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진강호(神劍震江湖, 1967) 영화

쇼브라더스에서 10년후쯤에 나오는 "오독천라 (五毒天羅, The Web of Death, 1976)" 와 거의 동일한 줄거리를 사용하는 1967년작 "신검진강호"는 제목이 제목이니 만큼 어느 그럴싸해 보이는 칼을 한자루 보여 주면서 시작합니다. "오독천라"가 천하무적의 괴상한 무기 "오독천라"를 소재로 하는 것처럼, "신검진강호"는 천하무적의 칼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남자주인공 일행이 스승의 뜻으로 하산하여 이 칼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 영화의 시작인 것입니다.


(길 떠나는 사람 둘, 배웅 하는 사람 하나)

"신검진강호"는 제목에 신검, 강호 이런 말이 들어가서, 꼭 무슨 멋드러진 무술영화 같아 보입니다만, 사실 영화를 끝까지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영화의 첫 1/3 정도는 꽤 무술 영화 같이 생겼습니다. 칼싸움 장면도 꽤 나오고, 정패패, 나열 등등의 대표적인 무술영화 인기배우들이 주요 배역으로 등장하니 말입니다. 정패패가 혼자서 수십명과 맞서 싸우는 부분의 칼 싸움 장면은 좀 엉성하니 힘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대강 "영화처럼 칼싸움 잘한다" 싶다는 느낌 정도는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정도가 끝입니다.


(다 잡아 죽이고 한 명 남았음)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이 영화는 본격적인 무술 영화의 탈을 쓰고 있지만, 기실은 60년대 초반에 더 유행했던 홍콩 쇼브라더스의 고전물에 가까운 면이 아주 많습니다.

대체로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많고, 옛날을 배경으로 양식화된 연기와 양식화된 대사로, 연극적인 이야기를 펼치는 것 말입니다. 요즘 한국영화로 따지자면, 이 영화는 "짝패"나 "청풍명월" 보다는 "춘향뎐"이나, "황진이"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아예 중국 전통극인 황매조의 흔적까지 상당부분 남아 있습니다. 이 영화는 홍콩 쇼브라더스의 옛날 황매조 영화처럼, 등장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황매조 노래로 부르는 장면이 직접, 간접적으로 여러 곡 들어가 있습니다.


(노래하는 정패패)

(이것이 세트 촬영으로 찍은, 깊은 산 속 장면)

그렇다면, 황매조 영화 같은 고전극으로서 이 영화가 탄탄하게 재미를 갖추고 있느냐 하면 또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우선 이 영화는 황매조 영화 특유의 세트 촬영과 양식화된 감정 표현의 재미를 거의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냥 동네 야산에 불과한 곳을 깊고 깊은 명산심곡에서 도시로 나가는 교통로인척 하는 등등, 다소 엉성한 야외촬영과 섞여 있어서, 영화의 의상, 미술까지 같이 좀 재미없어져 버렸습니다. 감정 표현 역시, 발랄하고 속도감 있고, 비교적 실감나는 무술영화의 성격 묘사가, "로미오와 줄리엣" 풍의 서정시, 문어체 스러운 대사로 가득찬 신파극 성격과 뒤엉키면서 이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중간의 주인공, 오른쪽 사람이 향단이 스러운 배역)

이 영화의 앞부분은 꽤 괜찮습니다. 영화의 초점이 좀 이상하게 비틀거리는 "오독천라"에 비하면, 이 영화는 영화의 초점을 정패패가 연기하는 여자 주인공에게 확실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악한 파벌의 교주 딸이면서, 쾌활하고 거칠것이 없고, 때문에 약간 무례하면서도, 도한 그 방정맞음이 매력인 여자 주인공이 잘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 주인공이 그런 성격을 그대로 발산하는 행동을 하면서 사건이 벌어지고, 엉키고, 꼬이고, 일이 커지고 하는 것들이 잘 그려집니다.

여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잡아 놓고 사건을 벌이기에, 남자 주인공이나 기타 주변 인물도 묘사가 잘 되고 있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천방지축인 성격인데 비하여, 남자 주인공은 항상 공손하고 예의바른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대조되는 성격으로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더 잘 묘사하고 이끌어나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정패패 특유의 천진난만하고 장난스러운 표정이 묘하게 잘 어울어지면서, 정패패의 감정동요가 꽤 설득력있게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적인 연기가 아니라 무용동작 같이 짜놓은 옛날 연극식 연기입니다만, 그런만큼 알아보기 쉽고 그만의 맛도 재미납니다. 그 외에도 여자주인공의 하녀 라든가, 여자주인공을 견제하는 같은 파벌의 중진 등등의 인물도 이러한 성격의 대조를 통해서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저 나무통 안에 들어가서 한 100일쯤 수련하다가 나와서 제자들을 만나는 스승)

그렇지만, 영화의 갈등구도가 잡히고, 정통 신파극조의 "비극적인 사랑"으로 흘러가면서 이런 성격묘사도 참 이상해 집니다. 자유롭고 활기찬 인물이었던 여자 주인공은 갑자기 난데 없이 비련의 여주인공이 됩니다. 칼질하고 독침을 날려대던 이 사람이 무기력하게 서서, 사람 이름 울먹이는 목소리로 부르면서, 눈물 떨구는 일만 합니다.

갑자기 내가 목숨을 버리네, 슬퍼서 살 수가 없네 하면서, 탄식하고 통탄 하는 과장된 연기를 하는 것은, 잘 조직된 신파극이라도 지긋지긋하고 이상하게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렇게 엉뚱하게 감정이 돌변하고, 인물들이 갑자기 무기력하게 엉엉 울고, 행동하고 뛰고 날던 사람들이 "어찌 이런 일이" "슬프도다 슬프도다" 이런 소리만 계속 읊으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별 조절도 없이 급격하게 막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더욱더 가짜같아 보이고, 감정이입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영화 앞부분만 해도 정패패는 이런 분위기 였는데)

업친데 덥친격으로, 이 영화는 영화의 무게 중심이라든가, 시간 배분에도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 소재로 언급되는 것은 어쨌거나 문제의 엄청나게 좋다는 전설적인 칼 입니다. 이 칼을 어디서 어떻게 구하느냐 하는 것과, 이 칼이 과연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분명히 영화 줄거리 속에서 초점을 맞추게 되는 일입니다. 꼭 칼이 "엄청난 무엇인가"로 직접 묘사될 필요는 없다하더라도, 칼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거나, 칼의 정체를 파헤치는 순간은 중요하게 집중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명 Notorious" 에서, 문제의 지하실에 침입하고, 다시 빠져나오고 하는 장면이 가장 박진감 넘치는 파티 장면으로 되어 있는 것이라거나, "39계단" 에서, "39계단"이라는 말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 그럴듯한 수미쌍관법으로 되어 있는 것은 좋은 예일 것입니다.

하지만 김 빠지게도, 이 영화는 이 엄청난 전설 속의 칼을, 칼을 찾아 떠난 주인공이 찾는 방식이 아주 허무 합니다. 누군가 전설 속의 칼을 찾아 길을 떠났다면, 그 칼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겠습니까? 여러 가지 답이 있겠습니다만, 이 영화 속에는 갑자기 시간 없으니까 "그냥 길가다가 우연히" "어? 여기에 왠 칼이 있네?" 하면서 발견하게 될 뿐입니다. 더우기, 무술 영화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칼이 정말로 그 전설적인 위력을 보여주는 부분도 매우 짤막하고, 그나마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은 싱거운 것입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후다닥 중요한 이야기 거리를 대강 때우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결정적인 몇몇 장면에서 "엄청나게 싸움 잘해서 아무도 못이기는 고수"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다 두들겨 패버리고, 문제를 확 해결해주는 엉뚱한 장면들이 들어 있기도 합니다. 작년에 유행했던 말로 과연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인지라, 참 건성건성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엄청나게 싸움 잘해서 아무도 못이기는 고수"는 별 사연도 없고, 앞뒤 이야기를 봐도 별 중요하게 활약도 안하고, 그냥 저혼자 급한일 해결하기 위해 한두번 나왔다 들어갈 뿐인 참 무의미한 인물입니다.


(칼 들고 있는 이 사람이, 문제의 "데우스")

하지만, 그렇게 해놓고, 남는 시간에 더 재미난 것을 많이 보여주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못하다는 것이 결정적인 타격입니다. 이 영화의 절정은 말씀드린대로, 비극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신파극 입니다. 그런데, 이 비극 묘사에,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아름다운 화면 연출이나, "봄날은 간다" 같은 기막힌 감정표현이 있는게 아닙니다. 그냥 했던 이야기 또 하면서 시간 때웁니다. 정말로, 문자 그대로, 했던 이야기 또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당장, 저 여자를 죽여 버려요."
"어떻게 그럴수가." (눈물흘리고, 고개 좌우로 흔들며 괴로워하고)
"어서 그 여자를 죽여요."
"도저히 그럴수는 없소."(눈물흘리고, 고개 좌우로 흔들며 괴로워하고)
"지금 그여자를 죽이지 않는다면, 안됩니다. 죽여요."
"어떻게 내가 죽인단 말이오."(눈물흘리고, 고개 좌우로 흔들며 괴로워하고)

이런 식으로 대사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똑 같이, "안돼, 그럴 수는 없다. 너무나 괴롭구나." 울부짖으며 시간 때우는 것을, 추궁하는 사람과, 추궁당하는 장소를 바꿔가며 누차 반복하면서 계속 끊임없이 시간을 보내버리고 맙니다. 이런 점은, 앞부분이 재미났음에도 엉성하게 후다닥 넘어간 것과 비교해보면,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한데서 질질끈다는 생각만 듭니다. 질질끈 것이 아까울 만큼, 결말도 별 수 없습니다.


(정패패, 눈물흘리며 같은 대사 반복)

이 영화의 양식적인 고전 비극 연출이 엉성한데는 기술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음악 문제가 심각하게 이상합니다. 음악이 따로 떼어 놓고만 보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음악은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고전적인 배경으로 흘러가는 중국 전통의 황매조 스러움이 가득한 영화인데, 비극 장면에서 배경 영화는 미국 헐리우드 영화 배경 음악을 베껴서 집어 넣어 놓은 것입니다. 어색하기도 어색하고, 감정이 진솔하지 못하게 억지로 과장된다는 느낌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 상당히 성의 없게 보입니다. 완전한 도용인지 어느 정도 참고로 다시 작곡한 곡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어쨌거나, 노골적인 모방임은 분명합니다. 특히나 이 영화 속에서 전통적인 중국 노래 몇 곡이 가사와 함께 흘러나오는 부분은 노래가 꽤 괜찮기에 더 이상하게 안어울리고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독천라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나 재미를 자아내는 반가운 형식의 전통 함정)

비교해 보자면, "오독천라"에 비해, 이야기가 조금은 더 정갈하고, 줄거리가 조금은 더 잘짜여져 있으며, 정패패가 연기하는 여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모든 갈등이 돌아가고, 결말이 지어지도록 되어 있어서 조금은 더 인물들의 개성이 잘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꼭 더 낫다고 하기는 어려운 수준입니다. "오독천라"에는 괴상한 소재와 기묘한 함정 같은 것을 구경하는 환상적인 맛이 있었습니다만, 이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는 훨씬 못미치니 말입니다. 의상이나 소품도 더 밋밋하고, 기대할만한, "바위를 칼로 깎아 버리는 쇼"도 이 영화에서는 실망스러울 만큼, 실감안나고 재미없는 연출, 특수효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

이 영화는 김용의 대표작 소설 중 하나인 "의천도룡기"에서 거의 맨 앞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잘라서 대폭 개작하여 영화를 꾸민 것입니다.

"오독천라"만 놓고 볼 때는 확신할 수 없었는데, 돌도끼 님의 설명을 듣고 비교해보니, "오독천라"도 "의천도룡기"에서 맨 앞부분을 대폭 개작해서 영화를 꾸민 것임이 확실합니다. 사실 "오독천라"는 "의천도룡기"와 그다지 많이 비슷하지 않습니다. 갈등구도 한 가지만 비슷할 뿐입니다. 대신에 이 영화 "신검진강호"와 "오독천라"는 꽤 비슷합니다. 말하자면, "의천도룡기" 앞부분을 떼어내서 개작해서 "신검진강호"를 만들고, 이 "신검진강호"를 다시 개작해서 "오독천라"를 만든 듯한 분위기 입니다. - 돌도끼님 감사합니다.

두 영화 모두 후반부가 이상하고, 결말이 늘어지는데, 이것은 뒷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의천도룡기"의 앞부분을 결말이 화끈한 짧은 이야기로 끊어지게 고치느라 무리한 흔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거나 그렇다고 해도, 이것보다는 훨씬 더 낫게 할 수 있지 않냐 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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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ress, 1964) 분화미인어 (Guess Who Killed My Twelve Lovers: 내 애인 열두명을 죽인 범인이 누구게요?, 噴火美人魚, 1969) 신검진강호(神劍震江湖, 1967) 여교춘색(女校春色, Whose Baby Is In The Classroom?, 1970) 연애도적(鑽石?盜, Venus' Tear Diamond, 1970) ... more

덧글

  • rild 2008/02/10 14:18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언제나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거울에 올리신 '이 결혼 안됩니다'를 최근에 재미있게 봐서, 스토리베리(http://storyberry.com/)로 만들어 볼 까 하는데
    가능하시다면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 뚱띠이 2008/02/10 21:18 # 답글

    지난주에 NHK위성방송에서 홍콩영화 특집을 해주었는데 그 옛날 영화를 요즘 다시 보니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 게렉터 2008/02/12 08:36 # 답글

    rild/ 이 링크 http://gerecter.egloos.com/3517852 로 출처를 밝히시고 만드시기 바랍니다. 완성되면 저도 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뚱띠이/ 홍콩영화가 한국에서 아주 뒤덮었던 80년대 후반 시기의 기염을 토하는 영화들이 나오는게, 따지고 보면, 그만큼, 60년대, 70년대부터 만만치 않은 좋은 영화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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