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보이 영화

"모던보이"는 만주사변-중일전쟁 발발 무렵의 옛 서울에서 직장은 폼잡으려고 다니는 철없이 놀고 먹는 한량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박해일이 연기하는 이 주인공은 스스로를 낭만의 화신이라고 부르면서 하는 짓이라고는 멋있는 옷을 골라 입는데 인생을 소모하고 돈을 펑펑쓰면서 여자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박해일이 재즈클럽에서 "로라"라는 예명을 쓰는 아름다운 가수를 발견하고 이 여자를 따라다니게 되고, "로라"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http://gerecter.egloos.com/2183319 "39계단" http://gerecter.egloos.com/2277670 에 나오는 소위 "수수께끼의 여인"에 해당하기 때문에, 주인공 "모던보이"는 엉겁결에 꽤 큼직한 음모에 휘말리게 됩니다.


(모던 보이)

"모던보이"에서 가장 멋진 대목은 공을 들여 만든 세트와 잘 만든 컴퓨터 그래픽을 필두로 여러가지를 즐길 수 있는 그럴싸한 "당시 상황 재연"들입니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30년대 서울거리의 모습은 상당히 화려하면서도 적당하게 사실감있게 잘 다듬어져 있고, 당시의 서울역앞이나, 90년대에 없애버린 중앙청 건물의 모습은 깔끔하게 합성되어서 멀쩡하게 영화속에 등장합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색과 옷차림 또한 당시 유행을 잘 반영하면서도 적당히 지금 영화 화면 속에서도 요란하고 화려하게 비치도록 잘 꾸며 놓았고, 시골에서 올라온 여학교 학생들을 묘사하는 부분처럼 고증을 적절히 살려서 실감나면서도 영화의 맛을 더할 수 있게 해 놓은 부분도 꽤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뭐 이것저것 멀리 볼 것 없이, 주인공 박해일이 몰고다니는 자동차만 봐도 이 영화가 고증과 재현을 내세웠다는 것은 바로 느껴집니다. 자동차의 겉모습과 움직이는 형상이 옛날 자동차의 모습에 충실히 잘 들어맞아 어울리면서도, 반짝거리게 닦아 놓은 자동차의 빛깔 하며 예스러운 곡선이 충분히 드러나 보이도록 화면속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느낌을 재미나게, 여유롭게 보여주는 것이 보기에 꽤 멋집니다. 그러니만큼, 이 영화는 30, 40년대 서울 풍경을 재현해서 보여준다는 기술적인 도전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사실 자신감이 좀 과한 정도라서, 이 영화는 뭘 재현해서 보여줬는지 아예 글자 써서 그때 그때 자막을 박아버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옛날 KBS "역사스페셜"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옛 유적 보여줄 때 같아서, 극적인 실감을 내는데에는 조금은 방해가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것 보여주면서 역이라는 자막이 나옴)

그리하여, 고두심이나 지금 장관하시는 양반이 튀어나와서 해설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찬란한 과거를 애써 웅변하는 TV쇼도 아닌데, 굳이 일일히 재현한 종목마다 자막을 집어 넣는 것이 약간 객기다 싶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정도 살짝 객기를 부리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닙니다. 영화속의 세트나 의상 뿐만 아니라, 주인공인 박해일이나 김혜수의 모습까지도 역시 겉보기 모습은 아주 제대로 들어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일은 웃음거리가 될만한 한량의 살짝 한심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경쾌하게 줄거리를 이끌고 나가서, 영화를 재미나게 버무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해외특파원"이나 "이창" http://gerecter.egloos.com/2279057 같은 영화의 "위기에 휘말린 주인공"다운 심경도 충실히 연기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일에 휘말려서 당황하는 보통 사람이면서도, 그 모험속에서 개성을 드러내고 용기를 내면서 최대한 헤어나가려고 노력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풍자대상인 한량의 모습은 주인공보다는 악당에 어울릴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모자란 모습을 오히려 "인간적인 결점"처럼 보이게 해서는, 도리어 뜻하지 않은 모험에 걸려든 "사실적인 주인공" 모습을 더 살리게 꾸며버린 것입니다. 이런 솜씨는 각본 대사들도 괜찮았거니와 그것을 표현해내는 연기 역시 거기에 썩 잘 맞아떨어지게 멀끔했다고 생각합니다.


(박해일)

김혜수는 재즈 클럽의 뇌쇄적인 여자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예스럽고 은은한 고전적인 분위기도 풍겨야 하는 역할을 멋지게 소화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것이 30, 40년대 배경 영화들이 노린다면 노리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헐리우드 영화를 그대로 따라해버리는 미국식 대중문화의 멋을 팍팍 따라하면서도 동시에 또 역사적 상황이나 사극 같은 맛도 한 번 풍겨 보자는 것입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같은 영화만 해도 결과가 다 집어치우고 그냥 대강 때우는 식으로 변해서 그렇지, 분명히 시작은 둘다 노리고 있는 면이 있었습니다. 김혜수는 고등학생때 생기발랄하면서도 성숙미도 매력적인 청소년 역할로 데뷔해서는, TV에서 인기를 얻기는 조선시대 배경의 연속극에서 "보옥"이 역할이 결정타를 먹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김혜수는 이 영화속의 아주 현대적이면서도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칠십몇년전쯤 사람인 느낌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영화 초반에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박해일을 맛이 가게 만들어 버릴 때, 그 김혜수의 모습이란, 바로 그때 그 보옥이 시절이 다시 되돌아온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어느새 그것도 20년전인가 싶습니다만, 의심스러운 "수수께끼의 여인", 박해일을 혼란으로 끌어들이는 위험한 속임수이라는 생각이 충분히 들게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그래도 그냥 홀라당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매력을 꽤 그럴싸하게 보여줍니다.


(김혜수)

재즈 클럽에서 끈적거리는 노래를 부르다가 열기가 끓어오르면 관객을 향해 겉옷을 확 벗어내던져버리면서 스스로 "로라"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이 갑자기 지나치게 수줍어하면서 단정하게 기모노를 입고 고개 숙여 차분하게 인사하는데 정성을 기울인다면, 분명히 이상하고 어색하고 뭔가 의심할만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이런 사람에게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김혜수가 주특기를 마음껏 살려서 연기할 때, 그 부서져내리는 듯한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무척 듣기 좋습니다. 이 시절 옷차림도 무척 잘 어울려서, 그냥 별것 없는 양장점 종업원 유니폼 조차도 배우의 몸매에 잘 맞아들어서 아주 잘 어울리는 의상으로 보입니다.



(보옥이 생각나는 장면)

이정도만 대충 놓고보면, 이 영화는 60, 70년대에 유행했던 일제시대를 배경으로한 첩보물 제작진들의 꿈과 희망처럼 보이는 영화입니다. 제대로된 의상하나 구할 수가 없어서, 자비심 없이 그냥 유행하던 가죽옷 입고 가죽장갑 끼고는, 일제시대의 멋있는 사나이 연기를 해야했던 당시 영화 제작진들이 보면 눈이 휘둥그레질만합니다. 헐리우드 느와르 영화들이나, 50년대에 이미 한국에서도 거장으로 명성을 드날렸던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독을 맡았던 영화들과 진짜 비슷한 분위기를 낼 수 있게 보일 수 있지 않겠냐, 이만하면 진짜 그런 영화를 제대로 만들어 볼 수 있겠다 싶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장동휘 보다 멧집은 작지만 연기가 훨씬 다채로운 박해일이 남자주인공이고, 김혜정 보다 개성은 덜하지만 화려하고 아름답기로는 그보다 나은 김혜수가 여자주인공이라니.

재즈클럽에서 악당들과 멋지게 담판하는 장면을 만들고 싶었습니다만, 제대로된 클럽을 하나 꾸미기 어려워서 대강 영업중인 호텔 클럽으로 뭔가 해보려던 시절에 비하면, 이 영화속 세트는 기가 막힐 지경아니겠습니까. 중앙정보부 쪽에서 하달된 지시로 영화가 갑자기 난도질하는 일도 없거니와, 필름 잘라 편집할 기술이 부족해서 필름을 잘못 잘라 붙이는 바보 같은 실수를 할 일도 없습니다. 촬영은 계획에 맞춰서 착착 진행되고, 음악도 다른 외국 영화 음악에서 훔쳐올 필요 없이, 영화 화면에 맞는 음악을 제대로된 진짜 악기와 장비를 갖추고 직접 만들어 줍니다.

실제로, 옛날 영화 중에 아예 지금 이 영화 "모던보이"처럼 1975년작 영화로 친일파의 아들이 어찌저찌 사랑타령과 어울려 음모와 비밀작전에 휘말리는 내용의 "왜 그랬던가" 라는 영화도 있었습니다. 이 영화 "모던보이"는 이런저런 옛 영화들의 엉성하고 허름한 점을 다 극복한 어떤 완성의 경지를 보여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30, 40년대 알프레드 히치콕 http://gerecter.egloos.com/2296677 이 감독을 맡은 영화처럼 만든, 30, 40년대를 배경으로하는 한국영화가 드디어 뭔가 멀쩡한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입니다.


(수수께끼에 휘말려 피나는 모험을!)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가 한 2/3쯤 진행된 무렵부터 발목을 잡히면서,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넓게 보면, 무너지는 방식도 좀 고전적인 방식 대로 무너집니다. 바로, 일제시대 배경 영화들이 수없이 걸었던 그 길을 또 걷습니다. 이번에도, "일본군에게 고문하는 장면 장황하게 보여주다가 망하기"의 형태로 주저 앉는 모양새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영화는 "일본군에게 고문하는 장면" 자체는 그렇게 장황하게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불필요하게 긴 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청연"이나, 인민군에게 고문하는 장면이 난데 없이 길게 이어지는 옛날 "장군의 수염" 같은 영화에 비하면 약과 수준입니다. 그런데, 비록 장면이 짧기는 해도, 그러다가 영화가 삼천포로 빠져버리는 방향 자체는 그대로 따라가버리고 맙니다. 보고있자면, 이 영화 "모던보이"는 삼천포로 가지 않을 듯 않을 듯 하면서, 사천이며 진주 일대를 이리저리 맴돌다가는, 그래서 꼭 삼천포로 안 갈것 처럼 하다가는, 그래도 결국은 마침내 삼천포로 빠져버리는 형국인 것입니다.



(명랑하면서도 경쾌한 분위기 좋았는데...)

고문하는 장면 길게 보여주다가 망하는 것이 예전부터 한국영화에서 잘나가던 영화를 삼천포로 인도했던 까닭은 이런 것입니다. 일단 이런 장황한 고문장면을 넣으면 뭔가 자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어지간한 공포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잔인한 장면이 팍팍 나오게 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왜인지 영화 관람 등급은 훨씬 유리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붙잡히는 경우라면 더합니다.

그런데다가, 영화의 악당인 일본군을 혐오스럽게 묘사하는 것은 뭔가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는 막연한 생각도 아주 끈끈하게 퍼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 토끼장에 토끼 한마리 죽으면 반전체가 눈물의 가두리 양식장이 되어 버리는 초등학생들에게, 십수년전까지만해도 일본군이 저지른 잔인한 만행을 세세하게 재현해 놓은 전시물을 들이밀고 아이들이 악몽에 몸서리치게 하는 것을 생생한 역사 교육이라면서 뿌듯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보니, 일본군이 주인공을 붙잡고나면, 목공용 공구라든가, 전기작업용 장비가 등장해서 주인공이 괴로워하는 끔찍한 모습을 장황하게도 보여주는 것은 한국영화 속의 멜라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무겁고 심각하게 죄악을 묘사해 놓고나니까, 그 다음부터 영화도 어쩔수 없이 흐름이 그쪽으로 뒤틀려서 사정없이 무겁고, 심각하고, 비장하고, 처절해져버리곤 했던 것입니다.

이 영화 "모던보이"도 바로 주인공이 일본경찰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하면서부터, 서서히 영화가 쓸데없이 비장하고 처절해 집니다. 이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실수 였다고 생각합니다.


(고문의 막간)

이 영화는 애초에는 주인공 한량이 웃음을 불러오게 하는 장면이 있으면서도, 억지로 웃기기 위해 집어 넣은 농담이 아니라 주인공의 모습과 상황을 풍자하는 개성이 살아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황은 명랑하면서도 비판의식이 있었고, 주인공은 독특하면서도 그만큼 사실감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실감과 개성 덕분에 주인공이 비교적 사소한 음모에 휘말리면서도 그 위기나 음모가 그만큼 신기하고 아슬아슬하게 와닿는 맛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 속의 휘말리는 수수께끼라는 것은 무슨 잃어버린 핵폭탄이 도시를 날려버린다는 것일리도 없고, 그렇다고 갑자기 사형을 언도 받고 쫓긴다거나 미래에서 온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강철 로봇이 되어 잡아죽이려고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애인이 알고보니 이름이 네 가지였고, 진짜 직업을 모르겠다는 것 정도 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이 영화의 경쾌한 분위기와 주인공의 가볍게 와닿는 현실감 때문에, 그 정도 사건도 꽤 굉장하게 혼란스럽고 심각한 위기이자 음모이자 수수께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맛이였고, 영화의 재미를 돋구어 주는 대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 엉성하고 헛점많은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는 부분이나, 어찌저찌하다가 상황이 더 꼬여버리는 모양새가 즐겁고 짜릿하게 와닿았던 것입니다. "테러 박"이라는 인물과 여자주인공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연애질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이 복선입니다. 그리고 뒤에 주인공이 궁지에 몰렸을 때, 이 복선에 이어서 자기 입으로 "테러 박"이 누구인지 둘러대어 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복선과 수수께끼, 코메디를 엮어서 잘 만들어 놓은 멋진 예입니다. "F학점 첩보원"에서 "불어 선생"을 활용하는 장면이나, "나인 야드"에서 소심한 치과의사 주인공이 마지막 작전을 벌이는 모습이 비슷한 예입니다. 주인공의 성격은 더 강해지고, 위기는 아슬아슬하게 풀려나가고, 웃을 수도 있고, 상황은 더더욱 꼬여버리면서 뒷일도 계속 궁금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수수께끼의 여인에게 빠져들며 수수께끼에 빠져들기)

그러나, 주인공이 고문 당하는 처절한 장면이 지나간 다음부터, 조국의 독립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나 인간적 고뇌, 친일파에 대한 응징이나 개과천선의 의무 등등이, 이런 재치와 기지를 빼앗아 가기 시작합니다. 유쾌하고 속도감 있는 엎치락 뒤치락하는 기동성 있는 이야기가 사라져 버리기 시작합니다. 당장에 확 그렇게 가라앉아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든 "테러 박" 복선 조차도 사실 고문 당한 다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막판에는 더욱 즐겁고 신나는 결판이 벌어질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가도, 영화는 자꾸만 처절하고 비극적인 결말로 치우쳐버립니다. 영화를 울적하고 심각하게 만들어야한다고 누가 날카로운 가위를 들이대고 협박이라도 하고 있는지, 자꾸만 별 필요 없이 비장하고 심각하게 변해버립니다. 풍자가 재미나게 어울렸던 이 발랄한 인물들의 코메디는 아무 쓰잘데 없는 것인냥 무시해버리고, 눈물흘리면서 사람 여럿 죽고 우울한 긴긴 대사를 읊는 엄청나게 비극적인 이야기로 변신해버립니다.

그 정도도 좀 심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같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죽기전에 엄청나게 긴 대사하고 죽기와 비슷한 형태의 구성도 등장합니다. 특히나, 막판 즈음에는 희극과 비극이 좀 조율이 안되어서, 박해일이 연기하는 좀 웃긴 인물을 묘사하는 밝은 느낌의 장면이 별다른 연결고리나 전환장면도 없이 기나긴 눈물과 서글픈 넋두리로 홱까닥 뒤집어져버립니다.


(비장하고 장중한 마무리 2-3분 직전까지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코메디 성격)

영화 전체의 구도와 인물 구성이 초중반의 밝은 분위기 위주로 되어 있던 까닭에 이렇게 영화 끝 1/3이 이상하게 뒤틀리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아서 어색하게 잘못 튀어나온 모서리들이 이리저리 걸리는 부분도 막 생겨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 맨 마지막에 에필로그처럼 달라붙은 과거 회상장면은 영화 내내이어진 박해일의 인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구구해 보여서, 마치 사면으로 목숨 구했던 모씨가 나에게는 29만원 밖에 없다고 소리치는 장면과 어떤 면에서 비슷해 보일 지경입니다.

그외에도, 사립탐정이 "테러 박"의 정체를 밝히는 부분도 좀 심하게 어색한 군더더기로 보이는데, 거기서 사립탐정이 "테러 박"의 정체를 굳이 말로 밝혀줄 이유도 없는데 갑자기 대사가 튀어나와서 영화흐름을 끊어먹는 느낌도 들거니와, 사립탐정이 "테러 박"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영화에서 이어진 아슬아슬한 수수께끼와 갈등들도 박살나버린다는 치명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영화를 마지막까지 유쾌한 활극으로 꾸몄다면, 아슬아슬한 추격전이나 휘몰아치는 소동, 난장판 속에서 자연스럽게 "테러 박"의 정체를 언급하는 시간정도는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계속 소동과 쫓고 쫓기는 신나는 이야기가 벌어지게되면, "테러 박"의 정체가 구체적으로 언급이 안되어도 별 상관없는 모양으로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이라면, 좀 때려부수고 뛰고 매달리고 해도 재미날텐데)

반대로 생각해도 문제는 뚜렷합니다. 다시말해서, 지금 나온 이 영화의 서글프고 암담한 부분의 이야기 줄거리도 따지고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식으로 영화를 서글프고 암담하게 풀어나가는 제대로된 방법도 있기는 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호사스러운 옛 시절의 모습을 잔뜩 화려한 볼거리로 보여준다음, 마지막에는 그런 것들이 다 날아가버린 무거운 역사와 인간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쓸쓸하고 아련한 결말을 맺는 것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압도적인 자금성의 광경을 뻑적지근하게 과시했던 "마지막 황제"라든가, 제정시대 러시아의 정경을 기가 막히게 그려냈던 "닥터 지바고" 같은 영화처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그렇게 만들어 보려고 했다면, 지금 "모던보이"의 모습보다는 좀 더 진지하게 사실주의 기법을 어떻게 사용할지 생각해 보아야 했을 것이고, 영화의 중심 갈등도 극적인 수수께끼 밝히기나 "정체를 밝혀라" 이야기 보다는 좀더 뚜렷하고 단순하면서도 훨씬 현실적인 것을 택하는 것이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타짜"나 "범죄의 재구성" 같은 영화처럼, 우울한 감정이나 퇴폐적인 화면을 영화 초반부터 좀 더 강렬하게 활용하는 것이라도 적당히 깔렸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모던보이"의 인물과 갈등구도, 연출 수법은 그 기본이 아무래도 "39계단"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같은 활극 영화에 훨씬 가깝게 보였습니다. 그러니 만큼, 김혜수의 인물도 지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보다는, 에바 마리 세인트처럼, 주인공을 모험으로 이끄는 신비의 여인으로 좀 더 굳건히 자리잡는 편이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모 TV광고 장면이나 "미녀삼총사" 영화판에서 카메론 디아즈 상상 장면과 비스무레)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다시 생각해 보면, 이렇게 영화의 초점이 좀 어긋난 때문에, 멋진 장점이었던 영화의 당시 상황 재연 조차 좀 빛을 잃은 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인고 하니, 이 영화에서 컴퓨터 그래픽과 세트로 장면들이 그냥 눈에 한 번 스치고 지나가기에 멋있기는 합니다만, 극중에 본격적으로 활용되는 모습은 부족하지 싶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의 옛 서울 거리 모습들이 정말 인물들이 활약하는 아름다운 구도가 되어 화면에 잡히는 모습도 부족하고, 추격전이나 기막힌 싸움의 무대가 되어주는 창의적인 활용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먼거리에서 본 건물의 모습만 한 번 그럴듯하게 보일 뿐이지, 거기에서 등장인물들이 대화하거나 뛰어다니는 배경으로 적극적으로 써먹는 것은 좀 부족해 보였습니다. 이래서야, 공을들인 수많은 장면들 중에 상당수는 정말로 "역사스페셜"의 자료 화면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개중에서, 서울 시내를 오가는 전차를 배경으로 하는 몇몇 장면이라든가, 바닥에 퍼질고 앉아서 기도를 하는 형태로 되어 있는 명동성당의 묘사는 확실히 영화속에서 자리잡고 제 역할을 하는 부분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창의적인 안무와 음악이 필수적인 재즈 클럽의 공연 장면은 그래도 미숙한 면이 눈에 뜨일 수 밖에 없다거나, 무척 공을 들여 아름답게 묘사된 당시 서울의 밤거리 장면이 여전히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사원"에 나오는 30년대 샹하이 밤거리에 비해 딱히 더 강렬하다거나 더 나은 것은 없어 보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중간까지의 흥미로운 구성에 보기 좋은 배우들과 세트의 모습이 아깝다는 생각이 더 들어서, 이래저래 아쉬운 느낌이 남았습니다.


그 밖에...

최근 잠시 잊혀졌다가, 유행처럼 함께 등장한 일제시대 배경의 한국영화, 연속극들은, 보통 "경성"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으니, 대강 "경성물" 정도로 이름을 붙여볼만할 것입니다. 경성물들은 여러가지 잡다한 이유로 관심을 받기 시작해서 돈을 끌어 모아 제작됩니다만, 막상 만들다보면, 일제시대라는 핑계로 일본만화처럼 마음놓고 꾸며보는 뭔가가 나온다든가, 아니면 고전 헐리우드 영화의 향취를 드러내는 뭔가를 만들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후자쪽의 대표적인 사례는 재즈 공연을 소재로 삼는 것인데, 이 영화의 노래부르는 장면만해도 헐리우드 고전 걸작인 "사랑은 비를 타고"를 바로 떠올리게 될만합니다. 굳이 갖다 붙이자면, 수수께끼의 여자주인공 이름이 "로라"인 것도, "로라" http://gerecter.egloos.com/2800683 영화 생각도 나고 말입니다.

전에도 한 번 꺼내 본 이야깁니다만, 고전 헐리우드 영화를 적극적으로 끌어오려거든 일제시대 이외에도 광복후-건국초 무렵인 40년대말 50년대초를 배경으로 삼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면, 꼭 일제 라든가 친일파 라든가 하는 주제를 다루지 않고 훨씬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꾸밀 수 있으면서도, 정말로 한국에 온 마를린 먼로를 등장시켜버릴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한 이야기에서 일제를 악당이 아닌 것으로 그리기란 쉽지 않은데 비해서, 이 시기는 정치세력간의 선악구분이 훨씬 더 모호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광복후-건국초 시기에는, 암살, 공작, 음모, 테러도 훨씬 더 복잡하고 괴상한 양상으로 벌어졌기 때문에, 이리저리 꼬인 괴상한 영화 줄거리의 배경이 될만한 사건도 훨씬 쉽게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969년에 나온, 이만희가 감독을 맡은 "암살자" http://gerecter.egloos.com/3573263 같은 이야기가 이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아무래도 이 시기를 배경으로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는 반공물로 꾸미지 않으면 만들기가 어려웠기에, 일제시대 배경의 활극에 비해서는 훨씬 그 숫자가 적지 싶습니다.

덧글

  • shuha 2008/10/06 17:49 # 삭제 답글

    고등학교 때 쯤에 본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이 한창 화제가 됐던 덕분에 읽어볼 기회가 있었죠.. 음 김혜수는 고분고분할땐 참 예쁜거 같기도 하면서도.. 어딘가 사채광고 분위기가 나는군요...
  • cotora 2008/10/06 20:01 # 답글

    바로 어제 극장에서 보고왔는데 참... 재미가 있는듯 없는듯 묘하더군요.
    후반부로 극이 치닫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고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겠더라구요.
    끝까지 안보고 자긴 했지만... 뭐랄까, 확실히 뭔가 비어있는듯한 느낌의 영화였습니다.
  • showmust 2008/10/06 20:25 # 삭제 답글

    이지형의 소설대로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만,
    한국영화의 필수요소를 따지시는 제작, 투자자 분들께서 그 스토리 그대로 싱겁게 가도록 놔 둘리 없죠.
    이래서 소설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보면서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 걸까요.
  • 잠본이 2008/10/06 21:28 # 답글

    중간부터 장르가 코믹에서 멜로로 바뀌는 듯한 위화감이 들어서 영 기분이 그랬습니다.
    김혜수가 의외로 여린 인물로 묘사되는 것도 슬펐고요.
    (박해일을 이용해먹고 썩소날리며 만주로 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 로렐라이 2008/10/06 22:28 # 답글

    저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군요... 뒤에 가서 쓸데없이 처절해지는 부분에서 짜증이 났다 말았다 하더라구요.
    둘이서 숲 속에서 머리 끄댕이 잡으면서 싸우는 처절한 연애까지는 괜찮았지만... 고문 부분 부터 이건 좀 아닌데, 싶었습니다.
  • 뚱띠이 2008/10/07 13:31 # 답글

    잘 나가다 마무리 부실이라니...많이 아쉽네요
  • 이준님 2008/10/08 19:53 # 답글

    1. 일단은 그렇게 변신하는게 "감동을 반드시 주어야한다"는 현대 한국영화의 투자 조건 1순위라는 것도 있을겁니다. 더군다나 일본관련 영화는 잘 못 만들면 악플의 공격이 꽤 무서운 수준이라는 거지요

    2. 아이러니컬하게도 박태원(모 감독의 외할아버지이자 프로토 타입 도장 원본인)인 일제 연간에 저런 장르의 작품을 꽤나 남겼습니다. 박태원의 일제 연간 작품이 원작대로 영화화되도 괜찮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월북후에 쓴 한국전 전쟁 소설은 좀 아니었고 갑오농민 전쟁은 뜨거운 맛을 본 다음에 나온 괴작이지만요)

    3. 고문 장면이면... 소싯적에 "전우" 시즌2를 따라갈 작품은 없지요. 단막극치고는 쎈편이었으니까요. 이 작은 좀 무리하게 넣은 셈이고

    4. 광복후 건국초면 만들기 어려운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교과서대로 하려"고 하다가 망하는 게 많지요. 여명의 눈동자의 후반부가 그런 셈이고 서울 1945도 그런면에서는 많이 미흡했습니다. 건국전야를 그린 TV 작품중에 "재미"로 본다면야 1980년대 괴작 "새벽"만한 작품이 없지요. ("여명의 그날"은 조기 종영이니까 제외)
  • 게렉터 2008/10/09 22:15 # 답글

    shuha/ 이 영화에서는 그래도 김혜수가 무척 멋지게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cotora/ 그래도 지루하고 짜증스럽기만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좀 좋은 면이 상당히 만해서 더 그렇게 와닿지 싶습니다.

    showmust/ 아예 흥겨운 활극식으로 뭔가 부서지고 폭파되고 하는 식으로 돈을 좀 뽑아보려고 했으면 차라리 나았겠다 싶었습니다.

    잠본이/ 차라리 그런 결말이 더 낫지 않나 싶습니다.

    로렐라이/ 그래도 마지막 승전기념식 하는 장면 부분에서부터도 어찌 잘 조절되었으면 싶기도 합니다.

    뚱띠이/ 소위 "경성물"들이 다들 좀 저런식이라서 한 구석 이상하게 꼬여 있어서 공이 만이 든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더 아쉽기도 합니다.

    이준님/ "전우" 시즌2 하면 강민호의 멋 + 고문의 선정성. 이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꼭 전편 다 보고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 아롱쿠스 2008/10/10 01:12 # 답글

    게렉터님, 박종설씨에 대한 포스트도 한번 해보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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