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를 쫓아라 영화

1970년작 첩보물 한국영화 "그 여자를 쫓아라"는 금괴를 빼내던 일당들이 내부 배신자 때문에 의문의 폭파공작으로 죽어버리면서 출발합니다.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되면,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홍콩에서 건너온 진정한 주인공 윤정희가 등장하는데, 윤정희는 아버지가 왜 금괴 빼내는 일에 뛰어들었는지 알고 싶어해서 조사를 시작합니다. 이제 영화는 각종 의문의 악당들이 윤정희를 추적/협박하면 금괴의 행방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윤정희 주위에 자꾸 꼬여드는 이야기로 나아 갑니다.


(포스터)

그리하여 이 영화는 어여쁜 여자 주인공이 어느날 갑자기 어마어마한 비밀의 소용돌이에 빠져서 자꾸만 수수께끼가 엉키는 범죄와 첩보의 대잔치에 빠져든다는 내용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독을 맡은 많은 영화들 중에 비슷한 내용으로 나온 고전들이 있고, 최근까지도 적당히 신나고 적당히 웃긴 내용으로 자주 만들어지는 내용입니다. 최근에 나온 인기작으로는 이 영화에서 윤정희가 맡은 역할을 카메론 디아즈가 맡은 "나잇 앤 데이" http://gerecter.egloos.com/4782770 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부류의 영화 중에서도 특히 스탠리 도넌이 감독을 맡았던 "샤레이드" http://gerecter.egloos.com/3046929 에 큰 영향을 받은 내용입니다. 전쟁 중에 숨겨진 금괴를 찾아다닌다는 초점과 의문의 사건에 빠져드는 여자 주인공이라는 내용부터가 일치하며, 여자 주인공의 친인척이 사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밀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이 드러나는 것도 같습니다. 여자 주인공 주변을 떠돌면서 적인지 동지인지 애매한 수수께끼 남자 주인공으로 캐리 그란트 같은 여유 부리는 신사 한명이 있다는 점도 같습니다. 물론 "샤레이드"에서는 진짜 캐리 그란트가 그 역할을 맡고 있고, 이 영화에서는 김희라가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샤레이드"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여자 주인공의 능력 입니다. "샤레이드"에서는 오드리 헵번이 재치 있고 귀여운 여자 주인공을 맡아서 관객이 자기 입장이라고 생각할만한 평범한 보통 사람에 가까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멀쩡한 보통 사람이 괴상한 상황에 휘말리고 엄청난 비밀에 끼어드는 그 당황스럽고도 놀라운 느낌을 영화의 중요한 재미로 살려가는 것입니다. 물론 오드리 헵번의 그 독특한 인물은 그저 "평범"한 것과는 무척 다르지만, 그래도 기둥은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이 영화에서 윤정희는 절대 평범한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윤정희는 스스로 꽤 대단한 첩보원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몇 마디 말로 단숨에 총을 빼앗는 기술을 갖고 있는가 하면, 무시무시한 악당 앞에서 절대 주눅들지 않는 베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일본 야쿠자 영화 여자 주인공 처럼 도박에 능하기도 하고, 채찍을 휘둘러대는 고문을 의연하게 버텨내는 힘도 있고, 사격에 대해서는 일류의 식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여자 주인공을 강력하고 멋진 첩보원으로 활용하는 영화입니까? 윤정희가 활약하는 몇몇 대목만 보면 그래야 마땅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중심 줄거리는 그대로 "샤레이드" 구도와 그냥 같습니다. 이 영화는 윤정희가 멋진 첩보원처럼 활약하는 장면도 넣고 싶어서 꽤 많이 집어 넣었지만, 이야기는 무시하고 그냥 "평범한 주인공이 어마어마한 비밀에 엮이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겁니다.

이러다보니 어떤 장면에서 윤정희는 제임스 본드급의 초능력 요원처럼 행동하다가, 어떤 장면에서는 남자주인공의 구출을 바라며 비명만 지르는 옛날 모험영화 여자주인공처럼 행세할 뿐입니다. 이야기는 오락가락하고, 내용은 연결이 어색해지고, 인물의 개성은 죽고, 재미는 부족해 졌습니다. 이 영화에서 김희라는 제임스 본드에 치즈 토핑을 두 번 정도 더 엎어 놓은 듯한 극단적인 대사를 읊조리는 어마어마한 인간으로 나와서 건들건들거리고 다닙니다.

여자 주인공의 중심이 비틀비틀 하고 있다보니, 마땅히 팽팽하게 관계가 유지되면서 별별 재미난 사연들이 다 엮여져야 마땅할 남자 주인공과의 이야기도 억지에 억지를 거듭할 뿐입니다. 적당히 관능적인 장면도 보여주고, 남자 주인공이 악당인지 선인인지 수수께끼 같은 느낌도 유지하고 하려하다 보니, 김희라가 자꾸 윤정희를 덥치려다가 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뜬금 없이 이야기를 방해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도전을 해보자면, 여자 주인공이 대단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 여자 주인공을 둘러싼 음모가 워낙 해괴하고, 남자 주인공은 더 엄청난 사람이라는 식으로 가 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했다면, 여자 주인공의 초인적인 능력도 강조하면서 나름대로 수수께끼 같은 사연에 빠진 평범한 사람의 느낌도 살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라쿠엘 웰치를 주인공으로 한 "레드 로즈 특공대(패톰)" http://gerecter.egloos.com/3458218 같은 영화는 엇비슷한 시도로 적어도 이 영화보다는 훨씬 매끈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꾸며내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곳에 도달하기에는 한참 모자랐다고 느꼈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샤레이드"의 중심 줄거리를 가지고,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대표되는 당시 첩보물의 흥겨운 내용들 중에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이리저리 뽑아서 덕지덕지 갖다 붙여 놓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장면을 골라서 끼워 넣었느냐에 따라서, 주인공의 위치부터 인물의 관계까지, 좀 엉망으로 오락가락하고, 이야기는 허무 맹랑하고, 갑자기 막판에 죽을 때 부질없이 긴 대사를 하면서 죽는 인물이 나와서 무슨 감동의 한 장면인척 하면서, 휙 끝나버리는 싱거운 모양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 복선을 이용해서 이야기 구조를 흥미롭게 꾸며나가는 수법도 찾아 보기 어렵고, 호기심과 긴장을 이용해서 흡인력을 생기게 하는 재주도 현격히 부족합니다. 이 영화에는 복선답게 복선이 활용되는 부분이 아예 없을 지경입니다. 당연히 끝까지 봐도, 별 대단한 상황이 펼쳐지지도 않습니다. 금괴가 어디에 있는지, 주인공의 아버지의 정체는 무엇인지, 수수께끼의 남자 주인공의 정체는 뭔지, 다 별 재미 없는 내용이고, 드러내는 순간의 연출도 심심하기만 하고, 당연히 실감나게 이치에 와닿는 맛도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자동차 추격전 장면등등 몇몇 기술적으로 부실한 대목은 실망을 더하기까지 합니다.

그나마 재미난 것들은 그래도 이래저래 뽑아내서 덕지덕지 붙여 놓으려고한 노력 덕택에 순간순간 한 장면 한 장면이 눈길을 끄는 대목들이 꽤 있다는 점 입니다. 일단 이 영화에 나오는 폭파 장면들은 깔끔하게 촬영되어 있습니다.

또 중간에 한번 나오는 양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폐공장의 진창을 뒹구르며 싸우는 장면은 일본 야쿠자 영화의 비슷한 모양을 잘 따라한 꽤 그럴싸한 촬영이었지 싶습니다. 불법 도박장에 출입하면서 "한강에서 온 올챙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윤정희의 모습이나, 제임스 본드 영화의 여유 부리는 대사를 따라한답시고 기괴할 정도로 극도로 양식화된 "여유 부리는 대사"를 주고 받는 김희라의 모습도 묘하게 재미난 맛이 있습니다. 도박 장면은 "銀蝶渡り鳥" 등의 당시 일본 범죄물에서 유행하던 장면들과 매우 비슷하게 되어 있는데, 연출이 좀 엉성한 듯은 해도 윤정희가 도박장에서 타짜 악당의 손에다 칼을 확 꽂으면서 사기치지 말라고 하는 장면은 역시 볼거리가 되어 줍니다. (銀蝶渡り鳥 보다도 빨리 나온 영화니, 유행에 빠르게 적응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독특한 것으로 꼽을만한 것이라면, 주인공과 그 아버지의 출신입니다. 이 사람들은 항일 운동을 위해서 일제시대에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거기서 잘 자리 잡아서 부유층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거기에 남아 있을 수 없어서 홍콩으로 건너가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중국-홍콩-대만 정세에다가, 2차대전시기의 상황, 당시 친일파들과의 갈등, 공산당에 대한 냉전 구도까지 별별 내용들을 다 얽어 볼 수 있는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무정부주의적인 "만주물"스러운 내용을 끼워 넣기도 좋고, 국제적인 음모를 집어 넣어 분위기를 잡기도 괜찮은 발판이지 싶습니다. 아쉽게도, 결말 장면을 보자면 진부하기만한 발상으로 이 모든 재미거리를 다 날려 버렸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는 최소한의 선을 지키려고 시도는 하고 있는 영화 입니다. 적어도 영화를 중간에 막 끊어먹고 넘어가는 느낌은 나지 않게 막아 보려고, 최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싶게 뭐라도 핑계는 대 가면서 내용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오락가락하는 인물의 상황 탓에 황당무계한 역할을 많이 하게 되었으면서도 김희라, 윤정희, 장동휘, 강민호 모두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특히 윤정희는 정말 아름다워서, 초인적인 첩보원이건 오드리 헵번이건 다 해낼 수 있어 보일 지경입니다.

거기에 짜집기해 놓은 내용 중에 그대로 적당히 건질 구경할 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전히 많이 모자라기는 해도, 적어도 비슷한 시기에 나온 비슷한 소재의 한국영화 "동경특파원" http://gerecter.egloos.com/3498678 보다야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밖에...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데, 윤정희가 "시력을 잠시 잃게 된다"라는 것을 소재로 삼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대목이 영화에 있습니다. 아마도, "샤레이드"처럼 오드리 헵번이 주연을 맡은 영화 "어두워 질 때까지"에서 오드리 헵번이 눈이 안 보이는 사람 역할을 한 것을 따라 해 보려고 한 까닭으로 짐작해 봅니다. 이 영화의 소재와 장면들이 대충 이런 식으로 모여 있으니 말입니다.

임권택이 감독을 맡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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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0/10/11 09:5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10/10/12 09:17 #

    "시"가 이 영화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단연 호언장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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