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꾸눈 박 영화

1970년작 "애꾸눈 박"은 꽤 재미난 축에 속하는 만주물 서부 영화로, 박노식이 만주를 주름잡는 "샹하이 박"이라는 표창잡이로 나오는 영화입니다. 임권택이 감독을 맡은 이 영화는, 시작 장면에서 호젓한 만주 어느 뒷골목을 무엇인가를 찾아다니는 세 사람이 저벅저벅 걷는 광경을 음산하게 잡아내면서 시작합니다. 그런고로 대충 박노식이 나오는 60, 70년대 깡패영화와 비슷한데 뭔가 만주물스럽게 가는 영화라는 정도외에 별 아는 바 없이, 대체 뭐가 어떻게 풀려나갈지 모르는 상태에서 보는 것이 가장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이하에서, 영화 내용 전체에 대해서 대강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애꾸눈 박, 포스터)

일단 이 영화는 제목이 "애꾸눈 박"인 만큼, 당연하게도 말론 브란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1961년작 "애꾸눈 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영화 입니다. 제목은 요즘에 나오면 뭔 패러디 코메디 영화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하게 모방했고, 주요 갈등구도와 주인공을 묘사하는 방식 같은 것도 모방한 것들이 보입니다. 물론 두 영화는 상당히 분위기가 다른 만큼 다른 점도 풍부합니다. 일단, "애꾸눈 잭"은 미국 국경 넘어 멕시코 일대를 무대로 무법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서부영화 입니다만, 그런 소재를 한국영화에서 풀어낼때 쓰는데로, "애꾸눈 박"은 만주 뒷골목을 무대로한 만주물로 되어 있습니다.

영화가 처음 시작되면 분위기 더러운 세 명의 인간들이 뒷골목을 뒤지고 다니며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괜히 발자국 소리를 크게 하는 것이라든가, 문 끼익거리는 소음 같은 것을 음산하게 울려퍼지게 한다든가해서, 황량한 분위기를 잡아내는 것은 제대로 잘 되어 있습니다. 걸어가니는 인간들의 무거운 표정. 정말로 소리를 "저벅 저벅"내며 걷는 구둣발을 가까이서 보여주는 화면 교차 같은 것도 분위기 잡는데 도움 잘 되게 잘 꾸며져 있습니다. 서부 영화 중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Once Upon a Time in the West)"같은 영화의 도입부와 비스무레한 수법입니다. 그렇습니다만, 느와르 영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시의 밤 뒷골목을 분위기로 하고 있다는 점도 재미나고 해서 흥미를 자아내기에는 그만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영화는 몇몇 싸움 장면과 총싸움 장면만 빼내면 사실은 서부영화라기보다는 40, 50년대에 주로 나온 느와르 영화와 비슷한 점도 아주 많습니다. 어두운 밤 도시의 뒷골목과 재즈 클럽을 배경으로 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나, 여자가 얽힌 문제로 꺾이고 망하는 남자들이 폼잡는 대사들을 자주 중얼거리고, 중간에 과거 회상장면이 길게 들어가면서 등장인물들의 사연과 성격을 가꾸는 부분도 분명히 느와르 영화 풍입니다. 이 영화는 그런 느와르 영화에 영향을 받은 일본 야쿠자 영화의 영향도 꽤 있어 보입니다.

그리하여, 박노식이 본격적으로 사연을 드러내는 첫장면 역시 재즈 클럽입니다. 어떻게해서 재즈 클럽으로 이야기가 넘어가는고 하니, 영화 첫장면에 등장한 분위기 무거운 삼인조는 주인공 박노식을 찾고 있는데, 이 박노식이 재즈 클럽에서 술값 떼먹으려고 하다가 얻어맞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공 박노식은 이름마저도 설운도 노래에서도 함부로 언급되지 못할 법한 "샹하이 박"이라서, 60년대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라면 아마, 굉장한 거물일법합니다. 하지만, 처음 샹하이 박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샹하이 박은 비굴하게 두들겨 맞으면서 살려달라고 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샹하이 박, 그러니까 박노식이 거의 첫등장에서 추레하게 엎드려서 맞으면서 시작하는 장면은 꽤 그럴듯합니다. 배경음악으로 클럽에서 연주하는 "Fly To The Moon"의 상쾌하고도 애잔한 곡이 들려오는 가운데, 우리의 주인공 박노식이, "술은 먹어야 겠는데 돈도 없고 외상을 할만한 명함도 없소, 그러니까 청소를 해서 술값을 갚을테니까,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라면서 빌빌거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클럽의 배경 꾸며 놓은 모양새는 당시 만주 분위기가 안난다는 것은 애초에 기대할바도 아니었습니다만, 어쨌거나 상당히 조잡해서 좀 않좋습니다만, 그래도 음악과 분위기의 대비나, 살짝 떨어져서 두들겨 맞는 박노식과 그런 박노식을 바라보는 사람의 표정들, 박노식의 모습을 거리를 잘 조절해가며 화면에 담아내는 촬영도 그럴듯하게 잘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첫장면에서 박노식이 연기를 썩 잘합니다. "샹하이 박"이라는 화려한 이름에다가 여러 사람이 무슨 커다란 사연이 있는듯 찾고 있다는 것 때문에 보는 사람은 주인공이 상당한 거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초라한 몰골이 되어 맞고 있는 것입니다. 수염이 덥수룩 하고 옷이 지저분하고, 알콜 중독자라서 손을 벌벌 떠는 반폐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박노식은 그런 좌절한 인간의 모습과 그 인간이 한 때는 잘나가는 좋은 시절이 있었다는 쓸쓸한 느낌을 충분히 전해질 수 있는 모습으로 잘 연기합니다. 박노식이 날카롭게 무적의 주먹꾼으로 나오는 영화들도 있습니다만, 이 영화의 초반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어울리는 그 모습을 보면, 역시 박노식은 사기 당해서 망한 절망한 청년이라든가, 두 눈을 잃고 평생 복수만 생각하면서 괴물같이 되어버린 인간 같은, 이런 좀 잘못 꼬인 인간의 모습에서 더 맹활약하는 배우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박노식이 상당히 처참하게 두들겨 맞고 조롱당하는데, 그 모습을 혀를 끌끌 차면서, 한 멋부리는 남자가 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박노식의 뒤를 쫓으면서 박노식을 구해주는 사람인데, 인상을 보아하니, 역시 평화롭게 인생 살면서 단지 박노식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사람인듯하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은 날카로운 표정 연기가 상당히 설득력 있는데다가, 좀 늘어지는 60년대식 베짱부리기 대사에 아주 명확하게 들어맞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삼인조가 박노식을 두들겨패서 지옥으로 보내버리려고 할 때, 갑자기 뒤에서 이 사람이 뛰어 들어서 박노식을 구해 줍니다. 그러자, 화가 난 삼인조가, 이 사람에게,

"우리의 일을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라고 하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화려한 후시 녹음 대사로, 살짝 비웃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방해는 이미 한 것 같은데."

라고 읊조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너무 과장된 성우 연기 억양으로 녹음되어 있어서, 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부자연스러운 면이 많이 느껴집니다만, 그래도 당시 이런류 영화들에서 멋부리고 베짱부리는 대사가 어떤 향취였고 어떤 개성이 있는지 아주 명확하게 전달해주는 좋은 표본이 될만합니다.

박노식이 두들겨 맞고 있는 것을 한참 지켜본 이 사람은 조용히 클럽 종업원을 부른 뒤에, 박노식의 술값을 대신 계산해 주고 싶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이 박노식을 구해주는가 싶은데, 순간, 어떤 여자 목소리가 들리면서, 박노식을 놓아주라고 호통을 칩니다.

이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여자 등장인물인 남정임이 등장할 차례인가 싶습니다. 비록 남정임이 결혼하면서 잠정 은퇴하기 직전즈음에 찍은 후기작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소위 60년대 트로이카 중에서 미모로는 최강이라는 남정임이니, 대부분 기대할만 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정임이 아닙니다. 흰색 중국 치파오를 입은 클럽의 주인 정도즈음 되는 사람으로, "샹하이 박"이 이런데서 이렇게 맞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놓아주고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클럽 주인의 방에서 박노식과 대화를 하면서, 박노식의 사연과 상황이 조금은 암시되면서 드러납니다. 박노식은 최고의 솜씨를 가진 싸움꾼이기 때문에, "샹하이 박"이라는 이름은 엄청나게 유명했고, 한때는 하얼빈의 여자들 중에 샹하이 박을 흠모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클럽 주인은 박노식에게 봉천의 마천평이라는 자를 암살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영화의 화면에서 클럽 주인의 말끔하고도 차가운 모습과 박노식의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은 극적인 분위기에 도움이 될만큼 잘 대비됩니다.

하지만 박노식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자신은 예전의 샹하이 박이 아니며, 지금은 알콜 중독자가 되어 싸움은 커녕 제한몸 건사도 제대로 못할만한 폐인이라고 합니다. 겸연쩍은듯, 스스로 비웃는듯, 스스로 픽픽 웃으며 "이 손을 보시오. 나는 이렇게 폐인이 되었잖소"라고 하는 박노식의 연기는 무척 그럴싸합니다. 알콜 중독자 박노식은 술을 좀 얻어 먹은 뒤에, 밤이 깊었으니 가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클럽 주인이 박노식에게 안기면서, "여기서 자고 가셔도 돼요"라고 말합니다. 잠깐 정적이 흐른 뒤에, "몸에 벼룩이 많아서"라고 하면서 안긴 클럽주인을 떼어놓고 사라집니다. 이 부분에서 긴장감은 상당히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박노식이 완전히 인생사 허망함을 느낀 인간의 목소리로 "몸에 벼룩이 많아서"라고 할때의 연기도 눈에 잘 들어 올 정도 입니다.

이즈음 되면, 도대체 박노식이 어떻게 폐인이 되었고, 왜 클럽 주인을 "몸에 벼룩이 많아서"라면서 떼어 놓았는지, 박노식을 따라다니는 수수께끼 같은 남자는 또 뭔지 호기심이 충분히 생길만합니다. 그렇게 저렇게 해서, 이제 영화는 느와르 영화의 수법을 그대로, 과거 회상 장면으로 돌아가서, 박노식이 "샹하이 박"으로 최고의 싸움군이 되어 하얼빈 일대에서 이름이 높던 시절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과거 회상 장면이 시작되면, 박노식의 옷차림이 60년대 유행 옷으로 바뀌어 있고, 애꾸눈이 아니라 두눈 멀쩡한 날렵한 박노식 눈매가 드러납니다. 처음부터 박노식이 애꾸눈의 초라한 모습으로 나왔기 때문에, 두눈의 멀끔한 모습으로 나올 때, 전혀 다른 시절, 과거의 일이라는 그 시간을 거슬러갔다는 느낌도 박노식의 얼굴을 보여주는것 만으로 간단히 살아 납니다.

과거 회상 장면의 처음에서, 아마도 흑룡강 지류가 흐르는 만주 벌판 어귀로 되어 있는 황량한 벌판에 박노식과 범죄 조직 두목 "하르빈 김"이 무슨 이유인지 땅을 파고 있습니다. 조금 살펴 보면, 흑룡강 지류가 흐르는 하얼빈이 아니라 한국의 산하가 아름다운 한강 어귀인 것이 뻔히 보입니다만, 그보다는 황량한 벌판에 사람 두명이 이유를 알려주지 않고 한참 흙을 파고 있는 장면에서 왜 저러는지 이유가 궁금해 집니다. 잠시 후 부드럽게 화면이 멀어짐에 따라, 이렇게 파고 있는 구덩이에 십자가 모양의 비목이 세워져 있으므로, 이렇게 파놓은 구덩이가 바로 무덤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대사를 통해서, 박노식과 범죄 조직 두목 두 사람이 서로 목숨걸고 결투를 벌이고, 무덤은 바로 패배자를 묻어 버리기 위한 것임을 알려 줍니다.

무덤을 먼저 파놓고 황야에서 결투를 하는 이 모습은 서부 영화를 잘 모방한 내용인데, 모래벌판의 분위기나 박노식과 두목이 대립하는 모습도 표정과 두 사람이 지평선을 배경으로 화면 좌우에 선 모양을 잘 나누어 보여줘서 꽤 재미나게 보입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결투 장면 자체는 가짜로 연기하며 싸우는 것이 화면에 갑자기 드러나 보이고 싸우는 방식도 별로 잘 싸우는 것 처럼 보이지도 않는 상당히 추레한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싸움 솜씨를 자랑한다는 샹하이 박의 솜씨라면서 굉장히 실망스럽습니다.

그래도 모래판에서 한쪽으로 계속 사람을 밀어붙이면서 두들겨 패서 모래판에 사람이 질질 끌려가며 두들겨 맞은 자국을 하얀 화면위에 남기는 표현 같은 것은 미술적인 멋이 있습니다. 모래판에서 싸우게 해서 한 발 한 발 디딜때 마다 모래가 휘날리게 한 것이나, 싸우다가 막판에는 강물로 철벙거리면서 들어가게해서 더 처절하게 싸우는 분위기로 연결시키는 것도 대강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한참 싸워서 둘다 지쳐 쓰러질 때 즈음 되어서 술병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술을 나눠 마십니다. 흘러간 한국 깡패영화에서 괴상하게 잡스럽게 표현되어 자주 나오는 "싸우다가 진 사람이 형님으로 모시는" 내용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 영화 속에 표현된 형태도 아주 매끄럽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많은 김두한이나 시라소니 영화에서 아주 터무니없게 묘사된 "형님으로 모시는 장면"에 비하면, 이 영화의 싸우다 정드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나마 괜찮은 편입니다. 이 부분에서, 상대방에게 마시라고 멀리서 던져도 절대 깨어지지 않는 유리 술병이나, 해가 지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촬영한 해지는 장면 필름을 끼워넣은 것은 옛영화의 볼거리라 하겠습니다.

이 장면은 나름대로 생각이 괜찮은 것이기도 했습니다만, 싸우다가도 술을 먹는 박노식의 모습을 통해서, 박노식이 술먹고 폐인 되는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이라면 복선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박노식이 두목과 친하게 되어 잘 지내고, 두목의 아리따운 동생인 남정임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도 하고, 결혼한 후에 남정임의 부탁으로 범죄 세계에서 손을 씻으려고 하는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남정임의 이름은 "향숙"으로, 하르빈 김의 동생이므로, "김향숙"입니다. 절절하게 사랑을 부르짖는 목소리로 아름다운 남정임을 향해 "향숙이-"라고 외치는 것을, "향숙이" 코메디가 한참 유행하던 시절일때 들어보면 괜히 실없이 웃깁니다.

이 부분에서는 박노식의 평화롭고 행복한 시절을 묘사하기 위해 과하지 않은 정도로 살짝 코메디가 가미되기도 하는데, 2000년대에 폭발적으로 유행한 소위 "조폭코메디"의 면면들을 상당부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식당에 간 박노식이, 남정임이 음악연주가 듣기 좋다고 하니까 박노식과 그 부하들이 마구잡이로 식당의 연주자들을 윽박질러서 데이트 장소마다 끌고 다니면서 음악을 연주하게 하는 부분은, "무식하게 힘으로 해결하려는 조직폭력배코메디"의 아주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두목의 동생인 남정임이 부부싸움 비슷한 것을 한 뒤에, 침대로 들어오려는 박노식에게 주머니칼(아마도 '째끄나이프')을 들이대는 모습은 "가문의 영광"시리즈의 선구자 격입니다.

이런 살짝 코메디가 들어가는 부분은 나쁘지 않습니다. 연주자들 앞에서 지휘하는 흉내를 내는 웃긴 부하라든가, 무성영화 시절 닳고 닳은 코메디를 그대로 반복하는데 지나지 않는 방문 부수려고 하기 장면은 좀 지겹게 되어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분량이 과하지 않게 잘 조절되어 있어서 분위기를 흐리지도 않고, 박노식의 행복했던 시절을 보여준다는 면에 충분히 기여하는 정도 입니다. 게중에는 박노식이 밤늦게까지 동생을 붙들고 있자 화가 난 두목이 들이 닥치는 장면이 그대로 결혼식 장면으로 이어지는 장면처럼 편집과 영상 표현이 경쾌하게 되어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다른 영화들에 있는 비슷한 장면을 조합해 엮어 넣은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배우들의 호연과 더불어 잘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이 영화는 두목이 친해진 뒤에도 갑자기 의리있고 착한 선배 정도로 변해버리지 않습니다. 박노식과 친해지지만 여전히 말투는 거칠고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나가고 박노식에게도 버럭버럭 화를 잘내는 범죄단 두목 같은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사실적으로 보이기도하고, 인간 관계나 감정과 성격의 흥미로운 면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배우의 연기와 모습이 출중하기도 해서, 이런 모습은 꽤 인상적입니다. 남정임은 이 영화는 최고 전성기의 미모에 비하면 약간 나이든 모습이 보일 때도 있고 지나치게 색채를 많이 쓰는 분장과 어울리지 않을 때가 많아서 약간은 실망스럽습니다. 하지만, 박노식이 남정임을 처음 만난뒤 첫눈에 반할때 "늑대 같은 오빠를 둔 천사"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모습에서는, 여전히 트로이카 최강의 위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느와르 영화다운 흐름을 따라가자면, 이 정도로 이야기가 흘러갔으니, 이제부터는 박노식의 인생이 망해가다는 단계로 흘러가야 할 것입니다. 범죄계에서 손씻고 새사람이 되려하는 박노식은, 남정임의 소원대로 작은 목장을 하나 마련해서 이 바닥을 떠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박노식은 고민입니다. 남정임의 소원인 목장과 평화로운 미래의 단꿈에 푹 빠진 박노식은, 목장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암살의뢰를 맡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돈과 남정임을 노린 봉평의 총잡이 마천평의 흉계가 숨어 있었습니다. 애초에 남정임에게 끊임없이 구애하고 있던 마천평은 덜컥 박노식과 남정임이 결혼을하고, 샹하이 박-하르빈 김-봉평 총잡이 마천평의 관계에서 자신만 잘려나간데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

이 부분의 묘사도 재미나게 잘 되어 있습니다. 봉평 총잡이 마쳔평은 영국 신사풍으로 겉옷과 모자를 치렁치렁 챙겨 입는 사람인데, 영화 앞뒤의 묘사를 통해 예전부터 남정임에게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 마침 오늘 정식으로 청혼을 하려는데, 베짱만 잘부리는 인간인듯한 오늘 처음 보는 박노식이 갑자기 자기가 먼저 첫눈에 반해서 남정임에게 청혼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향숙씨, 이것은 수달 모피로 만든 오바(덥쳐 있는 겉옷)입니다.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귀한 것이라 이렇게 향숙씨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정식으로 향숙씨에게 청혼을 하려고 합니다."
"아쉽지만 방금 내가 먼저 청혼을 했으니 미안하게 되었군."
"뭣이? 너는 향숙이를 안지 얼마나 되었나?"
"글쎄. 한 십분쯤 되었나?"

이런 대사를 싱글싱글 웃으면서 하는 것입니다.

마천평은 향숙과 박노식을 망하게 하고, 아울러 하르빈 김도 망하게 하기 위해서, 박노식이 하르빈 김을 죽이도록 암살을 의뢰했던 것입니다. 아편밀매범 한 명을 중간에 끼워넣어서 박노식이 자신이 죽이려는 사람이 자기 처의 오빠이자, 두목인 하르빈 김인지 모르게 하고, 일이 끝나자마자 박노식도 급습해서 애꾸눈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박노식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목장에서 보내는 평화로운 꿈에 대한 미래가 산산히 조각난 것도 너무나 허망해서 절망하게 됩니다.

남정임이 자신의 오빠가 죽었다고 충격을 받아 괴로워하는 앞에서, 박노식은 "오빠를 죽인 놈에게 내가 반드시 복수하겠소"라고 말한 뒤에, 집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알콜중독자 폐인이 된 것입니다. 길가의 짚더미 속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술만 퍼먹는 생활을 하면서 항상 언제나 남정임을 꿈처럼 그리워하면서 말입니다.

이 회상 장면 앞뒤를 통해 박노식을 따라다니며 박노식을 보호해주고 있던 수수께끼 같은 남자에 대해서도 사연이 대강 밝혀 집니다. 박노식은 하르빈 김이 금괴를 운반하려고 할 때에 암살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금괴가 하필이면 한국영화 만주물의 영원한 소재인 "독립군의 군자금"이었던 것입니다. 수수께끼의 사나이는 독립군의 요원으로 일본군의 눈을 피해 군자금을 운반하는 것을 하르빈 김에게 부탁했던 것인데, 도중에 박노식이 봉평 총잡이 마천평에게 속아서 하르빈 김을 죽여버렸고, 군자금은 봉평 총잡이 마천평이 가로챘던 것입니다. 하르빈 김이 죽어버리자, 독립군 요원인 수수께끼의 사나이는 박노식을 통해서 마천평과 군자금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박노식을 추적해 왔던 것입니다. 한편 박노식을 죽이려고 온 삼인조는 봉평 총잡이 마천평이 보낸 살인청부업자들로 도망친 박노식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조금 앞뒤가 안맞는 내용이 있기는 합니다만, 박노식을 흠모하는 클럽 주인과 독립군 요원인 수수께끼의 사나이, 박노식을 노리고 있는 삼인조는 이리하여 박노식을 두고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마침내 독립군 요원이 박노식을 붙잡게 됩니다. 독립군 요원은 박노식을 다그치면서, 군자금의 행방을 묻습니다. 독립군 요원은 박노식이 군자금을 노리고 하르빈 김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박노식은 애초에 군자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으니, 독립군 요원에게 답을 해주지 못합니다.

그러자, 독립군은 박노식을 고문하기 시작합니다. 고문은 동시상영용 중저예산 영화의 고문 장면이나, 비슷한 부류의 "여자 감방 영화"에서 거의 고문의 ABC 중에서 "A"에 해당하는 "채찍으로 때리기"로 막을 엽니다. 그리하여, 독립군 요원은 박노식을 두들겨 패기도 하고, 잠을 안재우는 고문도 하고, 무엇보다도, 알콜중독자 박노식에게 술을 주는척 하면서 술을 바닥에 조금씩 쏟아버리는 수법으로 고문하기도 합니다. 술을 한방울이라도 먹으려고 용을 쓰는 박노식의 연기는 훌륭합니다만, 어쨌거나, 보통 당시 한국영화에서는 일본군이나 공산당들이 장황하게 길게 보여주던 고문 장면을 독립군 요원이 보여주니까 이것도 참 기이한 축에 속한다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제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보여주는 문화가 고작 "고문"이라면 그것도 좀 부조리하다 싶은 면도 있고, 어찌보면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단지 맹목적인 혈연적 민족주의에 그치는 것으로 보여주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특히 독립군 요원이 고문을 하다말고 너도 한국인이라면 민족을 위해 독립군 군자금을 토해내라면서 잠시 웅변을 할 때에는 특히나 이상합니다. 어떻게 하면, 맹목적인 민족주의에 빠진 변태를 비판하는 영화로도 꾸밀 수 있을만큼 어색합니다.

그러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반대로 이 독립군 요원을 비정하고 강인한 첩보원 내지는 냉랭하고 거친 서부의 사나이라는 영화속 인물이라는 쪽에만 한정시키면, 이 장면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비정하게 고문하는 그 모습은 영화속 인물의 강한 성격에 잘 어울리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독립군 요원을 비정한 첩보원으로 그려내려고 했는데, 대사를 쓸 때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습관적으로 독립군이 "너도 한국인이라면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운운하는 의리있고 낭만적인 용사같은 대사를 하다보니까 이런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게 된 것입니다. 전체적인 모양새를 위해서는 좀 말 수 적은 첩보원으로 꾸미는게 나았겠습니다만, 지금의 모습도 옛 영화의 향취가 나는 것이 아주 이상하지는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고문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그런것들이 아닙니다. 고문장면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고문 장면은 뭐 딱히 잔인한 고문은 없고, 시간도 전체 영화 시간에서 따져보면 짤막한 편이라서, 박노식이 고생을 많이 하고, 독립군 요원이 정말 피도 눈물도 없고 임무만 아는 놈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정도입니다. 이 영화의 고문 장면에서 가장 강렬하고 기괴한 것은, 바로, 이 독립군요원이 술 안먹이는 고문을 하다가보니, "박노식은 고문 받는 중에 술을 못먹어서 알콜중독증이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상당한 황당함을 자랑하는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만, 뭐 나름대로 근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박노식이 손떨림이 멈추고 알콜중독 없이 맨정신이 똑바로 돌아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의 연기가 좋아서 대강 넘어갈만합니다. 고문 중의 대화를 거쳐, 박노식과 독립군 요원은 대강 진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봉천 총잡이 마천평이 모든 것의 배후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박노식은 자신이 손을 씻고 평화로운 미래를 꿈꾸게 한 그 사랑스러운 아내 남정임이, 지금은 봉천 총잡이 마천평의 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한편, 봉천 총잡이 마천평이 보낸 악당들은 박노식을 알던 클럽 여주인을 협박하고 끌고다니면서 추적한 끝에 독립군이 박노식을 잡아 놓고 고문하던 곳을 알아냅니다. 그리하여, 이 인간들이 박노식을 붙잡으려고 들이닥치는데, 그러나, 애꾸눈 박노식은 이제 "고문 받느라 술 안먹는 바람에" 알콜중독이 없어지고, 예전의 무시무시한 샹하이 박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박노식은 봉천 총잡이 마천평이 보낸 악당들을 두들겨 패 쓰러뜨려버리고, 이글거리는 분노를 활화산에서 뿜어져나오는 용암처럼 사방에 뿌리고 다니면서, 봉천 총잡이 마천평에게 복수를 하러 떠납니다.

싸움 장면에서, 악당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데, 클럽 주인이 방의 불을 꺼버리고, 어두운 틈을 타서 단숨에 박노식이 악당들을 두들겨 패버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순식간에 다 두들겨 패고 나면, 다시 불이 켜지면서, 얻어 맞고 비명지르며 쓰러지는 악당의 면상을 화면 가득 환하게 보여줍니다. 밝을 때 악당들이 히죽거리며 총을 들고 위협하고 있다가, 불이 꺼지고, 박노식이 잠시 동안 바람처럼 다 두들겨 패버리고, 불이 켜지니, 악당이 비명지르는 모습을 크게 보여준다 라는 이 속도감 있고, 조명, 화면 구도를 십분 활용하는 연출은 아주 좋은 계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몇몇 고전 영화나 유행하던 다른 영화에서 참조해온 연출법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영화 이야기에 비교적 근사하게 들어맞는다고 봅니다. 아쉽게도, 이 장면의 실제 결과는 조명 조절 기술이 너무 부족해서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에 걸쳐 가장 멋진 싸움 장면은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짤막한 싸움 장면입니다. 박노식이 봉천 총잡이 마천평을 잡아 죽이러 표표히 떠나는데, 박노식의 등 뒤에서 악당 한 명이 박노식에게 다시 총을 겨눕니다. 이 악당은 박노식을 해치워서 이 바닥에서 명성을 떨치기 위해 허구헌날 박노식과 결투하자고 설치던 놈입니다. 그러나 박노식은 아내 남정임을 붙잡고 있고 친구의 원수이기도한 봉천 총잡이 마천평을 죽이러 바쁜 길 아닙니까? 박노식은 결투하자는 악당 따위는 별로 신경쓰고 싶지도 않는다는 태도로 그냥 갈길을 갑니다. 그러자, 짜증난 악당이 총을 쏘려는 순간, 번개처럼 박노식은 몸을 뒤로 놀려 악당에게 표창을 날리고, 박노식의 모습에 연결되어 표창을 맞아 총을 떨군 악당의 모습이 강렬하게 연결되어 펼쳐집니다.

악당이 회복되어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는 박노식에게 경악하고 있을때, 박노식은 가던 길을 다시 떠나면서 만주물의 진수를 보여주는 어조로 초보 총잡이 악당에게 이렇게 읊조립니다.

"목은 하나 밖에 없으니, 아껴쓰도록 하게."

이 부분은 의외로 싸움 장면이 부실한 면이 많은 이 영화에서 충분히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유일한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봉평 총잡이 마천평의 소굴로 찾아온 박노식은 총질을 하면서 악당 부하들을 줄줄이 쏘아 죽입니다. 문 앞에 숨어 있다고 총을 쏘려는 악당 앞에 문을 열면서 박노식의 옷을 입힌 부하를 집어 던진 뒤에, 악당이 착각하고 악당 부하를 쏠 때, 박노식이 매우 빠른 권총 솜씨로 다 쓸어 버립니다. 이 부분은 과장된 싸움을 펼치는 당시 이탈리아산 서부 영화의 면면이 반영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좁은 실내 세트를 다니면서 총 싸움 하는 연출에 그런 내용을 결합시키는 독특한 수법이나 특징적인 연출법이 없어서, 기대보다는 좀 재미가 없기도 합니다. 돌아온 샹하이 박이 악당 소굴에 돌아와서 대활약을 하면서 악당들을 쓰러뜨리는데, 가장 짜릿해야할 대목치고는 그냥 총쏘는 소리 좀 많이 들리고, 악당들 좀 많이 자빠지는 것이 전부입니다.

박노식은 봉천 총잡이 마천평을 죽이기 직전까지 갑니다. 그러나, 봉천 총잡이 마천평이 죽으면 독립군 군자금의 행방은 아무도 알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즉, 그때 독립군 요원이 나타나 박노식이 마천평을 죽이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리하여, 전세는 급반전 되어, 박노식은 그만 마천평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이 영화의 절정장면이라면, 절정장면으로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다음 대목입니다. 박노식은 지하실에 붙잡히게 되었고, 형틀에 매달려 있습니다. 애꾸눈 박노식은 악당들에게 두들겨 맞아, 남은 한쪽 눈 마저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너무 심하게 맞아서, 박노식은 두 눈에 피를 철철흘리며 눈을 감은채, 말 한마디 할 기운도 없이 그냥 쳐져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박노식이 아무 대사 없이 말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주 효과가 좋습니다. 박노식이 비굴하게 알콜중독자로 살던 모습이 영화 앞에 많이 나왔기 때문에, 박노식이 굳이 울고 불고 소리지르고 욕하고 하는 장면을 보여주면 그냥 또 그런가보다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피를 흘리며 눈을 감은채 형틀에 매달려 있기만 하고, 그런 얼굴을 한참 보여주니, 정말로 박노식이 불쌍한 꼴이 되었다는 느낌이 대조적으로 충분히 삽니다.

악당 두목은 박노식을 괴롭히기 위해, 자신이 가두어 놓고 있던 박노식의 사랑하는 아내 남정임을 끌고 나옵니다. 알콜중독자 폐인이 되어 빌빌거릴 때, 날마다 꿈속에서 아스라히 떠오르던 아내, 남정임이 드디어 바로 앞에 나타났는데, 박노식은 두 눈을 다 다쳐 보지를 못합니다. 이 반어적인 상황은 꽤나 극적인 효과가 강합니다. 악당은 남정임에게 이런 저런 거지 같은 소리를 하면서 낄낄거리고, 남정임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어 웁니다. 남정임의 아름다운 얼굴과 눈물이 흐르는 얼굴 울음소리, 그리고, 피 묻고 눈이 보이지 않는 박노식이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묶여 있는 모습. 둘은 강한 대조를 이루면서, 두 사람의 비극적인 대응을 고조시킵니다.

낄낄거리던 봉천 총잡이 마천평은, 남정임에게 옷을 벗으라고 말합니다. 부하들과 묶여 있는 박노식 앞이라, 남정임은 "여기서요?"라고 되묻습니다만, 마천평은 웃으면서 그렇다고 합니다. 남정임이 옷을 벗기 시작하자, 마천평은 다시 크게 웃으며 말합니다.

"샹하이 박, 여기 너의 아내 향숙이가, 바로 네놈 앞에서, 이 마천평의 향락을 위해 옷을 벗고 있어!"

이 봉천 총잡이 마천평이라는 인간은 과거 회상 장면에서는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다니면서, 남정임에게 공손한 말투로 모피 코트 선물 같은 것을 갖다 주는 신사스러운 놈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던 인간이 조금씩 악한 꼴을 드러내면서, 서서히 변태스러운 면을 보이고, 결국 이따위 짓을 하기에 이르니, 이 인간의 더러운 위선적인 면모와 뒤틀린 성격의 면면은 무척 잘 묘사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런 류의 갈등 구도는 당시 일본의 동시상영용 중저예산 완전성인용 영화에서 좀 잡스럽게 여기저기 튀어 나오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장면에서, 묶여 있는 박노식이, 분노가 극에 달하여, 보이지도 않는 눈을 부릅떠 반쯤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면서 마천평을 노려보는 모습은 그런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절정으로 보일만합니다. 이 부분은 당시 깡패 영화, 만주물에 나온 박노식 연기의 극치라고도 할만합니다.

절정이 절정이라서 그런지, 이 영화는 이 다음 결말 부분이 급격히 실망스러워 집니다. 일단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박노식이 살아나가는 동기가 좀 급작스럽습니다. 박노식이 "목은 하나 뿐이니 아껴쓰게"라면서 살려주었던 살인청부업자 악당 놈이 박노식의 "관대함"에 감동해서, 바로 박노식 편으로 전향해서는, 봉천까지 달려와서 박노식을 다시 구해준다는 것입니다. 이 살인청부업자 악당이 갑자기 돌아와 나타나는 것도 좀 황당하기는 합니다만, 별 비중도 없고, 박노식에게는 사소한 애송이 취급당하던 놈이 문득 혼자서 람보짓을 하면서 악당 소굴을 마구 휘젓고 다니는 것도 충분히 묘사되지 못했습니다. 이런식으로 결말에 설치게 하려면, 영화 초반부터 조금 싸움 재주 있는 것 가지고 폐인 박노식에게 자꾸 덤비면서 알량거리던 놈으로 해서, 좀 역할도 크게 주고 복선도 많이 주는게 좋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싸움이 강조되고 있고 총싸움 장면도 많이 보여준 만큼, 박노식이 살아나서 마지막으로 결전을 벌이니, 좀 화려하고 거창하게 많이 부수면서 크게 싸우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돈 많이 쓰는 미국 영화에서는 이런 류의 마지막 싸움은 탱크나, 대포, 전투기나, 대형 기관포 같은 것이 등장해서 신기할 정도로 심하게 한 번 박살을 내곤 하는데, 그런 비슷한 류의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는 도리어, 막판에는 총싸움도 안하고, 그냥 박노식이 주먹질 좀 하고 말 뿐이라서 아무래도 별 대단한 큰 싸움이라는 느낌이 없습니다. 특히나, 계속 이야기했던 것 처럼, 이 영화는 싸움 장면, 무예의 묘사 같은 것의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한 이 맨손 싸움은 좀 싱겁습니다.

영화의 결말은 이런 것입니다. 박노식은 봉천 총잡이 마천평을 맨손으로 두들겨 패서 죽입니다. 그리고,

"왜 벌써 죽었어!"

라는, 상당히 독특한 대사를 하면서, 죽은 악당을 뒤흔들며 화가 덜풀렸다고 절규합니다. 영화 상영 시간은 대략 다 채웠고, 제작 예산도 거의 다 썼는데, 어떻게 결말을 맺을 방법이 없으니까, 이후에, 문득 독립군 요원이 "이제 황금을 찾으러 가야지"라면서 다 같이 황야를 자동차를 타고 달려가는 모습이 튀어나오면서 황급히 끝납니다.

정리해보자면, 이 영화 "애꾸눈 박"은 일단 멋을 많이 부리고 파괴 장면이 화려한 서부영화와 비도덕적이고 도시 뒷골목 밤분위기의 멋이 살아 있는 느와르 영화가 조화되어 있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거 회상 장면과 다른 사람 시점, 다른 장소의 상황으로 연결되고 전환되는 모양이 잘 알아보기 어렵게 혼란스럽게 되어 있고, 싸움 장면들이 중요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한 두군데 빼고는 기술이 무척 모자란다는 점에서 빠지는데가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만, 또 박노식, 최봉등을 적역으로 배치에서 최고급의 연기를 이끌어내고 있고, 봉천 총잡이 마천평 역할을 맡은 악역 독고성도 매우 훌륭합니다. 독고성은 비슷한 시기에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일본 영화 "흡혈귀 고케미도로(吸血鬼ゴケミドロ)"의 전설적인 고 히데오( 高英男)를 방불케하는 충분한 실재감과 개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차분한 구도로 잡다가 한 사람 얼굴로 확대해서 다가가면서 놀람, 감동등의 기분을 강조하는 것이라든지, 이런 저런 재미난 화면 연출도 꽤 있습니다. 화려하고 차가운 인상의 클럽 주인이 걸어갈때 걸음걸이 맞춰서 화면이 따라가면서 움직여서 클럽 주인이 더 화려하고 주목 받게 보이게 하는 연출도 재주있게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연출이 제몫을 발휘하기에는 정말로 화려한 의상이나 분장은 아니고, 이런 장면이 별 크게 중요한 부분들에 결정적으로 사용된 것도 아니라서 좀 부족한 면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 밖에...

이 영화에도 악당 부하 악당으로 박동룡 http://gerecter.egloos.com/3825648 이 출연합니다. 늘어서 있는 부하들끼리 다같이 "예!" 라고 대답하는 장면을 빼면, 대사는 딱 한 줄입니다. 박동룡은 봉천 총잡이 마천평에게 달려가서 독립군 요원이 나타나서 뭘 요구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대사를 한 마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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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huhA 2008/09/05 12:17 # 삭제 답글

    샹하이 박이라면 다찌마와 lee에 나오는 그 이름이군요..
  • Merkyzedek 2008/09/05 22:55 # 답글

    상하이 박하니까 김두한씨 소설에 나오던 그 권총 잘 쏜다는 상하이 박 생각나기도 하네요.
  • 박민성 2008/09/05 23:11 # 답글

    인상적인 대사가 많네요ㅎㅎ
    이게 만약 옛날영화가 아니라 요즘에 나온 애니메이션이라든가.. 외국영화였다면
    인터넷에서 짤방으로 많이 돌아다녔을것만 같아요
  • 이준님 2008/09/06 08:46 # 답글

    1. 상대편 똘마니가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우리편이 되었다가 어이없게 죽는 경우는 개인적으로는 (전에도 몇번 말씀드린) 이대근 아저씨가 동생의 목숨을 담보로 악의 조직과 대결하는 -그리고 박원숙 아줌마와 프랜치 키스를 하는 결말의- 모 영화에서 조춘씨가 맡은 역이 기억이 나는군요

    2. 그래도 저 영화는 "유명" 배우들이 나오니까 그나마 다행이지요. "무명" -남자는 주로 근육질과 액숀을 여자는 주로 몸매로만 상대하는-배우들이 나오는 80년대 만주물은 캠피의 영역을 벗어나서 "눈뜨고 못볼 수준"이 많지요

    3. 역시 임권택 감독이 "자기 영화로 안 치는" 작품입니다. 저 작품도 그렇지만 일본 밀리덕후들에게 인기가 높은 "증언"이나 "아밴고 공수군단"도 임감독에게는 저 영화와 동급으로 여겨지니 안구에 습기가 찹니다.

    ps: 저 영화는 그래도 낫지요. 소싯적에 천호진, 민복희가 나온 모 영화에서 "한강 어귀"가 사용된걸 보면 진짜 개그중에 개그입니다
  • 게렉터 2008/09/09 02:30 # 답글

    ShuhA/ 다름아닌 이 영화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Merkyzedek/ 지역이름 + 성 이라는 이름이 철지난 폼잡기 별명으로 한참 유행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 끝트머리가 저 유명한 최주봉의 쿠웨이트 박 아닌가 싶기도 하고,

    박민성/ 만주물스러운 대사가 뭔지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준님/ 그나마 70년대 후반부터 나오는 홍콩 영화 따라하는 무술 영화 만주물은 최소한의 자비심 마저 없는 무모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세계적인 트래쉬 무비의 조롱거리로 부상한 "소화성 장의사"도 따지고보면 출발은 만주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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