 퍼지는 듯한 따스하고 환한 빛으로 감상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것은 느와르 영화 분위기를 답습하는 이 영화의 향취입니다. 또, 기괴한 울긋불긋한 빛을 사람 얼굴에 드리우는 등등, 조명 효과들은 재미납니다. 적극적으로 색감을 왜곡해서, 기이한 향취와 함께 만화 같은 느낌을 내거나, 혹은 옛날 영화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80년대판 "환상특급 Twilight Zone"의 에피소드들이나, 최근의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같은 영화에도 보이는 것인데, 이 영화에도 과하지 않게 살짝 활용되어서 영화를 기이한 볼거리로 만들어주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초록색 불빛)

아주 독창적인 소재나 방식을 활용한 영화라고 볼수는 없고, 영화 속 이야기나 코메디의 형태도 좀 소박한 편입니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빠른 진행에, 복고풍 배경과 현대적인 괴상함이 난잡하게 섞이는 형국 때문에 주목할만한 볼거리 수준은 되어 줄 것입니다. 우스꽝스러운 과장된 표정으로 영화의 분위기에 맞춰가는 와중에도 나름대로, 감정이입이 될만한 감정을 보여주는 연기자들에게 공감한다면, 영화는 좀 더 재미날 것입니다. 저는 배우들 중에서는 여자 주인공 역을 맡은 쉐리 J. 윌슨이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저예산 영화 "이블데드"를 감독해서 드디어 돈을 만지는데 성공한 샘 레이미가 처음으로 영화사 다운 영화사에, 제작진 다운 제작진과 함께 일해서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의 각본에는 조엘 코엔과 에단 코엔 형제가 참여 하기도 했고, 이 영화 속에는 "허드서커"라는 이름의 감옥이 나오기도 합니다.

영화의 여자 주인공을 맡았던 쉐리 J. 윌슨은 이 영화를 찍을때만해도 사실상 무명에 가까운 배우였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 직후에 출연한 TV 연속극 "달라스"의 세계적인 대성공으로 단숨에 인기배우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The XYZ Murders" 라는 제목도 있습니다.

샘 레이미 감독의 초기 영화이면서, 독특한 점은 있는 영화이기에,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꽤 많이 좋아해서 알려진 영화입니다. 이런점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을 맡았던 "1941"과도 또 비슷해 보입니다.

덧글

  • hansang 2008/02/09 14:07 #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샘 레이미 최고작이라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애쉬 2008/03/15 05:18 # 삭제 답글

    샘레이미의 장기는 장르에 충실하면서도 비틀어 묘한 쾌감을 주는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크라임웨이브는 정점이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냥 독특한 점이 있는 영화로만 평가하는 리뷰가 못내 아쉬워서 리플을 달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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