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투혼 (강호룡호투, 江湖龍虎鬪, Flaming Brothers, 1987) 영화

1987년작 "영웅투혼"은 "영웅본색" 이후 대대적으로 유행을 탄 홍콩 느와르 영화들 중에서, 그 흐름의 한 중앙에 있다고 할만한 전형적인 홍콩 느와르 영화 입니다. 범죄자 주인공, 처절하거나 장렬한 비극적인 이야기, 의리를 중요시하는 인간 관계, 한 자루의 권총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총알. 모두 다 나옵니다. 전형적인 "홍콩 느와르" 영화치고 약간 어긋나는 대목이라면, 영화의 배경이 홍콩이 아니라 마카오라는 점입니다. 내용인즉 어린 시절 거지로 지낼때부터 같이 자라온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인 주윤발이 첫사랑을 만나면서 범죄계에서 손씻고 새 출발 하려고하는데, 쉽지 않다는 이야기 입니다.


(마지막 결전 장면 중에서 - 영화 전체의 분위기는 이런 분위기만은 아닙니다만)

이 영화는 우선 선명하고 또렷한 줄거리를 잡아 놓고, 그다지 길지 않은 상영시간 동안 그 줄거리를 똑똑히 따라가는 영화 입니다. 줄거리 자체 역시 소재에서 바로 뚝 떨어지는 쉽고 또렷한 것입니다. 복잡하게 꼬이는 것이나 어지럽게 엉키는 것 없이, "홍콩 느와르"하면 따라가야할 그 방향 그대로를 시간 순서 그대로 밟아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 요소가 있겠습니다만, 배우가 좋고 줄거리가 잔재주 없이 색깔이 뚜렷해서 우선 그것으로 일단 볼만한 영화 였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한다고 해 봅시다. 첫번째: 운명적으로 남녀가 만나서 좋아하고, 두번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점을 알고 괴로워하고, 세번째: 관계가 들통나서 주변에서 한 번 싸우고, 네번째: 억지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묘책 - 야반도주를 계획하지만, 다섯번째: 결정적인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아서 슬프게 끝난다... 라는 정도가 정해진 발걸음이라고 할만합니다. 그렇다면, "홍콩 느와르"라면 어떤 이야기가 가장 꾸밀만하겠습니까? 범죄 세계에서 의리 하나로 뭉쳐서 살아나가는 "형제"가 있습니다. 형제 중에 한 명이 어떤 계기로 손씻고 범죄계에서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범죄계의 악연으로 손 씻고 떠나기가 쉽지 않아서 위기에 휩싸입니다. 결국 의리에 엮인 사람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목숨 바쳐 피튀기면서 수백발씩 총알이 나가는 마법의 권총을 휘두르며 마지막 대결전을 벌입니다.

이 영화, 역시 바로 이 이야기를 그대로 하나하나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마카오의 경마장 한 켠이 마지막 결전의 무대 입니다.)

좀 더 줄거리를 끌어내어서 설명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마카오에서 살아가는 거지 남자 아이 둘이 있습니다. 자라서 주윤발이 될 한 아이는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있는 한 여자 아이에게 밥을 얻어 먹으면서 이 여자 아이를 좋아하게 됩니다. 두 남자 아이는 자기들이 밥 훔쳐 먹는 것을 두고 호통치는 어른들이 깡패들에게는 굽신 거리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깡패가 되어서 떵떵거리고 살겠다고 막연히 결심합니다. 시간은 흘러흘러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자리잡은 깡패가 되었습니다. 보아하니, 두 사람은 유흥가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은 그야말로 "깡패"지만, 그래도 마약에는 손을 안댄다든지하는 나름의 규칙을 최소한 지키려고 하는 "의리있는" 범죄자들 입니다. 그와중에 주윤발은 우연히 옛날 그 첫사랑의 여자 아이를 만나고, 사랑을 위해 손씻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새사람이 되려고 한다는 겁니다.

60, 70년대 일본 야쿠자 영화들이나, 거기에 영향을 받은 한국 범죄물 영화 중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 듯한 이야기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영화 역시 그런 닳고닳은 옛 영화 같은 고루한 냄새에 좀 쩔어 있는 느낌이 없잖아 있기도 합니다.


(여자 주인공, 하문석)

가장 누추한 부분은 문어체로 꾸며져 있는 비현실적인 대사들과, 감정을 쓸데 없이 짜내어 쳐발라 놓은 양식화된 연기 구성 밖에 없는 몇몇 장면들이었습니다. 감상을 자아낼 부분, 결정적인 상황 설명을 위해서, 배우에게 그럴싸한 대사를 읊어댈 시간을 주는데, 이 대사란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각본 쓰는 사람은 감정에 못이겨서 격하게 썼지만, 듣고 있자니, 영화가 나온 유행에서 1, 2년만 지나가도 이게 무슨 철지난 추함인가 싶다는 겁니다. 여기에 이런식으로 망해가던 영화들에서 잘 보이던 난데 없이 터져나오는 갑작스런 "애절한 음악", "슬픈 주제가"도 위태위태하게 나오고, 관객들에게 재미를 줘야한다는 의무감에 발맞춰 끼워져 있는 "배우들의 바보짓 흉내 개인기로 웃기는 시간"이 난삽하게 나오는 등등의 문제점들도 조금씩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각본 전반을 볼작시면 이렇게 어색한 대사로 망가지는 부분 보다는 핵심을 또박또박 따라가는 사건이 충실한 부분이 더 선명한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영화 요소요소에 스쳐지나가는 복선들을 이용하는 솜씨가 탄탄합니다. 인물 하나 허투루 낭비되는 품 없이 끝까지 사건마다 잘 엮어 써먹고 있습니다. 복선들 중에서는 이 영화를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기도문" 복선 같은 것은 심금을 울리는 한 방입니다.

한번 떠들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수녀들과 함께 지내는 여자 주인공은 어린 시절, 더러운 거지 였던 주인공에게 밥을 몰래 나눠주면서 항상 식전의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성스럽고 밝은 세계의 여자 주인공, 추하고 더러운 세계의 남자 주인공으로 대립되는 영화 속 세상에서 남자 주인공은 깡패로 자라났지만, 그 옛날 그 기도문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인공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기도하고, 본성은 선하다는 상징이기도 하고, 주인공 스스로 멀쩡하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듯도 합니다. 남녀 주인공은 한 20년만에 우연히 만납니다. 너무도 달라진 서로의 상황 때문에 서로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우연히 기도문을 되뇌이게 되는 순간, 서로, 서로 알아보는 기회가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 한 곳에 계속 남아 있던 한 심정이 다시 되뇌이게 되는 순간이 된다는 겁니다.

되짚어보자면, 대사나 음악, 편집은 엉성한 대목이 꽤 눈에 뜨이는 각본이지만, 벌어지는 사건과 행동들은 여전히 충실하기 그지 없고, 충분히 정교한 각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상적인 대사를 잡아내는 연출은 헛점이 있는 편이지만, 싸움 장면, 총질 장면을 잡아내는 부분의 연출은 화면 연출도 이 행동을 잘 보여주는 각본에 들어맞게 훌륭합니다. 특히 마지막 대결전 장면에서, 어떤 총에는 총알이 남아 있고, 어떤 총에는 총알이 안남아 있는지 난잡한 상황이 복잡한 이야기가 되는 데, 이걸 요란한 격전 속에서도 잘 알아 볼 수 있게 꾸며 놓았습니다. 마지막 결전은 무슨 게임이론 연습문제 같은 누가 누구를 협박하고 누가 누구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인지 마구 얽힌 것이 결정적인 파국을 만들어내는 상황이기도 한데, 이 복잡한 상황을 잘도 별 해설이나 어색한 설명 없이도, 깔끔하게 보고 이해할 수 있게 잘 영상을 짜 두었기도 합니다.


(나이트클럽 관리하는 깡패가 된 주윤발)

배우들의 행동, 표정도 이런 각본을 짊어지고 나갈만큼 잘 따라가고 있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충직한 부하를 연기하는 조연이나, 두목 형님의 애인을 연기하는 밤무대 가수는 외모에 어울리는 배역을 잘 맡아서 사건 진행을 튼실하게 잘 따라가는 모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자 주인공 격인 주윤발 역시 어딘지 허무하고 울적한 맛이 있지만, 여유만만하고 사람좋은 웃음도 잘 짓는 그 특유의 인물상을 이번에도 잘 보여 줍니다. 이 영화 중반에는 망가지는 모습으로 관객들을 개인기로 웃겨주는 대목이 있는데, 주윤발의 또다른 주특기이기도한 주성치류의 "막코미디" 솜씨 역시 잘 섞어서 드러내 있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여자 주인공을 20년만에 만나서 어색하게 호감을 드러내고 조심스럽게 "결혼했는지" 물어보는 장면에서는, 첫사랑 앞에서 쑥스러워할 수 밖에 없는 그 모습을 실감나고도 마음에 와닿게 무척 정교하게 보여주는 출중한 실력을 갖고 있기도 했다고 생각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에서 눈에 뜨이는 배우는 여자 주인공을 맡은 하문석 입니다. 깡패 주윤발과 대척점에 있는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엄청나게 착하고 연약한 상대역을 맡았는데, 겉모습부터가 그야말로 훅불면 마카오에서 홍콩까지 바다 건너 날아갈 것 처럼 정말 가녀리게 생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의지를 갖고 버티겠다는 꿋꿋함도 있고, 80년대 유행에 걸맞는 "당찬" 느낌도 약간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어찌되었거나 그 기본 바탕은, 옛 영화, 쏟아져 나온 양산형 영화의 여주인공들이 갖고 있던, 그 지어낸 이야기 속 인물 같은 구식 여성상을 바다처럼 이 영화 속에서 견지하고 있는 배우였다고 생각합니다. 순정을 따라가면서, 착하고, 또 순종적이고, 울고 화내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 남자 주인공에 대한 애절한 마음 밖에 없는 바보스러움을 눈물 연기로 꾸며내는 그 고루한 방식의 배역을, 아주 훌륭하게 잘 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주윤발의 "형수님" 격에 해당하는 배우조차 마찬가지로, 이 영화 속 여자 인물들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개성이야 어찌되었건, 결국 남자 주인공에 대한 애정과 순종에 모든걸 걸고, 눈물로 매력을 드러내는 구식 애정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식 여자 주인공 인물로 뒤덮어 놓은 형국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당시 다른 영화에 출연한 하문석의 모습)

이 영화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구질구질한 뒷골목의 썩은 인간들의 정서를 사실주의로 드러내는 요소가 군데군데 잘 살아나 있다는 것입니다. 배경이 마카오이기도 합니다만, 이 영화는 "첩혈쌍웅"이나 "용호풍운"류의 홍콩 느와르 영화들과는 달리, 도시 밤거리 풍경을 낭만적으로 잡아낸다든가하는 아름다운 밤풍경을 보기는 어려운 영화 입니다. 대신에 동남아시아 뒷골목의 대낮부터 술에 쩔은 쇠락한 거리의 찌든 풍경이 펼쳐져 있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지나치는 깡패들 말투에는 술집에서 낄낄거리며 진하게 놀고 자빠지다가, 갑부집 아들이 행패부리고 돌아오면 사장이라는 그 애비가 손 봐준다며 난리친다는 류의, 어찌보면 우리 주변에서도 노무나 익숙한 바로 우리곁에 있는 그 아시아의 퀴퀴한 밤문화를 계속 짚어주며 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그런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담고 있다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영화 전체의 줄거리 흐름을 막거나 박자감각을 흐트리지도 않도록 잘 조절되어 있기도 한 데, 이런 점은 이 영화 특유의 좋은 개성으로 짚어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충실한 홍콩 느와르 다운 줄거리 흐름, 애절한 사랑을 담고 가는 가운데, 실망 스럽지 않을만큼, 이 시절 홍콩 영화 다운, 다소간 환상적인 총싸움 장면도 적지 않이 충분한 영화 입니다. 전형적인 당시 이 부류의 홍콩 느와르 영화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게, 좀 기괴하게 남자 주인공들끼리 불타는 눈빛으로 서로 바라보는 장면이 스치는 부분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싸울 때는 총탄도 많이 날아다니고, 옛 무협영화와 연결되는 피튀기며 처절하게 싸우는 격한 연출도, 잔인하다기 보다는 화려한 양식화된 모습으로 군데군데 힘을 주면서 등장해 줍니다. 마지막 함성을 내지르며 자살하듯이 총알 속으로 같이 죽자고 뛰어드는 아시아 영화 속 깡패들다운 맛간 모습들도, 싸움의 속도 있는 파괴감, 총탄이 들이치면서 온몸을 요리조리 날려가며 싸우는 무술 같이 날렵한 싸움 연출 속에 잘 섞여 있었습니다.


그 밖에...

영화 좋아하는 한국 남자들이 불타오르며 이야기하다보면 이렇게 새게 될 때가 많은데,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선생님과 함께 "홍콩 느와르 영화 중에 영웅본색, 첩혈쌍웅 처럼 다 아는 영화말고 감명 깊게 본 것" 이야기하다가 최고로 꼽았던 영화 였습니다.

국내에서 통하는 제목이 "영웅투혼" 입니다. 한자로 된 원래 제목은 "강호룡호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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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1/01/14 23:1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11/01/18 09:12 #

    척이 아니라 진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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