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鬼國)

(신라 유물)

신라에서 바다로 나갈 배를 알아보던 사람이, 바닷가에서 이상한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남자였는데도, 얼굴에 마치 왕후장상의 귀한 부인처럼 너울을 덮어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냥 이상한 사람이다 하고 지나치려다가, 우연히 같은 배를 기다리게 되었으므로, 시간이 적적하여 물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라, 서라벌이나 무주의 아름다운 풍속과 놀라운 문물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시골사람이 귀한 나그네에게 여쭙습니다. 그처럼 남자도 얼굴을 너울로 가리는 것이, 요즘 서라벌의 멋입니까?"

그러자, 얼굴을 너울로 가린 사람은 잠시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곧 답하였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 보시오.

나는 일찌기 배를 타고 먼바다를 오가던 사람이었소. 그리하여 나는 큰 돈을 벌기도 했고, 또한 허망하게 재물을 날려 보기도 하였소. 그러다보니, 나는 점점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새로운 물건을 보고, 또 진기한 나라를 구경하는 것에 취하게 되었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멀리 나아가 보려고 한 적이 있소. 나는 겁이 나기도 했지만 용기를 내어 신라를 출발했으나, 오만한 마음가짐과 재물에 대한 탐욕에 하늘이 벌을 내리시는 것인지, 그만 풍랑을 만나고 만났소. 배는 부서지고 사람들은 물에 빠져서, 내 배는 길을 잃고, 나는 거친 바다 한 복판을 홀로 떠돌게 되고 말았소.

나는 죽었다 생각하고 지난 시절을 후회했소. 그리고 혼자 비바람과 파도 사이에서 떨면서 목숨이 끊어질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그랬건만, 요행 배는 비바람을 타고 수십일을 흘러다닌 끝에, 먼 곳의 육지에 닿게 되었소.

나는 다 죽은 꼴이 되어, 육지로 내려왔소. 나는 샘을 찾아 목을 축이고, 신 나무 열매와 쓴 풀뿌리를 뽑아 배를 채웠소. 그렇게 정신없이 바닷가의 수풀 속을 헤메며 숲 깊은 곳에 들어오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왠 젊은 여자 하나가 눈에 보였소.

나는 사람을 만났으니, 죽어도 사람꼴로 죽겠구나 싶어, 그 여자에게 달려가 말을 걸어보려고 했소. 그런데, 문득, 그 여자가 윗옷을 벗는 것 아니겠소? 나는 젊은 여자가 갑자기 옷을 벗는 모습을 보고 잠시 놀라 멈칫하였소. 마침 젊은 여자 옆에 어린 아이가 있었으므로, 나는 젊은 여자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겠거니 생각하였소.

나는 헛기침을 하여, 인기척을 내고, 그 여자에게 다가가 이 곳이 어디인지를 묻고, 또한 신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묻고자 하였소. 내 소리를 듣자 여자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소. 숲은 고요하여, 멀리서 새소리만 들릴 뿐이여서, 그 여자가 몸을 돌릴 때 나는 풀수풀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귀에 크게 들렸소.

그런데, 나는 다시 한 번 크게 놀라고 말았소. 여자의 앞 섶에 젖꼭지가 없었던 것이 첫째요, 또한 이 여자가 나를 마치 지나가는 개나 닭을 보듯 무심하게 말을 거는 것이 둘째였소. 그 여자가 말하기로,

'보아하니, 너는 이곳 사람이 아닌데. 왜 우리나라에 와 있느냐?'

하였소. 나는 여자의 벗은 몸이 보였으므로, 고개를 돌리고 공손히 말하기로,

'저는 바다 저쪽 신라 사람으로, 물건을 팔고 사려고 바다를 나왔다가 비바람을 잘못 만나 배가 부서져 긴시간을 굶었습니다. 바라건데, 혹 버리는 밥이나, 개와 고양이를 줄 먹이가 있거든 저에게 조금만 나눠 주셔서 죽어가는 자에게 다시 삶을 주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였소.

그러자, 여자가 웃으며, 손짓하며,

'가까이 오라'

하였소. 그리고, 머리를 풀어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리더니, 머리카락 뒤쪽을 손으로 쥐었소. 그리고 머리카락섶을 손으로 헤치며 조금 기다리니, 머리카락이 점점 축축해졌고, 곧 시간이 흐르자, 머리카락 사이에서, 하얀 물 같은 것이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소. 여자가 말하였소.

'내 머리카락을 핥아라'

나는 해괴하다 생각했으나, 너무나 배가 고프고, 또 이 여자가 자뭇 두려운 면이 있었으므로, 시키는대로 하였소, 나는 여자의 뒷 목덜미에 얼굴을 갖다대고, 혓바닥으로 여자의 머리칼을 핥았소. 그리하여, 여자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나오는 흰 물을 빨아먹었소. 놀랍게도 그 맛은 소의 젖과 비슷하였소. 그리하여, 허기를 채울 수 있으므로, 나는 그여자의 머리섶에 얼굴을 부비며 정신없이 머리카락을 핥았소. 그 여자의 머리칼에서 나오는 물을 빨아 먹다보니, 어느새 나는 그 맛이 세상에 놀라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몹시 즐기게 되었소. 그 오묘한 맛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소?

잠시 후에, 여자가 다시 웃으며 내 얼굴을 보고 말하였소.

'이 물은 다른 동물의 젖과 같은 것이 아니다. 아기에게 이 물을 먹이면, 100일만 먹여도 너댓살이 될 나이로 자라난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아기에게 100일 이상 젖을 먹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나는 조금의 물을 먹었을 뿐인데, 원기가 왕성하여, 마치 어제 신라에서 출발한 사람 같았소.

그러나, 그 여자의 머리카락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기운을 차리고 있는 동안, 갑자기 이 여자와 같은 이 나라 사람들 한무리가 나타났소. 그들은, 내 모습을 보고는 화가 난 듯 말하였소.

'함부로 남의 나라에 들어 왔으니, 벌을 받아야 하겠다.'

고 하고는, 나를 붙잡아 줄로 묶어 버렸소. 분명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 사람들이 그 여자의 친척이나 남편인지도 모르겠소.

나는 줄에 묶인 채, 이 나라 사람들의 행동과 사는 모양을 유심히 보았소. 그 중에 가장 해괴하고도 흉측한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은 입을 통하여, 임신이 이루어지며, 또한, 이 나라 여자들은 자궁이 아니라, 위장 위쪽에서 아기가 자라나고 나오게 된다는 것이었소. 어찌, 배를 기다리며 만난 길손에게 그와 같은 망측한 이야기를 낯낯이 하겠소?

마침내, 나는 줄에 묶여 끌려가 그 나라 사람들의 밭과 곳간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소. 그곳에는 곡식과 짚푸라기들이 널려 있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앞뒤를 오가며 땀흘리고 일하며 곡식과 짚푸라기를 나르고 있었소. 나를 붙잡은 사람이 말하였소.

"너는 함부로 남의 나라에 들어와 침범했으니, 무슨 벌을 받을지 택하여라. 첫째는 우리와 함께 곡식 쌓는 일을 하여, 그 높이가 석 자가 될 때까지 쌓는 것이다. 둘째는, 너의 코를 한 자가 넘도록 길게 잡아 늘여서 코끼리 코와 같은 모양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둘 중 어느 벌을 받겠느냐?"

나는, 같이 곡식 쌓는 일을 하겠다고 하였소. 나는 그 낯선 땅에서 이상한 사람들과 함께 뼈빠지게 곡식을 나르며 일했소. 대체 어쩌다가 내가 여기까지 와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으며, 또한 고향 사람들의 얼굴과 신라의 거리 모습이 아른아른하였소. 그러나, 정신없이 땀을 흘려 곡식을 나르느라 힘이 들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절해버릴 정도로, 죽을 힘을 다해 곡식을 날랐소.

다행히, 며칠이 지난 후에, 성상께서 베푸신 높은 은덕과, 진해장군(鎭海將軍: 장보고)의 공으로, 겨우겨우 신라로 목숨을 건져 되돌아오게 되었소. 다만, 나는 그때, 곡식을 석 자 높이로 쌓는데는 실패했소."

얼굴을 너울로 가린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말을 걸었던 사람도, 더 이상 묻지는 않았으나, 너울로 가린 얼굴을 한참 동안 넌지시 살펴 보았다고 한다.

후에 어떤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했더니, 믿지 못하여 말하기를,

"어찌 세상에 그런 곳이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하루살이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지 알수 있을 것인가? 땅속에 사는 개미는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을 것인가? 비려(碑麗)의 광막한 벌판에서 그 넓은 땅을 기어다니는 이리는 탐라 밖에 끝없는 바다가 있어서 산만한 고래가 뛰어 노는 줄 알 수 있을 것인가? 우산국의 궁벽한 섬에서만 태어나서 산 사람이, 부여의 끝없이 넓은 들판을 알 수 있을 것인가?

바다 밑에 사는 아구는 남산 아래 서라벌 궁궐의 사치스러움을 떠올려보기 어려울 것이네. 넓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어찌 헤아려보기가 쉽겠는가?"
- 원본 출전 "유양잡조 (酉陽雜俎)"


*1. 귀국
이 이야기는 "유양잡조"에 실린 신라 사람의 짤막한 표류담에, 프랑스 신부 뒤 알드(Jean Baptiste Du Halde)가 18세기에 쓴 "조선전"에 소개된 내용을 합친 것입니다. 우리측 책으로는 18세기 조선 학자인 안정복이 쓴 "동사강목"에 요약되어 인용되어 있습니다. 한편, "조선전"에는 "양서(梁書)"등의 문헌에 전해지는 "여인국(女人國)"에 대한 내용이 합쳐져 있는데, 그것이 이야기 속에 합쳐져 있습니다.

본래 귀국(鬼國)은 본래 중국 고대 문헌인 "산해경"에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산해경에는 눈이 하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후 귀국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일본 지역에 해당하는 나라로도 등장하는데, 이것은 다만 발음을 옮긴 것에 불과할뿐 아무런 설명이 없으므로 같은 지역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위 이야기는 짤막한 설명이라, 어떻게 표류한 사람이 돌아왔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제가 임의로 장보고와 임금을 칭송하는 관습적인 말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 "유양잡조"의 이야기는 유명한 신라의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 뒷부분과 대체로, 동일한데, 저는 18세기 조선 학자인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의 인용에 근거하여 위 이야기에 해당하는 부분만 빼내서, 이야기를 꾸몄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라기이 외국편" http://gerecter.egloos.com/3660215 에 포함된 1회 이야기 입니다.
by 게렉터 | 2008/03/14 13:12 | 기타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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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류나 위에 소개드린 원칙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지적해 주시면 매우 유용하겠습니다. 이하는, 현재까지 올라간 이야기들의 목록입니다. 1. 귀국 http://gerecter.egloos.com/3660223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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