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칠시저(黑漆匙筯)

(백제 무령왕릉 유물)

신라로 들어오는 길에 어떤 뱃사람이, 문득 넓은 바다에서 한 섬을 보았다. 배에 탄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로,

"끝없는 바다에서 잠시 길을 잘못 들어섰기는 하나, 신라로 들어오는 바닷길에 이러한 섬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며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늙은 뱃사람들과 젊은 뱃사람들이 같이 보고, 또 여러 책과 지도들을 찾아 보았으나, 과연 이러한 섬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말하기로,

"그렇다면, 이 섬에 들어와 보고 듣고 전하는 자는 우리가 고금에 처음이 될 것이 아닌가? 어찌 이름을 떨칠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저 섬에 들어가 보는 것이 옳다. 혹여 세상에 없는 기이한 보물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였는데, 또 다른 사람이 가로 막으며 말하기를,

"세상에 보물은 드물기에 보물이라 하니, 예부터 뱃사람이 옥(玉)이라 하여 주워왔더니, 한갖 반질거리는 돌에 지나지 않았고, 금(金)이라 하여 주워왔더니, 구리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일이 잦았다.

수천년 동안 사람이 오가는 일이 끊이지 않은 신라의 산길이라 할지라도, 밤이면 가끔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물어가는 일이 있고, 바다 밖의 섬에는 독을 지닌 벌레와 사람을 물어뜯는 물고기와, 온갖 뱀과 용의 종류가 한도 없이 많다고 한다. 어찌 이름모르는 섬이 위험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만약 저 섬에 흉악한 나라가 있다고 하면, 우리가 내려서면, 붙잡아 쳐죽이거나 노비로 삼아 일평생 괴롭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한참동안, 말이 오가며 여러 사람이 떠들었으나, 쉬이 뜻을 정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한 사람이 말하기로,

"지금 우리가 무릇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바다로 흘러왔으니, 이는 파도를 따라 먼길을 돌아온 것일지도 모르오. 그렇다면, 해와 별을 보고 방향을 잡아 다시 신라로 가려 한다 하여도, 필시 처음에 기약하였던 것 보다는 수십일은 더 걸릴 것이며, 혹은 몇달이 더 걸릴 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소?

그렇다면, 비록 두려운 일이 있을까 걱정되기는 하나, 저 섬에 내려 물과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오. 비록 큰 보물은 구하기 어려울 것이나, 오히려 맑은 물과 나무 열매가 보물과 같은 값어치가 있을 것이오."

하였다. 그랬더니, 모두 그 일을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뱃사람들이 모두 섬으로 내려가려 하였는데, 다가 가면서 보니, 섬에는 우뚝우뚝한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으며, 땅에는 파란 풀이 돋아나 있어서, 과연 물과 열매를 구하기 쉬울 듯 보였다. 모두가 기뻐하는데, 다가가면서, 보니 땅에 언뜻언뜻 검은 빛이 보이는 것이 이상하였다.

이윽고, 사람들이 섬에 내렸는데, 맨 처음 내린 사람이 놀라며 여기며, 외치기로,

"이 섬에는 사람이 사는 것이 분명하오."

하였다. 그러면서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드니, 그것은 젓가락과 숟가락이었다. 과연 사람들이 보니, 틀림없는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그 모습은 정갈하게 다듬어 깎아서, 검은 색으로 옻칠을 하여 잘만든 장인의 솜씨와 다를바가 없었다. 검게 칠한 젓가락의 빛깔은 햇빛에 비추어 보면, 윤기가 있고, 광택이 있어, 반짝거렸으며, 손으로 잡아보면, 가볍고도 단단하였으므로, 백가지 음식을 차린 아름다운 밥상에 놓아도 부족할 것이 없어 보였다.

"저런 숟가락과 젓가락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사람이 사는 곳이리라."

모두 그렇게 말하며, 앞다투어, 섬으로 내려왔는데, 섬에 내려서보니, 그러한 검은 숟가락과 젓가락이, 한둘이 아니라, 수천 수만이 바닥에 널리 깔려 있어서, 그 숫자가 끝이 없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멀리서 보았을 때, 섬의 땅에 검은 빛이 보였던 것은 바로 이 숟가락과 젓가락의 빛깔이었음을 깨달았다.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이 숟가락과 젓가락은 큰 보물은 아니라 할지로도, 분명히 귀한 것이다. 이렇게 많은 숟가락과 젓가락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백만대군이 한 자리에 모여 밥을 지어 먹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던지고 다시 떠났다 하더라도, 설령 이와 같았겠는가?"

사람들이 놀라워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는데, 끝없이 젓가락과 숟가락이 땅에 떨어져 뒤덥혀 있는 이 섬에,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멀리 섬 저편을 보고, 우거진 높은 나무 숲 사이로 들어와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다만, 멀리서 새소리가 가끔 들려왔고, 모두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소슬하게 부는 바람 소리만 귀에 들릴 뿐이었다.

이때, 하늘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이 땅에 떨어져 툭 소리를 내었다. 사람들이, 젓가락과 숟가락이 떨어진 곳을 올려다보니, 이는 나무위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한 사람이 말하기로,

"나무 위에 사람이 숨어 있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것 아닌가?"

하고는, 우거진 큰 나무위로 올라가 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무를 기어 올라가서 보니, 사람은 커녕 다람쥐 한마리도 없었다. 다시 나무에서 내려오려다가 가만 보니, 나무 마다 커다란 꽃이 피었는데, 꽃 하나가 사람의 얼굴만한 큰 꽃이었다.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꽃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꽃 안에, 암술과 수술이 있는데, 바로, 그 나무에 핀 꽃의 암술과 수술이 숟가락과 젓가락이었다. 나무에 핀 꽃의 암술은 숟가락 모양이고, 수술은 젓가락 모양인데, 꽃이 질 때에, 꽃잎은 바람에 날려 날아가고, 그 암술과 수술만 부러져 땅에 떨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좋은 숟가락, 젓가락과 같았던 것이다.

뱃사람들이 놀라워 하고, 또 즐거워 하기를,

"세상 여러 곳을 다녀 보았으나, 숟가락과 젓가락이 열리는 나무는 또한 들어 본 적이 없다."

하며, 신기해 하였다.

사람들은, 섬에서 물과 나무 열매를 구하고, 또, 섬에 온통 널려 있는 검은 색의 빛나는 젓가락과 숫가락을 주워 왔다. 무겁지 않을 정도만 주워 왔으니, 그 숫자는 100쌍 정도 였다.

"검은 옻칠을 한 젓가락의 값을 받아도 적지는 않을 것이요, 나무에서 열린 기이한 물건이라 하면서 팔게 된다면, 금은과 같은 보물일 것이다."

하며 모두 기뻐하였다.

마침내, 다시 섬을 떠나 사람들은 무사히 신라로 돌아왔는데, 돌아오면서, 기록해 놓은 표시를 보고, 또 별과 해의 방위를 따져 보았으나, 그 이상한 섬의 위치는 다시 찾기 어려웠다.

신라에 돌아와, 한 가난한 뱃사람이 있어서 섬에서 주워온 숟가락과 젓가락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며 자랑하였다.

"이처럼 좋은 물건이 있으니, 이것을 팔면 나도 부유해 질 것이다."

그리고, 뽐내며 그 젓가락으로 밥을 먹으려 하는데, 막상 밥을 먹으려 해보니, 손에 걸쳐 쥐기에는 그 모양이 너무 투박해서 아팠다. 또 크기도 다른 젓가락들보다 큰 까닭에 음식을 먹기에 매우 불편하였다. 또한, 음식의 습기에 닿으면, 젓가락이 기이한 성질이 있어서, 그 모양이 이지러지므로, 그 모습 또한 추하였다.

사람들이 놀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과 같이 보통 사람보다 두 세 배는 큰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로다."

하며 비웃었다. 그러자 뱃사람이 실망하여,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내다버리며, 화를 내며 소리치기로,

"대체 밥을 먹을 수 없는 숟가락과, 반찬을 먹을 수 없는 젓가락이 무슨 소용인가? 비록 백쌍을 갖고 왔으나, 거친 나물 음식만한 값도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옛일을 기억하고자, 젓가락 하나만 남겨 두었다.

뱃사람이 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차를 끓여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차를 마시며 그 아내에게, 탄식하여 말하였다.

"학문이 깊은 선비들이 말하기를, 땅의 두께는 3만리(里) 정도인듯 하다는 사람이 있고, 사람이 사는 곳은 그 중심에섯 1만 5천리(里) 정도인듯 하나는 사람도 있다. 또, 세상의 땅 둘레는 9만리(里) 정도 라고 하는 선비도 있다.

이러한 말들은 듣기에는 기이하고 신비로우며, 또한 익히기는 어렵고 배우기도 쉽지 않으므로, 세상사람들이 오묘하고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헤아려 보면, 이는 세상사에 한푼어치 도움도 되지 않는것이다. 땅의 두께가 3만리가 아니라 2만 9천리라 한들, 농사에 무슨 도움이 되며, 땅의 둘레가 9만리가 아니라, 9만 1천리라 한들 신라가 삼국을 하나로 합칠 때에 무슨 쓸모가 있었겠는가?

지금, 내 젓가락을 보니, 비록 먼 바다의 섬에서 가져온 놀라운 물건으로, 나무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이 열리는 이치는 매우 묘하나, 마치 저 높은 선비들이 하는 말처럼, 아무 쓸모가 없어서, 한 그릇 거친 잡곡밥의 값어치도 없으니 그와 같다."

이때, 바깥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는데, 살펴보니, 북쪽 대아찬(大阿飡)이 보낸 사신들이 서라벌에 선물을 바치러 오는 행차였다. (북쪽 대아찬은 발해의 임금을 말함) 행렬에 앞장선 북쪽에서 온 말갈의 미인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말을 타고 길을 지나가며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고 듣기 좋았으며, 말 위에서 하늘거리는 춤을 추며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그런데, 그 가난한 뱃사람이 보니, 이 미인들이 노래하며, 연주하는 악기가, 대나무를 엮어 만든 판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바짝 마른 젓가락을 들고, 대나무 판을 긁어서 드르륵 드르륵 하는 소리를 내어 장단을 맞추는 것이었다. 미인들이 노래하는 가사에 말하기로, 악기 이름을 무악절(舞樂節)이라 하였는데, 그 대나무 판을 긁는 까만 젓가락이 뱃사람이 먼 바다의 섬에서 가져온 것과 꼭 같아 보였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그 악기를 매우 귀하게 여겨서, 그 젓가락을 금은으로 장식하고, 옥돌로 꾸몄으며, 비단끈을 달아 지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뱃사람이 크게 놀랐다. 뱃사람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버린것을 크게 안타까워 하며, 괴로워 했는데, 그러다가 무심코, 하나 남은 젓가락으로 마시던 차를 휘휘 저었다. 그랬더니 젓가락은 젓는대로, 점점 녹아 없어지더니, 곧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원본 출전 "유양잡조(酉陽雜俎)"


*9. 흑칠시저
이 이야기는 "태평광기"에 "신라"라는 제목으로 편제 되어 있는 이야기 중에, "유양잡조"를 출전으로 하는 이야기 하나를 바탕으로 두고 묘사와 대화를 보충한 것입니다. 이중에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관한 내용은 "유양잡조"에는 전혀 없는 것인데, 조선시대의 "양엽기"에 나와 있는 "경륭무악절(慶隆舞樂節)"이 나오는 이야기에서 가져와서 중간에 잠시 등장시켰습니다. 중간에 선비들의 고답적인 연구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시대 "성호사설"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라기이 외국편" http://gerecter.egloos.com/3660215 에 포함된 9회 이야기 입니다.
by 게렉터 | 2008/03/25 15:01 | 기타 | 트랙백 | 핑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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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은현 at 2008/03/25 17:49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고전이야기들... 고등학교때는 참 ... 싫었는데 말이죠...;
Commented by 베로스 at 2008/03/26 10:51
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알고보면 우리나라에도 꾀재미있는 고전이 많이 있는 듯 하네요.
Commented by 게렉터 at 2008/03/27 23:26
은현/ 재미있게 이야기를 구성하려고 좀 재미위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들러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베로스/ 원본출전과 "신라기이"에 대한 설명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에 달았던 덧글을 다시 첨부합니다:

일단 주의하셔야 할 것은, 이 이야기 중심 소재의 문헌상의 출처가 어디까지나 육조시대-당나라의 이야기의 계열에 있는 "유양잡조"에 실린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만, 그 기록속에 등장인물로서 신라사람과 신라배가 나오는 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야기를 만들어 올리면서, 우리쪽 자료를 참조하여, 원래 줄거리의 손실이 없는 한도안에서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로 꾸미기는 했으나, "신라기이 외국편"의 이야기 소재는 원칙적으로 "'외국의 기록'에 실린, 신라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은 주지의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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