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영화

공교롭게도 케이트 윈슬렛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천상의 피조물" http://gerecter.egloos.com/2849512 이야기를 할 때 언급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영화에 반전이란 것을 미리 아느냐/마느냐 하는 점은 여러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화랑 관창이 황산벌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결정적인 순간은 미리 모두에게 알려져도 영화보는데 별 상관 없는 내용일 것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맘마미아" 같은 영화를 볼 때는 줄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음악이 뭐가 깔려드는지 하는 것이 숨겨진 기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뭔지 모르고 보면서 이 음악, 저 음악에 신기해하고 감탄하는 게 맛이기에 배경음악을 알려주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이 영화 "더 리더"는 시대적 배경에 민감한 인생에 걸친 사랑 이야기라는 정도만 알고 보는 편이 이 영화가 던져주는 놀라움과 호기심을 맛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대체 뭔 내용이야?: 포스터를 봐도 알 수 있는게 없습니다.)

제목이 "더 리더"인데, 도대체 이것이 오디오북 녹음하는 성우의 이야기라서 "더 리더"인지, 아니면 e북 기계 개발하는 기술자가 애크로뱃리더를 능가할 PDF리더를 만들기 위해 고생하는 이야기인지, 그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보는 것이 가장 흥미진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자신의 개성에 십분 들어맞는 멋있는 것이고, 복선들과 시간을 왔다갔다하는 이야기 구조는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긴장감을 잘 생기게 하는 영화입니다. 느긋하면서도 주요 장면에서 충실한 실력을 갖춘 연출은 감상적인 분위기가 충분히 있으면서도, 궁금증을 돋구다가 풀릴 때마다 격렬한 느낌도 있습니다. 결말 부분에서 좀 어쩔 수 없이 약간 궁금증/긴장감이 많이 떨어지면서 시간을 소모하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 정도면 사춘기 소년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에서 부터, 훨씬 더 다양한 여러가지 소재들을 부드럽게 엮는 내용으로 적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 대강의 윤곽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는 이야기인지...)

이 영화의 중대한 반전이라면 반전은 초장에는 꼭 개인적인 성장담이나 두 사람간의 감정 교류에 초점을 맞추는 이야기인것처럼 출발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시작할 때만 보면 남녀주인공의 "부적절한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두 사람 간에 여러가지 다채로운 격정적인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내용의 전부일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장부터는 갑자기 역사, 시대 배경, 인류학과 연결되는 사회적인 내용으로 이야기가 급격하게 확대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개인적인 감정 교류에서 사회적인 맥락으로 뛰어 오르는 과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복선과 전환 방식의 솜씨가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이러한 이야기 변화가 놀랍다는 생각이 들고, 의외라는 생각이 들도록 꼼꼼히 잘 숨겨 놓기도 했습니다. 결코 이 정도로 진지한 사회적인 이야기로 내용이 커지지 못할 것처럼 보이도록 숨겨놓고 출발하고 있었기에, 막상 영화 중반부에 사건이 사회적인 주제로 초점을 옮겨가게 되면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되어 가려고 이렇게 빠지나?" 하는 생각이 충격을 주고 이야기 속에 빨려들도록 하게 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자연스러운 이야기 연결과 충격적인 국면 전환 이라는 함께 해내기 어려운 두 가지를 썩 잘 해내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눈빛과 ???의 눈빛)

특히, 옛 사연이 "피해자"의 입을 통해서 무심하게 울려퍼질 때, 관객들은 영화 중심 소재를 택해서 뒤엎어버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놀라게 됩니다. 사랑의 표시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악덕의 상징이었고, 순수한 신실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사실은 변태의 노리개라는 식의 이야기가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의 감정과 기억은 전혀 모르는 피해자가 무심하게 그러한 옛 사연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오면서, 이 영화는 동시에 주인공의 모습도 보여주도록 짜 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조를 이루면서, 뒷자리 구석에서 듣고 있던 주인공이 그러한 옛 사연을 듣게 되면서 전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충격은 커집니다. 숨겨진 사연을 알고 관객들이 놀랄 때 주인공도 같이 놀라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감정 이입하게 하는 장면은, 영화가 국면 전환에서 주는 충격을 극적으로 활용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중반 이후에 확 인류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이야기까지 확대되어 버리고, 초반에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간다는데에 대한 복선도 많이 깔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이 반전처럼 느껴지도록 잘 감춰 놓은 것은 이 영화의 첫번째가는 멋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나눠 보자면 여기에는 영화적인 기술과, 줄거리 상의 기술이 둘 다 하나씩 힘을 발휘했다고 생각합니다.


(케이트 윈슬렛)

화면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측면에서는 역시 영화 초반에, 두 주인공 배우들의 관계를 충분한 노출과 관능미가 충분한 묘사를 통해서 드러내서 보여주었다는 점을 짚어야 할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영화 초반에 두 배우의 몸과 서로간의 탐닉이 화면 가득 펼쳐집니다. 남자 주인공을 여자 주인공이 뒤에서 껴앉는 대목에서부터 시작해서, 남자 주인공이 밥먹으면서 기억을 돌이켜보는 대목까지는 두 배우들의 숨소리와 시선을 담아내는 기술까지 끈적끈적합니다.

이런 것을 보여주면서 이 영화는 영상매체의 묘미를 살렸습니다. 당연히 이렇게 두 남녀 주인공의 내밀한 상황에 대한 묘사는 영화 전체가 두 주인공간의 관계나 내연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런 영상을 잠깐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남녀의 관계에 밀착하는데 중심을 잡고 있다는 생각을 막연히 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배우들의 노출과 서로간의 친밀한 연기가 관객이 그런 고정관념을 갖게 만들었기에, 앞으로 사실은 매우 사회적인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는 점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그런 장면들 자체가 영화 전체에서 차지하는 시간상의 비중이 그다지 길지는 않습니다. 비록 남녀의 모습을 충분히 드러내어 화면에 담아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신경을 빼앗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화면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시간과 길이로 따지면 어쨌거나 짧은 시간 동안 박자감각 있게 여러사건이 터지는 와중에 잡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중반부에 다른 내용으로 빠지더라도 초반부에 한참 다른 소리만 하다가 급변해서 어색하다는 느낌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남녀주인공의 교류에 달라붙어 있는 이야기들을 간결하게 보여줘서, 뒤에 좀 다른 이야기가 달라 붙는 것을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래도 시각적인 인상은 강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러다가 PDF리더 프로그램 만드는 고충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빠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은 단순히 반전과 같은 중반의 국면전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을 감추는 용도에만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중반 이후에도 두 등장인물의 감정 교환과, 심경 변화도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다루는 사회적인 문제나 인간 윤리, 도덕에 관한 내용들이 이어지고 커져나가는 가운데에도 그런 내용을 같이 고민하면서 또 같이 갈등하는 감정적인 인간에 관한 내용도 이끌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질 때에 초장에 나왔던 충분히 시각적으로 인상을 남기는 묘사가 여운으로 이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관객들이 화면을 보고 기억하는 것처럼, 과연 두 남녀 주인공들이 서로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첫사랑의 기억이 오래도록 인생에 남았다는 데 설득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관능미와 열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 보여준 것이 그 효과를 오래 남겼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사이에, 주인공들이 과거의 사랑에 대한 개인의 기억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이 요동치는 내용이 끼어들어도 크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게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자전거 여행의 추억)

이 영화 초반은 사춘기 소년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였고, 중반 이후의 이야기는 사회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옮아가는 것이 부드럽고도 강렬했던 또다른 이유는 여자 주인공 케이트 윈슬렛의 인물을 짜 놓고 활용하는 방법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을 맡은 케이트 윈슬렛은 옛날 느와르 영화에 자주 나오는 "위험한 여인" 인물을 맡았습니다. 숨겨진 비밀이 있고, 불길한 느낌이 있고, 범죄나 죄악과 연결될 듯한 분위기가 흐르고, 그러면서도 넘치는 매력으로 유혹하는 느낌이 있는 신비의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도저히 배경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 여자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차차 하나씩 하나씩 성격과 취향과 배경을 드러내도록 하면서 이야기를 꾸몄습니다. 처음에는 여자 주인공이 뭐해서 먹고 사는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게 해놓았고, 그 성격도 종잡을 수 없이 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펼쳐지면서 여자 주인공의 취향, 말버릇, 직업 같은 것들이 하나둘 조금씩조금씩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니 여자 주인공의 비밀을 하나 확 더 터뜨리면서 내용을 뒤집어 엎는 순간으로 잘 연결해 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금발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금발도 갖고 있지 못한 머리칼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나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영화는 나이 많은 여자 주인공이 15세 사춘기 소년을 유혹하는 이야기로 출발한다는 점을 주목해 볼만합니다. 당연히 죄의식이나 죄악, 불안한 관계나 비도덕적인 상황에 대한 암시와 분위기 조성이 충분히 이루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이야기가 더 어둡고 더 엄청난 비밀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적당히 자연스럽습니다. 케이트 윈슬렛의 인물이 성격이 이상하고, 어딘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수수께끼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뒤에 그런 내용들을 일거에 덮어버릴 수 있는 매우 다른 강한 비밀로 연결되는 것이 충분해 보입니다.

더우기 케이트 윈슬렛의 인물이 15살짜리 꼬드기는 좀 어두운 역할이라는 점은 선명합니다. 그러다보니 영화 초반에 아슬아슬한 불안한 분위기,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 충분히 생기고, 케이트 윈슬렛 인물에 대한 괴상한 어두운 분위기를 잘 잡아 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영화가 좀 더 어두운 소재로 확 치달으면서, 죄의식, 도덕적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로 치닫는 상황과도 잘 연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느와르 영화 여자 주인공 같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남녀 주인공의 역할분담도 딱 그대로 입니다. 이 영화는 관객들과 관점이 멀지 않은 남자 주인공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여자 주인공을 보고 느끼는 이야기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옛날 느와르 영화 주인공들 처럼 독백을 읊는 소리가 배경으로 깔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남자 주인공의 상상이나 회상 장면이 화면에 표시되는 등등, 그 마음속 상황과 감정이 관객들에게 충분히 드러납니다. 그렇게 꾸며 놓았기 때문에, 주인공이 갖고 있는 호기심이라든가 신비롭다는 생각이 화면 속에서 잘 전달 됩니다.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하는지 화면에 표시되는 남자주인공이 있으니까, 자연히 이 영화는 남자주인공의 내면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주인공이 관심 많은 여자주인공의 내면에 대한 호기심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는 여자주인공에 대해서 관객들은 영화 속 남자주인공과 함께 호기심을 갖고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관객들은 좀 더 남자 주인공과 하나가 되어 영화속 등장인물들을 바라보게 되고, 그 감정이 더 잘 전달되게 됩니다. 나중에 여자 주인공의 비밀이 밝혀질 때 남자 주인공이 경악하는 장면이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 다시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 등등에서, 그 감정의 동요가 쉽사리 관객들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속이 뻔히 드러나는 남자,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여자)

이 영화에서는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등장인물들이 정체를 드러낼 상황을 자아내는 장면을 부드럽게 가져다 놓기 위해서, 복선들을 잘 사용하는 구석도 있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무심하게 지나치는 몇몇 요소들이 복선이 되어 주어서, 영화 분위기를 잘 돋굽니다. 그러면서 영화 줄거리가 의외로 흐를 때에도 이 영화를 지켜보는 감정이 별 흔들림 없이 잘 이어지기도 합니다.

복선들은 짧게 분위기만 만들어주는 간단한 것부터, 반전 같은 국면전환을 암시하는 꽤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까지 다양하고도 적절하게 잘 깔려 있습니다. 우표책에서 슬쩍 비춰주는 우표에 그려진 모양이라든가, 여자 주인공이 뜻도 모르면서도 읊어주는 그리스어에 감동하는 성격이라든가, 문학시간에 서양 문학의 근간은 비밀이라는 강의를 듣는다든가, 여자주인공이 "교회"에 앉아서 깊은 감흥에 빠진다든가, 여자주인공이 "누구도 사과를 할 필요는 없다"라고 중얼거린다든가, 남자주인공을 꼭꼭 "꼬마야"라고 부르는 여자 주인공의 말버릇이라든가,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나, 이 영화에는 하나의 복선을 쌍으로 두 번에 걸쳐 울궈먹는 사례가 있어서 더 효과를 돋구는 구석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복선에 해당하는 장면이 하나 펼쳐지면, 관객들은 이제 그때 그 복선은 이제 써먹고 지나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같은 복선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하나 더 펼쳐져서 중의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면서도 관객들이 보기에는 매우 의외의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복선은 벌써 이야기에 한 번 써먹은 줄 알았는데, 한 번 더 써먹는 다른 이야기가 또 나오니 놀랍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영화에 나오는 "서양문학의 근간은 비밀에 관한 이야기이다"라는 말을 처음 듣는 장면을 꼽아 볼만합니다. 이 말을 주인공이 듣는 것은 우선은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과의 관계를 비밀로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상징과 암시입니다. 나이든 독신녀와 사춘기 소년이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그 사실이 바로 "비밀"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계속 보면, 실은 여자주인공이 엄청나게 큰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이야기로 다시 한 번 연결되고, "비밀"에 관한 복선은 여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저러고 책을 읽어 달라고 하는 겁니까?)

영화의 연출 방식은 기본기가 충분하고 성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다보면 좀 진부한 방식에 너무 전형적인 수법으로 내용을 표현해서 약간 싱겁다는 생각이 안드는 것은 아닙니다. 차분하고 감상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 등장인물 한명이 말없이 걸어다니는 장면,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장면을 잠깐잠깐 보여주는 모양 같은 것은 제몫은 합니다만, 워낙 비슷비슷한 장면들이 여러 영화에서 많이 보이던 탓에 좀 지루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위해서 주인공 혼자 말없이 있는 장면 보여주는 것)

그렇습니다만, 각본과 편집 방법에서 이야기 구성을 시간을 왔다갔다하면서 해 놓은 모양은 꽤 멋집니다. 한 인생에 걸친 두 사람의 사연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과거 사건과 현재 사건을 번갈아 가면서 진행하는 영화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이 영화 "더 리더"는 꽤 잘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과거 사건의 시간의 흐름이나 상황의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 시간대를 왔다갔다 하는 수법은 허구헌날 쓰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저렇게 해서 얘네들은 헤어졌데요..." 한 다음에 중년/노년이 된 주인공의 현재 모습을 한참 보여준 뒤에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그런데 헤어진지 5년 만인 스물아홉살 때 우연히 길에서 두 사람이 만났데요" 이런식으로 이야기가 연결되는 것들 말입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같은 영화만 해도 마찬가지 수법을 씁니다. 그런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정도와 비교해 보면, 이 영화에서 해놓은 것이 훨씬 흥미진진합니다.

지금 주인공의 행동이나 복선이 직접적으로 강렬하게 과거의 행동과 연결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연결 관계는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남자 주인공이 과거의 여자 주인공 사진을 한참 보고 있다거나 하는 노골적인 장면 같은 것은 없습니다. 도리어, 저런 묵직한 과거가 있던 주인공이 어떻게 살면서 적응하고 어떤 사연을 거쳐서 감정이 변해서 지금과 같은 멀쩡한 사람으로 우아하게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의 전공이나 직업, 가족 관계나 도덕관에 대한 작은 이야기 같은 것들이 주인공의 배경으로 흘러가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만은 충분히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화려하게 국면의 전환이 일어난 중반 이후에는 사연을 궁금하게 하고, 이야기를 알고 싶게 만드는 힘을 강하게 내뿜었다고 생각합니다. 격정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데, 잠시 시간을 바꾸어서 현재의 장면을 차분하게 보여줍니다. 꼭 결정적인 장면에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면서 끝나는 연속극처럼,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고 싶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저런 사연들이 있었던 사람들이 과연 지금 현재에는 어떻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영향을 끼치고 남아 있는지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80년대의 주인공이 무슨 일을 어떻게 엮어나갈지 궁금하게 해 놓고, 갑자기 다시 현재로 돌아옴)

널찍한 공간과 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받는 위치에 놓인 여자 주인공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무심결에 동정심을 자아내게 하는 수법도 정석 그대로 입니다.

영화 초반에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뒤흔듭니다.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남자주인공이 훌쩍이면서 "날 사랑하나요?"라고 구슬프고 애틋하게 물어볼 때, 유유하게 누워서 무심하게 말도 없이 답하는 무심한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자주인공은 부유한 집안의 똘똘하고 건장한 소년이고, 여자주인공은 팍팍하게 일하면서 가족없이 살짝 가난하게 사는 독신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여자주인공은 서희 아씨가 길상이 대하듯 남자주인공을 손바닥위에 두고 있습니다. 여자주인공은 강하고 제멋대로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국면이 바뀌면서, 그 여자주인공이 초라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화면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 남자주인공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자 주인공이 왜 저런 신세가 되었냐 하는 이유에 앞서서 그냥 "불쌍해 보인다"라는 감흥이 영화 속에 깔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자 주인공의 도덕적 판단에 대한 문제로 이야기가 연결되고는 있고 그 점은 분명하지만, 강한 주인공이 졸지에 약한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모습때문에, 동시에 "측은하다"라는 느낌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복합적인 감정을 더욱 강하게 이끌어낼 뿐만아니라, 도덕이나 윤리에 대한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이야기를 건드리고 있는 이 영화의 줄거리에도 도움이 됩니다. 나쁜놈이지만 불쌍해보이고, 동정심이 가지만 처벌은 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이야기와 개인적인 이야기의 충돌이 잘 피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주인공이 앞에서 불쌍하게 훌쩍거리는데도 무심)

자잘한 연출 상의 기술들도 잘 되어 있는 구석이 적지 않습니다. 회고로 진행되는 이야기의 감상적인 느낌을 은은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따스한 색깔을 많이 사용하는 색조부터 화면을 잘 꾸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감정적인 느낌에만 빠지지 않도록 탁한 채도의 색깔과 선명한 선을 살리는 날카로운 윤곽은 잘 보이게 잡아낸 느낌도 있습니다. 시대상을 나타내는 것들도 과하지는 않으면서도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영화의 중반부의 60년대 시대상을 살짝 써먹은 것은 효과가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 내용이 이전과 매우 다른 소재와 주제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내용을 엮어 보려고 주인공의 동료나 스승을 통해서 장황한 사상과 관념에 관한 대사들을 쏟아지게 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문어체 대사가 많아지고 극적인 요소가 적기 때문에 좀 재미없고 억지스러운 설교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젊은층이 이념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풀어 놓았다는 점이 부각되던 60년대 시대상을 살짝 풍기게 했습니다. 그래서는 이런 류의 심각한 토론 장면이 잠시 끼어드는 것도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소피 마르소 나오는 "라 붐" 같은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분위기인 영화 초반이, 무슨 에리히 프롬의 저서 같은 내용을 다루는 후반부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공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책 읽어 주기"행동을 보여줄 때, 책 읽는 대사들이 겹쳐지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연거푸 쏟아지면서 들리게 모아놓고 꾸며 놓아서, 사건들이 정열적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내용을 보여주는 것들은 두 차례 모두 매끈합니다. 자주 볼 수 있는 표현 방법이지만 책의 문장들과 목소리, 책을 담아내는 화면과 듣고 읽는 사람들의 표정을 심어 놓은 모습 모두 잘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중요한 장면들에서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눈빛, 시선이 잘 살아 나도록 얼굴을 화면 속에서 담아내는 기술도 충분합니다. 하다 못해, 처음 주인공이 혼자서 아파서 헤맬때는 부슬비가 우중충하게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는데,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만난 뒤에는 어느새 비가 눈으로 바뀌어서 흩뿌린다는 류의 유행가 가사 같은 연출도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모양이 썩 어울렸다고 생각합니다.


(만남: 그녀를 만나니 눈이 내리고, a foggy day in London town에도 the sun이 마구마구 shining 하는 구나)

배우들 중에는 역시 케이트 윈슬렛이 대활약하는 영화입니다. 케이트 윈슬렛이 아주 정교한 연기 기술을 보여주거나, 영화 속 등장인물의 심리변화를 세세하게 얼굴에 드러내서, 동기, 갈등, 결심을 잘 전달해주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 속 등장인물에 케이트 윈슬렛은 딱 떨어지도록 어울리게 자기 개성을 십분 발휘하면서 확실한 인물의 힘을 살리고 있었습니다. 강인하고 힘있는 모습을 갖고 있지만, 어딘지 불안하고 무슨 큰 문제나 사고를 칠 것 같은 광포한 느낌도 숨겨져 있는 모습을 신비롭게 보여준다는 느낌은 비할 데 없습니다. 그러면서 불쌍해 보여야할 부분이나, 인간적인 한계를 헤메는 공감할 수 있는 태도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엄청난 과거를 숨기고 비밀스럽게 살아간다는 "신비의 여인" 인물에 더할나위 없고, 영화 중반 이후의 상환반전 이후에 감정을 이끌어내면서도 호기심과 인물의 변화와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데도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연기 실력이 빛을 발하는 멋드러진 부분도 있습니다. 자기 행동의 동기에 대해 약간의 광기를 드러내면서 호통치며 설명할 때 그 절묘한 모습은 훌륭합니다. 짧은 순간의 몇 마디 연기일 뿐이지만, 주인공의 과거와 성격을 다 드러내면서,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사회의 윤리규범에 관한 내용까지 한 방에 깊게 전해줍니다.


(케이트 윈슬렛)

남자 주인공을 맡은 랄프 파인즈는 멀쩡하게 제 몫을 다하고 있고, 제목이 "더 리더"인 만큼 책 읽는 목소리가 중후하고 읽는 솜씨가 훌륭해서 중요한 장면에서 팍팍 힘을 더하는 임무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남자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데이빗 크로스도 충동적이면서도 순진한 사춘기 소년의 모습부터, 화를 내거나 충격 받은 표정이나 야비해 보일 수 있는 상황을 연기하는 솜씨까지 충실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부분을 꼽자면 결말입니다. 이 영화의 결말은 장중하거나 아련하거나 하는 느낌과는 거리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결말 직전까지만해도, 다시 두 인물간의 개인적인 관계에 집중해서 갈등과 긴장이 흘러가던 이야기가 결말 부분에서 그다지 그런 면이 강조되지 않는다는 점 부터가 좀 헐렁한 면이 있지 싶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주인공이 뉴욕에 가서 펼치는 장면은 중심 줄기에서 지나치게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감정 흐름 때문에, 후반부로 갈 수록 여자주인공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동정적인 면이 부각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이 영화는 어째 여자주인공의 나쁜 짓이나 죄에 대해서도 그저 여자 주인공을 불쌍하게만 여기고 용서하는 듯한 분위기로 흐른다는 문제가 있지 싶었습니다. 사춘기 소년을 유혹하는 것으로 출발한 여자 주인공이 더 엄청난 과거도 갖고 있었는데 너무 미화하는 분위기로 빠지기만 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제작진들이 "우리 영화의 사상은 나쁜 놈 편드는 용서하고 죄가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핑계를 대고 설명을 하기 위해서 이야기 본류와 딱 들어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반대편 이야기를 꺼내 놓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이 영화 전체의 갈등이나 남녀주인공들의 관계에서 미미한 상관 밖에 없었던 인물이 대미를 장식하는 자리에 처절한 이야기거리들을 길게 풀면서 나타나버립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좀 안어울린다는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이 양반은 인상도 좋습니다만, 목소리가 무척 좋습니다.)

"더 리더"는 다층적인 이야기 구성을 따라가면서 여러가지 방향으로 느껴지는 남녀의 회한과 감정이 상당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영화 못지 않게 사회의 격렬한 흐름속에서 개개인들이 취할 수 있는 윤리적 선택의 문제와 한계에 대해서 생각할 문제도 잘 연결해 놓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과 주제, 소재를 이미 알아채고 영화를 보러 간다면 중반의 국면전환이 충격이 아니라 별것아닌 싱거운 것으로 느껴져서 심심한 면이 있고, 두 주인공들의 마지막 선택이라든가 영화의 결말이 다채로운 갈등들과 기구한 사연에 비해서는 약간 부실한 면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은은한 화면과 아름다운 연기에 잘 맞추어진 내용은 여운과 상념을 불러오게 하는 힘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Scarlet Fever"라는 병을 한자어 병명으로 "성홍열"이라고 자막에서 번역했습니다. 정확한 번역이지만, 열정적인 사춘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병명, "Scarlet Fever"가 한자어 뜻대로라면 "오랑우탄처럼 얼굴이 변하는 병"이 되어 버려서 좀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었습니다.

배경은 독일이지만 영어로 되어 있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길가의 표지판이나 벽에 있는 낙서 같은 것들은 모두 독일어로 되어 있습니다만, 주인공들이 읽는 책은 유독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 영어로 된 책을 보고 영화속 주인공들은 "독일어로 된 책"이라고 부릅니다.

뉴욕에 간 주인공이 하는 대사는 과연 영어입니까? 독일어입니까? 결코 알 수 없지만, 앞뒤 정황을 보면 화면에서 들리는 영어 대사는 사실은 미국에서 산 독일계 주민과 독일어로 대화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 장면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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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Anonymous 2009/03/30 15:12 # 답글

    그래도 독일식 억양을 넣으려고 좀 노력한 흔적이 처음에 보이던데, 그게 "이건 독일어라고 생각해 주셈" 이라는 장치가 아닐까요?
    항상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
  • 시대유감 2009/03/30 19:58 # 답글

    아직도 마지막에 식탁에서 재회하고 헤어질때 케이트 윈슬렛의 써글픈 표정은 잊혀지질 않습니다. 과연 여우조연상을 받을만 하더군요.
  • FAZZ 2009/03/30 20:06 # 삭제 답글

    e북 기계 개발하는 기술자가 애크로뱃리더를 능가할 PDF리더를 만들기 위해 고생하는 이야기인지... 와 계속되는 PDF이야기에서 웃음이 ㅎㅎ
  • ZinaSch 2009/03/30 23:09 # 답글

    PDF에서 뻥 터졌습니다. ㅎㅎ 확실히 계속 영어로 적혀 있는 책들이 거슬리더라구요. 책을 읽고 글씨도 써야 하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방금 보고 온 영화 리뷰라 더욱 반갑군요 :)
  • 반바스틴 2009/03/31 10:46 # 답글

    정말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 게렉터 2009/04/01 21:38 # 답글

    Anonymous/ 아마 그렇지 싶습니다. 아예 정말로 독일식으로 영어하는 독일인 배우들도 나오고 말입니다.

    시대유감/ 저는 본문중에 써넣었듯이 재판중에 자기 행동의 동기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가장 뛰어난 연기였다고 생각합니다.

    FAZZ/ 감사합니다.

    ZinaSch/ 책과 읽기가 워낙 중요한 소재이다 보니 나름대로 타협한 결과가 이렇습니다.

    반바스틴/ 저 역시 재미나게 보았습니다.
  • 진성당거사 2009/04/08 00:30 # 답글

    생각해보니 성홍열이 그런 뜻이었군요.....;;
  • 게렉터 2009/04/13 17:00 # 답글

    진성당거사/ 그러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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