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 영화

"500일의 썸머"의 중심 소재는 주인공이 "썸머"라는 이름의 애인을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진 뒤에 우울해 하다가 정신차리는 과정을 코미디로 엮은 영화입니다. 많은 연애물들이 과연 남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게 될까말까, 내지는 결혼을 하게 될까말까 같은 일이 어떻게 되는지를 결론으로 갖게 되어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이미 남녀 주인공들이 헤어지고 말았다는 점을 시작하면서부터 알려주고 출발합니다. 따라서 누가 누구와 엮이는가 깨어지는가 하는 것은 이 영화의 반전( http://gerecter.egloos.com/2849512 ) 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는 줄거리나 내용은 대충 미리 알아도 됩니다만, "형식"이 미리 알면 재미가 줄어들 만한 점이라고 생각해봤습니다.


(Summer)

미리 알면 재미가 줄어들지도 모르는 이 영화의 재미난 형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면 이렇습니다. LA에 사는 주인공은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지만 또 적성에 아주 안맞지도 않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직장에 새로온 사장 비서를 보고 엄청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계기가 생겨서 애인 사이가 되었다가, 헤어지고, 괴로워하고, 대충 극복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줄거리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별 독특한 특징 없이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이지 싶습니다.

마틴 가드너가 썼던 책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목록을 뽑아 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들 1위를 꼽게 되면, 이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는 세계 유일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순간 "평범한 것"에서 살짝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 1위는 1위에서 떨어지게 되고,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 2위였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꼽히게 됩니다. 그러나, 잠깐. 그렇다면 새롭게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이 된 사람도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는 독특한 특징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평범한 도시의 공원)

이 영화의 주인공이나 이야기 줄거리가 물론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축에 속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인공의 직장만 해도 한국 대학생들이 목표로 삼는 "적당한 대기업"에 속하는 것은 아니고, 남자 주인공과 달리 여자 주인공은 다소간은 비범한 면들이 강조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세계, 그것도 멕 라이언이나 차태현이 활동하는 "로맨틱 코미디"의 세계 기준에서보면 분명히 "평범"합니다. 대륙 반대편에 사는 사람의 라디오 사연을 듣고 숙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도 아니고, 한강물 깊이를 시험하기 위해 주인공을 물 속에 쳐넣는 사람과 연애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냥 직장인이 직장인 답게 비슷한 또래의 다른 직장인을 만나서 적당히 연애하고 적당히 이별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평범함 덕분에 이 영화가 잡아놓은 소재는 반대로 개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연애물 영화치고는, 그것도 코미디에 집중하는 연애물치고는 개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영화로 만들어질법한 연애 이야기라면, 연애하는 한 쪽 사람의 성격이나 직업이 아주 특이하다든지, 두 사람이 놓인 상황이 과격하다든지, 하다 못해 90년대에 쏟아졌던 각종 잡영화들처럼 남녀 주인공들이 "통통 튀는 성격"이라든지, 아니면 누구 한사람이 죽는 다든지, 반대로 태어날 때 출생의 비밀이 있다든지, 이도저도 아니면 누가 기억상실증이라도 한번 걸려야 영화로 나올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특이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이야기, 누구에게나 쉽게 있음직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쪽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세운 작전이었습니다.


(그냥 회사의 그냥 주간회의 모습)

이런 작전은 뚜렷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평범하고 있음직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현실감을 불어 넣을 수 있고, 보는 관객들에게도 쉽게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호위 무사"가 나와서 왕비를 호위하면서 사랑에 빠지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펼쳐보지만, 영화를 보는 남자 주인공이 어지간한 경호원이 아닌다음에야 호위 무사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끼게 하는 것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영화에서 왕비가 묘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장면이 드러나는 상황 역시, 매끄럽게 잘 표현하지 않으면 진짜 같이 와닿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혹시 김윤옥 여사쯤 되는 분이라면 모를까, 그런 영화 장면을 보고, "맞아, 나도 저런 적이 있었지" "저런 감정, 나도 그때는 그랬지" 라고 생각하기란 어려울 겁니다. 그렇지만, 평범한 주인공의 평범한 사랑이야기를 소재로 삼으면, 이런 면에서 유리합니다. 나도 저랬지, 저런 감정이 진짜 구슬픈 감정이지, 이끌어 내기가 훨씬 쉽습니다.

표현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장점도 큽니다. 남자 친구가 왕자님이라거나, 터무니 없는 조건으로 계약 연애를 하게 되는 이야기는 재미있고 특이하게 꾸밀 수 있어 보입니다만, 반대로 그런 특이하고 이상한 조건에서 정말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연기 해야 할 지 상상해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중세시대, 적들이 칼을 들고 둘러서 있는 상황에서 남자 주인공을 지키기 위해 여자 주인공이 목숨을 거는 상황은 아슬아슬하고 극적이고 놀라운 장면입니다. 그렇지만, 영화 감독도 영화 배우도 중세시대에 칼든 적들 앞에서 어떤 말투로 말하는지 상상해서 표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이 사람 죽으면 나도 죽어요" 라고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여자 친구에게 혹시 전화라도 오지 않을까 전화통만 보고 있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 정도는 정말로 어떤 건지 다들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랫만에 만나는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좀 잘보이려고 생각도 하고, 헛된 기대도 잠깐이나마 부질 없이 품어보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배우도 알고, 감독도 알고, 의상 담당도 알고, 음악 담당도 알고, 작가도 알고, 감독도 압니다. 영화를 일정한 품질 이상으로 뽑아 내기에, 제작진 모두 서로 이해하면서 같이 작업해 나가기에도 좀 더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실에서 가장 예쁜 그녀)

그렇게 때문에 이런 장점을 잘 살려서 성공을 거둔 멋진 다른 영화들도 이미 꽤 나온 편입니다. 이미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꼽을 만한 한국영화 "봄날은 간다"는 전형적인 대표작입니다. 이런 평범한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감상을 이끌어 내고 적당히 긴장감 있는 줄거리에 안타까운 감상도 끌어내려고 하면서 적절히 웃긴 내용도 나오게 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닮았다면 닮은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좀 순박하고 얼빠진 듯하게 행동하는 남자 주인공에 보다 자유롭고 종잡기 어려운 여자 주인공의 구도가 흡사했습니다. 아마 남자 주인공의 마음에 좀 더 초점을 맞춰서,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하거나 아쉬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마음을 보여주려면, 여자 주인공 쪽에서 남자 주인공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위치로 두는 것이 좋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애타는 느낌으로 이야기에 끌어들이기에 좋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 때문에 우연히 만나서 서서히 친해지고 다시 멀어지고 서글퍼하는 배분도 비슷비슷합니다. 두 영화는 제목에 봄이 나오고 썸머가 나온다는 점도 뭐 억지로 나란히 놓고 보자면 생각나기도 합니다.


(사랑이 변할까?)

"500일의 썸머"도 비슷한 면에서 꽤 성공하는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특별히 엄청난 대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데도 두 남녀의 연애행각이 관객들을 사로 잡을 만하게 느껴졌습니다. FBI 증인 보호 프로그램이 나오고 살인을 목격하고 이혼 한다 어쩐다 난리를 치는 "들어는 봤니, 모건 부부" 같은 영화보다 더 이야기에 빨려드는 맛이 있는 것은, 바로 이 영화가 이렇게 보통 이야기를 다룬 덕분에, 더 현실적으로 와닿게 된다는 점이 분명히 한 몫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만, 반대로 이렇게 소재와 주제를 선택하면 치명적인 약점 하나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필연적인 문제로, "지루하다"는 점입니다. 어제 저녁 잠실 사는 홍길동씨 일기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 정도라면, 두 시간 동안 어두운 곳에 앉아서 들여다보게 하면, 별 자극적인 맛도 없이 싱겁고 재미없고 휑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로 재미나게 만들려면 무슨 수든 수를 내야 합니다. 바로 이 탓에 수를 쓰지 못하면, 한 장면 한 장면 정성들여 만든 TV쇼들도, 오늘은 불륜, 내일은 시어머니 드러눕기, 모레는 사투리 쓰는 웃긴 조연 개인기로 때워나가는 막장 연속극들에게 힘없이 무너져 나간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봄날은 간다"는 사람이 고민해서 짜낸 게 아니라 마치 하늘이 내린 결과물인 듯이,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는 듯 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절묘하게 완급을 조절해나가는 기막힌 편집을 맛볼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게다가 배역에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배우들의 매력적인 모습과 연기를 집어 넣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촬영 솜씨가 발휘 되었기에,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영화들 중에 이렇게 "평범한 사랑"을 다른 이야기로는 엄청나게 낭만적인 음악이나 거리의 풍경을 이국적으로 담아내면서 영화를 꾸려나가는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평범한 사랑 이야기의 이면에 항상 같이 하기 마련인 평범한 사람들의 구구하고 추한 모습들을 포착해서 노골적으로 화면에 드러내는 현실주의 수법으로 영화에 자극적인 면을 집어 넣기도 합니다.


(거리, 옷차림, 건물을 잘 담아내려고 하는 촬영)

"500일의 썸머"도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이 영화는 평범한 이야기를 어떻게 안 지루하게 다루느냐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꽤 색다른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내용이나 인물은 진짜 같고 바로 내가 겪은 일 같은, 그저 평범한 것으로 그대로 두었습니다. 대신에 영화의 전체 형식을 신기한 구경거리로 만드는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수법도 선례들은 있습니다. 이를 테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 Fidelity)" 같은 영화는 재미난 영화 형식을 즐길거리로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세계에서 영화 속 세상만을 보면서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대화해야 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는 영화 밖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말을 합니다. 자기가 지금 느낀 기분이 어떻고, 무슨 생각으로 연애를 정리하려고 하는지, 맥주 한 잔 놓고 친구에게 이야기 하듯이, 카메라 쪽을 보고, 영화 밖에서 구경하고 있는 관객들을 향해서 주절주절 읊조립니다. "제4의 벽"을 돌파하는 몇몇 연극의 재미난 요소를 더 흥겹고 더 격하게 "제4의 벽"을 돌파하는 것처럼 보여줍니다. 신기하고, 특이하고, 재미났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 속의 영화를 보고 있는 영화 속 관객으로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보고 있는 관객이 됩니다.)

"500일의 썸머"는 이런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정도의 선례들 보다 더욱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연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반대로 형식은 좀 더 요란하고 특색있게 꾸몄습니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만 해도, 음악에 대한 취향이 분명한 레코드 가게 주인이라는 주인공의 직업은 "그냥 회사 직원"이라는 직업보다 훨씬 더 비중이 높게 다뤄지고 있고, 주인공의 옛 연인들은 훨씬 더 "특별한 삶"을 사는 인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배우들만 해도 굵직굵직하게 배우의 특색이 분명한 사람들로 배역을 채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 비하면, "500일의 썸머"에서 활약하는 배우들은 보다 평범한 소시민 역할 연기에 더 걸맞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500일의 썸머"는 형식면에서는 끊임없이 더 신기한 것을 보여줍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이 영화는 많은 영화들과는 다르게 시간 순서를 마구 넘나들면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썸머와 만났던 500일을 차례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앞 뒤 넘나 들면서 왔다갔다하면서 짤막짤막하게 한토막씩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다보면, 나름대로 과거와 현재를 대조하는 듯하게 규칙적으로 보여준다는 느낌도 있는 듯 하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서, 친해지기 전에 남녀 주인공의 관계를 잠깐 보여주고 대조적으로 연인관계가 된 이후의 남녀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혹은 한창 재미나게 연애놀이하는 시절의 두 사람을 먼저 잠깐 보여주고, 그리고나서 냉랭해진 시절, 헤어진 후의 상황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식으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이런 것은 농담책이나 TV코미디쇼에서 자주 나오는 "연애시절 vs. 결혼시절"을 대조해서 다루면서 웃기는 듯하다는 느낌도 약간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 영화가 그런 규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500일이 다 지나고 이 모든일들을 다 겪은 주인공이나, 주인공 외부의 관찰자가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내용들을 복기하고 정리하기에, 나름대로 분석하고 정리한 결과가 설명될 수 있도록하는 자료화면의 형식에 오히려 더 가깝습니다. 짤막짤막한 이야기들이 과거를 돌아보는 설명에 어울리도록 그때그때 뽑혀 나와서, 500일 중에 이날 있었던 일, 저날 있었던 일을 왔다갔다 하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게중에는 단순한 비교와 대조 목적으로 시간이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 풀이의 느낌이나 복선 형태로 장면을 나눠 놓은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영화에서는 비틀즈 멤버 중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레코드판 표지를 보여주는데, 대충 시간흐름에 관계 없이 이야기가 끊기기 때문에, 처음 봐서는 그게 무슨 의미이고 어떤 감상인지 무심코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건들을 이날저날 오락가락하면서 다양하게 보여주면서, 점차 서서히 깨닫게 합니다. 그 때 그 레코드판 표지를 보면서 저 주인공 두 사람은 이런 느낌을 받았겠구나, 괜히 그 레코드판을 한참 보여주던 그것은 바로 그런 감상과 연결되는 구나, 하고 나중에 알아채고,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시간 순서처럼 차근차근 보여주었다면, 별 의미 없는 가벼운 사건에 머물 수도 있었습니다. 억지로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내용인 것처럼 꾸몄다면 지나치게 진부한 방식의 복선이나, 부드럽지 못하게 이야기속에 끼워놓은 "나좀보소 상징주의"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나눠서 앞뒤 사연을 처음에는 알지 못하게 하고 나중에 드러내서, 제대로된 복선으로 활용해 먹고 있는 것입니다.


(레코드도 팔고 등뒤에 보면 DVD도 팔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60년대 스파이물 TV극 I, Spy DVD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굵직한 줄기는 바로 이렇게 시간 진행을 오락가락하면서 짤막짤막하게 끊어진 단위로 보여주는 수법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이외에도 형식상 많은 재주를 부려서, 영화를 더 풍성하게, 더 재미나게 꾸미고 있습니다. 영화 앞뒤를 장식하는 나래이션 같은 것은 비교적 전형적인 수법이고, 현실적인 영화 속 사건이 서서히 공상적인 장면으로 변해가면서 주인공의 넘치는 감정을 드러내는 수법 같은 것도 "앨리의 사랑만들기(Ally McBeal)" 같은 것 비슷한 느낌으로 적절히 활용되고 있습니다. 스리슬쩍 뮤지컬쇼가 영화속에 개입된다거나 정말로 자료화면이나 TV광고, 다른 영화 패러디 형식으로 끼어드는 장면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영화를 꾸미고 있는 재미난 형식들은 우선 무엇보다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상영시간을 방어해내는데 한 몫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서 이런 흥겨운 장난스러운 영화를 표현하는 형식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명랑하게 만들어 준다는 효과도 상당히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서글프고 우울한 이별에 관한 장면을 보통 사람들이 겪는 바 대로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런데도 날짜를 오락가락하면서, 연애를 소재로 하는 코미디 TV쇼 처럼 꾸며서 보여주는 형식 덕분에 지나치게 울적한 분위기로 가라앉지는 않는 것입니다. 가슴에 와닿는 진짜 같은 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영화는 전체적으로 계속 밝고 경쾌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당장 지켜보는 재미도 재미거니와,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겪으면서 성장해 나아간다는 실존적이라면 실존적으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이런 이야기들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사연을 가깝게 보여주면서도 웃음은 잃지 않게 영화를 만들어 놓았으니, 자연스럽게 냉정하게 이별을 돌아보는 이야기지만, 인생에 대한 긍정과 진실한 사랑의 가치에 대한 희망은 어울려서 더 멋지게 남는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뜨거운 사랑이 차디찬 이별로 끝난 것은 케이블 TV 홈쇼핑 방송에 나온 왕년의 인기배우 같은 서글픈 맛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개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 따뜻한 기억을 가슴 한켠에 품고 있는 사람이 되어 또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는, 도둑을 쫓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지친 개가 그래도 주인이 늦을 때면 기운 없는 모습으로 문앞에 엎드려서 밤늦게까지 기다리고 있는듯한, 그런 멋과 향취가 있다는 겁니다.


(재회)

평범한 소재와 재미난 형식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했습니다만, 이 영화는 그 균형을 잃을 때 마다 좀 아쉬운 대목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꼭 웃겨야 한다", "반드시 웃긴 장면이 많아야 한다"라는 의무감 때문인지, 이 영화는 "누구나 느낄 만한 보통 이야기"라는 줄기에서 간혹 벗어나서 "코미디 영화 속에서만 일어날 것 같은 특별한 일"도 가끔씩 보여줍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대목들은 대부분 별 재미가 없는 부분으로 느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실의에 빠진 주인공이 직장에서 "확 다 엎어버리는 장면"은 정말로 영화나 TV에서만 볼 수 있는 화끈한 환상처럼만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태도가 돌변하는 모양과, 영화 속 줄거리에 기여하는 형태가 살짝 지겨운 면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와닿는 있음직한 일 같지가 않고, 대신, 답답한 직장인이 꿈꾸는 망상속의 막연한 모양이 그저그런 케케묵은 수법으로 또 화면에 나타난다는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참여하는 배우들의 연기에 정성이 있고, 앞뒤가 튼튼해서 영화를 망치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만, 뚜렷한 특색이 있었던 영화의 전환점치고는 좀 심심했습니다. 이 영화에 어울리는 더 멋진 것을 대신 끼워넣었다면 훨씬 더 좋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외에도 비슷비슷하게 신기해서 웃긴거라면서 나오지만, 코미디 영화에는 워낙 자주 나오는 것이기에 외려 심심하고, 이 영화에는 좀 안어울리는 것들이 몇 가지 더 떠오릅니다. 조숙하지만 귀여운 꼬마 조연, 한심하지만 정감가는 주인공의 친구들, 마지막 장면을 꾸며내는 수법, 주인공이 "창조적으로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방식 등등이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정면에 보이는 분 이마빡을 자세히 읽어보면 "웃긴 주인공 친구"라고 적혀 있습니다.)

더 영화에 걸맞는 인물 묘사 방법, 보여주는 화면 구성 방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의 친구들에게는 차라리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잭 블랙처럼 확실히 특색을 주든지, 꼭 웃기겠다는 맹세를 조금 저버리고 "제리 맥과이어"의 이혼하고 혼자인 여자들 모임에 모인 사람들 처럼 연기와 대사에 현실감을 더 집어 넣었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창조적으로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들도 오히려 "예술가"를 묘사하는 틀에 박힌 연출에 박혀 있는 이 영화의 방식보다는 아예, "칵테일" 같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더 와닿고 뭉클한 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뭐 그렇습니다만, 그렇게 "틀에 맞춘 웃기는 수법" 이라는 것들도 아주 이상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더욱더 어울리는 게 있지 싶은 아쉬운 면이 있어서 그렇지, 이 영화 전체를 휘두를만큼 과하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웃기려고는 하지 않습니까? 지루할만하면 막아주는 위치 선정을 잘한 유격수 같은 수비를 하려고는 했을 겁니다. 사실, 이 영화는 한 축을 맞고 있는 "신기한 연출"이라는 부분이 아주 막강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오락가락하는 전체 구성이라든가, 절정 대목 즈음에서 등장하는 상상 속에서 기대했던 일과 실제로 벌어진 일을 화면을 반으로 쪼개서 동시에 보여주는 수법 같은 것들은 확실히 재미났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숫자도 좀 부족하고 정도도 덜 신기한 것들로 되어 있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루할만하면 막아주는 닳고닳은 농담거리도 대충 몫은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귀엽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맛이 매력인 여자 주인공인만큼 좀 더 젊고 어린 모습이면 어땠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자 주인공 Zooey Deschanel 특유의 어린애 같은 웃음 소리는 "은하수를 여행하던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나온던 때 정도 시점에서만 써먹었더도 훨씬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이 멋지게 깔려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 영화입니다만, 주인공들의 노래 듣는 취향이 소재로 잠깐 부각되기도 하는 영화인 만큼, 좀 더 좋은 음악들을 더 적절하게 더 재미나게 잘 사용했다면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예스맨 때도 엊그제 같은데)

그래도 역시 다 모아보면, "500일의 썸머"는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면서도, 젊은 사람들의 아련한 연애 이야기를 차분하게 담아내는 데 성공한 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봄날은 간다" 같은 영화처럼, 처음 가슴 두근거리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설레고 긴장되는 감성부터, 연애하며 같이 노는 기간의 행복한 순간들, 서서히 찾아오는 내리막길과 이별의 충격, 헤어진 뒤에 슬픈 감상과 미련까지 치우침 없이 잘 다뤄 줍니다. 특별히 대단한 관광지나 엄청난 명소를 이용해서 "로맨틱"하게 "파리의 썸머"나 "프라하의 썸머"로 꾸미지 않았지만 대신에, 그저 그런 LA의 보통 공원과 그냥 어디에나 있는 20세기 도시의 건물들을 적극적으로 소재로 삼아 끌어내고 있습니다.

그냥, 보통, 평범한, 세계 어디서나 길가다가 쉽게 볼 수 있는 공원 풍경이, 그 지나간 사랑의 기억 덕분에 가슴 깊이 와닿는 아름다운 정경으로 보입니다. 그런식으로 아름답다는 감상을 화면으로 보여주려고 열심히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면, 잘 맞춰낸 편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영화 중에도 보이 듯이 "500 Days of Summer"가 아니라 괄호가 있는 "(500) Days of Summe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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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iroTan。◕‿‿◕。 2010/02/07 18:46 # 답글

    그래도 저에겐 크게 어필하지 못했어요.. 그냥 저냥...
  • 게렉터 2010/02/15 00:51 #

    의외로 그럴 때 두번보면 좀 더 재미난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확실히 좀 심심한 듯한 감상인 면도 있습니다만.
  • 영춰 2010/02/07 19:10 # 답글

    중간까지 읽다가 더이상 읽으면 안되겠다 싶어 일단 보류입니다. 보고와서 나머지를 읽겠습니다. ㅎㅎ(이미 시간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 쥐약..)
  • 게렉터 2010/02/15 00:50 #

    아쉽습니다. 그런 부분에 민감하시다면, 심지어 "형식이 특이하다는 것"조차도 모르는게 놀라는 맛이 더 재미날텐데 말입니다.
  • JayPark 2010/02/13 02:38 # 답글

    보는 내내 킥킥대면서 아주 즐겁게 영화를 보고 돌아왔는데
    '자연스럽게 냉정하게 이별을 돌아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자려고 이불 덮고 누우니 떠나간 분 생각에 마음이 어딘지 씁쓸해진달까.

    막상 볼 때는 닮은 점을 못 느꼈는데 보고나서 생각해보니 '봄날은 간다'와 매우 비슷한 것이
    오랜만에 재미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언제나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P.S. 엄청 늦었지만, 단편집 아주아주 매우매우 계속계속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하핫.
  • 게렉터 2010/02/15 00:51 #

    감사합니다. 단편집 이야기 무척 반갑습니다.
  • 부산사나이팬 2010/02/14 01:53 # 삭제 답글

    제가 Gerecter님 블로그에서 6개월 넘게
    다양한 영화에 대한 정보, 좋은 말씀 많이 들어왔는데
    그걸 Twitter등 제가 활동하는 다른 곳에서 소개해도 될런지요 ?
  • 게렉터 2010/02/15 00:51 #

    링크 나 부분 인용은 허락 없이도 무제한 허용하고 있습니다. 마음껏 소개하십시오.
  • 2010/04/26 02:2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returnet 2013/01/24 09:08 # 삭제 답글

    평범한 연애에 대해 말하는 만큼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카드회사 사장부터 친구들, 노신혼부부까지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대입해볼 수 있는 여러 캐릭터가 준비되어 있는 점이 이 영화의 디테일이라면 디테일이 아닐지.
    영화의 절반이 지나도록 여주인공의 행동을 당최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마음넓고 쿨한 소개팅녀를 통한 친절한 설명이 삽입되어 있는데, 그 부분에서 마저 이해하지 못했다면 영화가 끝나도록 서머를 욕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윗분 말씀처럼 봄날은 간다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개인적으로는, 여자라면 23살쯤에 자연스레, 남자라면 32살에 격정적으로 깨닫게 되는 진실을 담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외로... 영화적 재미를 꼽자면 주인공의 감정을 표현하는 여러가지 방식이나 이것저것 참 다양하게도 써먹는 연출도 좋았지만, 다 제쳐두고 역시 클로이 모레츠의 출연과 역할이 반갑고 즐거웠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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