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影) 영화

1968년작 "영"은 한국영화의 소위 "만주물" 중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종류에 해당하는 영화 입니다. 무엇인고 하니, 홍콩 무술영화를 흉내낸 아류작을 만들고 싶어서, 중국식 옷과 무기를 그대로 등장시키고 싶은데, 선비의 나라 조선을 그냥 배경으로 하면 잘 맞지도 않으니, 배경을 만주의 한국인들로 삼는 것입니다. 이 영화 "영"도 요동에서 금광을 발견해서 마을을 만들고 정착한 한국계 산촌에서 악당들이 행패를 부리고, 어디선가 떠돌이 검객이 나타나, 줄기차게 칼싸움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영화는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당시 유행하던 이탈리아산 서부영화의 음악을 그대로 가져와서 막 집어 넣어버린 등등, 서부영화스러운 맛도 상당히 깔린 영화입니다.


(영: 윤정희가 포스터에는 아주 경망스럽게 나옵니다만, 영화 속에서는 저렇지는 않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영"의 기본발상과 전체 구조는 홍콩 무술영화를 흉내내서 만든 만주물 한국영화입니다만, 영화 속의 구체적인 장면장면들은 크게 보면 두 가지 또다른 줄기가 있습니다.

우선 그 첫째는, 일본의 칼싸움 영화들입니다. 일단 영화 제목이자, 영화속 주인공의 이름인 "영"(影, かげ) 부터가, 일본 영화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어감입니다. 보통 홍콩 무술영화였다면, 주인공의 별명은 "영검자(影劍者)" 라든가, "백검영(白劍影)" 같은 식으로 어느 정도 말이 되는 세 글자 정도 되는 한자 이름을 붙였을 것입니다. 애초에 좀 뿌리 깊은 한국식이였다면, 그냥 "그림자"라든가, "봉황성 그림자" 같은식으로 별명을 붙였지 싶습니다. 제목을 한자 한글자로 삼은 것하며, 영화속 자막속의 글씨체나, 주인공 "영"이 쓰고다니는 삿갓의 모양하며, 일본 영화들의 깊은 영향은 명백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영화속 칼싸움 방식도 일본 영화 칼싸움의 영향을 매우 깊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 영화의 칼싸움에서 절정장면에서 멋있게 보이는 것만 너무 재미없이 따라해서 칼싸움이 좀 엉성하고 추해진 면도 크다는 것입니다.

여러명의 악당들이 칼을 번쩍이고 다가오고 있고, 주인공은 매서운 눈길로 악당들을 쏘아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주인공 사무라이는 순간적으로 칼을 뽑아들면서 악당들 앞을 달려나가며 칼을 휘두릅니다. 일본 칼싸움 이야기에서 지긋지긋하게 많이 나오는 "발도술" 운운하는 내용들을 나름대로 영화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을 휘두른 주인공 사무라이의 등뒤에서 악당들이 우수수 쓰러지고, 한편으로 그런 악당들 나자빠지는 장면을 배경으로 주인공 사무라이가 인상쓰는 표정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사무라이는 그렇게 폼을 잡으면서, 연대장 앞에서 제식훈련하는 양 엄격한 분위기로 피묻은 칼을 칼집에 천천히 집어 넣는 것입니다.

이 영화 "영"에서는 이런 칼싸움 장면을 아주 많이 따라하는데, 영화 화면상으로 보면 전혀 그런 칼싸움이 어울릴 상황이 아닌데도 억지로 억지로 무조건 그렇게 싸워버리게 한 가짜 같은 부분이 꽤 많습니다. 그런 탓에, 주인공 "영"을 맡은 독고성이 이런류의 폼잡기를 무척 잘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싸움 장면은 엉성해 보이는 것도 꽤 많습니다.

이 영화의 장면장면이 만들어진 두번째 줄기는 서부영화 입니다. 일단, 이 영화는 아예 처음에 주인공이 말을 타고 마을로 걸어들어갈 때부터,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장고"의 주제곡을 그대로 틀어줍니다. 어떻게 저작료를 조금 줬는지 아니면 도용한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패러디 영화도 아닌데, 당시로서는 나온지 얼마되지도 않는 아주 유명한 다른 시대 다른 배경 영화의 주제곡이 갑자기 울려퍼지는 것은 꽤나 이상합니다. 게다가 이런 식의 다른 서부영화 음악은 꽤 자주 나와서, 주인공이 마지막 결전을 하기 위해 말을 타고 떠날 때도 울려퍼지고, 그 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국영화에서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영화사 창고에 쌓여 있는 음악과 번갈아 울려퍼지기도 해서 좀 안어울리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이 영화에는 서부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구성을 여러모로 가져와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일단 바로 눈에 뜨이는 것은, 마을의 어린이와 무뚝뚝하고 거친 이 떠돌이 사나이가 엷은 우정을 맺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잘 써먹은 것은 70년대의 "셰인"에서부터 90년대의 "데스페라도"까지 대표적인 영화들을 손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산봉우리에서 "옥퉁소"를 불고 있는데, 어린이가 잘 분다고 동경하면서 한 곡 더 불어달라고 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서부영화라면 아마 기타 연주 였지 싶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에서 이 어린이와 주인공의 관계도 썩 잘 맞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은 시작하고 한 10분간은 대사 한마디도 없이 인상만 쓰는 사람이고, 제대로된 이름도 안가르쳐주고 "영"이라는 별명만 불리우는 좀 무시무시한 떠돌이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어린이와 대답할 때는, 그냥 착하고 자상한 영화속 선인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할 뿐입니다. 이런 영화속 주인공과 어린이의 대화를 묘사할 때에는, "데스페라도"에서 어린이에게 기타를 연주하라는 손놀림을 계속 연습하라며, 읊조리는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모습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갑자기 이 살벌한 떠돌이가 문득 떠돌이 어린이를 안으며, 나도 사실은 같은 핏줄인 한민족이란다 운운한다든가, 나도 어머니가 보고 싶구나 어쩌고 운운하는등, 이름 없는 떠돌이 사나이의 살벌한 느낌은 갑자기 확 다 사라져 버려서 분위기를 다 흐려 버립니다.


(떠돌이 독고성)

그런즉, 이 영화는 보면서 살펴보면 사실 좀 트래쉬 무비스러운 맛이 군데군데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영화 구조 자체는 그렇게 엉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래저래 잡다한 이야기가 어울려 있고, 애초에 좀 이렇게 잡다하게 섞여 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굳이 "한국영화 만주물"로 시작한만큼, 소재를 조합해 놓은 모양이나 출발은 나름대로 호기심이 생길만합니다.

설명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요동의 한 산골에 금광이 발견되어 한국인 정착촌이 조그마하게 생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털어먹기 위해서 허장강을 두령으로 삼고 있는 산적 떼거리 같은 놈들이 들러 붙어 금을 뺏아가면서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산적 떼거리는 마을에 가까이에 있는 한 절에 자리잡고 있는데, 산적들이 절을 근거로 해서 근처의 마을을 괴롭히는 것은 조선시대 산적들이 실제로 많이 하던 짓거리이니 만큼 그럴듯해 보이면서도 나름대로 기묘한 맛이 있기도 합니다. 두령 허장강이 더러운 소리를 지껄이는 면상 뒤로 자비로운 표정의 불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뭐, 아쉽게도 이 영화는 그런 모습을 별로 중요하게 써먹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나마 싸움 장면 연출에서 절의 지붕으로 뛰어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는 것은 좀 배경을 활용하는 축에 속할 것입니다.

두령 허장강의 휘하에는 커다란 칼을 쓰는 칼잡이, 무거운 철퇴를 휘두르는 놈, 표창을 잘 쓰는 악당, 리볼버 권총을 잘쓰는 총잡이까지 개성 있는 다양한 악당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홍콩 무술영화의 줄거리 그대로, 주인공이 이런 여러가지 형태의 악당들과 다양한 싸움을 하면서 차례로 물리치는 이야기로 하면 충분히 멀쩡한 것이 나올듯한 예감이 듭니다. 특히, 현대적인 무기를 쓰는 권총잡이는 현대식 의상을 입은 여자가 맡았는데, 관능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무서운 총잡이라는 것이 꽤 이야기가 될법 하기도 하고, "진사 어르신"부터, 칼잡이, 총잡이가 뒤섞여 있는 모양이, 20세기 초 만주물에서 온갖 시대와 국적이 뒤섞이는 특징에도 잘 맞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악당 두령 허장강과 그 부하)

그렇습니다만, 이런 것도 이 영화에서는 별로 잘 표현되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의상과 분장입니다. 일단, 변발을 한 허장강의 가발 분장이 매우 초라해서, 허장강의 얼굴이 보일때마다 장난처럼 보인다는 것부터가 김을 새게 합니다. 게다가 시대 배경을 무시한 그냥 홍콩 무술 영화에 자주나오는 명나라, 청나라시대의 옷을 어지럽게 꾸며 놓은 악당들의 옷차림도 이상합니다. 서부 영화 주인공의 옷을 입고 있는 독고성의 옷도 영화에 어울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개중에서도 특히 괴상한 것은 권총잡이의 의상입니다. 이 사람의 옷은 몸매를 자랑하게 한답시고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원색으로 아래위가 통일된 색상하며 전혀 현실세계의 옷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속 총잡이가 입고 있는 옷은, 조선시대에 산적들의 괴롭힘을 받는 마을에 갑자기, 60년대 뮤지컬 쇼의 출연 배우가 뚝 떨어진 듯한 무척 해괴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영화의 줄거리의 세부조절과 싸움 장면의 배분이 치명타를 날려서, 영화를 신나게 이끌어갈 싹을 밟아 버립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해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주인공 떠돌이 독고성이 마을에 찾아온 날,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산적들에게 시달릴 수 없다고 진사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악당들이 들이닥쳐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고 진사를 때려눕혀 버립니다. 마을 사람들이 당황한 순간 갑자기 우리의 주인공 떠돌이가 나타납니다. 주인공 떠돌이가 나타나자, 같은 칼잡이로서 호기심을 느낀 칼잡이 악당이 일대일 대결을 하겠다고 합니다.

"등잔불에 달려드는 모기 같은 놈이구나!"

등잔불에 달려드는... 까지 대사를 했을 때, 당연히 상식적으로 "불나방 같은 놈이구나"로 대사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필이면 "모기 같은 놈이구나"로 대사가 이어지는 이 이상한 맛은 어찌보면 이런류의 영화를 보는 재미라면 재미일 것입니다.

칼잡이 악당은 독고성이 칼도 제대로 뽑지 않으며 싸우는데도 맥없이 당해버려서, 한쪽 눈을 다칩니다. 독고성은 승리하여 읊조리기를,

"네 놈의 상판에는 애꾸눈이 더 잘 어울리는구나"

라고 읊어주고, 악당들은 두고보자면서 도망갑니다.

독고성이 이렇게 악당들을 건드리자, 다음날 악당들은 마을 사람들을 붙잡아서 두들겨 패고 협박하면서 독고성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합니다. 악당들은 여자주인공 윤정희를 비롯해서 진사 일가족을 대롱대롱 매달아놓고 호통을 치다가, 어린이 한명만 매달아 놓고 그네처럼 흔들흔들하게 한 뒤에 멀리서 창을 던져 맞춘다면서 협박을 합니다. 갑자기 총잡이가 끼어들어서 잠시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만, 하여간 그러다가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찰나에 독고성이 나타나 악당들과 칼싸움을 시작합니다.

독고성은 절간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면서 마구 칼질을 해서 수십명의 악당들을 쓰러뜨립니다. 이때, 독고성이 휙휙 칼질 하는 모습만 화면에 보여주고, 뒤이어, 이번에는 좌우로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는 악당들의 모습만 보여주는 식으로 연출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칼을 휘두르는 장면과, 칼에 베여 쓰러지는 장면을 따로 촬영한 뒤에 번갈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화려한 화면 전환과 신나는 음악을 겹쳐놓으면 뭔가 아방가르드한 연출이 되겠다 싶기도 합니다만, 지금 연출된 모양새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카메라 잡이 남기남 감독이 돈아끼고 시간아끼려고 대충 찍을 때 써먹는 수법처럼 보입니다. 특히나, 이런식으로 찍은 장면들은 쓸데없이 악당들이 죽는 장면이 별로 사실적이지도 않은데 장황하게 보여주게 되어서 싸움의 박자감각을 깨고, 주인공의 칼싸움 솜씨를 더 가려 버리는 역효과도 상당합니다.

한참 싸움을 하다가, 주인공과 독고성이 "인디아나 존스 2: 운명의 사원"에 나오는 것 같은 절벽에 매달린 구름 다리를 건너 어디 악당들이 올 수 없는 것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이 싸움 장면은 끝이 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은 급작스럽게도 갑자기 태연하고도 평화롭게 윤정희가 빨래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알기 어려운데, 한참 지켜보면서 대사를 가만히 들어보면, 독고성이 칼질하면서 설친 뒤로, 악당들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주인공과 마을 사람들인데, 다음에 이어진 이야기는 악당들이 도망쳤다는 이야기로 연결되니 상당히 이상합니다. 장면 전환 사이에 시간이 좀 흘렀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무엇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실수로 빠뜨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 주인공 윤정희가 독고성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듯한 설명을 어린이가 떡먹는 장면과 연결시켜서 좀 싱겁게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 영화는 물가에 있는 독고성에게 갑자기 무슨 스타워즈의 오비완 커노비처럼, 독고성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음속에 양이 있고, 양속에 음이 있나니, 너는 내 조국과 민족이 있는 곳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내 기술을 사용하거라."

이 스승이 뭐하는 인간인지, 주인공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갑자기 독립운동 이야기는 왜 나오는지, 더군다나 그게 음양의 조화하고는 대체 뭔 상관인지, 설령 무슨 상관이 있다고해도, 그걸 왜 갑자기 죽은 아버지 사자가 별자리에 나타나 아들 사자 심바에게 가르침을 주는 형식으로 알려주는지 절대 알아먹을 수 없어서, 그저 낯설게만 보입니다. 그렇다고 영화 다음장면에 뭔 음양의 조화나 독립운동과 관련된 소재가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영화는 이제, "허장강의 역습" 단계로 넘어갑니다.

잠시 몸을 숨겼던 허장강은 독고성을 제압하기 위해서, 악랄하고 솜씨좋은 칼잡이를 하나 더 고용합니다. 이예춘이 연기하고 있는데, 극중이름은 "호암"입니다. 이 영화가 나온 것이 대략 "사카린 사건"이 화제가 된 지 1,2년 지난 즈음인데,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는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만, 하여간 요즘 나왔다면 아무래도 대기업에서 투자받기는 포기해야할 악당 이름입니다. 이예춘은 독고성을 죽이겠다고 호언장담 한뒤, 길가는 독고성에게 나타나 싸움을 겁니다.

이예춘과 독고성의 싸움 장면은 그야말로 가짜 같습니다. 이예춘이 무슨 대단한 칼솜씨를 보여준 것 같지도 않은데, 독고성은 그냥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뒤에서 몰려온 악당들이 그물을 던져버린 것에 걸립니다. 악당들의 온갖 기습, 갖가지 암살등등을 잘도 알아채고 악당들을 쓰러뜨리던 그 독고성이 왜 허무하게 별것도 아닌 그물던지기에 걸려드는지는 전혀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시무시한 칼잡이 이예춘이 고용되어 나타나서 독고성과 불꽃튀는 싸움을 보여줄만하다 싶어 기대하게 해놓고, 갑자기 영화를 끊어먹고 이상하게 넘어가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허장강 일당들은 독고성을 왜인지 죽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뜬금없는 소리를 하면서, 독고성의 목숨을 부지시켜 줍니다.

"금괴가 있는 곳을 대라!"

어리둥절한데, 부연설명을 들으면, 마을의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진사가 모아서 숨겨 놓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것 같으면 진사를 붙들고 협박을 하든지, 하다못해 진사의 딸인 윤정희를 붙잡아서 물어봐야 할 듯한데, 왜 길가던 떠돌이인 독고성에게 물어보는지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뒤이어지는 이야기를 봐도, 허장강 일당은 진사 가족들에게는 금괴의 행방을 묻지 않습니다.

이해를 포기하고 영화를 지켜보면, 다음 내용은 독고성을 고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극적인 장면과 처절한 감정을 만든답시고 고문장면 길게 넣다가 망한 수많은 한국영화들과 비슷한 길을 걷습니다. 독고성을 채찍질을 좀 한 뒤에, 통나무에 묶어놓고 바베큐처럼 돌리면서 불로 그슬리며 고문을 하는데, 지금껏 나온 모든 싸움장면들과 맞먹는 정도의 길이로 장황하고도 별 내용없이 계속 고문장면이 이어집니다. 뭐, 그렇다고해서 특별히 자극적인 장면인것도 아니고, 어떤 처절한 감상이 잘 전달되는 것도 아닙니다. 일단 고문하는 이유부터가 아무 복선도 없었던 "금괴의 행방" 아닙니까.

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더욱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악당의 부하인 총잡이가 갑자기 혼자 독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아아... 내가 왜 이럴까. 이것이 사랑일까."

대사가 매우 당황스러운데, 그리고, 참으로 너무하게도, 이 악당 부하 총잡이가 갑자기 비극적인 순정의 여인이 되어 목숨을 건 사랑 때문에 고문받다 쓰러진 독고성을 구출하여 함께 탈출합니다. 악당 부하 총잡이가 독고성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는 것은 이해할만도 합니다만, - 왜냐하면 독고성이 엄청나게 폼을 잘 잡기 때문에 - 그렇다고 해서, 야비한 범죄자 일당이었던 이 사람이 갑자기 사랑의 낭만에 모든 것을 건 다소곳한 소녀로 돌변하는 것은 아주 괴이합니다. 차라리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두 사람이 끈적한 눈빛을 한 번 주고 받은 뒤에, 농담 비슷하게 눈이 맞아 도망친다 어쩐다 하는 식이었으면, 그나마 그냥 유쾌한 맛이라도 있었지 싶습니다.

산속 계곡으로 두 사람은 도망칩니다. 이 총잡이의 극중 이름은 "미경"인데, 독고성에게 마지막으로 제 이름을 한 번만 불러주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고문에 시달린 독고성이, 힘겨운 목소리로,

"미경이..."

라고 하면, 총잡이는 독고성 품에 안겨 흑흑거린뒤에, 독고성을 뒤쫓는 악당들을 제압하기 위해 싸우다가 칼맞아 죽습니다. 그날 따라 기분나쁜일이 있었던 관객이 이 영화를 본다면, "뭐하는 쇼인가?" 하는 말이 절로 나올법도 합니다.

이렇게해서, 독고성은 몸을 피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갑자기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변해서, 윤정희가 짝사랑하는 남자 만나려고 수줍은 시골처녀 방실방실 웃으며 볼을 붉게 물들이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윤정희는 독고성 앞에서 고개를 돌리며 부끄러워하고, 또 배실배실 웃으며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독고성의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윤정희가 독고성의 가슴에 "오일"을 발라주기도 합니다. 뭔 일이 어떻게 돌아가나 싶은데, 그렇게 명랑한 분위기로 짝사랑하는 총각 만나러 온 분위기의 윤정희가 하는 대사인즉슨, 과격하게도 악당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영"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킬 기세라는 것입니다.

결국 독고성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고, 엄청나게 뛰어난 칼잡이라는 이예춘을 비롯하여 수많은 적들과 한꺼번에 싸워야하는 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전을 치르기 위해 마을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마지막 결전을 앞둔 날밤에, 어린이가 달을 보고 소원을 비네 어쩌네 하는 학습지에 실으려고 작가가 날림으로 쓴 동시 같은 이야기를 하고, 한편으로는 마을 사람이 어느 동굴에 들어와서 숨겨놓은 금괴를 보면서 "이 금괴를 놈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 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갑자기 숨겨놓은 금괴를 한참 보여주면서 대사도 길게 하기 때문에 무슨 복선 같기도 합니다만, 이 장면은 앞뒤 따져봐도 아무 쓸데 없는 괜히 나오는 장면입니다.

한편, 윤정희는 독고성의 동굴에 찾아와 다소곳하게 절을 하더니, "임 향한 일편단심" 어쩌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비문으로 점철된 대사를 길게 읊습니다. 그리고 독고성에게 안깁니다. 이렇게해서, 독고성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은 싸움을 앞둔 마지막 밤이 지나갑니다. 누추한 장면 이야기를 굳이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 폭풍전야를 묘사할 때, 마을 사람들이 피난을 가려다가 악당들에게 막혀 못가는 부분을 보여줄때, 엑스트라들의 연기와 지휘가 도무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피난가려는 엑스트라 마을 주민들의 얼굴이, 영화 촬영을 하는 것이 재미난지 그저 싱글벙글입니다.

드디어 밝아온 결전의 날. 이 결전의 날 앞부분은 서부영화를 만주물에 잘 결합시킨 꽤 괜찮은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황량한 바람만 부는 인기척 없는 마을이 있고, 이곳 저곳에 주인공이 올것을 기다리고 숨어 있는 악당들만 마을 군데군데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말을 타고, 마을 초입에서부터 길을 따라 들어오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적이 공격해 올 곳의 눈치를 살핍니다. 싸우기 직전의 적막한 마을의 분위기와 금방이라도 총성이 쏟아져 나올법한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긴장감을 이룹니다. 물론, "장고" 주제곡을 다시 한 번 더 틀고 있는 것도 뭐, 효과가 있다면 있습니다.

싸움이 시작되자, 독고성은 앞서 악당들이 머무는 절에서 수많은 적들과 칼부림했던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마을에 있던 적들을 혼자서 줄줄이 쓰러뜨립니다. 이 연출은 대체로, "금연자"(金燕子, 심야의 결투) 와 비슷한 분위기 정도에 근접하려고 노력하는 모양입니다. 마침내 독고성은 악당 두령인 허장강과도 결투를 합니다. 독고성은 허장강을 보고 말에서 뛰어올라 높이 하늘로 치솟습니다. 허장강은 하늘을 올려다 보더니, 한참 뒷걸음질 치고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자, 한참 만에 하늘로 올라갔던 독고성이 땅에 내려와 착지합니다. 독고성의 높은 도약력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공중으로 뛰어오른 사람이 너무 한참만에 떨어지는 모습이, 왠지 뭔가 과장해서 웃기려는 코메디 같은 맛이 있어서 좀 실없이 웃기기도 합니다. 허장강은 독고성과 몇번 칼날을 부딛히다가 죽는데, 두령치고는 매우 쉽게 쓰러지고, 그나마 죽는 장면도 좀 간략하게 보여주고 맙니다.

독고성은 두령을 죽이자 또 어딘가로 뛰어가고, 독고성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윤정희가 마을로 따라 들어 옵니다. "금연자"에서 은붕이 휩쓸고 지나간 자취를 따라가는 금연자, 정패패의 모습과 비슷하다면 비슷한데, 하여간 텅빈 마을에 흙먼지 바람만 휘날리는 가운데, 독고성 한 명에게 몰살당한 수많은 악당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꽤 괜찮아 보입니다. 과연 커다란 싸움이 벌어졌고, 독고성이 엄청난 놈이구나 하는 것을 알려주는 분위기가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당장 허무하게 끝을 맺을 판 직전에 나오는 것이라서, 이런 분위기를 묘사한 것이 극적으로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좀 허망합니다.

독고성이 간 곳에는 이예춘이 있습니다. 이미 허장강이 죽은 마당이라서, 이예춘은 허장강이 주는 청부살인 대가를 노리고 독고성과 싸울 이유는 없습니다. 이예춘은 검객의 정복욕구를 위해서 한 번 싸워보고 싶다고 합니다. 이예춘의 덩치크고 우락부락한 모습과 독고성의 날렵하고 마른 모습은 대조를 이루고, 이예춘의 커다랗고 긴 검과, 독고성의 조선시대식으로 말하면 창포검이라 할 수 있는 팔뚝 정도 길이가 되는 칼도 대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싸우기 전의 분위기는 대강대강 볼만합니다. 그러나, 최후의 결전치고, 역시나 또 별것없습니다. 그냥 독고성이 몇번 칼 부딛히고, 사무라이 영화 정석대로 베고 나간 뒤에, 등 뒤에서 이예춘이 나자빠질 동안, 칼집에 칼 집어 넣으면서 인상쓰고 있는 것이 싸움의 끝입니다. 이번에도 별 필요없이 이예춘이 피토하면서 죽는 모습을 좀 길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해서,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악당들을 독고성이 모두 몰살시켜버렸습니다. 이럴 것이였으면, 왜 먼저번에는 악당들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한 것인지, 반대로 왜 악당들은 이번에는 그물로 간단하게 독고성을 붙잡지 못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싸움입니다. 독고성은 서부 영화 주인공처럼, 마지막에 표표히 황야 저편으로 떠나려고 하는데, 그러자, 윤정희와 어린이가 쫓아와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완연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 주인공처럼 폼을 잡는 독고성은 문득 품에 품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 어린이에게 선물로 주고 독립운동 운운하면서 마을을 떠납니다. 지난 밤에 서방님 어쩌고 하며 독고성 곁에 있었던 윤정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떠나는 독고성을 바라보고 이것이 영화의 끝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독고성"의 모습은 좀 맺힌게 많고 쓸쓸하면서도 말없는 떠돌이로 아주 잘 들어 맞습니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 주인공에도 잘 맞을 법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서부 영화 주인공에도 잘 맞을 법 합니다. 다만, 이런식으로 섞여 있는 만주물 속에서 제 활약을 하기에는 영화 각본이 상당히 이상했고, 독고성도 그 각본을 이겨낼 정도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여자 주인공인 윤정희는 애초에 독고성에게 가끔 정보를 전해주는 것 외에는 비중이 없기도 하지만은, 그나마 연기를 궁중의 이야기를 다룬 거창한 사극 풍으로 하고 있어서, 만주물에 나오는 산골마을 처녀 역할에 안어울려서 그나마 더 모자랐다고 느꼈습니다.

어떻게 보면, 총잡이가 황당하게도 60년대 무대 의상을 입고 설치는 부분만 잘 조절하고, 허장강과 이예춘 등등의 의상, 분장만 잘 조절했어도, 조금은 더 분위가 살 수 있었던 영화아닌가 싶습니다. 총잡이 이야기를 좀 고치면, 독고성이 제압하는 부분, 독고성이 붙잡히고 고문당하는 부분, 고문당했다가 다시 재기하는 부분, 등등이 줄줄이 다 바로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랬다면, 그런 내용들이 이어질때마다 영화 장면들이 이상하게 표현되거나 또는 내용이 엉성하게 끊어지는 문제점도 다소간 해결될 수 있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칼싸움은 어찌보면, 홍콩 무술영화와 일본의 영화속 칼싸움을 우리나라 영화 속에 잘 살려 보려던, 한 시도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60년대 중반이면, 일본 칼싸움 영화에서 직접 이어지는 조선시대 "검객" 이야기들이 아직도 나오던 시기이니 만큼, 나름대로 새로운 유행을 펼쳐나가는 어떤 단초가 될 수도 있었다 싶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60년대 후반, 우리나라 활극의 유행은 그런 칼싸움이나 홍콩식 무술보다는 서부 영화의 총싸움 영향이 훨씬 강하게 되어 "만주물"에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70년대 후반에 이런 서부영화스러운 만주물이 줄어들고, "장군의 아들"이나 "아나키스트"의 일부 장면들같은 몇몇 단편적인 면면들을 제외하면, 최근까지 거의 맥이 끊겼다가 요즘 좀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다는 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괜히, 어찌 이 서부영화스러운 만주물이라는 것이, 사실은 좀 우리나라에 잘 맞는 부류의 영화, 한국영화 다운 한국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듭니다.


그 밖에...

이 영화는 영화를 시작할 때, 꼭 홍콩 영화나 일본 영화처럼 한자로 가득찬 제작진 소개 자막을 보여줍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좀 웃긴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아역배우들을 소개할 때, "아역배우 누구누구"라고 나오지 않고, "천재소년 누구누구"라고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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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huhA 2008/09/03 01:14 # 삭제 답글

    그래도 독고성의 분위기에서 반은 먹고 들어가네요-_-; 이런 영화를 잡탕찌게처럼 만들면 딱 '킬빌' 스럽게 될거 같기도;; ..개인적으로 일본 창바라 물을 좋아해서 으음.. 기대는 됩니다만, 이때의 한국영화들은 일단 '말' 이되는 영화가 별로 없었군요-_-;
  • 게렉터 2008/09/03 18:32 # 답글

    ShuhA/ 맞습니다. 독고성이 가장 멋있게 나오는 영화 축에 속합니다. 그래도 60년대 한국영화는 사정이 아주 좋은편입니다. 70년대후반에서 80년대에 걸쳐 나온 본격 트래쉬 무비들은 최소한의 꼴조차 갖추지 못한 터무니 없는 것들이 끝도 없이 넘쳐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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