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도(韓荷嶋)

(신라 조각)

신라에서 마립간을 모시기 시작한 무렵에, 한 신라 사람이 바다에 나가서 금은보화를 얻어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묻기를,

"공은 어디에서 이같은 보물을 얻었소?"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저는 백제와 가야를 다니면서, 신라 사람의 옛 물건들이 흘러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저는 구슬 목걸이를 하나 보았는데, 구슬은 사라지고 없고, 구슬을 꿴 끈만 있었습니다. 그 목걸이 끈을 가진 사람에게 묻기로,

'이 목걸이는 왜 구슬은 없고, 꿴 끈만 있습니까?'

했더니, 그 사람이 답하기를,

'왜국섬을 왕래하는 신라 사람의 물건이라고 하기는 했으나, 나도 구슬이 없고, 끈만 있는 까닭은 알지 못하오.'

하였습니다. 마침, 그 물건값이 비싸지 않았으므로, 저는 그 목걸이 끈을 사서, 옛 신라 사람의 물건이라 하여 좋아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그 구슬 없는 목걸이 끈을 걸어 놓고 기분좋게 구경하였습니다. 그런데, 벽에 걸어 두고, 햇빛이 비치는 때가 되니, 목걸이 끈에 작은 글씨가 써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여겨 그 글씨를 읽어보니,

'삼한(韓)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고, 눈 먼 사람을 박대하지 않는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뜻을 알 수 없는 말이라서, 나는 기이하게 여겼으므로, 그 목걸이 끈을 여러 사람에게 보였는데, 모두가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라가 또한 삼한의 땅에 있는 나라인데, 삼한 사람의 물건으로 삼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는다 하니, 이것은 이치에 맞는말이 아니오. 더우기, 눈 먼 사람을 박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앞의 말과 이어지지 않고, 운율도 맞지 않으니 더욱 이치를 알 수 없소. 그러므로 이 글은 다만 어린아이의 글씨 장난일 것이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왜국섬을 왕래하는 신라 사람의 물건이라 하였으니, 이는 필시 왜국섬과 관계가 있는 것 아니겠소?"

하였으나, 누구하나 분명히 뜻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 또한, 몇날 며칠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삼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고, 눈 먼 사람을 박대하지 않는다' 라는 이야기를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구슬 없는 끈에 적힌 글귀에 대한 일은 잊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후에 노젓고 잡일 하는 사람으로 배를 타고 왜국섬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파마국(播磨國)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라벌에서 같이 간 뱃사람이 말하기로,

'이곳에는 한빈(韓濱)이라는 바닷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눈 먼 장님들을 박대하는 것을 극히 삼가고, 다만 눈 먼 장님들을 받들어 공경하는 풍속이 있다네.'

라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곧, 제가 샀던 구슬 없는 목걸이 끈에 있는 글귀를 떠올렸습니다. 목걸이 끈에 '눈 먼 장님들을 박대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 곳의 풍속과 같았고, 또한 바닷가의 이름이 "한빈"이라 했으나, 삼한(韓)이라 할 때의 한(韓)자가 있었으므로, 또한 관계가 있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길을 물어, 한빈으로 찾아가 보았습니다.

한빈은 신도(神嶋)라는 섬에 있는 바닷가 였는데, 작은 배를 타고 이 섬에 가보니, 이 섬 사람들은 무당 앞에 모여, 굿에 열심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한빈을 찾아 가는 길에, 굿판이 벌어진 앞에서, 물어보니 답하기를,

'이 섬에는 영험한 신(神)이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섬기고 열심히 굿을 합니다.'

라 하였습니다. 내가,

'그 신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하고 물어보니,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하고 안내하기에, 가 보았습니다.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마치 사람처럼 생긴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자뭇 모양이 섬세하고 진기하여, 마치 정과 망치로 쪼아서 만든듯 해 보였습니다. 더욱 진기한 것은, 사람의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이 두개가 뚤려 있는데, 그 자리에서 샘물이 흘러나와서, 그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위를 흘러내리는 물이 마치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듯한 모양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바로 이것이 신도의 신이시니, 벌써 옛날부터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오늘날까지 계속 신께서 울고 계십니다.'

라 하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하기로, 다만 바위의 모양이 우연히 바람과 물에 깎이어 사람과 비슷해 졌을 뿐이고, 두 구멍에서 샘물이 쏟아지고 있을 뿐인데, 그것을 신이라 부르면서 섬기고 굿을 하니 참으로 웃을만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짐짓 그 태도가 진중했으므로, 저 역시 예의를 갖춰 다시 묻기로,

'그렇다면, 저 바위 신께서 이처럼 계속 눈물을 흘리며 울고 계신 것에는 무슨 까닭이 있습니까?'

했더니, 답하는 이야기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본래, 이 사람 모양의 바위 돌은 커다란 구슬 모양의 보석이 박혀 있어서,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으로 치면 눈이 있는 자리에 보석이 하나씩 박혀 있으니, 사람들이 이것을 신의 눈이라 하였는데, 그 보석은 햇빛을 받으면, 아름답게 반짝였습니다. 그러면 다섯가지 빛깔이 보석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를 일컬어, 사람들은 신의 눈이 빛을 발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바위의 모습은 마치 불교의 절에서 만드는 불상과 모습이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느 신라 뱃사람이 왜국섬에 와서, 왜국섬의 임금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이 섬을 지나치다가 이 섬에서 이 바위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신라 뱃사람은 말하기로,

'바위 덩어리 위에 보석이 박혀 있는데, 아무도 캐어갈 줄을 모르다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하여 그 바위에 기어올라가, 보석을 캐내려 했다 합니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말하기로,

'그것은 신의 눈이니, 신의 눈을 빼내면, 신이 매우 아파서 싫어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 사람은 비웃으며 답하기로,

'암석에서 보석을 캐내는데, 고통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희로애락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 돌덩이를 두려워하여 신이라 모시며 두려워 할 뿐, 귀한 재물로 사람을 위할 줄 모르니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하고는, 기어이 바위를 기어올라가, 끌과 망치로, 구슬 모양의 보석을 캐냈습니다. 보석을 캐내니, 마침, 보석이 빠진자리에서, 샘물이 솟아나오기 시작해서, 바위 위로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그 모양이, 마치 사람 모양의 바위가 눈물을 흘리는 모양과 같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곳 사람들이 말하기로,

'신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신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더니 신라 사람은,

'참으로 미련하다.'

하고는, 보석을 들고, 배를 타고 신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점점 거새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거세게 섬의 바다로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갑자기 바다에 물결이 일기 시작하더니, 결국 바위에서 흘러내린 물로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풍랑이 치게 되어, 신라 사람의 배는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신라 뱃사람은 섬을 떠나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해 노력하여, 온갖 계책을 다 써보았으나, 결국 한참을 헤멘 끝에도 섬 소용돌이에서 나오지 못하고, 풍랑에 휘말려, 배가 섬의 바위돌에 부딪쳐 부서져 산산히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섬 사람들은,

'신이 노하여, 신라 사람의 배를 부수어 버렸다.'

하며, 그 바위 신을 더욱 더 영험한 것으로 정성스레 섬기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바위 신의 눈이라하는 보석을 삼한(三韓)의 땅에서 온 신라 사람이 빼내어 버려, 그 바위 신도 눈이 없어졌으므로, 이곳 사람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귀하게 대접하게 되었다 합니다. 또한, 신라 사람의 배가 깨어져 부서진 한빈이라는 바닷가에서는, 바위 신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삼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말을 듣고, 드디어, 목걸이 끈에 적혀 있던 삼한(韓)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고, 눈 먼 사람을 박대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곳에 관한 이야기임을 완전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로,

'왜국섬에서 신라 사람이 다닐 때에, "신라는 옥으로 만든 상자(玉匣)처럼 빛나는 나라이고, 또한 눈부시게 하얀 나라이다"라 하며 뽐내는데, 그러한 위엄으로 오직 섬사람들의 순박함을 비웃으며, 제 욕심만 채우려한 탓에 큰 화를 당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하였습니다.

저는 그길로 그 한빈이라는 바닷가까지 가서는, 그곳에서 바닷물의 흐름을 따라 바닷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결국 저는 바닷물결을 따라간 곳의 한 작은 섬에서 옛날 그 신라 뱃사람의 부서진 배의 조각 조각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 저는 그곳에서는 그 신라 뱃사람이 쓰던 물건과, 그 신라 뱃사람이 사들였던 온갖 귀한 보물들이 잔뜩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저는 그것을 주워모아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 중에, 글을 많이 읽은 선비가 있어 말하기로,

"혼백이 없고, 정신이 없는, 돌덩어리 따위를 신이라 섬겼는데, 그 사연이 이러하니, 참으로 교묘한 일이오."

하며 감탄하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선비가 자뭇 풍류를 안다하며, 말하기로,

"돌덩어리에 정신이 없어 희로애락이 없다하나, 사람들이 모여들면 눈에서 광채를 내며 위엄을 보이고, 또한 아픈 일을 당하매 아파서 울고, 또한 노하여 배를 부수는 것은, 사람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소.

비록 진짜 사람에게 일곱가지 정이 있다하나(七情),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볼 수가 없으니, 다만 눈에 보이고 들리는 모습으로써, 다른 사람도 정신이 있다 짐작할 뿐이요. 그런즉,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사람들이 맞으면 울고, 기쁘면 웃으며, 가끔 말하고, 가끔 화를 내며 주먹을 흔드는 겉모습일 뿐이니, 과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과연 사람마다 그 속에 희로애락이 있고, 혼백과 정신이 있는지, 어찌 알 수 있겠소? 다른 사람이 움직이고 말하는 것 또한, 그저 바람에 깃발이 나부끼고,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듯이, 그저 겉으로만 얼굴표정을 찡그리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일 뿐, 실상 세상 사람들 또한 희로애락 없는 바위덩어리와 같은 것인지 어찌 알 수 있겠소?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은, 비교해보건데, 돌덩어리에서 보석을 빼니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하는 따위보다 지극히 정교하고 교묘할 뿐이오. 그러한 까닭으로 사람에게 마치 진실로 희로애락이 있는듯 믿기 쉬울 뿐이오. 어찌, 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신이라하는 것과, 사람의 세상 사는 모습을 보고 사람에게 혼백과 정신이 있다하는 것이 다르다 하겠소?"

하였다. 그랬더니,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껌뻑껌뻑하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도, 왜국섬에 가면, 한하도(韓荷嶋)라는 섬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그 섬에서 삼한(韓) 사람, 곧 신라 사람의 배가 부서진 조각을 찾아서, 그 실려 있던 물건(荷)이 떠밀려 온 것을, 그 섬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 원본 출전 "파마국풍토기(風土記)"


*10. 한하도(韓荷嶋)
이 이야기는 일본의 고대 "풍토기" 중에서 파마국풍토기(播磨國風土記)에 기록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원래 보물을 찾아가는 과정은 없고, 바위 신에 관한 이야기와 신라 물건이 한하도에 떠밀려 온 사연과 그로인해 생긴 풍습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물건에 적힌 글귀를 보고 알아내는 과정으로 이야기를 꾸민 것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궁예"에 대한 내용을 거울에 새겨져 있는 글귀를 보고 알아낸다는 것을 참조해서 구성했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정신에 관한 이야기는 신라 승려 원측이 쓴 "반야심경찬"을 비롯한 몇몇 문헌에서 내용을 가져왔고, 중간에 신라에 대한 칭송 묘사 역시, "풍토기"에 있는 다른 글귀에서 찾아 넣었습니다. 보물을 찾았다는 "한하도"는 지금도 일본 효고현에 있는 것으로 보는데, 현재 "당하도(唐荷島)"라는 섬을 "파마국풍토기"의 "한하도"로 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신라기이 외국편" http://gerecter.egloos.com/3660215 에 포함된 10회 이야기 입니다.
by 게렉터 | 2008/03/27 23:10 | 기타 | 트랙백 | 핑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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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무명씨 at 2008/03/28 00:56
효고의 옛 지명이 하리마(播磨)이지요.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8/03/29 12:32
교훈적인 이야기로군요. '남의 동네에 가면 함부로 깝치지 마라' (...)
Commented by 게렉터 at 2008/03/31 09:55
무명씨/ 옳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하도"-"당하도"를 찾아내는데, 효고 현 관광자료를 뒤지면서 알아냈습니다.

잠본이/ 이 사건과 시대가 대략 일치하는 눌지마립간 시기를 보면, 왜적이 신라로 쳐들어 왔다가, 대패하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몇 번 나타납니다. 아마 이런 내용과 관련된 적개심, 내지는 신라군이 왜군에 대해 저지른 어떤 횡포 같은 것이 반영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시무언 at 2008/04/08 13:47
역시 남의 동네에서 깝치는건 꼴불견이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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