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히치콕 극장 Alfred Hitchcok Presents 영화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 (Alfred Hitchcock Presents)"은 지금으로부터 50년도 더 된 옛날인 1955년부터 거의 10년에 걸쳐 이어졌던 텔레비전 단막극 시리즈입니다. 단막극의 내용은 주로 범죄를 소재로 삼는 30분 정도의 짧은 이야기들을 줄줄이 보여주는 것인데, 보통 반전이 있는 절묘한 줄거리를 선보이거나, 기괴한 반어적인 상황, 역설적인 심리의 충격을 다루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만, 물론 이 단막극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극 시작과 끝에 진행자로서 영화 감독 중에는 천하제일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나와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마무리 인사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약간 어긋난 비유이고, 분위기는 무지막지하게 다릅니다만, 현재 한국에서 방송중인 TV쇼에 견준다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최근까지 MBC의 "TV서프라이즈"에서 김용만이 하던 것 비슷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Good evening. 항상 이 말로 쇼를 시작합니다.)

잡다한 잡지를 넘겨보다 보면, 미국에서는 1950년대 즈음 부터 1960년대 초반에 걸친 시기 정도를 "텔레비전의 황금시대(The Golden Age of Television)"라고 일컫는 것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텔레비전이 팔렸던 시기일리는 없고, 텔레비전극의 규모, 재미, 분량에 있어서는 역시 풍요로운 21세기 텔레비전이 더 풍성하니까 단순히 양적인 비교로 그 먼 옛날이 "텔레비전의 황금시대"라고 불리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습니다만은, 한가지 생각할만한 것은 바로 그 시대가 과감하게 텔레비전으로 영상매체가 할 수 있는 왠갖 것에 도전해 본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고 냉전 구도가 서서히 자리잡는 것과 때를 맞추어 미국이라는 세계 초강대국의 절대적인 안정과 풍요가 극에 달하는 시기가 찾아 왔습니다. 그러니 당시로서는 첨단 문명의 극치라 할 수 있는 "텔레비전"이 미국에 널리 보급되면서 정말로 집집마다 안방에 "안방극장"을 갖춰 놓고 그때그때 방송국에서 틀어주는 영상을 즐기는 충격적인 새로운 문화가 안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시기에 영상 매체의 표현 방법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전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나아가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문화"라든가 "예술"을 즐기는 방식 자체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생각도 한 번 해 봅니다. 바로 이 시기에 미국 텔레비전 화면 속에는 바로 그 토스카니니가 등장해서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고, 텔레비전 화면 위에서 수많은 미술 작품들이 선 보여졌으며, 세상 각지의 풍물과 소식들이 영상으로 담겼고, 세익스피어의 고전이 상연되고,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이 펼쳐졌습니다.

당연히 텔레비전을 통해 뭐든 해 보겠다는 의욕이 가득하던 시대였을 겁니다. 많은 영화판 사람들이 돈주고 입장하는 극장수익을 노리는 영화와는 다른 공짜로 볼 수 있는 텔레비전극의 묘한 점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단막극 시리즈들이 다양하게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는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시청자의 이목을 붙잡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진 날렵하고도 흡인력 있는 이야기들이 상당히 생겼습니다. 그러면서도, "극장에서 돈 주고는 안 보는 관객"들도, "집에서 공짜로 TV에서 본다면 볼"수도 있으니까, 실험적인 내용, 기묘한 기술적인 시도를 곁들인 단막극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미국의 "텔레비전의 황금시대"라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80년대 중반, 후반 무렵의 텔레비전과 비슷한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TBC 고별방송의 충격이 정리되고 컬러 텔레비전의 가능성이 자리잡던 시기의 우리나라 TV 방송은 비슷한 맛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베스트셀러극장" 같은 단막극 시리즈에서는 진지한 문예 작품을 영상화 하는 것에서부터, 괴기물에 가까운 기괴한 이야기들이 당시 한국 영화에서는 꽤 보기 힘들었던 동시녹음으로 촬영되었고, "수사반장"에서는 소재는 실제 범죄 사건에서 찾되 그 연출 방법에서 갖가지 화려하고 과감한 수법들을 마구 펼쳐버리는 도전들이 있었습니다. 주말 황금 시간대에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해외 TV물을 거침없이 내보내주는가 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과 품질을 지닌 어처구니 없는 흘러간 한국영화를 볼 기회도 넉넉하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결코 전체적인 값에 있어서 요즘 TV보다 나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TV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해본다는 식으로 만들어지던 TV극들, 특히 단막극들이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대통령으로 훨씬 더 많은 일을 저지른 로널드 레이건 같은 양반도 따지고 보면 연예인으로서는 바로 이 미국 텔레비전의 황금시대에 TV단막극 시리즈의 진행역할을 맡은 것으로 아마 제일 널리 얼굴을 알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탄생한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은 가장 대표적이고 전설적인 단막극 시리즈로 굳건히 자리잡아서, 후에 나오는 수많은 비슷한 세계 각국의 SF/환상 단막극 시리즈의 직계 조상이 되었으며, 나아가 수많은 SF작가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은 제목에 "알프레드 히치콕"이라는 이름이 들어가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얼굴과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가장 풍성한 자료가 된다는 면 때문에, 지나치게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중심,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직접 감독을 맡은 에피소드 중심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이러저러한 성향의 사람이고, 그 증거는 이러저러한 작품들의 공통점이 이러저러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현기증'/'새'/'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숨은 의미는 바로 이러저러한 것이었지롱!" 이라는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뭔가 남들은 안 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감독작을 끄집어 낼 수 있는 희귀한 근거자료 정도로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이 취급당하는 일이 잦았지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어판 DVD까지 나왔고,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곳도 이리저리 돌아가며 찾을 법도 해져서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은 이런 잘난척 용 희귀자료에서는 벗어나게 되었지 싶습니다. 더이상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팬들이 소녀시대 지방 공연 동영상 모으듯 모으는 팬 수집품이 아니라, 한 때 무척이나 재미나게 심야TV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휘잡아 놓았던, 심야 단막극 시리즈만의 오묘한 맛을 보여주었던 예스러운 고전으로 즐길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의 단막극들은 훨씬 더 볼거리들이 풍족해 집니다. 고전시대 할리우드의 명배우들이 생동감있게 TV극에서 활동할 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는가하면, 30분 안쪽에 들어오는 짧은 시간 동안 가볍고 빠르고 집중력 높게 펼쳐지는 단편물의 맛을 한 껏 즐길 수 있는 기회도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칫 "단편영화"라고 할 때의 왠지 학구적이고 전위적이고 재미없을 것 같기만한 엉뚱한 편견과는 전혀 다르게, 어떻게든 시청률 높여보려고 최대한 시청자들을 잡아 둘 수 있게, 빨려들게 만들려고 애쓴, 휘어잡는 맛이 있는 "단편" 영상물을 줄줄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런류의 TV단막극들은 한 때 재능있고, 개성있었던, 작가, 연출가들의 솜씨를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되는 수가 많습니다.

영화나 책은 출판되면 남겨져서 뒤늦게 재평가를 받거나,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가치가 드러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 혈기, 신인의 열정으로 기염을 토하는 재미난 것을 꾸며낸 TV극의 경우에는 그 후 별로 작가/연출가가 유명해지지 못하면 기록에 남지 않고 잊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십년 전에 보고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멋진 줄거리였던 "수사 반장" 에피소드나, 기가 막힌 소재를 다루었던 "베스트셀러 극장" 에피소드가 분명히 기억 저편에서 생각나지만, 그것이 그때 딱 한 번 방송을 탈 기회를 얻었던 신인 작가의 단 한편의 걸작이었다면, 그 후로는 단 한번도 다시 볼 기회를 찾지 못하고 사라져 가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50여년전의 TV단막극 시리즈를 다시 돌아보는 지금 우리로서는, 지금까지 전혀 전해지지 않는 이름의 연출가가, 지금까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작가의 극본을 TV극으로 꾸민 것을 볼 기회가 됩니다. 그래서 이름있는 작가의 작품이 아니었기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외로 그 사람들이 방송국에 실력을 인정 받은 유일한 기회로서, 신인 시절에 딱 한 번 보여줄 수 있었던 걸작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두 편 정도의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서 대강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 시즌1 1956년 2월 12일 방영분: 그리고 그렇게 리아부친스카는 죽었다(And So Died Riabouchinska) -

(찰스 브론슨, 클로드 레인스, 인형)
흥겨운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무대 뒤편에서 갑자기 죽은 시체가 발견됩니다. 무대 뒤편을 오가면서 형사는 범인을 밝혀내려하는데, "리아부친스카"라는 이름의 인형을 사용하는 한 복화술사 늙은이가 어쩐지 사건과 연계되어 있는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복화술은 이 바닥에서 자주 써먹게 되는 소재입니다. 일단 인형이란 것이 괴기스러운 이야기에 단골 소재인데, 복화술은 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인척하고 인형을 흉내내게 된다는 면에서 한 사람의 정신이 두 개로 분열된다거나 하는 이야기에 견주기에도 아주 딱 좋습니다. 복화술사의 조종을 받는 복화술사의 철저한 창조물이자 노예인 인형이 오히려 복화술사를 서서히 지배하게 된다는 류의 초현실적인 이야기는 아주 전형적인 구도가 됩니다. 뭐, 화끈하게 과감하게 밀어붙인 예로는 "납골당의 미스테리(Tales from the Crypt)"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단연 꼽을만하거니와, 은근슬쩍 상징적인 느낌으로 이런 소재를 써먹는 것으로는 하다못해 "시카고(Chicago)"의 한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 에피소드인 이 "그리고 그렇게 리아부친스카는 죽었다"는 그 중에서도 상당히 매끄럽고 은은한 수준으로 이 복화술 소재를 괴기스럽게 활용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은한 것이 문제인지, 사건의 진상은 별달리 진상이랄 것도 없고, 진상을 숨기기 위해 나오는 속임수들은 조금 지겨울 정도로 무심한 것들 뿐입니다. 그래서 자칫 별다른 화끈한 반전도 없으면서 괜히 숨겨진 인간관계, 대단한 숨겨진 과거가 있는냥 시간만 끄는 이야기로 잘못 비칠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엎어버리는 것이 개인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클로드 레인스의 연기입니다. "카사블랑카"나 "오명"에서 보여준 탄탄한 연기 역시 최고의 솜씨입니다만, 이 TV극 속에서 보여주는 짧은 개인기 쇼의 안정감있고 부드러운 모습 또한 그에 견줄만 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막판에 "이제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하고 나서 모든 사건을 다 주절주절 혼자 설명해줍니다. 이런 것은 영화나 TV로 보여주기에는 매우 건조하고 답답한 방식으로 이야기 절정과 결말을 때우는 셈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클로드 레인스는 그 부분의 역할을 혼자 맡아서는 한참 동안 긴긴 혼자 하는 대사로 자기 혼자 화면을 버티면서 극의 절정과 결말을 혼자 끌고 나갑니다. 그리고, 변해가는 말투와 절묘하게 일그러지는 표정, 적절한 감정의 발산을 버무려 터뜨려서, 흥미롭고도 기괴하면서도 나름대로 감성에 대한 공감마저 느낄만한 힘 마저 냅니다.

이 에피소드의 이야기는 단순하게 잘못 엮어내다보면 그냥 싱거운 주술적인 귀신 이야기 분위기만 알수 없게 풍기게 되기 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클로드 레인스의 연기와 이 개인기를 풍요롭게 담아내는 화면 연출 덕분에, 이야기는 사실감과 현실감이 충분한 정신병적인 실제적인 내용으로 뼈대를 굳건히 세우면서도, 오묘한 신비로운 분위기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인 정신병적인 소재를 신비롭게 엮어 내면서 인간의 감성이나 나약한 측은한 부분에 대한 공감을 건드리는 꽤 진지한 느낌도 분명히 느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역을 맡은 한 "무명 배우"의 모습도 볼 거리입니다. 이 배우는 한참 후에 영감님이 된 70년대말, 80년대초 쯤이 되어서 우리나라에서 굳건한 모습으로 인상을 굳혔던 바로 그 "찰스 브론슨"입니다.

혹자는 노년의 찰스 브론슨은 온화한 백인 할아버지 같아 보였는데, 이 이야기 속 모습에서는 까칠한 성격의 남미나 아시안계처럼 보인다고 하기도 했습니다만, 찰스 브론슨 하면, 순수한 악당의 모습이 아니면서도 무표정이라고 해야할 것 같은 묘한 인상 한 번 쓰면, 별로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은 것 같은데도, 왠만큼 더러운 인상쓰는 악당들 보다 열두배는 더 무서워보이는 오묘한 "주특기"가 전설적인 배우라 하겠습니다. 바로 그 찰스 브론슨이 새파랗게 젊은 시절 - 흑백 TV라서 새파란 색깔이 별로 눈에 뜨이지는 않습니다만 - 에, 아직 찰스 브론슨 다운 격한 개성은 없지만 나름대로 꿋꿋이 제 몫은 잘 해내는 모습을 이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시체가 발견되기까지의 도입부에서 사람들의 시선, 대화의 설정과 시체를 보게되는 화면의 움직임이라든가, "카르멘" 같은 오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비극적인 상황과 반어적으로 배치되는 경쾌한 음악이 멀리서 가만히 들려오는 상황을 이용하는 수법이라든가 하는 것들도 주목해 볼만합니다. 화려한 기교나 놀라운 개성은 없지만 정석을 견지하는 이러한 연출상의 솜씨도 이야기를 재미나게 따라가게 해 주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시즌1 1956년 6월 10일 방영분: 미끼(Decoy) -

(독백을 하며 범인을 추적하는 주인공)
1950년대 미국 서부의 어느 도시의 밤. 독백으로 현란한 대사를 마음 속으로 읊조리는 흑백 화면 속의 주인공 앞에 아리따운 여인이 있습니다. 여인의 직업은 클럽의 가수. 주인공은 위험에 처한 듯한 여인의 상황을 보고 감정이 동합니다. 주인공은 어딘가 잘못 걸려든다는 불길한 느낌이 있으면서도 그 여인에게 서서히 빨려들면서 사건에 엮이게 되고, 주인공은 결국 범죄의 한 가운데에 빠지게 됩니다....

...... 이런 것이 가장 전형적인 1950년대의 느와르 영화 분위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미끼"도 딱 이런 내용을 줄거리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뭐 어떻게 흘러가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을 레이몬드 챈들러 소설이나 험프리 보가트 영화로 알고 있다면,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범죄의 범인 내지는 사실상의 범인이 누구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볼거리는 어찌보면 이야기의 묘한 특징이나 절절한 감동을 느낀다는 것보다는 30분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50년대 느와르 영화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후다닥 재빨리 어떻게 늘어 놓고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 구경거리가 되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더군다나 이 이야기가 촬영된 시기 자체가 바로 50년대 느와르 영화가 유행하던 시기에서 별로 멀지도 않을 때니까, 더 신기한 구경거리가 됩니다.

과장된 어조로 읊어대는 마음 속 생각에 대한 독백. 어색해 보일만큼 지나치게 마음 속 생각의 독백에 맞춰 움직이는 동작과 표정, 미친듯이 폼을 잡는 대사나 독백에 비해서 정작 총쏘는 동작이나 격투는 조잡할만큼 가볍게 표현하는데 그치는 것들. 지금 와서는 제대로 찾아서 보기도 어려울 법한 50년대에 쏟아진 닳고 닳은 형태의 느와르 영화의 면면을 이 이야기에서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즐거운 부분은 이런 전형적이고 그다지 별 감동 없을 만한 내용을 다루지만, 그 형식이 30분짜리 단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루하고 재미없는 느낌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의 특징과 분위기를 핵심만 쏙쏙 뽑아서 한번 확실하게 맛보게 해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삼겹살을 대놓고 사서 먹으면 냄새도 베고, 살도 찔 것 같고, 너무 느끼해서 속도 안 좋을 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시식코너에서 한 점 살짝 집어 먹는 것은 그런저런 두려움 없이 산뜻하게 돼지라는 동물의 가장 맛난 핵심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1950년대 분위기 속에서, 1950년대에 유행한 느와르 영화 특유의 향취를 느껴볼 좋은 기회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군데군데 꽤 괜찮은 구석도 많습니다. 별 개연성도 없이 복선을 던지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복선이기 때문에 너무 노골적인 내용은 가려야할 필요가 있을 때, 살짝 맛이간 인물인 이야기 속 DJ 녀석을 등장시킨 것은 썩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쓸데 없이 히죽대면서 껄렁하니 이상한 정신상태면서 괜히 인기만 많은 이 맛간 DJ는 결코 옳은 제 정신이라고 할 수 없는 인간이라서 이야기속에 필요한 만큼만 헛소리를 하고 그치게 해도 잘 들어 맞습니다. 그러면서도, 말투며, 표정, 배우 선정, 연기 설정, 무엇보다도 아주 사실적으로 들리도록 대사를 잘 써서 이런 인간이 있을 법도 하다는 느낌도 충분하게 해 놓았습니다.

이런 인물을 등장시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대책없이 막힌 이야기를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기술의 한 모범으로 생각해 볼만합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은 보기에 따라서는 연출자로서 알프레드 히치콕에 대해서 살펴보기 보다는, 그냥 인간 알프레드 히치콕으로서, 혹은 텔레비전 진행자로서 알프레드 히치콕을 살펴보기에 훨씬 더 좋은 소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표정하고 무뚝뚝하면서 별 표정 변화 없이 등장해서 천천히 특유의 좀 새는 발음으로 말을 읊조리는 데, 그러면서도 말투에는 어딘지 동네 수다쟁이 할머니 같은 구석이 좀 서려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짓궂은 괴짜 영감님 같은 스스로의 모습을 화끈하게 활용해서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냉소적이면서도 음침한 농담으로 잘도 이끌어 줍니다.


(흥미로운 진행을 위해서라면 몸개그도 불사)

이렇게 정장을 차려 입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정중한 말투로 괴상한 농담을 읊어대는 심야TV 단막극의 형식은 이후 TV 문화의 발전에도 선구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연출자가 아닌 텔레비전 쇼 진행자로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개성과 후대에 끼친 영향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일본의 "세상의 기묘한 이야기"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 정장을 차려 입고 나와서 이야기 앞뒤에 냉소적인 해설을 덧붙이는 타모리의 모습은 이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의 히치콕 감독에서 영향을 깊게 받은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기묘한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한 한국 MBC의 "환상여행"에 나온 권해효 역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TV쇼 진행솜씨"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봅니다.



그 밖에...

"TV서프라이즈"에서 한국/일본식 TV버라이어티쇼 진행자처럼 나왔던 김용만이 더 이상 출연을 하지 않게 된다는 보도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연료가 훨씬 더 싼 권해효를 등장시켜서,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처럼 앞 뒤에 간단하게 괴기스러운 소개를 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정말로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 분위기가 나도록 박찬욱 감독이나 배우 윤여정 정도가 역할을 맡아도 그럴듯해 보일 듯 합니다.

핑백

  • 게렉터블로그 : 주가 등락 예측과 사기 수법 2011-07-22 14:50:11 #

    ... 이겠습니까? 언제부터 떠도는 수법이겠습니까. 위대한 영화 감독으로 이름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직접 출연해서 각 편을 소개했던 TV 단막극 시리즈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Alfred Hitchcock Presents)"의 시즌3 두 번째 에피소드를 보면 위 수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방송이 최초로 이 사기 수법을 소개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 more

  • 게렉터블로그 : 죽은 듯 고요한 밤 (악몽의 밤, Dead of Night, 1945) 2014-11-25 10:44:42 #

    ... 복화술사의 인형에 관한 이야기는 수많은 복화술사의 인형에 관한 섬뜩한 영상화판의 원조라 할만한 것이라서,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은 조금씩 다르지만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Alfred Hitchcock Presents)"의 301에피소드 “유리 눈알(Glass Eye)”이나, 납골당의 미스터리 TV판의 에피소드 210 “복화술사의 꼭두각시 (The Vetnri ... more

덧글

  • DOSKHARAAS 2009/03/05 00:11 # 답글

    저 복화술 이야기는 레이 브레드버리의 단편 소설이 생각나게 하는 군요.
  • soup 2009/03/05 00:17 # 답글

    오프때 정말 잼있게 본 작품이에요.
    개인적인 시간때문에 나머지도 보지 못한게 아쉬울 정도였어요.
  • FAZZ 2009/03/05 00:59 # 삭제 답글

    권해효가 그런역을 말씀대로 맡는다면, 예전에 여기 블로그에서 권해효가 나왔던 심야 드라마 시리즈라고 해야 하나? 블로거분들이 스토리를 덧글로 달아서 정리했던 그거 말이죠(기억이...) 그렇게 되는거 아닙니까? ^^

    그나저나 간만에 글을 보게 되서 기쁘군요
  • 새매 2009/03/05 01:30 # 답글

    복화술 이야기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이 원작인 게 맞습니다. 도솔에서 나온 미스터리 걸작선에 번역되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
  • 뚱띠이 2009/03/05 10:59 # 답글

    오랜만에 올리신 새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테리군 2009/03/05 13:23 # 답글

    허세와 허풍으로도 유명했던 히치콕. 당시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은 이런 측면에서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 잠본이 2009/03/06 22:58 # 답글

    복화술과 인격분열이라는 소재는 배트맨 시리즈 중에 등장하는 모 악당을 통해서도 구현되었죠. (소심한 회계사와 포악한 인형 갱두목의 콤비[?] OTL)
  • 게렉터 2009/03/09 09:25 # 답글

    DOSKHARAAS, 새매/ 저는 저 TV극판이 원작보다 좀 더 나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soup/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직도 그날의 감동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FAZZ/ 바로 "환상여행"입니다.

    뚱띠이/ 오랫만에도 그대로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또 반갑고, 또 감사드립니다.

    테리군/ 당시 영화 작업하던 알프레드 히치콕 이야기, 후일담 같은 것 보다보면 "TV 때문에 바빠서..." 어쩌고 하는 핑계를 대는 내용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이는데, 비슷한 맥락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본이/ 공포물 중에는 정말 많이 나옵니다. 피노키오 인형 나오는 그 영화도 사실은 거의 비슷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 추유호 2009/03/14 23:52 # 답글

    게렉터님 요번 신간의 '박시은 특집' 너무 재밌네요. ㅎㅎ
    글을 남길 위치가 마땅하지 않아 여기다 남깁니다. :)
  • 게렉터 2009/03/16 15:07 # 답글

    추유호/ 대단히 감사합니다. 추유호님 주변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도 궁금합니다. 제 경우에는 특히 제 이야기 처음 보는 분들이 많이들 좋아하셨습니다.
  • 추유호 2009/03/20 22:16 #

    앗 '박시은 특집'이 아니라 '특급'이군요-_- 죄송합니다.
    제가 인간관계가 협소해서, 이런 책을 읽어 줄 사람이 없네요. ㅠㅠ
  • 게렉터 2009/03/24 10:00 # 답글

    추유호/ 다른 글들도 이야기도 재밌는 것이 많으니, 단편집 전체를 재미나게 잘 읽어 주십시오~
  • 진성당거사 2009/04/08 00:35 # 답글

    정말 1950년대 초(1952년쯤?)부터 1960년대 (대략 1969년 전후)까지는 미국 TV의 황금기였던듯 합니다. 언급하신 Alfred Hitchcock Presents, The Twilight Zone 등등의 스릴러부터, I Love Lucy와 Bewitched 같은 전설적인 시트콤, 그리고 What's My Line?, I've Got Secret! 같은 퀴즈 쇼 등등. 지금 봐도 전혀 모자란 것이 없이 매혹적입니다.

    아, 인트로 음악이 구노 작곡의 "Funeral March of A Marionette"의 편곡 버젼이라는 것도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게렉터 2009/04/13 16:59 # 답글

    진성당거사/ 아무렴 시작하는 음악 유명합니다. 오히려 요즘에는 이 노래는 구노 보다는 도리어 "히치콕 극장 주제곡"으로 더 잘 알려진 듯 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