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The Book of Eli 영화

"일라이"는 지구 종말 이후의 세계를 다룬 수작 SF 영화로, 문명이 멸망한 세계에서 엄청나게 싸움 잘하는 용사인 떠돌이 주인공이 황량한 세계를 표표히 떠돌면서 사건을 겪는 영화입니다. 지구 종말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더 로드" 같은 영화처럼 암울함과 비극적인 맛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영화도 아니고, 좀비 때문에 멸망한 세계를 다룬 영화처럼 공포영화 같은 맛을 노리고 있는 영화도 아닙니다. 이 영화는 그보다는 더 정통파라면 정통파인 SF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지구 종말 이후에 정상적인 법과 제도가 사라진 세계를 마치 서부영화의 무대와 같은 방식으로 써먹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 한 가지를 더 곁들인다면, 싸움 장면은 동양 무술 영화의 칼싸움 장면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포스터)

동양 무술 영화의 칼싸움 장면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영화는 역시 그 중에서도 "킬 빌" 이후로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굳건히 자리잡은 옛날 일본 칼싸움 영화의 칼싸움 장면 영향을 잘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악당 떼거리들과 주인공이 17:1 정도로 대치한 채 늘어서서 개폼을 잡고 시간을 끌면서 뜸을 한참들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번쩍번쩍하면서 주인공이 칼을 휘둘러 악당들을 순식 간에 다 자빠뜨려버리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칼을 들고 날뛰는 윤곽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싸우는 동작의 실루엣만 눈에 뜨이게 하는 방법은 70년대부터 한국영화에서도 모방하던 인상적인 화면 구성일 것이고, 칼부림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손을 대었다가는 그 손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따위의 대사를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모양도 60, 70년대 일본 칼싸움 영화 속 떠돌이 사무라이나 "낭인"들의 정취가 잠깐씩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영화는 숨겨져 있던 몇몇 사실들이 다 드러나는 영화의 맨마지막을 보고 나면, 대표적인 그 시절 일본의 칼싸움 영화 시리즈 하나가 아주 선명하게 떠오를만도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마치 이 영화가 꼭 "칼싸움" 영화인 것처럼 들리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칼부림 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고 강렬한 화면으로 잡혀 있는 편이기는 합니다만, 일단 주인공도 칼잡이라기 보다는 총도 쓰고 주먹도 쓰는 다재다능한 싸움꾼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영화 전체에 싸움 장면이 그렇게 아주 많은 편도 아니고,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들은 싸움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는데다가, 아주 어마어마한 거창한 싸움이 벌어지지도 않습니다. 주인공이 멋을 부리려고 할 때 "무진장 싸움 잘하는 떠돌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무진장 싸움 잘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 몇군데는 필요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 몇군데를 잘 꾸며 놓은 정도인 것입니다.


(맨처음으로 쓰는 무기는 "활")

그렇다면, 왜 주인공이 "무진장 싸움 잘하는 떠돌이"라는 점을 보여 주어야 하는고 하니, 바로 이 영화의 중심 줄거리가 서부 영화 줄거리를 아주 체계적으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줄거리는 악당이 지배하는 서부의 황량한 마을에 정체 불명의 떠돌이 총잡이 하나가 나타나고, 서서히 악당과 갈등을 빚으면서 좀 싸우다가, 결국에는 떠돌이 총잡이가 마을을 지배하는 악당을 왕창 박살내버리고 또다시 표표히 떠나간다는 서부 영화의 한 형식을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입니다. 황량한 서부의 마을 대신에, 지구 종말로 황량해진 세상에 겨우 수습한 넝마 같은 마을이 나오고, 악당들은 말대신에 오토바이를 타고 흙먼지를 날리며 질주하고, 콜트 6연발 리볼버 권총 대신에 글록 자동 권총으로 총질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을에 있는 조금 착하면서 엄청나게 예쁜 아가씨가 주인공과 얽히는 이야기도 이 영화에는 나오고, - 이런 아가씨는 보통 술집 종업원 중에 가장 인기 많은 종업원이기 마련인데 - 주인공이 술집에 들어가서 곱게 한 잔만 마시고 가려고 하는데 멋모르고 시비걸던 악당 때문에 싸움이 붙어서 바를 박살내면서 싸우는 거의 정겹기까지한 서부영화 장면도 영화 속에서 그대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영화 내용과 앞뒤가 좀 안맞아도 그냥 일부러 재미로 서부영화 팬과 같은 마음으로 제작진이 집어 넣은 것 같은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서부 영화 주인공 이름이라면 "장고"를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장고 하면 딱 생각나는 무기는 뭡니까? 그 무기가 이 영화에도 괜히 한 번 나와 주는 것입니다.

일본 칼싸움 영화 이야기와 서부영화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이 영화는,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면, 서부영화에 일본 칼싸움 영화 요소를 대거 도입했던 60, 70년대 이탈리아산 서부 영화들을 이어 받았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바닥의 대표적인 인물인 세르지오 레오네가 감독을 맡았던 영화의 주제곡도 잠깐씩 영화에서 오마주 처럼 끼어 들어서 나오고 그렇습니다. 연출 수법이나, 넝마짝을 걸친 쇄락한 사람들의 모습도 이런 옛 영화들을 멋있게 계승하고 있고, 도덕이 부족하고 무례함만 넘치는 분위기가 드러나는 더러운 몰골로 사람들의 의상을 갖추도록 하고 있으면서도, 멋있는 배역은 나름대로 멋있어 보이게, 아름다운 배우들은 나름대로 아름다워 보이도록 꾸며놓는 방식들도 옛 이탈리아산 서부영화들과 견주게 되는 부분들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황량한 외딴 마을에서 총격전)

그렇게 해서 이 영화는 전체적인 줄거리 구성과 인물 구도는 옛 이탈리아산 서부 영화를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고 연출 수법도 이 시기의 수법을 잘 따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부의 무법자를 다루던 방식을 잘 살려서, 지구 종말 이후의 무법천지 세계를 그려 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영화는 폼 잡는 영웅적인 떠돌이 싸움꾼의 무용담 분위기를 튼튼하게 잡아내서 영화 분위기를 지나치게 어둡지 않은 활극 분위기로 유지시켜 주고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어둡지 않게 묘사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나름대로 암울한 묘사는 끊임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사악하기 그지 없는 악당과 일당백으로 싸우는 멋진 주인공이 대결하는 이야기를 펼치면서 줄거리 자체에 또 관객들을 빨려들게 하는 것입니다. 지구 종말로 모든 문명이 멸망해 버렸고, 남아 있는 인간들은 읽고 쓰는 능력마저 잃어버리고 있는 암담하고 진지한 배경을 흐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싸움 장면과 대결에 더 집중하게 해서 절망적이거나 우울한 느낌이 과하지 않도록 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객들은 사악한 악당들을 주인공이 아작을 내는데서 통쾌한 느낌을 느낄 수 있게 꾸며 놓았고, 비열한 조직이 지독하게 덤벼오지만 당당하고 꿋꿋하게 맞서 싸우는 주인공을 듬직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서부영화 요소를 잘 활용해서 맞춰 놓은 절묘한 영화의 방향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아냥거리는 듯이 암울한 사회 풍자를 툭툭 던지는 좀비 영화들을 이어가는 영화들은 많았습니다. 극히 심각하고 처절하게 영화를 펼쳐나가면서 비극적인 요소에 초점을 맞추는 찰톤 헤스톤이 주인공을 맡았던 SF물을 이어가는 영화들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월E" 같은 영화는 코미디 애니메이션이지만, 지구 종말의 광경을 담아 낼 때의 수법은 찰톤 헤스톤 SF물과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종교, 인간 본성, 생존의 처절함 등을 중심소재로 굵직굵직하게 써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부영화의 다소간 낭만적인 싸움 구도를 줄거리 뼈대로 잘 활용해서, 이 영화 속에서 신나는 싸움 영화 같은 느낌을 있는 듯 없는 듯 은근히 살려나갑니다. 매우 진지한 소재를 가라앉은 느낌으로 차곡차곡 다루고 있는데도, 우울해지는 대신에, 묘하게 주인공을 멋스럽고 희망차게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농담 장면이 몇 개 있는데, 유행가 가사를 대단한 금언이라는 양 옮기는 것을 비롯해서, 껄렁한 서부 사나이들의 유머 감각과 매우 비슷한 수법으로 살벌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그대로 지키면서도 웃긴 맛은 그대로 가져오는 부분들은 재미를 돋구는 데 그만이었습니다.


(목 좀 축이게 한 잔만 주시오.)

이 영화에서 싸움 장면들은 서부 영화와 칼싸움 영화들을 본 받아서 인상적으로 되어 있지만, 말 그대로 짧고 인상적이게 꾸며서 요점만 간단히 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싸움 장면이 넘쳐나는 영화는 아닙니다. 게다가 영화에서 가장 재미난 대목들도 싸움 수법이나 싸움 장면들은 아닙니다. 싸움 장면들은 이 영화를 지탱하는 줄거리 구도를 진행시켜 나가면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정도만 나옵니다. 그 대신에 이 영화에서 재미거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지구 종말을 배경으로하는 SF물의 소재들입니다. 딱히 대단한 상징물이나 결정적인 충격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모 영화 마지막 장면의 부서진 자유의 여신상 같은 것은 딱히 없습니다.

대신에 영화의 흐름을 부드럽게 따라가면서 그다지 이야기 속에서 따로 티나지 않게 조금씩 차곡차곡 나옵니다. 현대사회에서 널려 있는 문명의 이기와 공업 사회의 산물들을 귀한 보물로 여기는 모습, 조금씩 조금씩 흘러나오는 "어쩌다 지구가 멸망했나"에 대한 이야기들, 종말 전과 모순적으로 펼쳐지는 풍자적인 상황들, 파괴되거나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된 관광 명소의 역설적인 모습, 지구 종말 이후의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대용품, 생존 아이디어들, 물물교환이나 도덕이 붕괴된 세상의 살벌한 정경들, 파탄난 도시의 처참한 광경과 묵시록적인 시상을 연상케 하는 기묘하면서도 장엄한 종말 이후의 풍경들. 이런 이야기 거리들이 부드럽게 따라나옵니다. 어느 것 하나 크게 나서는 것 없이, 이 영화의 서부영화 같은 줄거리에 곁들여진 독특한 양념이라는 느낌으로 틈틈히 영화를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양념거리들은, 말이 양념이지, 사실 그 양념이 따져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그냥 "달러 시리즈"(무법자 시리즈) 아류작 서부영화일 뿐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 거리들이 틈틈히 걸리적거리지 않게 잘 박혀 있었던 덕분으로, 줄거리가 아류작 서부 영화와 다를 바 없는 형세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 영화의 독특한 멋이 물씬 살아났다고 느꼈습니다. 이런 지구 종말 이야기의 요소들은 옛날 SF 영화, SF 단편물 속의 지구 종말 이야기를 다루던 방식들을 잘 살려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런 이야기 거리들을 거창한 것, 대단히 충격적인 것으로 다루기 보다는 줄거리에 방해가 되지 않는 부드러운 조율로 곁들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팟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나는 것: 귀에 꽂고 있는거 배터리 교환은 어떻게?)

옛날 SF 영화들 중에는 "지구 종말 이후"를 배경으로 다루면, 영화에서 미래 세계를 다룬다고 하면서도 황량한 세트로 대충 때울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제작비 아끼려고 "지구 종말 이후"로 배경을 잡은 중저예산 영화들이 꽤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중저예산 "지구 종말 이후" SF 영화들을 정통파로 계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건물 한 채 등장하지 않고 그냥 사막의 길바닥이 대부분의 영화 배경인 것이라거나, 몇 안되는 주요 등장인물과 출연료 싼 두대 맞고 쓰러지는 악당으로 떄우는 나머지로 때우는 듯한 모양을 보다보면 정말 그런 영화들이 생각납니다.

물론 이 영화는 돈 없어서 부실하게 때운 구석이 드러나는 영화는 아닙니다. 중저예산 영화들이 개척해 놓은 멋있는 전통을 잘 배워와서 매끈한 좋은 기술로 흠없이 잘 심어 놓고 있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예를 꼽아 보고자 생각하면, 이 영화의 멋진 배경음악도 생각 납니다. 이 영화는 주요한 배경음악으로, 전자악기 소리를 중요하게 활용하는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 싶은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퇴락한 건물의 잔해와 폐차들이 나뒹구는 황량한 대지가 끝없이 펼쳐진 종말 이후의 생경한 세상 풍경은, 저 머나먼 외계 행성의 풍경을 노래하는 듯 하다는 흘러간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과 맞아들 법 합니다. 그런데 그냥 흘러간 프로그레시브 록을 구식으로 그대로 트는 것이 아니라, 더 절묘하게 개량된 곡을 더 그럴싸하게 다른 음악들과 잘 엮어 가며 깔아 주는 것입니다.


(영화 절반은 이런 데서 때웁니다.)

서부영화 모양으로 흘러가는 줄거리가 다 끝날 때 즈음이 되어가면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의 몇 가지 의외의 사실들이 마지막으로 흘러 나옵니다. 이 영화의 "반전"이란 것은 세계와 역사를 다 뒤엎어 버리는 충격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장엄한 결말이나 경악스러운 진실을 드러낸답시고 주제와 소재를 휘젓는 엄청난 것도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그렇게 대단하고 과감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영화의 반전이란 것은 그렇게 엄청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고 가벼우면서 대신에 통쾌한 것입니다. "환상특급"(Twilight Zone)이나, MBC 환상여행과 같은 단막극 TV쇼, 혹은 호시 신이치의 짤막한 단편 소설에서 많이 나오는 것들입니다.

탐욕에 눈이 먼 악당이 악착 같이 비밀을 파헤쳤는데, 알고보니 그 비밀이란 부질없는 것이더라 하는 이야기, 신기한 보물을 발견해서 좋아하면서 남용했는데 그 부작용으로 패가망신한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던, 짧은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그런 반전이 나옵니다. 앞뒤가 꼭 들어맞게 정교하게 꾸며 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결말을 갖다 붙여도 될만한 복선 몇 가지를 영화 도중에 좀 던져 놓았던 데다가, 시각적인 매체인 영화의 특성을 잘 살려서 눈 앞에 한 번에 보여 줄 수 있는 반전이라서 즐겁게 볼 수 있는 결말입니다. 이런 반전은 그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에 엄청난 비밀을 걸어 놓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가는 영화라면 너무 장난스러워 보일 법한 것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서부 영화대로 펼쳐지면서 재미를 주던 중간 부분들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다 구경시켜 주고 나서, "그래도 결말은 어떻게 재미나게 지어야 겠지" 하면서 문을 닫는 느낌으로는 크게 부족할 것은 없는 느낌입니다. 이 이야기를 충분히 재미나게 봤다면 좀 작고 소박한 반전일지언정 마무리로는 어울린다고 느꼈습니다.


(이런 자세도 알고보면 사소한 복선)

이 영화의 결말 부분을 꾸며 놓은 연출은 종교에 대한 풍자와 상징을 중요한 소재로 실하게 써먹고 있는 중간 부분의 소재들도 잘 정리해 주는 모양입니다.

이 영화는 기독교 문화를 중요한 바탕으로 활용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기독교 내지는 발달된 종교라는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야만인과 문명사회를 가르는 어떤 특징적인 소재로서 자주 써먹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은 19세기 모험물 같은 곳에서도 많이 나오지 싶은데, 이런 옛날 유럽 소설들을 보다보면, 원시 종족을 탐험하는 탐험가들이 "기독교 문화권"이라는 말을 "문명 사회"라는 뜻으로 활용하는 대목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거의 비슷한 관점이 이 영화에서는 소재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한 신에 대해 고민해 보면서 또한 우주와 인간 삶의 의미를 고민해 보는 것이, 바로 지구 종말 이후의 삶과 대조되는 문명화된 삶의 한 단면이라는 시각이 소재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소재로 꾸려서 영화를 펼쳐나가는 것은 기독교 문화를 전제하지 않으면 쉽고 분명하게 연결되기는 어려운 이야기 일 것입니다. 워낙에 기독교 문화에서 생활화된 시각이고, 기독교 문화에서 널리 이야기 되던 것이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소위 여러 잡신들과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숭배를 조직적으로 배척하는 유교 문화를 발전시켜온 고려나 조선과 같은 곳에서 지구 종말을 겪었다면 이 영화와 같은 이야기는 딱히 잘 들어맞지는 않을 것입니다.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고보면, 이 영화는 나름대로 기독교 영화로서 생각할 여지도 충분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교리에 딱 떨어지는 영화도 아니고, 카톨릭 선교 영화와 들어 맞을 만한 영화도 아닙니다. 하지만, 기독교를 상정한 종교에 대한 고민과 기독교 문화 요소에 대한 이야기 거리들은 풍성하고도 신실하게 박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몇몇 요소를 뽑아내서 그냥 줄거리 속에서 상징으로 몇 군데에 활용한 "매트릭스"나 몇몇 "슈퍼맨" 영화들과도 이 영화는 다릅니다. 단적으로, 이 영화는 밥먹기 전에 한 끼 일용할 양식을 앞에 두고 감사 기도를 올리는 것이 고달프게 인생을 살아가는 세상의 중생에게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는지 - 조금 닭살 돋기는 해도 - 구구절절한 설교 없이도 꽤 그럴듯하게 보여 줍니다. 종교를 이용해서 장사 하는 데에만 눈이 어두운 무리들과 인생이란 무의미하다는 허망감 사이에서, 무신론-다원론적인 합리주의와 사명과 믿음에 대한 고집 사이에서 평범한 기독교인이 어떻게 꾸역꾸역 버티면서 살아가는지 보여 주는 맛도 이 영화는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 꽂혀 있는 여러 책들의 제목을 눈에 뜨이게 배치해 놓은 것은 굳이 굳이 균형을 맞추려는 인공적인 술책처럼 보이기는 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를 "기독교 영화"라고 해도, 영화 중의 내용으로 볼 때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나 기독교 상징에 기대고 있는 영화라거나, "다빈치 코드" 처럼 특정 종교의 특징에 기대고 있는 영화라고만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영화 속에서"다빈치 코드"의 취급은...) 그 보다는 문명에서 종교 생활의 의미와 문화의 일부로서 종교라는 것이 갖는 성격에 대한 생각을 흥미롭게 이야기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가장 와닿기 좋은 친근한 예시로 기독교를 활용한다고 할만합니다. 전체적인 서부 영화 갈등과 지구 종말 영화의 재미거리들을 방해하거나 뒤덮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이런 이야기 거리도 술술 잘 풀어놓은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소림사의 고수 스님이라서 싸움을 잘한다는게 반전이라는 것은 아니란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몇몇 중대한 위기들을 "주인공은 운도 좋고 힘도 세니까"하고 그냥 얼버무리고 때우는 부분들이 있어서 이야기에 구멍이 뚫리는 듯한 느낌이 나는데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맨손으로 싸워도 다 잡아 죽일 힘이 있는데, 악당은 기관총으로 무장을 하고 마구 갈겨도 주인공은 절대 안죽는다는 람보2 류의 발상으로 얼렁뚱땅 주인공의 무시무시한 위기를 통과해 버리는 것입니다. 특히나, 이 영화가 나름대로 진지하고 심각한 분위기가 근엄할 때와 어울릴 때나 막판 반전과 같은 결정적인 대목을 앞두고 이런 것이 어울리면 좀 많이 엉뚱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절대 주인공은 안죽기로 악명 높은 옛 서부영화의 주인공들 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더욱 더 운이 좋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나오는 모 서부영화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래도 총알 막으려고 철판을 가슴팍에 숨겨 넣고 있다는 정도의 사연이라도 소개되면서 주인공이 버티는데, 이 영화는 그보다 더한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어림없게 싸움 잘하는 엄청난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끌어 나간다는 자체도 참 힘겨운 일이지 싶습니다. 이 영화가 어쩔 수 없이 구멍이 뚫리는 데를 빼놓으면 그럭저럭 멋지게 이야기를 버텨내고 있는 이유를 찾자면, 역시 그 주인공을 연기한 덴젤 워싱턴의 완벽한 연기를 칭송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덴젤 워싱턴은 현실적이고 평범하고 보통 도시 근로자 같은 느낌을 똑똑히 유지하면서도, 엄청나게 싸움 잘하고 시적인 대사를 읊조리고 "엘 마리아치" 시리즈나 "신 시티" 시리즈 주인공 못지 않게 폼을 잘 잡는 참으로 기묘한 역할을 아주 멋지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지구 종말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 때문에 일반인도 처절한 생존 투쟁에 몰리게 되었다는 그 느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그냥 보통 회사 직원이었지만 지금은 서바이벌의 고수가 되었다는 그 기구한 사연을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에 다 담아내는 듯 합니다. 잡화상에서 총 뺏는 대목을 비롯해서 싸움 장면의 동작 연기도, 그 몸짓 하나하나가 기막힌 부분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와코비아 지점 한 군데에 걸어 들어가서 은행을 털어도 완벽히 어울릴 행색)

악당 부하들은 서부 영화에서는 좀 다채롭게 나오는 것이 재미나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냥 다들 떡대 좋고 인상 더러운 폭력배들 뿐이라서 좀 심심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단역들도 연기가 어색한 배우들은 없고, 다른 작은 배역들과 조역들도 모두 잘 어울렸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서부 영화 인물 구도에서, 칼싸움 영화 같은 싸움 솜씨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요즘 대도시 흑인 근로자 같은 성격이 남아 있는 인물이라서, 독특한 맛이 많은 것에 비하면, 악당 두목은 그냥 제임스 본드 시리즈 악당 두목들과도 별 다를바 없는 훨씬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대사도 악당 두목의 대사는 독특한 맛이 절묘한 대사보다는 단순한 말을 연극적으로 과장되어 하거나 거창하게 읊조리는 대사들이 많습니다. 게리 올드만은 이런 인물을 맡아서 최대한 제 몫을 다해서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우기 주인공 댄젤 워싱턴과 잘 어울리게 맞받아 꾸며 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게리 올드만이 더 재미 없고 더 흔한 인물을 맡았기는 해도, 그 연기 솜씨는 도리어 더욱 뛰어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밖에...

원래 제목이 "The Book of Eli" 인데, 제목 자체가 영화의 이야기와 맞아 들어서 이야기 거리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목의 의미를 따지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거리라는 것입니다. "환상특급"류의 짧은 이야기에서도 이런 사례는 많을 겁니다. 그러니만큼 별 의미가 없는 "일라이" 같은 지금 제목 보다는, 차라리 정확한 번역은 아니라도 "일라이의 복음서" 정도 되는 제목이 더 좋지 않겠나 생각 합니다.

억지를 쓰자면, 농담 삼아 "더 로드"는 일본 칼싸움 영화 "아들을 동반한 검객" 시리즈와 견주어 지는 영화이고, 이 영화는 그 보다 더 유명한 옛날 일본 칼싸움 영화 시리즈와 견주어 지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본문 중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비슷한 소재와 배경을 갖고 왔어도 이 영화와 "더 로드"와는 아주 아주 많이 다른 정취를 담고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만.

덧글

  • 존다리안 2010/04/18 23:32 # 답글

    딱 北斗의 拳이군요.
  • oIHLo 2010/04/19 00:12 # 답글

    무려 8천만달러짜리더군요.
    개틀링건 장면은 콘티 짜느라 애쓴 티가 나긴 했습니다.


    3류 악당 역을 해도 나름의 품격이 느껴진다니... 개리 올드먼이 명배우긴 한가 봅니다.
  • baemale 2010/04/24 20:15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게렉터님. 다름이 아니라 제가 문화콘텐츠를 전공하는데요, 그래서 요괴와 관련된 소재로 게임을 기획하거나 판타지소설을 하나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게렉터님의 요괴관련 자료들을 십분활용하고 싶어서요.
  • 베이글 2010/04/26 16:14 # 답글

    와코비아 지점에 나타날 법한 차림이네요.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