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풍운 (龍虎風雲, City on Fire, 1987, 미스터 갱) 영화

1987년작 홍콩 느와르 영화, "용호풍운"은 주윤발이 범죄자들 사이에서 경찰을 돕는 끄나풀로 나오는 영화 입니다. 주윤발은 맨날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항상 음지인 범죄자들 세계만 오가면서 살아야 하는 끄나풀 삶에 피곤해 하는데, 그러면서도 "일"이니까, 또 자기가 잘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버텨나가고 있습니다. 주윤발은 영화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마지막 한 건에 뛰어드는데, 여기에서는 이수현이 보석 강도 한탕을 하려는 진짜 범죄자로 출연하게 됩니다.


(홍콩의 밤거리)

이 영화에서 첫번째로 꼽아 볼만한 점은 소위 말하는 네오 느와르(neo-noir) 요소 입니다. 70년대 즈음부터, 할리우드 영화 중에는 악당을 주인공으로 하거나, 비정한 범죄 세계를 배경으로 하되, 어딘지 울적한 도시의 낭만으로 분위기를 잡아 대는 영화들을 "네오 느와르" 영화라고 종종 불러왔던 듯 싶습니다. 그러니까, 옛날 40, 50년대 흑백영화 시절 느와르 영화와 비슷한 줄거리에 비슷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면이 많이 있는데, 복고풍으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현재 도시 사회의 날카롭고 멋진 최신유행을 더 삭막한 느낌으로 살리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 빠진 영화들이 80,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전형적인 연출 형식이 자리잡기도 합니다. 블루스 계통의 끈적이는 배경 음악, 푸른 빛이 새어 들어 화면이 온통 청색 계열이 되는 어두운 밤 장면, 보통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위험한 여자 주인공, 아무 음악 없이 생활 소음이 들리는 다소 나른한 장면으로 쓸쓸함과 우울함을 한번 고조해 보려는 장면. 등등이 떠오릅니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영화로는 "원초적 본능"을 생각해 볼만하고, 초기 예시로는 70년대판 "기나긴 이별"도 생각 납니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서는 90년대 즈음해서 "정말 최신 유행스러운 멋있는 영화 한 번 만들어 보자"고 해서, 이런 네오 느와르 분위기를 줄창 따라하면서 밀어 붙이다가 어색하게 겉멋만 잡는데 그치고 조악한 연기로 말아 먹은 영화들이 꽤 되지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40, 50년대 흑백영화 시절, 할리우드 느와르 영화를 열광적으로 평가하고 거기에 영향 받은 영화들도 많이 만들어진 것이 프랑스 영화계인만큼, 반대로 이 "네오 느와르" 영화는 프랑스 범죄 영화의 영향을 역으로 받은 부분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도 별 근거 없이 그냥 그러려니 하는 기분도 지금 잠깐 듭니다.

바로 이 영화, "용호풍운"은 이런 "네오 느와르"부류의 연출을 정석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블루스 계통의 배경 음악은 깨끗하게 녹음 되어서 감상적으로 잘 흐르고 있고, 채도가 낮은 화면 속에서 따스하게 번져 나오는 홍콩 밤거리의 전등 불빛들은 외롭지만 멋있고, 우울하지만 낭만적이고, 삭막하지만 뜨거움도 있는, 도회적인 밤분위기를 묘하게 담아냅니다. 특히, 초반, 거리에서 벌어진 범죄 소동을 담아내는 장면은 덥고, 습하고,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운 아시아 밤거리, 홍콩 밤거리 특유의 혼란스러운 개성을 잘 드러내어 줬습니다. 높게 솟은 빌딩 사이 복잡한 굽이굽이 거리마다 정말 별별사람들이 별별일을 다 벌이면서 오늘 밤도 깊어가는구나 하는 심상이 긴박한 가운데에도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입니다.

몇몇 장면에서 허무함과 쓸쓸함, 그걸 아스라히 웃어 넘겨버리는 주윤발 특유의 미소와 짤막 짤막하게 흐르는 한 두 소절 블루스 곡조는 정말 어떤 "전형"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런 걸 어줍잖게 따라하려다가 실패하면, "차가운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하지"라는 그 말이 담고 있는 조롱거리가 될 수 있겠구나 - 바로 느껴집니다. 어줍잖은 사람이라도 따라하고 싶을만큼, 이 영화에서는 그런 전형적인 분위기가 잘 나와 준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로 나아가고 있는 영화 입니다만, 동시에 몇몇 이야기 전환점에서 총격장면, 액션장면은 또 아주 솜씨 좋은 구경거리가 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런 장면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오는 장면마다 과연 좋은 솜씨다 싶게 정성이 엿보입니다. 도입부의 범죄 추격전 장면은 이미 언급했습니다만, 마지막 결전 장면에서 결전에 어울리는 긴 싸움 장면들도 충분히 볼만합니다. 영화 내내 언급되었던 "보석 강도" 장면을 차례로 담아내고, 뒤이어 이어지는 경찰과의 추격전, 그리고 각 인물들의 마지막 운명까지 길게 이어지는 하나의 연결된 싸움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영화 결말에 걸맞게 박진감도 있고, 크기도 크고, 장중함도 있습니다.

긴장의 팽팽함과 느슨함을 오가면서 긴 싸움 장면을 이어가는 짜임새는 튼튼합니다. 특히 몇몇 총격 장면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사람의 모습이나, 총을 쏘는 사람의 흥분한 모습이 짧지만 적당히 격하게 화면에 나오게 한 것은 딱 알맞는 수준입니다. 파괴감을 살리기도 하면서, 얼마나 처절한 상황인지, 여기 모여서 뒤엉켜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극단적인 운명으로 막나가고 있는지, 짧지만 선명하게 인상을 남기게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홍콩 느와르라면 바로 이런 맛)

이 영화가 잘못 미끄러지면 저지를뻔했던 문제점은 지겨워 질지 모른다는 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분위기 잡기가 잘 되어 있고, 이런 바탕에서 느긋하고 쓸쓸한 네오 느와르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자칫 지루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중반부, 초반부에 보다보면 좀 지겨울 때도 있고, 너무 이야기를 분위기 잡느라 느릿느릿만 간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아주 재미없어 지지는 않습니다. 버티는 술수를 나름대로 세워 두고, 영화 내용에 어울리게 줄거리를 요리조리 잘짜서 그래도 지겨움을 막아내도록 잘 꾸며 놓았습니다.

우선 쓸쓸하고 우울하게 폼잡는 주윤발이 여자친구 앞에서는 그냥 장난스런 지극히 평범한 남자친구로 행동하려한다는 점을 잘 이어지는 연결장면과 좋은 연기로 보여준 것이 장면 전환에 잘 먹혀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맨날 경찰 끄나풀로 범죄 세계와 얽혀서 살고 있는 주윤발이, 얼마나 간절히 "그냥 평범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구구하게 말로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눈빛 속에, 지나가는 웃는 표정 하나하나 속에 담아내는 역설적인 효과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다가 이야기의 중심을 관통하는 "범죄자들 사이에서 범죄자인척 하는 경찰측 요원"이라는 범죄물의 주요한 이야기 거리를 제대로 잘 짚어 낸 것도, 중심을 충분히 잡아 줍니다. 이렇게 "범죄자인척 하는 경찰" 이야기는, "그러다가 범죄자들과 오히려 의리를 느끼는 모순적인 상황에 빠지는데..."하는 기묘한 이야기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에 느와르 영화의 절묘한 소재라고 할만합니다.

요즘에야 이런 소재를 다룬 영화의 거목과 같은 대표작으로 단연 "무간도"를 꼽을 수 있고, 중국에서 고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수호지"의 범죄자들에게 동조하게된 "호걸"들을 꼽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저는 영화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70년대 일본영화에서 "야쿠자 형사" 시리즈, "야쿠자 형사"를 다룬 영화들이 유행하면서 자리잡은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중간중간에 다리 역할을 하는 다른 여러 영화들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만, 역시 이 영화도 바로 70년대 일본의 "야쿠자 형사"시리즈가 개척한 소재를 잘 활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지루하지 않고, "과연 정체는 언제 탄로나고, 그러면 어떻게 될것인가?"하는 점을 가슴 졸이고 보게 하는데 이 소재가 제 몫을 한 것입니다.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요)

이 대목에서는 공을 세우는 것은 주윤발의 "동료" 범죄자가 되는 범죄자 역을 맡은 이수현 입니다. 이 영화에서 이수현의 범죄자 연기는 아주 출중합니다. 보석 강도 한 판으로 잘 살아 보겠다는 망가진 인생의 서글픔을 잘 표현해 내기도 하면서, 동시에 사람 답게 친하게 같이 어울려 팀을 꾸려 보겠다는 활기차고 정겨운 느낌도 담아 냅니다. 그러니, 분명히 범죄자고, 인생 망한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이 충분히 들면서도, 관객들로하여금 "보석 터는 데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응원을 하게 만드는 그런 진심으로 불쌍해 보이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 절묘한 이수현의 인물 연기가 연결 고리가 되어서, 끝도 없이 분위기를 잡아대던 패션쇼 같았던 이야기가 현실감, 질박함, 공감으로 연결 되고 있습니다. 이게 이 영화의 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이수현이 가담하고 있고, 주윤발이 끼어든 "강도단"이란 것은 조직 범죄라고는 하지만, 무슨 대단한 "대부"와 "두목"이 충성과 위계를 뽐내며 화려하게 하는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그냥 경험 많은 전과자랑 경험 없는 햇병아리 범죄자랑 서로 어울려서 "강도"짓 해서 생활비 한 번 벌어 보겠다는 게 다 입니다. 밑바닥의 희망 없는 삶의 한 풍경, 몰릴 데로 몰려서 강도짓을 하게 된 그 불우하고도 보기싫은 인간들의 군상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런 친구들끼리 어울려서 껄렁거리며 다니면서 서로 친해지고 우정을 느끼게 되는 그래서, 어떤 "의리" 비스무레한 것이 생겨나게 되는 그 매우 와닿는 현실적인 소재가 생생히 살아나는 것입니다.

웃는 모습이 더 불행해 보이는 이 절묘한 범죄자의 절박한 모습을 다루는 느낌 때문에, 강도 이수현과 끄나풀 주윤발간에 의리가 생기는 느낌은 더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주윤발이 "배신"을 하면 어쩌나 하는 아슬아슬한 느낌이 더 영화에 빠져들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덕분으로 이 영화의 마지막 결전은 충분히 이야기 전체를 사로잡을만하며,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되나 싶은 호기심과, 몰리고 몰리는 그 절망감,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어 보려고하지만 자꾸만 낙망하게 되는 감상, 여기에 엮일만한, 이 느와르 특유의 허무한 서글픔이 잘 조화된다 싶었습니다.


(강도질로 먹고사는 이수현)

제가 아쉽게 느끼는 대목은 이렇게 후반부에서 이수현의 인물이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고, 연기도 너무 잘하기 때문에, 마지막 대결전에서 상대적으로 주윤발의 역할은 너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의 흐름이나, 이야기에 빨려드는 몰입감에 비해서, 영화가 마지막까지 끝이나도, 모든 이야기거리가 장중하게 정리된다는 느낌은 적은 편입니다. 대신에 한쪽 방향만 급하게 마무리지은 듯합니다. 그래서, 영화 보고 나서, "내가 이 영화 제작진이었다면" 마지막에 누가 죽고 누가 살게 하겠다든가, 누구는 어떻게 되게 하겠다든가 하는 여러 다른 결말에 대해서 자꾸 영화 본 관객들끼리 말하게 만드는 면도 있습니다.

도시 풍경, 음악, 인물 구성등등의 면에서, "느와르" 영화의 일종으로서, "홍콩 느와르"를 생각해 보기에 좋은 표본이라 할 만한 영화 아닌가 합니다. 지금와서 보면, 80년대 후반 호황기의 아시아 도시 이면 풍경이 어땠나 싶은 표본으로 꼽아 볼만한 좋은 자료라는 생각도 듭니다. 애니매이션으로는 일본의 "씨티헌터", 영화로는 홍콩의 "용호풍운" 어떤가 하는 생각 자주 해보게 됩니다.


그 밖에...

이 영화 줄거리를 보다보면 당연히, 쿠엔틴 타란티노가 감독을 맡은 "저수지의 개들"이 떠오를 만 합니다. 핵심 소재는 거의 동일한 영화이고, 흘러가는 꼴도 비슷합니다. 다만, "저수지의 개들"과 이 영화의 분위기는 전혀다르고, 줄거리도 꼭 아주 다른 것처럼 느껴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한 때 크게 이야기거리를 불러 일으켰던, 특유의 줄거리 섞어치기 수법으로 이야기 시간 순서를 섞어서 보여주고 있는데다가, "저수지의 개들"은 "용호풍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네오 느와르" 분위기는 싸악 다 빼버리고 오히려 정반대의 분위기로 꾸미고 있다는 점, 등등이 이유 아닌가 싶습니다.

"첩혈쌍웅"에서는 이수현이 경찰편 주윤발이 범죄자편인데, 이 영화에서는 반대 입니다.

"감옥풍운"등의 영화와 함께 시리즈로 묶여서 불리우는 일이 많습니다.

"미스터 갱"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었던 제목 중 하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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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닥슈나이더 2011/01/10 22:51 # 답글

    아~ 제가 답글 달려는 내용이 이미
    <"첩혈쌍웅"에서는 이수현이 경찰편 주윤발이 범죄자편인데, 이 영화에서는 반대 입니다.>
    이렇게 쓰셨네요... 저게 아마 마케팅 포인트도 되었던듯.......

    여기서 주윤발의 그 에스컬레이터 사이 난간으로 팔 튀기면서 내려오기가 나오지 않나요??

    어렸을때 이대나 충무로 역에서 꼭~ 해보고 싶었는데..^^;;
  • 게렉터 2011/01/11 09:05 #

    나오는 걸로 기억합니다. 그거 따라하는(따라해보려는) 사람도 한 때 많았습니다.
  • 2011/01/11 00:4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11/01/11 09:05 #

    감사합니다~!
  • DOSKHARAAS 2011/01/11 08:57 # 답글

    실제로 쿠엔틴 타란티노는 용호풍운의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을 했다는 말은 듣긴했지만 건너 건너 들은 거라 잘은 모르겠군요... 저는 세대 상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 게렉터 2011/01/11 09:06 #

    저는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두 영화가 이렇게 비슷한 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분위기를 다르게, 연출 수법을 다르게 하면, 이렇게 영화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구나 싶습니다.
  • 독자 2011/01/14 20:36 # 삭제 답글

    게렉터님!!

    안작득지 그리고 신라시대 그림그리는 여인네 이야기를 읽고 무진 감동을 받은 지나가던 독잡니다..

    한번쯤 '경국지색'에 관하여 글 올려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ㅜㅜ 이게 정말 고전이 아니고 현대인의 창작이라는게 놀랍습니다

    정말 좋은 글들 감사하구요, 앞으로도 번창하세요!!
  • 게렉터 2011/01/14 23:02 # 답글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소재의 이야기는 "신라기이" 시리즈가 아니라도 이후에 이어질 다른 삼국시대 배경 시리즈에서 만나보실 기회 있으실 줄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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