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판)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 열차를 타라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 영화

박노식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는 머릿속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듯한 어감의 제목과 박노식의 말기 대표작이라는 점 때문에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는 영화 입니다. 한국 영화는 20년만 지나도 중간중간에 화면이 날아간 대목이나 녹음이 날아간 부분이 흔한 판국에, 이 영화는 필름 보관도 비교적 잘 되어 있어서, 여러모로 접할 기회가 많은 편인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은 옛날 액션 영화의 조잡함이나, 못만든 영화의 황당함 등등으로 놀림거리가 되는 일이 비교적 잦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는 그저 쓰레기스럽기만한 트래쉬 무비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영화입니다. 트래쉬 무비는 커녕, 신성일과 윤정희 같은 최고 배우를 기용하고 돈을 퍼넣은 "동경특파원" http://gerecter.egloos.com/3498678 같은 영화보다도 오히려 더 나은 영화 입니다.


(포스터)

일단 이 영화는 계속해서 눈을 사로잡는 장면들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결말 즈음 되면, 한국 영화 특유의 "막판에는 모두가 신파극이예요"에 허우적 거려서, 갑자기 눈물 흘리는 장면과 장황한 한 맺힌 사설 풀어놓기로 시간낭비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영화는 그런 신파극의 대향연 속에서도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재미거리를 던져 줍니다. 이 영화는 사연이 밝혀지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줄거리로 재미를 이끌어내는가하면, 그런 부분이 부족할 때면 상당히 상상하기 어려운 신기한 화면을 보여주어서 재미를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두 부분이 어울어지면서, 이 영화는 지루함을 떨쳐버리고, 영화를 끝까지 진행하는데 충분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의 커다란 단점은 그 "신기한 화면"이라는 것이, 도통 사리에 맞지 않는 황당한 내용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비웃지 아니할 수 없는, 악명 높은 "호두"로 사람 쓰러뜨리는 장면을 필두로 해서(과연 어떻게 해서 호두로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겠습니까?), 싸인펜으로 그린 듯 보이는 조악한 뱀 문신에, 여자 주인공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허황된 무용담을 늘어 놓는 것 하며, 이 영화에서는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꺼내 놓는 것마다, 거의 대부분이 결코 생생한 현실감을 느끼기 어려운 터무니 없는 것들입니다.

게다가 주인공들의 옷차림은 멋을 부린답시고 "코디가 안티"로 일관하고 있는데다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집의 벽에는 도대체 왜 그런게 있는지 알 수 없는 소주 광고 포스터나 헬스 클럽 전단지 같은 것들이 장식용 그림처럼 붙어 있는 모습도 상당히 해괴합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영화 속 "신기한 장면"들은 신기하기는 해도, 힘있거나 멋있다기보다는, 우스꽝스럽고 초라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나마 신기한 장면들은 이상한 소재로 지루함을 가시게한다는 역할은 해내고 있기에 아주 이상하기만 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영화의 대사들입니다.

60, 70년대 한국영화는 장황한 문어체로 대사를 꾸민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영화 역시 그 정도가 상당히 지나친 장황한 문어체 대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문어체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너는 누구냐?"
"나는 너의 전우에게 지옥행 급행열차권을 선사한 사나이다!"

등과 비슷한 대사는 현실감은 조금도 없지만, 화려한 수식어와 과격한 표현이 나름대로 맛을 느낄만하게 되어 있어서 나름대로 영화에 어울리는 운치가 있습니다.

문제는, 뭔가 극적인 대사, 멋있는 단어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마구 주절거리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일단 이 영화는 격정적인 감정을 묘사할 방법이나 대사를 별로 생각하지 못해서, 그냥 애절한 목소리로 서로를 부르는 장면으로 때우고 넘어가는 대목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은 한국식 이름이 "예지"이고,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이름은 동혁인데,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을 "선생님" 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쁜 감정을 표현할 때는 기쁜 목소리로 "예지- 예지- 예지이이-" 라고 불러대고, 슬픈 감정을 표현할 때는 슬픈 목소리로 "선생님- 선생님- 선생니이히임-"이라고 불러대는 것으로 대사를 한참 채우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현실감 없는 말투이기에, 한국 옛날 영화를 놀려대는 코메디 영화에서 자주 놀림거리로 삼던 그 모습 그대로 입니다.

그런 부분 이외에 좀 내용이 있는 대사 중에서는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문법도 틀리고, 내용도 이상한 대강 분위기만으로 내용을 짐작해야하는 알 수 없는 대사들이 또한 상당합니다. 게다가 뻔히 눈에 보이는 영화 내용과 정반대로 튀어나와 버리는 엉뚱한 소리도 대사 속에서 꽤나 빈번히 나옵니다. 과장해서 안 좋게 말한다면, 초등학생이 방학숙제로 급하게 동시를 쓰려고 하는데, 나름대로 멋을 부려본답시고 아무곳에나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어려운 단어를 가져와서 어울리지도 않는데 막박아 넣은 듯한 느낌이 납니다.

"육체가 무슨 소용이 있어? 마음이야! 정신이야! 그게 바로 애정이야!"
"제 육체는 더럽지만, 제 눈만은 맑답니다." (눈은 육체가 아니란 말인가?)
"그토록 힘들게 살던 때도 눈물 없이 살아왔건만 오늘은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 것인가?" (이 장면에 앞서서 눈물 흘리는 장면은 줄기차게 많이 나왔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단지 아편 때문에 나를 찾아온 것을 아닐테지." (그런데 이 인간들이 거래하는 물건은 애초에 아편이 아니라 다른 마약이었습니다.)
"총을 쏘지마!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그래놓고 자동차로 받아서 죽여버림)

이 영화는 그렇게 부실한 부분이 많은 영화 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이 영화는, 신기한 장면에서 현실감이 부족한 것과, 대사에 흠이 많은 부분. 이 두가지만 덜어내면, - 소재와 대사를 빼면 남는 것이 많지는 않겠습니다만 - 전체적으로 상당히 흥미진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사연이 많을 듯한 묘한 인물을 갑자기 등장시키고,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의 풀이나 해설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이도록 하는 수법을 썼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좀 더 입체감 있게 하고, 등장인물들의 활동과 펼쳐질 이야기의 규모를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구조가 잘 잡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영화는 누군가를 살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어느 맹인, 남자 주인공 박노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관객이 궁금해지는 부분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대체 왜 박노식이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가, 하는 살인 동기이고, 둘째는 박노식은 어쩌다가 맹인이 되었는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이 영화는 지루하게 질질 끌지 않고, 이 내용에 대한 답을 초반부에 제시해 줍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박노식이 나와서 "나는 이러이러해서 맹인이 되었고, 저러저러해서 누구를 죽이려한다"고 답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박노식과 인연이 있는 새로운 여자 주인공이 등장해서,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사연을 밝혀 줍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짜는 것이 전지적 작가 시점의 해설은 직접 나오지 않으면서도, 등장 인물들간의 시점 변환이 자유로운 영화 매체에 잘 어울리는 이야기 구성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 줄거리를 풀어나가고 있는 부분이 꽤 많습니다. 주인공들이 노리고 있는 마지막 살인의 목표인 장동휘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낼 때는 주인공들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슬며시 시점을 바꿔서, 목표물인 장동휘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여자 주인공이 중요한 정보를 캐내는 장면에서는 여자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 주인공이 정보를 캐낼 대상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이렇게 해서 영화속 등장인물들은 상황을 모르는데,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만 내막을 알게하는 상황을 만들어서, 더 재미를 돋굽니다. 뿐만아니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꾸며서, 전체 영화 분량에서 비중이 작은 악당들, 가벼운 조연들도 나름대로 개성이나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를 충분히 주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촬영기술과 음악을 과감하게 이용해서 인상적인 장면을 꾸며낸 부분도 상당합니다.

이 영화는 남자주인공이 먹고 살려고 색소폰 주자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점을 적극 활용해서, 영화에서 색소폰으로 구성지게 연주하는 재즈와 블루스 음악을 많이 퍼넣어 놓았습니다. 신파극 장면에서는 상투적인 전자 오르간 소리로 가득찬 단조 곡조의 70년대 영화 음악을 풀어 놓았는데, 여기에 비해 보면, 상대적으로 색소폰 곡을 활용한 부분은 음악이 굉장히 듣기 좋습니다.

자유분방하게 풀어지는 곡조가 살인하고 돌아다니는 주인공들의 "내일이 없는 어두운 분위기"에 잘 들어 맞는 부분도 있고, 도시의 비정한 느낌과 도덕이 없는 세상의 냉랭함에 대해서 다루는 쓸쓸한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는 면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좀 괴상한 신기한 화면이 툭툭 튀어나오고, 비현실적인 문어체 대사가 철철넘치는 이 영화를, 살짝 사이키델릭한 느낌까지 들어간 자유 분방한 음악이 나름대로 시적인 맛으로 꾸며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화면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화면을 통째로 등장인물의 한쪽 눈이나 입술 모양만으로 다 채워넣는 과감한 장면도 잘 써먹고 있고, 격렬한 감정 표출 장면에서 일부러 음악과 음향을 하나도 들리지 않게 하고 느린 동작으로 보여줘서 극적인 느낌을 한껏 키우는 부분도 잘 써먹고 있습니다. 이런 화면 연출은 당시 "수사반장" 같은 TV물에서도 좀 남용하던 것이기도 한데, 이 영화에서는 과하지 않게 꼭 필요한 구석에 잘 써먹었습니다. 거기에 주먹질을 하는 손끝이라든가, 행동을 이끌어내는 부분을 가까이서 먼저 보여주다가, 부드럽게 화면이 이동해서 전체 상황을 화면에 담아내는 묘사 방식도 아주 자연스럽게 잘 되어 있습니다. 동작의 역동적인 느낌이 잘 살아나고 내용을 알아보기가 더 좋아집니다.

이렇게 시각적인 효과가 충분한 연출들을 이 영화는 열심히 활용해서, 일부러 대사가 있는 장면인데도 대사를 없애고, 화면만으로 내용을 표현한 부분도 상당히 많습니다.

사람이 없는 텅빈 길거리나,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법한 황량한 들판 같은 곳을 무대로해서 이야기를 한참 진행하는데, 이것도, 이 영화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런식의 배경 묘사는 영화 자체가 어떤 현실적인 공간이 아니라, 붕 떠 있는 꿈이나, 희미하게 기억나는 막연한 전설 같은 느낌을 좀 줍니다. 이런 부분은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를 흉내내다가 실패해버린 60, 70년대 한국 영화들과 확연히 달라지는 구석입니다. 어떻게 보면, "천애명월도"나, "편복전기" 같은 무협 영화의 신비로운 느낌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을 것입니다.

그외에도, 자연스럽게 18년전의 과거 회상 장면이 원래의 이야기에 가볍게 끼어들었다 빠지는 시간을 뒤집어 헤치고 다니는 것하며, 그 18년 전의 사건이 서로 다른 인물들의 시점에서 두 번, 세 번 다시 반복되어 펼쳐지면서 하나 둘 더 많은 사연이 공개되는 수법하며, 재미난 연출은 더 많습니다. 살벌하고 어두운 상황에서 조롱하듯이 발랄한 음악이 나오는 것도 모범적으로 써먹고 있다고 할 만하고, 자동차 폭파 장면이나 싸움 장면 같은 기술적인 부분이 괜찮은 구석도 군데군데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나, 결정적인 살인 직전, 직후에서 박노식의 안경 벗은 모습이 큼지막하게 보이는 장면은 나름대로 충격효과도 좋지 싶습니다. 맨날 복수, 살인 이런 것만 생각하면서 살다보니까 스스로도 괴물 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점을 보여주기는데, 좀 좋게 보자면 그럴싸한 주제로도 연결되는 꽤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았는데, 이 영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이 영화와 다른 영화의 모방 관계에 대한 것 입니다.

일단,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일본 영화 "자토이치" 시리즈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온 부분이 많고, 똑같이 박노식 감독, 박노식 주연으로 먼저 나온 적 있던 "인간 사표를 써라"를 스스로 반복하고 있는 부분도 상당히 많습니다. 이 영화에서 앞 못보는 맹인인 남자 주인공 박노식의 싸움 방식과 무기는 자토이치 시리즈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한편, 주인공들이 갈등에 말려드는 동기라든가, 장중한 결말을 만들기 위해 마지막 갈등을 집어 넣는 수법 등은 "인간 사표를 써라"와 매우 비슷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듣기 좋은 음악들이 사실 다른 곳에서 쓴 음악을 가져온 것임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의 다른 장면들이나 재미난 부분들도 어딘가 다른 영화를 참조해 온 부분이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면, 이 영화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악당들이 등장하는 부분은 70년대 일본 영화나 홍콩 영화에서 오토바이족들이 설치는 장면과 비슷하고, 남녀 주인공의 모험이 마약 조직과 한 번 얽히는 내용은 일본 영화 "2인자는 지옥행이다 二発目は地獄行きだぜ"와 흡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옥행 급행열차"라는 제목 자체도 영어권에서도 "express train to hell"이라는 말이 종종 사용되는 등 예전 영화에서 가끔 이야기되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어떤 원조 영화로 좀 더 중요하게 꼽을 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이 영화는 주요 배경이 일본이고, 등장 인물도 남자 주인공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일본 이름으로만 불리웁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친 70년대 일본 영화가 몇 편 있지 않을까 저는 막연히 짐작 해 보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영화에 대한 결말을 포함해서, 구체적으로 영화 내용에 대해 황당한 내용부터, 진지한 내용까지 좀 밝혀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영화 시작하면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시계와 신나게 색소폰을 불고 있는 맹인 연주자를 번갈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맹인 연주자는 리듬을 타면서 시계가 알람을 울릴 시각을 상상하고 있는 듯 합니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가 싶으면, 연주가 한 곡조 마무리 될 때 쯤 해서, 시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시계는 시한 폭탄이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 설명도 해설도 없었지만, 이렇게 장면을 교대로 보여주고 "이제 세 놈 남았다" 하는 대사를 곁들이는 것만으로, 바로 그 시한 폭탄을 설치한 인간이 다름 아닌 색소폰 연주자였다는 점이 전달 됩니다. 색소폰 주자는 사람 죽이려고 폭탄 설치해 놓고 여유롭게 연주를 하고 있는 상당히 막가는 인간이라는 점도 전달되고, 무엇보다 앞으로 세 명이나 더 살인을 할 것이라는 점도 관객에게 예고가 됩니다. 무엇때문에 이런 살인을 하려는 것인지, 그 동기에 대해서 관객들은 호기심이 생기게 됩니다.

색소폰 주자 박노식은 눈이 안보이기 때문에 문패를 손으로 더듬으면서 자기가 죽일 사람의 집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 죽이려는 맹인이 문패를 더듬으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장면은 꽤 환상적인 맛이 있어서 묘한 분위기를 돋굽니다. 드디어 박노식은 두번째 죽일 놈을 찾아내고, 살인을 하러 그 집에 쳐들어 갑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다른 손님이 와 있습니다. 그 손님은 다름아닌 여자 주인공인 안보영입니다.

이제 이 영화는 박노식 이야기는 잠시 젖혀두고 안보영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안보영은 술집에서 출장나온 "하야코"라는 이름을 쓰는 여자로, 안보영이 미모가 출중하기에 집주인인 문제의 "죽일 놈"은 안보영 보고 낄낄거리면서 웃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보영은 태도가 돌변해서 집주인을 죽이려고 합니다. 왜 이러느냐고 집주인이 묻자, 안보영은 18년전, 북만주에서 있었던 과거의 한맺힌 기억을 읊어줍니다. 이야기는 18년전의 회고담으로 돌아갑니다.

18년전 있었던 일을 간단히 요약하면, 2차대전 종전시 일본군 패잔병들이 돌아가는 길에 만주의 한인촌을 약탈했는데, 이 패잔병들이 안보영 부모를 죽이고, 어린 안보영은 창고에 감금했다는 것입니다. 안보영은 그 복수로 당시 문제의 패잔병이었던 집주인을 죽이러 18년만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야, 우리는 이 집주인이 얼마나 나쁜놈인지, 어떤 과거를 갖고 있는 놈인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 주인공 박노식도 2차대전 종전시에 당한 어떤 나쁜일 때문에 복수하려고 살인을 하는 것이겠거니 싶습니다.

"죽이기 전에 왜 죽이려는 지 사연을 길게 들려주기"라는 영화 등장 인물로서의 중요한 업무를 마친, 안보영은 악당을 죽이기 위해 손을 꺼내 듭니다. 그런데, 태권도도 아니고 가라데도 아니고 하다 못해 장풍 쓰는 동작도 아닌 상당히 기괴한 손동작을 취합니다.


(도대체 무슨 권법? )

문제의 손동작인즉, "뱀"을 조종하는 손동작입니다. 안보영은 집주인에게 줄 물건 상자에 뱀을 담아왔고, 이 기괴한 손동작으로 뱀을 조종해서 집주인을 죽이는 것입니다. 기상천외한 살인 방식에 놀라는 것도 잠시, 살인을 하고 빠져나가는 안보영은 마침 살인을 하려고 들어오던 박노식과 만나게 됩니다. 내가 죽이려는데 네가 왜 죽였냐 운운하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두 사람은 집을 경비하는 사람들에게 포위 됩니다. 박노식은 "자토이치"와 비슷한 무기를 꺼내들고, "자토이치" 흉내를 한판 벌여서 악당들을 모조리 자빠뜨려 버립니다.

같은 사람 죽이러 왔다가 마주친 살인범 두 사람은, 통성명 하다가 서로를 알게 됩니다. 바로 두 사람은 18년전 일본군에게 약탈 당했던 마을에서 같이 지냈던 소꿉친구였던 것입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18년전 일어났던 일이 여러차례에 걸쳐서 다시 반복해서 보여주는데, 여자주인공은 창고에 갇혀서 고통 받고 있었고, 남자 주인공은 인질이 되어 고통 받다가 총 맞고 자빠질 때 나무뿌리에 눈 잘못 찍혀서 맹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자주인공은 창고에 갇혀 있을 때, 너무 심심해서, "뱀과 친구가 되기 위해" 뱀 조련하는 방법을 익혔다는 기막힌 이야기를 지금 우리 영화 관객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담담한 어조로 들려줍니다. 영화 속에서는 "아버지를 잃은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뱀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뱀을 조련하려고 했다"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이게 무슨 말인지 더 모르겠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여자 주인공은 창고에 갇혀 있을 때 먹을게 없었기 때문에 쇳조각을 갈아서 바늘을 만들고, 바늘을 입으로 뱉어서 독침처럼 쏘는 기술을 연마해서는 쥐를 잡아 먹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처절한 이야기에 두 사람은 크게 괴로워하고, 여자 주인공은 연신 "선생니임- 선생니임- 선생니히이임-"을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오랫만에 만난 소꿉친구인 두 사람은 둘 다 원수를 갚기 위한 일념하나로 인생 개판 치면서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고, 두 사람은 힘을 합해 복수를 완료하기로 결의 합니다.

이제 네 명의 원수 중에 두 명이 남았는데, 두 명은 마약밀매로 갑부가 된 인간들이라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에게 "기술을 두 가지만 더 연마하라"고 제안합니다. 두 개의 기술인즉,

여자 주인공이 화살을 쏘면 맨손으로 잡아내기.



눈감고 자동차 운전하기.

입니다.

화살잡기는 뭐 딴거 없이, 그냥 실패하면, "권투 선수는 뭐 맨날 때리기만 하나요" 라는 대사를 나누면서 용기를 내고, "좋아요?" "좋아!" "좋아요?" "좋아!" 라는 말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계속 연습해서 해 냅니다.

눈감고 자동차 운전하기는, 자동차 운전대에 눈금을 새겨서 손가락 끝의 감각으로 운전대가 돌아간 정도를 알 수 있게 해 놓은 것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남자주인공이 운전대를 손에 쥐고 있으면, 여자주인공이 "좌로 10, 우로 20"등등으로 이야기 해주면,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움직여서 자동차를 운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 "권투 선수는 뭐 맨날 때리기만 하나요" 정신으로 반복연습해서 화살 잡는 법을 익혔다는 이야기보다는 훨씬 배경설명이 차분합니다만, 문제는 이 영화에서 자동차 운전 기술은 딱히 앞으로 별 쓸모가 없습니다.

자동차 운전 기술은 별 쓸모가 없지만, 화살 잡기 기술은 이렇게 사용합니다. 무기 없이 몸 수색을 한 뒤에만 만나는 악당을 찾아가기 위해 악당에게 빈손으로 남자주인공이 접근합니다. 바로 그때, 여자 주인공이 멀리서 화살을 쏘면 그 화살을 남자주인공이 붙잡아서 화살촉을 무기로 사용해서 악당을 처치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 보다야, 화살 쏘는 것을 열심히 연마해서 멀리서 화살로 악당을 저격하는 것이 단순하고도 가능성도 높을 법한데, 왜 이런 어렵고 기괴한 방법을 쓰는지는 좀 불분명 합니다. "화살 쏜다 - 악당이 맞아서 사망"으로 간단하게 할 수 있는데, "화살 쏜다 - 악당 옆에 있는 주인공이 화살을 잡는다 - 화살촉으로 악당을 찔러서 살해"라는 복잡한 방법을 쓰는 것인지?

하여간, 이렇게 해서, 주인공은 세번째 원수까지 처치하는데 성공합니다. 세번째 원수는 죽기 직전에 자기 부하들을 부르는데, 이 부하들은 앞서 설명했던대로, "호두"를 이용해서 쓰러뜨립니다. 내용인즉, 호두를 "아주 아주 세게 던져서 이마에 맞추어 뇌진탕을 일으켜 쓰러지게 한다" 입니다. 발상 자체도 무협 영화의 과장된 장면에 어울릴 법한 것이라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덜덜 떨게하는 면이 있기도 하거니와, 호두를 던지고 맞는 연기와 효과가 상당히 누추해서 인구에 회자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네번째 원수는 출연료도 비싼 장동휘인데, 어디있는지 위치를 알기 어려워서 주인공들은 고생합니다. 그런데, 주인공들은 좀 우울해져서 지내고 있는데, 마침 주인공들이 일하고 있는 클럽에 갑자기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탄채로 들어옵니다.

모두가 당황하는데,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겉멋만 넘치는 폭주족 인간들이 마침, 장동휘 아들이랍니다. 이 영화에서는 "일본 제일의 부호의 아드님아니십니까" 운운하는데, 미츠비시 회장님은 어디계시고, 소니 회장님은 어디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마약밀매하는 장동휘가 일본 제일의 부호라고 하고, 그 기세를 믿고 아들놈이 오토바이를 탄 채로 클럽에 들이닥치니까, 클럽 주인 아주머니는 클럽이 반 아작이 나는 분위기인데도, 호호호 하고 웃으면서 굽신굽신 대접합니다. 이 모습은 "킬 빌"에서 클럽에 오렌 이시이 일당들이 들어왔을때, 주인이 굽신거리면서 방으로 안내하는 모습과 궤가 같은 장면입니다.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여자주인공은 장동휘 아들에게 접근해서 장동휘의 거처를 알아냅니다. 아들은 모델들을 발탁하는 사업도 하고 있는 장동휘에게 모델 심사에 여자주인공을 추천합니다. 여자주인공은 모델 심사를 받으러 장동휘 앞에 나타난뒤, 장동휘를 습격하려고 합니다. 장동휘를 죽이는 일은 너무 위험해서 박노식에게 사실을 숨기겠다고 하고, 박노식을 사랑하게 되어서 떠나기 싫고 어쩌고 하는 전통 진부 신파극을 하며 잠시 시간을 끕니다만, 줄거리에는 아무런 영향을 못미칩니다.

장면은 바뀌어 마네킹이 가득한 어두운 방에서 장동휘가 이런저런 고민을 늘어놓으며 독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장동휘는 살짝 변태스러운 악당 두목 스러운 모습을 짧지만 충실하게 잘 연기하고, 이 부분에서 "핫!이 니 조상이냐"라는 멋진 코메디 대사도 하나 늘어 놓습니다. 어두운 방과 불그스름한 조명, 마네킹이 가득한 모습 등등이 분위기를 기이하게 만드는 점도 꽤 괜찮았다고 느꼈습니다.

장동휘의 성격 묘사하는 시간이 끝나고 나면, 어두운 암실인 이 방에서, 커튼을 열어 젖힙니다. 그러면 이 어두운방 건너편의 밝은 방이 드러나는데, 그곳에서 바로 심사를 받는 모델들이 저마다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밝음과 어두움, 변태 남자와 비키니 차림의 여자들, 한 사람의 두목과 많은 모델들의 대조를 이루면서 장면이 이어지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구성은 좋습니다. 그러나, 결코 깔끔하게 보기 좋은 장면만은 아닙니다. 이 장면은 제임스 본드 영화의 아름다운 여배우들 모습처럼 만들려고 했던 대목일텐데, 배우들의 자태며, 옷차림이며, 좀 많이 부실합니다.

하여간, 장동휘는 이렇게 늘어선 모델들을 훑어 봅니다. 화면은 모델들 중에 한 명이 되어 서 있는 여자주인공을 바라보는 장동휘의 눈빛을 보여주고, 곧이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장동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 주인공의 눈빛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여자주인공이 살짝 보일듯 말듯 미소짓는 입술을 보여줍니다. 여자 주인공이 장동휘를 의식하고, 장동휘가 여자 주인공에게 빠져들고, 그렇게 걸려 들었다는 사실을 여자 주인공이 직감하고 계략이 맞아들어감에 기뻐하는 극적인 감정들이 모두 버무려져서 이어지는 세 화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다음에는 거울 깨고 주인공이 맨손으로 유리 부수며 난리치는 장면이 잠시 그려지고, 드디어 장동휘와 여자 주인공의 마지막 결전 장면이 벌어집니다. 두 사람의 마지막 결전은 연출과 대사의 후시녹음이 약간 실패해서 정확하게 원래 표현하고자한 내용을 알아먹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뭔가를 느끼기는 어렵습니다만, 이 마지막 결전도 사실 생각만 보면 꽤 멋진 장면으로 기획된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주인공이 악당에게 장황하게 자신의 한맺힌 사연을 늘어 놓습니다.

"18년전 누군가 당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당신을 창고에 감금해서 당신의 인생을 모조리 망쳐 놓았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주인공이 자기 팔자에 대한 한탄을 읊조리면서 악당에게 입장바꿔 생각해보라고 비난하는 장면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악당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악당 다운 비열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하긴, 이렇게 죽여버려야지!"

그러면서, 악당은 권총을 꺼내 주인공을 쏘려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공은 악당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일전에 복선으로 나왔던 입으로 바늘을 쏘는 공격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악당이 말한 그대로 - "죽여버린다" - 악당을 응징해 버리는 것입니다.

말끔하게 이런 긴장감과 극적인 전환이 표현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옳은 장면은 아니고, 여전히 입으로 바늘을 뱉아서 사람을 죽인다는 기술은 무척 황당하게 느껴집니다.하지만, 나름대로 역설과 긴장감은 그럴듯할 수 있었던 장면입니다. "더티 해리"에서 마지막에 명대사를 읊조리며 끝장을 보는 장면과 견줄만 하기도 하고, "(속)석양의 무법자 (좋은 놈, 나쁜 놈, 못난 놈,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의 장중하면서도 웃음이 서려 있는 수미쌍관법의 결말 장면과 견줄만 하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충 이야기가 끝나는가 싶습니다만, 이 영화는 아직도 좀 남아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모든 복수를 끝낸 남녀 주인공들은 자동차를 타고 도망칩니다. 남녀 주인공들은 복수가 끝나니 허무하니 어쩌니 하면서 눈물을 줄줄흘리며 이상한 수식어만 난무하는 멋있는 단어 골라쓰려고 하다가 문법 다틀리며 어색한 대사를 한참 늘어 놓습니다. 불필요하게 영화가 늘어진다 싶은데, 이때 갑자기, 죽은 장동휘의 아들놈들이 나타나서, 주인공들의 자동차를 벼랑끝에서 떨어뜨려버립니다.

자동차가 벼랑에서 굴러떨어져 터지는 장면은 여느 명작 영화 못지않게 깔끔하게 잘 촬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화끈하게 터져서 주인공들이 다 죽어버린 것 같습니다. 뭔가 감정이 잘 연결되지 않고 별 해괴한 기술들을 사용하며 날고 기던 주인공들이 너무 쉽게 죽어버리는 듯 해서 허망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복수를 이룬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는다는 나름대로 허무주의적인 결말로 끝맺는 듯 합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다음 장면을 보면, 여자 주인공은 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벼랑에서 떨어지는 자동차에 있었으면서도 바로 일어나서 소리치며 걸어다닐 정도로 멀쩡할 수가 있는지 아무런 사연을 안가르쳐 주기때문에 좀 갑작스럽습니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은 애절하게 남자 주인공을 "선생님- 선생니임-" 하면서 부릅니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이 이제부터 밝고 명랑하게 살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여자 주인공을 구해주고 자신은 희생하여 죽어버린 그런 류의 결말인 듯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결말도 아닙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남자 주인공도 안죽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안가르쳐 줍니다. 대신에, 나자빠져서 구르느라 그동안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벗겨진 남자 주인공의 얼굴을 화면 한가득 보여줍니다. 눈이 다친 그 모습은 박노식의 흥분한 표정과 겹치면 상당히 흉칙해 보입니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은 "복수니 어쩌니 하면서 나는 눈을 잃고 18년 동안 암흑속에서 살았다"고 읊조립니다. 주인공은 복수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도 인생을 망쳐서 괴물 같이 되어 버렸다는 점을 그 흉칙한 얼굴을 가까이서 비춰주면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후에는 다시 한 번 예상하기 어렵게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이제껏 단 한 마디의 복선도 없었는데, 갑자기, 여자 주인공이,

"안구를 기증하겠다는 사람이 있대요. 그래서 선생님은 수술을 해서 눈을 뜨실 수 있을지도 몰라요."

라고 합니다. 관객들로서는 그런 일이 있으면 기왕이면 악당들하고 싸울때 도움이 되게 진작에 수술을 시도하지, 눈감고 힘들게 다 싸운뒤에 이제야 눈을 뜬단 말인가 싶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억지 해피엔딩을 만들려는 술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리고 이야기는 급격하게 흘러가서, 남자 주인공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눈을 이식하는 수술 받는 장면이 나오고, 남자 주인공은, 눈을 뜨게 되어, 기쁜 목소리로 "예지- 예지- 예지이이이이-" 라고 여자 주인공 이름을 부르면서 뛰어 옵니다.

이 장면은 느린 동작으로 되어 있고, 이름을 계속 부르는 성우의 연기가 좀 추레하고, 촬영을 잘못해서 달리다가 중간에 갑자기 옷차림이 바뀌어 버리기 때문에 약간 한심한 느낌이 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장면에서 충격적인 결말 장면이 나옵니다. 남자 주인공이 기뻐하며 여자 주인공에게 달려오면, 여자 주인공이 선글라스를 쓰고 말없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배경 음악 하나, 대사 한 마디 없지만, 단 하나의 화면 보여주기로 뒤통수를 확 때리는 반전을 전달합니다. 바로 남자 주인공 박노식에게 이식할 눈을 준 사람은 멀쩡한 생사람이었던 다름 아닌 여자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선글라스를 쓴 사람으로는 맹인인 박노식 밖에 안나왔습니다. 그런 시각적인 복선이 충분했기에, 단 한마디 대사도 없이, 동작도 없이, 그저 여자 주인공이 선글라스를 쓰고 앉아 있을 뿐인데도, 관객들은 직감적으로 "여자 주인공이 눈이 멀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눈을 뜬 박노식의 표정과 대조되게 번갈아 보여주는 여자 주인공의 얼굴에, 뜬금없이 안구 이식 수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던 여자 주인공의 이상한 행동을 돌이키게 되면서, 관객들은 장면 하나로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자기 눈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꽤 멋진 연출수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의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공상하는 장면을 잠시 보여주어서 두 사람의 기구한 불행의 인생을 허무한 느낌으로 조망합니다. 남자 주인공과의 행복한 크리스마스 상상 장면이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이에 두고 '나 잡아 봐라'를 딱 70년대 영화식으로 하는 것이라서, 진부한 느낌이 너무 극심해서 잠시 어이없는 실소가 나기는 합니다만, 대강 이것이 이 영화의 장중한 결말인 것입니다.

결말 장면에서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에 대한 이상한 이론을 시적인 대사랍시고 한참 읊조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은 굉장히 듣기에 어색하고, "우리 어머니의 나라로 돌아가서 공정한 법의 심판을 받자" 운운하면서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뭔 500년 묵은 예비군 비디오 교육 자료 같은 대사를 장황하게 늘어 놓는 부분도 상당히 영화 전체와 안 어울립니다. 이런 잡스러운 대사만 확 쳐냈으면 영화의 결말 장면이 훨씬 그럴듯해 보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이런 교훈적이고 건전무쌍한 대사가 장황하게 없었으면, 당시 사정상 개봉하기가 좀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리하자면, 1976년판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는 황당한 소재, 어색한 대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모방하고 복제해온 부분들 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돈에 눌려 죽은 사나이" http://gerecter.egloos.com/3497134 처럼 어처구니 없이 못만든 장면을 조롱하는 맛을 느끼는 것이 중심이 되는 영화는 아니고, 또한 "공포의 이중인간" http://gerecter.egloos.com/2928165 처럼 황당하고 이상한 장면들을 신기하게 구경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닌 영화입니다.

어디서 베껴온 수법이 많이 섞여 있기는 해도, 도전적인 연출 방법들을 상당히 많이 구경할 수 있는데다가, "네 명을 차례로 잡아 죽여서 복수를 한다"라는 단계적인 줄거리를 흡인력 있게 제시해낼 줄 아는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는 "쇠사슬을 끊어라" http://gerecter.egloos.com/3509141 보다 낫고, 과감한 연출시도는 "장군의 수염" http://gerecter.egloos.com/2153960 보다도 많습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허무주의 속에서 어떤 전설 같은 느낌을 슬쩍 내는 특유의 분위기도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잡다가 어처구니 없는 장면이 튀어나오면 헛웃음을 웃다가 망쳐지게 되는 커다란 문제점은 어쩔 수 없슨니다만.

박노식이 용팔이 시리즈를 한창 유행시켜서 나름대로 제작비도 좀 쓸 수 있게 되고, 자기가 원하는 장면을 마음껏 집어 넣을 수 있는 자유도 얻은 시기에 나온 영화가 이 영화,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아닌가 싶습니다. 이 영화는 전성기 "박노식 영화"들 중에서는 마지막 영화면서, 한편으로는 다른 "박노식 영화"들과는 성격이 약간은 다른 영화라고도 볼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 묘한 도전이라는 느낌을 즐기기에도 괜찮은 영화입니다. 물론 지금 이 영화를 보면, 끝도 없이 장황한 문어체 대사를 읊조리며 황당무계한 기술을 비장하기 그지 없는 표정으로 펼쳐대는 그 흥겨운 맛도 충분한 즐길거리가 되어 줍니다.


그 밖에...

이 영화가 참조하거나 장면을 모방한 영화로 또 다른 영화 떠오르는 것이 있으신 분은 무엇이든, 대강 어렴풋한 느낌이라도 덧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국내 영화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보면, 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 안보영은 이 영화가 유일한 출연작이라고 합니다. 이런류의 영화속 여자 주인공이라면, 장면에 따라서 여자 주인공이 관능적인 매력을 내뿜거나, 슬쩍 흘리는 미소로 남성 등장인물들을 압도해버리는 장면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보영은 한맺힌 감정과 화난 모습 연기는 무척 잘하는데, 너무 배우의 인상이 그 방향으로만 치우쳐 있어서 좀 아쉬운 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색소폰을 비롯한 목관악기를 일컬어 상상도 하기 쉽지 않은 단어인 "통나발" 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주인공 박노식은 만주일대에서 유명한 "통나발 할아버지"라는 떠돌이에게 "통나발 부는 법" 그러니까, 목관악기 부는 법을 배운 것으로 나옵니다.

영화 제목이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와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 두가지로 혼란스러운 영화입니다. "급행"이 들어가느냐 마느냐 인데, 개봉 당시부터도 영화 포스터와 배포용 자료, 영화 도중에 표시되는 자막이 서로 엇갈려서 혼란스럽게 되어 있습니다.

KMDB 고전영화 VOD 서비스를 이용해서 500원을 내고 인터넷으로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영화입니다. ( http://www.kmdb.or.kr/vod/vod_basic.asp?nation=&p_dataid=&mul_id=626&file_id=2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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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OiZe 2008/07/11 21:50 # 답글

    재밌네요 ㅋㅋㅋ
  • Kerberos 2008/07/11 22:07 # 삭제 답글

    화면의 구성이라든가 여러가지 색감같은 기술적인 면들은 70년대 니카츠 로망을 표방한 일본영화의 느낌이 많이 나네요. 특히나 포스팅 중간 부분, 드문드문 여성의 나체(비록 옷을 완전히 입은 모양이지만)가 나오는 장면들은 거의 빠질 수 없는 70년대 일본영화의 클리셰였죠. 게렉터님이 말씀하신대로인것 같습니다. 단지 그때 일본영화들은 여자를 주인공(Main)으로 내세운 영화가 좀 더 많았다는 것.
    제가 본 영화중에서 이 영화와 가장 닮은 부분이 많은 영화라 하면 아무래도 테루오 이시이 감독의 "직격! 지옥권 (1974)"이 제일 먼저 떠오르구요, 그 다음 여성의 복수를 전면으로 내세웠던, 스기모토 미키와 스즈키 노리후미가 함께 작업했던 영화들 - "스케반 (1973)" 등이 있겠네요.
    그리고 저런 차량 폭파신이라든가 (그때 당시로써는 꽤 스케일이 컸다고 볼 수 있는) 한 명의 인물을 사이에 두고 쫓고 쫓기는 암투극을 그린 영화는 이탈리아 출신 감독인 "페르난도 디 레오"의 첩보영화를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대표작으로는 - "도시의 사냥꾼 (1972)", "보스 (1973)" 등이 있습니다.
  • 뚱띠이 2008/07/11 23:26 # 답글

    70년대 쌈마이 영화는 나름대로의 묘미가 있지요.
  • 쭌님 2008/07/11 23:49 # 답글

    저위에 '작은 악역하면 저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그 사진에 나오신분
    왠지 MB분위기나요
  • JINN 2008/07/12 02:47 # 답글

    우와 진짜 재미있겠어요. 7~80년대 일본 핑크영화 삘이 팍팍 풍기는데요. '야쿠자 부인'시리즈도 떠오르고요. 마츠다 유사쿠 영화들도 겹쳐지고. 크 요즘 영화들은 이런 기백이 딸려서 안타까워요.
  • 이준님 2008/07/12 08:01 # 답글

    1. 여주인공이 눈을 대신 준다는 설정은 최민수의 데뷔작 "신의 아들"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지요. 거기서는 여자가 "조민수"였습니다

    2. 저 "작은 악역"아저씨는 꽤 괴악한 악역으로 잘 나왔지요. 유흥업소 건달이나 북조선 수용소 간부나 장교로 잘 나왔습니다.(기억나는 건 오지명 요원 -_-;;이 나온 괴작 7호실 손님에서 북조선 공작원-사실 저 아저씨 나올때부터 북조선 공작원 같았음이나 김희라, 유지인이 주연한 "북으로 간 여인들"에서 나체 고문을 실시하던 장교 -_-;;였지요) 놀랍게도 90년대 괴작인 차인표 주연의 "알바트로스"에서도 나옵니다. 당연히 정치범 수용소 장교로서 말 그대로 "거세"를 집게로 하는 불멸의 연기를 보여주지요
  • shuha 2008/07/12 16:55 # 삭제 답글

    전혀 다른 영화지만.. 자토이치의 그 무기는 사실 수라유키히메에서도.. 비슷하게 (그쪽은 지팡이, 이쪽은 우산) 전혀 배경이나 뭐 다른 영화입니다만..
    뭔가 복수 라는 점에서 수상쩍게도-_-a 수라유키히메가 생각이... (물론 본인의 생각쪽이 수상한 겁니다만)
  • 제목없음 2008/07/14 17:09 # 답글

    일본영화에 약함에도 불구하고 처음 타이틀 스크린샷을 올리신걸 뒤로 넘기고 봤더니 7080 일본영화인가? 싶었는데 한국영화였군요;
    상당한 작품인듯 한데 소개 포스팅 감사합니다


    p.s 링크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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