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하삼지 (斷下三指)

(신라 토우)

신라 진해장군(鎭海將軍: 장보고)이 청해진을 호령하던 무렵으로부터 얼마쯤 지나서, 한 신라 뱃사람이 당나라에 갔다. 그 사람은 당나라에서 한쪽 다리가 없는 외다리 신라 뱃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외다리 뱃사람의 소개로 예부터 알고 지낸다하는, 당나라의 서문사공(西門思恭)이라는 벼슬아치를 만나게 되었다.

묻기로,

"서문사공은 어떤 관직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까?"

하니, 외다리 뱃사람이 답하기로,

"서문사공은 당나라 조정에서 좌룡무군, 우룡무군(左右龍武軍), 좌신무군, 우신무군(左右神武軍), 좌신책군, 우신책군(左右神策軍)을 모두 다스리는 벼슬을 하고 있네."

하였다. 이에, 그 사람은,

'이토록 높은 벼슬을 하는 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반드시 융숭한 대접을 받으리라.'

하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서문사공을 만나 이야기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좋은 술과 산해의 진미는 고사하고, 개떡과 물 한모금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때문에, 그 사람은 몹시 실망하였다. 그 사람은 돌아오는 길에 외다리 뱃사람에게 투정부렸다.

"공의 옛 벗이라 하더니만, 당나라의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사람을 대접하기가 시정의 잡배만한 인심도 없었습니다. 어찌 의리가 이러합니까?"

그러자, 외다리 뱃사람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십수년전에 나는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배를 타게 되었네. 내가 탄 배에는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당나라 임금이 신라로 보내는 사신들도 타고 있었네. 바로 그 사신들 중에 하나가 바로, 서문사공이었네. 그런즉, 그때가 내가 서문사공을 알게 된 처음이네.

신라로 돌아가는 우리 배는 처음에는 좋은 바람을 타고, 기세 좋게 나아가는 듯 하였으나, 점차 바람과 물결이 순조롭지 못하게 어긋나기 시작하였네.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험하고, 날씨를 알기 어렵기도 오직 하늘의 뜻을 바랄 뿐이니, 바람을 잘못 만나고 물살이 거칠 때 자칫 잘못하면 바다 위에서 길을 잃기가 쉬웠네.

마침내 우리 배는, 대체 어디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먼 망망대해로 흘러들어갔네. 우리 배는 방향을 잃고 어지러이 떠돌기 시작하였네. 도무지 우리 배는 길을 잡을 수 없었으므로, 드넓은 바다에서 끝없이 헤메기만 할 뿐이었네. 마침내, 배안에 쌓아놓았던 먹을것이 부족해 지기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서문사공에게 부탁하였네.

'공께서는, 당나라 조정에서 내리신 분부를 따르는 귀하신 몸이요, 또한 저희들은 그러한 공과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드넓은 바다에서 아는 사람 조차 없이 죽어 버린다면, 이는 공의 가족의 슬픔일 뿐만 아니라, 당나라 조정의 큰 손실이요, 또한 수치입니다.

다행히, 공께서는 당나라 조정에서 신라로 보내시는 많은 진기한 과일과 고기를 갖고 있으실것입니다. 그러한즉, 부디 그 물건을 풀어, 당나라 조정의 뜻과 공이 탄 이 배를 구해 주십시오. 비록, 당나라 조정에서 내리신 물건을 사사로이 사용하는 것은 죽을 죄이나, 이대로 저희가 죽어, 배가 물에 가라앉으면, 또한 그 물건들은 고기밥이 되고 물에 떠서 썩는 잡동사니가 될 뿐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더욱 큰 무례 아니겠습니까?

부디, 공께서는 큰 결단을 내리시어, 공과 당나라의 덕을 만국 사람들에게 보이소서.'

서문사공은 한참을 고민했네. 그러나 결국, 모두가 주리고 죽어가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다하고, 신라로 보내는 당나라 임금의 보물상자를 열었네. 과연, 그 중에는 진귀한 술이 있고, 또 기이한 음식이 있었네.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조금씩 조금씩 나눠 먹으며, 겨우 목숨을 부지해 나갔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텅빈 바다만을 떠다닌 것이 몇 달이나 지나갔네. 사방을 본 즉 푸른 물결만 넘실거리는 곳에서 몇십일씩 계속 지내는 것은 무서운 일이네. 이미 배를 타고 있는 사람 중에는 제 정신이 아닌 사람도 있었고, 간신히 맑은 정신을 갖고 있으나, 걸핏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하루에 몇 차례씩 미쳐 날뛰게 되어 버리는 사람도 있었네. 그 비참한 모습을 어찌 쉽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던 끝에, 바다 저편에 육지가 보였네.

'육지에 밭을 만들고, 울타리를 쳐 놓은 듯한 모습이 보입니다.'

누군가 소리쳤으므로, 배가 다가가면서 자세히 보니 과연 그러하였네. 서문사공이 말하기로,

'울타리를 쳐 놓았다는 것은 사람의 흔적이요, 아직 밭이 보인다는 것은 밭을 갈고 농사를 짓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니, 지금 그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오. 저 섬은 필시 사람이 사는 땅이니, 이제야, 우리는 목숨을 건졌다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말하니, 과연 옳은 말이었네. 배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감격하여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네.

배를 대고 육지에 허겁지겁 올라가 보니,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리는데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네, 주위를 돌아보니,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바닷가에 다만 허연 바위섬이 높이 솟아 있었네. 서문사공이 이상하게 여겨 묻기로,

'조금 전에 배를 타고 땅으로 올라 올 때는 이런 바위섬을 보지 못했거늘, 대체 이 바위섬은 언제 솟은 것이오?'

하기에, 나는 자세히 들여다 보았네. 곧 나는 놀라 답하였네.

'저것은 바위섬이 아닙니다. 공께서는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위섬이 몸체를 돌려 땅으로 다가오니, 바위섬이라 생각했던 것은, 섬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사람이 바다 속에서 허리 위만 내놓고 있는 등짝이었네. 이 사람이 뭍으로 걸어나오니, 그 크기가 과연 끝없이 장대하여, 보통 사람의 몇 십배는 족히 될만하였으며,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그 높이가 마치 산과 같아서 눈과 귀가 있는 머리통께가 가물가물해 보일 정도였네.

우리는 힘을 다해 거인에게서 먼 쪽으로 도망쳤네. 거인은 소리쳐서, 뭐라고 말하며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마치 천둥이 치는 것과 같았네. 우리는 소리에 놀라 넘어지기도 하고, 또 귀를 틀어막기도 했는데, 그처럼 소리가 너무 커서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또 말이 우리의 말이나 다른 나라의 말과 얼마나 비슷하고 다른지도 알 수가 없었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인들이 몰려들어 우리를 보았네. 거인들은 그들의 손가락 만한 길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우리를 보고 몹시 신기하게 여기는 듯 보였네. 거인들은 우리들의 모습에 경탄하며, 우리를 다선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네. 거인의 손에 집혀 들때, 나는 단숨에 몸이 솟구쳐 높은 산위로 올라가는 듯 했으므로, 정신이 아찔하였네.

거인들은 우리를 집어들고 겅중겅중 걸어갔네. 거인의 키가 우리의 몇십배로, 한 걸음을 걷는 것이, 우리가 한참을 달리는 거리였으므로, 거인들이 잠깐 동안 걸어간 거리가 줄잡아 족히 백리는 되지 싶었네. 거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널찍한 동굴이었네. 그 동굴, 동굴 천장이 마치 산처럼 솟아 있어, 동굴 안에 구름이 생길 듯 만큼 커다란 곳이었네.

동굴 안에는, 남자 거인과 여자 거인, 늙은 거인과 여자 거인들이 잔뜩 모여 앉아 있었네. 그들의 행색은 당나라 옷과 비슷해 보이는 듯 하기도 하였으나, 결코 같지는 않았으며, 소매가 매우 넓어서, 그 소매 안에, 높은 탑과 커다란 집을 몇 개씩 집어 넣을 수 있을 듯 보였네.

거인이 우리를 동굴 바닥에 내려 놓자, 동굴 속에 있던 거인들은 일제히 우리를 지켜보며 놀라워 하였네. 여러 거인들은 우리를 툭툭 건드리기도 하고, 우리를 넘어 뜨렸다 일으켜 세웠다 해보기도 하고, 우리를 손가락으로 때려 걷고 달리게 하기도 하였네. 여러 거인들은 이토록 장난을 치며 우리를 갖고 놀았는데, 모두 대단히 기뻐하고 신기해했네. 놀란 가슴을 가라앉혀, 거인들의 커다란 얼굴을 살펴 보았으니, 이 거인들은 우리를 얻은 것을 마치 귀한 물건이나, 진기한 짐승을 얻은 듯 여기는 듯 싶었네.

거인들은 구덩이를 하나 깊게 파서는, 우리를 그 구덩이 안에 집어 넣었네. 거인들에게는 팔목이 들어갈 뿐인 작은 흙구멍에 불과했으나, 우리에게는 높은 벽으로 둘러 쌓인 깊은 우물 같은 곳에 갇힌 셈이 되었네. 거인들은 우리를 이곳에 가두어 놓고, 마치 우리가 공작새나 앵무새를 두고 기르며 구경하고 재밌어 하는 것 처럼 여기는 듯 했네.

우리는 그 구덩이 안에서 갑갑하게 있었는데, 가끔, 거인들이 우리들이 잘 있는지 와서 살폈네. 거인들이 우리를 확인할 때 얼굴을 내밀면, 구멍 위로, 커다란 거인의 눈만 하나 보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 검은 해가 떠 있는 듯 하여, 몹시 무서웠네. 갑자기 갇혀 있는 구멍 위로 그늘이 지며, 커다란 눈동자가 하늘을 가리는 그 놀라운 광경을 어찌 지금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하룻밤을 꼬박 갇혀 있으면서, 우리는 무서워 울기도 하고, 또 놀라 떨기도 하였네. 그런데, 우리 중에, 옛 백제 땅에서 온 사람이 있어 말했네.

'예전에, 백제가 망하려 할 무렵에, 바다로 부터 이처럼 커다란 거인의 시체가 떠내려 와서 백제 사람들이 모두 놀라운 것으로 여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신라의 땅까지 떠내려갈 수가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떠내려 오기는 하였으나, 분명히 우리가 갈 수 없을 만큼 먼 길은 아닐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가 지혜를 모아, 좋은 계책을 내면, 목숨을 구하여, 신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말에 우리는 희망을 얻어 궁리하기를,

'흙바닥으로 벽이 되어 있으니, 흙을 긁어 기어 올라갈 사다리 같은 발판을 만들면 이 구멍의 꼭대기 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인이 항상 우리를 감시할 때, 눈을 대고 들여다보니, 그때를 기다려 눈을 찌른다면, 거인이 눈을 감싸쥐고 아파할 동안 도망칠 기회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날 내내 벽의 흙을 긁어내어 사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네. 그리고 하루가 지나자, 우리는 모두 벽에 달라붙어 구멍을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네. 구멍의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서, 우리는 기다리기 시작했네. 한참 기다리니, 마침내 거인이 다시 얼굴을 내밀고 구멍 안을 쳐다보았네. 구멍 위로 거인의 커다란 한쪽 눈이 드리웠네. 그 모습은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술이 거하게 취해 잠자는 듯 하였네.

'지금 어서, 저 눈을 찌르라.'

내가 소리치니, 기다란 깃발 대를 들고 있던 사람이 깃대 끝으로 힘차게 거인의 눈 한 중앙을 찔렀네. 곧 거인이 굉장한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날뛰기 시작했으며, 아파서 길길이 소리지르기 시작하였네. 커다란 소리가 나면서, 거인이 뛸 때마다 땅이 흔들리니,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과 같아서 우리는 모두 넘어지고 자빠졌네.

'지금이 기회이니 머뭇거려서는 안된다.'

다시 일어나 기운을 차려 달리기 시작해서, 우리는 간신히 구멍을 빠져나와, 동굴 밖까지 쉴새 없이 달렸네.

곧 거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뒤쫓아 오기 시작했는데, 거인들의 걸음이 빨랐으므로, 우리는 곧 잡혀 죽으리라 생각했네. 곧 거인 몇이 우리를 밟아 죽이려 드는 듯 하기도 했네. 달리면서 눈 앞을 보니, 울타리가 쳐 있고, 그 안에 양과 염소 같은 것들이 가득 있는 것을 보았네. 우리 중에 하나가 말하기로,

'마치, 우리가 누에를 길러 그 실로 비단을 짓는 것처럼, 이 자들은 양과 염소를 벌레 처럼 길러 그 털로 옷감을 짓는 것인가 싶습니다.'

하였네.

마침내, 나는 한가지 꾀를 내어 말하기로,

'저 울타리를 열어 양떼와 염소떼를 나와 내달리게 하라.'

하였네.

우리들이 힘을 합해 울타리를 열자, 양떼들이 가득 쏟아져 나오며, 온통 양울음 소리가 가득해 졌네. 사방에 양과 염소들이 가득 내달리며 어지러우니, 거인들은 양과 염소와 우리가 그 크기가 비슷하였으므로,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였네. 그래서, 거인들은 우리를 잡는다고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으나, 매양 양을 대신 움켜 쥐었을 뿐이네.

마침내, 우리는 끝도 없이 긴긴 시간을 도망쳐, 우리 배가 있는 곳까지 올 수 있었네. 우리는 허겁지겁 배에 올라타, 다시 바다로 나갔는데, 얼마되지 않아 거인 하나가 산 저편에서 끝끝내 우리를 찾아 쫓아 오는 것이 보였네. 거인이 우뚝하게 서서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쫓아오니, 그 모습이 마치 높은 산이 소리를 지르며 무너지는 기세인 듯 하여, 우리는 모두 겁을 먹어 머리털이 쭈뼛 섰네.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배를 움직였으나, 마침내 거인이 손을 뻗어 우리의 배를 잡았네. 우리는 배도 부서지고 거인에게 붙잡혀 죽으리라 생각하였으므로, 죽기살기로 달려들어, 도끼로 거인을 치려 하였네. 우리는 맹렬히 도끼를 휘둘러, 거인의 손을 마구 내리찍었으니, 거인의 손가락 세 개가 잘려서 배위에 떨어졌네. 마침내, 거인은 배에서 손을 떼고 아파서 소리지르며 길길이 날뛰었네.

물이 깊었으므로, 거인은 그 이상 쫓아오지는 못했으므로, 우리는 겨우 섬을 벗어날 수 있었네. 그러나, 우리 배에는 더이상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았는데다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 지 방향도 알 수 없었네. 우리 모두 굶고 기가 빠져 죽게 되었는데, 그 중에 서문사공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말하기를,

'지금 내가 걸치고 있는 옷이 가죽으로 된 것이니, 이것도 동물의 껍데기인즉, 이것이라도 씹으면 무엇이라도 먹는 듯 할 것이다.'

하고, 옷을 뜯어 씹어 먹었네. 나는 비참한 신세를 견딜 수가 없어서, 바다에서 작은 물고기라도 하나 잡아보려 하였으나, 파도에 휩쓸려 물에 빠져서, 그만 상어에게 물려 한쪽 다리를 잃고 목숨만 겨우 건졌네. 우리는 긴 시간 굶주리며 뜨거운 햇볕에 그을리며, 한달 동안을 바다를 떠다녔네. 그러던 끝에 마침내, 북쪽의 바닷가에 도착하니, 그곳이 바로 신라 땅의 남쪽 끝이었네.

그리하여, 우리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그때 고생할 때에 나는 다리 하나를 잃어 외다리가 되었고, 서문사공은 굶주림에 너무 고생을 하여, 금은보화를 선물로 줄 망정, 남에게 자기 음식을 나누어주려 하지 않는 것이네."

이야기를 들은, 뱃사람은 크게 감탄하며, 말하였다.

"공께서 해주신 이야기는 과연 놀라운 이야기 입니다.

생각해 본즉, 남쪽의 먼바다와 동쪽의 바다는 깊어서 다행입니다. 만약, 그러한 커다란 사람들이 서쪽의 얕은 바다에 산다하면, 그 사람들은 성큼성큼 바닷물을 건너와 신라와 아홉 나라의 사람들을 모두 벌레처럼 여겼을 것이니, 우리는 새장 속의 새의 신세가 되거나, 광대의 원숭이와 같은 꼴이 되어, 모두 가축처럼 여겨져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 말을 듣고, 외다리 뱃사람이 이렇게 답하였다.

"내가 그것을 생각해보니, 이치가 자뭇 묘하네. 우리가 그 거인들을 보며 놀랍고 하고, 두려워 했던 것 처럼, 만약, 우리보다 극히 작은 사람들이 세상 어느 곳에 살고 있어 신라에 온다하면, 분명히 우리를 보고 무섭게 여길 것이네. 또한 신라 사람들도 그 작은 사람들을 보면, 꼭 거인들처럼 그 작은 사람들을 붙잡아 놀잇감으로 삼으려 할 것임이 분명하네.

그렇다면, 혹시, 먼 옛날에 바로 이 신라 땅에 벌레처럼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땅으로 지금 우리와 같은 크기의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 작은 사람들을 모두 새장속의 새로 삼아 다 망하게 하고, 지금 우리는 그처럼 새롭게 들어와 땅을 차지한 사람들의 후손인 줄도 모르는 일 아닌가?

태고의 먼 옛날에는 소떼들도 들판을 달리고, 개떼들도 산속에서 늑대와 먹이를 다투었을 것이네. 그러나 사람이 나타난 후에, 이들 중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들이란, 울타리 안에 붙잡혀 쟁기를 끌고, 목에 줄이 묶여 음식 찌꺼기를 먹고 있는 것들 뿐이네. 세상의 이치가 이와 같은 것 아니겠는가?"

후에, 사신들이 당나라 조정에 가서 보았는데, 사람 키만큼 커다란, 거대한 손가락 뼈 세 개가 당나라 임금의 보물창고에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그곳 사람이 대답하기를,

'서문사공이 신라로 길을 떠났다가 당나라에 돌아가서는, 거인들이 사는 곳으로 간 까닭에 사신의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것을 고한 일이 있습니다. 서문사공은 그 증거로 거인의 잘린 손가락 뼈를 바쳤는데, 그것이 아직도 보물창고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 원본출전 "옥당한화(玉堂閒話)"


*7. 단하삼지 (斷下三指)
이 이야기는 송나라 때 나온 설화문학의 집대성인 "태평광기"에 "신라"라는 제목으로 편집되어 있는 서너편 중에 "옥당한화"를 춘전으로 하는 "서문사공"의 이야기를 골자로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서문사공이 신라의 사신이 되어 길을 나섰다는 동기에만 신라가 언급되어 있을 뿐, 신라와 별로 관계가 없는 이야기 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도 서문사공이고 서술시점도 서문사공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는 "신라"라는 제목으로 이야기가 편집되어 있습니다. 다른 자료와 함께 보면, 신라와 관련된 바다를 표류하는 이상한 이야기가 상당히 유행했고, 그런 이야기 중에 이것이 대표격으로 수집된 듯 보입니다.

위 이야기는, 서문사공을 바탕으로 이후에 우리나라 문헌에 나온, 비슷한 형식의 거인국에 표류하는 이야기들과 합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어우야담", "지봉유설", "청구야담" 등의 조선 중기 이후에 나온 거인 이야기를 원래 이야기의 뼈대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합하여 내용을 보충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거인의 눈을 찌르고, 양떼를 이용해 도망치는 것은 "청구야담"에 들어있는 거인이야기에 추가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청구야담"은 조선 헌종 무렵에 나온 책인데, 이 시기는 이미 동아시아에 유럽의 여러 문물이 전래되던 시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은 아마 오디세이아의 직접적인 영향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worry님의 질문에 따라 덧붙인 사항입니다.)

한가지 특기할만한 것은, 이렇게 여러 거인이야기에서 취합한 이야기들을 보면, 하나 같이, "거인이 바다에서 따라와 배를 붙잡으려 했는데, 도망치려고, 도끼로 거인을 찍어서 쫓아보냈다" 라는 부분이 절정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나온 시대와 배경이 조금씩 다른 데도, 이러한 내용만 유독 일치하는 것은 꽤 관심을 끕니다. 제목도 때문에, "단하삼지"로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라기이 외국편" http://gerecter.egloos.com/3660215 에 포함된 7회 이야기 입니다.
by 게렉터 | 2008/03/20 13:54 | 기타 | 트랙백 | 핑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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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정worry at 2008/03/20 19:20
거인의 눈을 찌르거나, 무리짐승인 양떼를 이용해서 도망에 성공하는 것이 오딧세이아에 나오는 키클롭스편과 비슷해서 읽다 깜짝 놀랐습니다. 신라기이 외국편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
Commented by 게렉터 at 2008/03/20 21:35
거인의 눈을 찌르고, 양떼를 이용해 도망치는 것은 "청구야담"에 들어있는 거인이야기에 추가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청구야담"은 조선 헌종 무렵에 나온 책인데, 이 시기는 이미 동아시아에 유럽의 여러 문물이 전래되던 시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은 아마 오디세이아의 직접적인 영향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에스키모 at 2008/03/21 00:18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이런 이야기도 있었군요^^
Commented by 무명씨 at 2008/03/21 11:55
그런데 거인국 설화는 상당히 보편적인것 같아요. 실제로 거인족이 존재했던 것일까요?
Commented by marlowe at 2008/03/21 14:04
[요재지이]에서는 야한 버젼이 있지요. 여기서는 거인국과 소인국이 둘 다 나옵니다만....
Commented by 게렉터 at 2008/03/23 22:13
에스키모/ 앞으로도, 20여개 정도 더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자주 들러주십시오.

무명씨/ 뭐, 사냥하던 시절부터 덩치 큰 사람/동물 보면 놀라서 겁먹기 마련이고, 낚시해서 잡은 잉어부터 사냥해서 잡은 호랑이까지 잡은 거 크기 과장하는 것도 전통이다보니, 워낙에 생기기 쉬운 이야기 종류인듯 합니다.

marlowe/ 말씀하신김에 새로 올린 이야기는 소인국에 관한 것으로 뽑았습니다.
Commented by 시무언 at 2008/03/24 09:41
오디세이야뿐 아니라 육지인줄 알고 올라갔던 곳이 알고보니 다른 거대한 생물이란 얘기는 아라비안 나이트가 신밧드가 육지인줄 알고 올라간 곳이 고래의 등이었다는 얘기가 생각나는군요.
Commented by 게렉터 at 2008/03/25 15:19
시무언/ 이 이야기에서는 육지인줄 알고 거인에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속에 서 있는 거인의 상체를 보고, 산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금은 다릅니다. 이러한 부분은 주석에서 언급드린 대로, "어우야담" 등지에 있는 조선후기의 거인에 관한 기록을 참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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