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2011) 영화

2011년작 "걸리버 여행기"는 따지고 보자면 컴퓨터 그래픽 시대의 도래와 함께 찾아온 옛날 영화 새로 만들기 물결을 타고 있는 영화 들 중 하나일 겁니다. 50, 60년대에 나왔던 영화들 중에 특수 효과가 중요했던 영화들을 훨씬 더 싸고 실감나는 특수효과로 꾸밀 수 있는 요즘 기술로 다시 보여주자는 겁니다. "걸리버 여행기"는 소인국 정경을 보여주는 특수효과가 우선 자리에 잡혀 있습니다. 즉, 현대 뉴욕에서 출발해서 걸리버라는 이름의 신문사 문서수발실 말단 직원이 일이 잘못 꼬이면서 버뮤다 삼각지대로 취재여행을 떠나게 되고 거기서 이상한 회오리에 휘말려 소인국으로 가게 된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포스터)

그렇다면 기본 목표로 보아야 마땅한 소인국 정경은 어떻게 펼쳐지느냐 하면, 대체로 준수한 정도 입니다. 어색함 없이 깨끗하고 군데군데 재미난 점도 있게 되어 있다고 할만 합니다. 처음 걸리버가 소인국에 나타나서 눈을 뜨는 장면과 공을 세우는 장면 정도까지는 소인국과 걸리버의 거대한 크기의 차이를 적당히 와닿게 잘 보여 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전체를 봐서 걸리버의 크기가 빚어내는 재미거리들이 영화 전체의 줄거리로 충분히 퍼져 나오느냐 하면 별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출발 할 때 "소인국이라는 이상한 곳이 있네" 하는 것 정도 보여주는 데서 그치고 마는 정도 입니다. 이후의 이야기에서는 걸리버가 거인이라서 소인국 사람에게 대단한 존재로 비치고 있다는 그 지위만이 줄거리에 엮일 뿐, 실제 걸리버의 크기나 크기 차이가 주요한 갈등이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돌파구가 되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이런 점은 소재를 얼마나 잘 써먹었느냐 하는 점에서 보면 좀 아쉬운 면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해내지 못했을만큼 사실적으로 공룡을 보여준다"라는 그 특수효과 하나를 들고, 그 예봉이 꺾이지 않고 줄기차게 내지른 "쥬라기 공원"과 같이 소재 잘 펼쳐 보여주기의 결정체와 같은 영화와 비할바는 아니겠습니다만, 그래도 아쉬움은 좀 남습니다. "미지와의 조우"나 "어비스" 같은 영화는 특수효과가 빚어내는 눈으로 보는 놀라움이 미술적인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멋이 있는데, 이 영화 걸리버 여행기도 그런 시도를 충분히 해낼 부분부분이 있는 영화였기에 조금 방향이 엇나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더 들었다는 것입니다.


(공중에서 내려다 봐야 제맛인 어느 나라 매스게임 같은 거라도 해보면 어떨까?)

"걸리버 여행기"다운 크기 차이에서 오는 신기한 점이 이야기의 초점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이 영화가 어디서 주로 재미를 파냈는고 하니, 이 영화는 바로, 시간여행물 이야기에서 재미거리를 퍼내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소인국은 당연히 우리 세계와는 완전히 떨어진 세계이니 우리 문화와는 동떨어진 다른 세상 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음식이나 옷차림 문화적 풍슴은 17세기 정도 무렵의 유럽과 매우 흡사합니다. 궁전은 어째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즈음 비슷하게 생겼고, 나라간의 풍습 같은 것은 훨씬 더 과거의 중세 시절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주인공 걸리버, 잭 블랙의 눈에 비치는 소인국 풍경은 바깥 세계와 한 번도 접촉이 없었던 또다른 세계가 아니라 사실 17세기, 과거의 유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곳에서 걸리버가 하는 행동은 시간여행 영화에서 하는 코미디물 주인공의 행동과 같습니다.

바로 이 시간여행물 코미디에서 이 영화는 재미거리를 잘 뽑아 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유행가 가사를 이용해서 시적인 대사를 지어내서 당시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감동으로 여인을 유혹하고, 민주주의나 대통령과 같은 개념을 들이대면서 당시 사람들의 이상한 반응과 충돌을 만들어 냅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스타워즈" 팬이자 전자오락 팬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영화광, 게임광 문화의 특징적인 일면들을 많이 이용해서 우스꽝스러운 재미를 잘 잡아 냈습니다.


(이건 어느 시대 동작인가)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출세도 거리가 멀고, 잘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짝사랑도 잘 안풀리고, 친구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취미를 붙이고 몰두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혼자서 빠질 수 있는 영화나, 만화책, 전자오락 같은 것이라는 좀 우울한 고정관념인 것입니다. 좀 케케묵은 이야기 거리이긴 한데, 그런만큼 또 부드럽게 자리잡히는 이야기로 잘 꾸며 집니다. 자, 그런데 그런 울적하고 세상에서 별 힘 못쓰고 사는 청춘이었던 주인공이, 어쩌다가 소인국에 떨어졌더니, 영웅이 되었다는 겁니다. 더군다니 이렇게 영웅이 되면서, 바로 그 영화광, 전자오락광으로 몰두했던 경험들이 소중하게 활용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근사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 영화는 그런 이야기 거리들이 맞아드는 묘미를 다루고 있고, 그리고 연출이나 대사와 같은 기본기면에서 그런 맛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19세기말 20세기초 미국 대중 소설이나, 80년대말 90년대초 일본소설에서는 그런 이야기 참 많았다고 생각해 봅니다.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소시민이 "또 다른 세계"에 떨어져서 위대한 용사로 거듭난다는 내용 말입니다. 19세기말 20세기초 미국 대중 소설에서는 주로 군인인 경우가 많았던 듯 하고, 80년대말 90년대초 일본에서는 고등학생인 경우가 많았던 듯 합니다. 그런만큼, 무던히 쏟아져 나온 이야기의 형식이고, 단순히 "이런 일이 나한테도 벌어진다면..."하고 허망하게 바라는 내용을 맥없이 써놓는 내용이 되는데 그칠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이 영화는 개중에서는 충분히 꼼꼼한 편에 속한다고 느꼈습니다.


(컴퓨터 게임 속 인물에게 그녀의 이름을 붙여서...)

성공적으로 이 영화가 모양을 갖춘데는 역시 주인공을 맡아서 영화의 재미거리들 대부분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배우, 잭 블랙의 솜씨를 칭송해야 할 겁니다. 언제나 잭 블랙이 잘 하는 주특기 역할을 맡아서 또 그대로 합니다만, 역시 하던 가락 그대로 잘 합니다. 이 영화에는 잭 블랙의 특기를 살리기 위해 록큰롤 소재도 꽤 많이 들어 가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무리수를 두고 억지로 뮤지컬 장면도 하나 짧게 집어 넣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이야기 풀어나가는 속도가 좀 어정쩡해서 주인공 배우가 혼자서 주절주절 혼잣말을 읊어대어서 관객이 알아 듣도록 해설을 해줘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혼자서 길을 갈 때 하늘을 보고 비가 내릴 걸 두려워해서 발걸음을 서두른다는 점을 표현한다고 해 봅시다. 길을 혼자서 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구름이 끼는 걸 보니 비가 내리겠는 걸, 빨리 가야 겠어." 라고 혼잣말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이 혼자서 길을 가다가 빨리 가야 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입 바깥으로 소리를 내서 "빨리 가야 겠어"라고 말을 하지는 않잖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혼잣말하는 장면을 넣으면 연기하기가 어색해지기가 쉬울 겁니다. 그렇다고 배경에 깔리는 나래이션으로 처리해 넣으면 영화 흐름이 좀 방만해 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훌륭한 배우들 중에는 저런 혼잣말을 꼭 진짜처럼 보이게 연기를 잘 해 주는 솜씨를 보여 주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잭 블랙은 적당히 웃겨서 문질러 때우며 넘어가면서 꽤 자연스럽게 슬쩍슬쩍 저런 부분도 이야기를 몰아가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쓸데 없이 진지한 표정 짓기 업계의 황태자)

전체를 보건데, "걸리버 여행기" 치고는 크기의 차이를 보여주는 시각적인 화려함이 그렇게 특출난 수준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조나단 스위프트 수준의 통렬한 풍자와 사회비판에 관한 상징이 잘 살아난 심각한 면이 있는 영화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문화의 세계 전파에 대한 소재가 꽤 많았던 것에 비하면 이런 점은 좀 이상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상한 면을 좀 더 보자면, 권선징악이 선명한 내용이면서도 주인공의 몇몇 치명적인 잘못된 점들을 애교로 슬며시 덮고 넘어가서 권선징악 구도가 흩트러지는 문제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시간여행 영화에 대한 웃긴면이 잘 살아 있고, 영화의 이야기 거리들을 조정해 가기 위한, 도입부, 인물들의 성격 묘사, 웃긴 장면, 교휸적인 장면, 등등의 비중 배분과 연결이 어색하지 않아서 볼만했던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잭 블랙 외에도 공주와 왕비를 비롯하여 조연급들의 연기가 알맞게 제 몫을 잘 지켜 준 것도 영화의 균형을 잡아 주는 데 한 몫 했다고 느꼈습니다.

이모저모 보아하니, 이런 정도의 내용이라면, 영국 사람이 쓴 "걸리버 여행기"를 원작으로 두고 영화로 꾸미기 보다는 차라리 같은 미국 사람이 쓴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를 원작으로 두고 영화를 꾸민 편에 더 맞아 들 수 있는 이야기 같다고 보이기도 했습니다. 잭 블랙이라면 일식을 예측해서 아서 왕 궁전에서 마법사인척 하는 장면이나, 육중한 갑옷 때문에 투덜거리는 장면 같은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에 나오는 주요 장면들을 잘 해낼 수 있어 보인다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 밖에...

소인국은 17세기 즈음의 프랑스나 영국처럼 나오는 반면, 그 적국은 아주 명백히 오스만 투르크 제국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약간 19세기 독일 풍도 가미되어 있어 보입니다.

원작이 정치풍자적인 특징이 매우 강한 책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 사회풍자 요소가 좀 더 가미 되지 않은 것은 약간 아쉽기도 하고, 어째 어색하고 무심한 듯 보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지금 영화 바탕 틀만 보면 사실 좀 깊게 이야기 거리로 삼아서 이리저리 웃음거리로 조롱하고 넘어갈 소재들도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 내용은 평화로운 문명국이, 이슬람계로 보이는 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 거기에 치즈 버거 좋아하는 미국 거인이 나타나서 평화를 선사해 준다는 내용이고, 영화를 비롯해서 대중문화를 퍼뜨려서 온 나라 사람들이 미국 문화에 쩔어 버리게 되는 상황하며, 미국인이 "보호자"를 자칭하면서 어마어마한 노동력과 자원을 사용하는 모습하며, 서유럽 문화의 배신자가 미국인의 기술을 적에게 넘기는 바람에 적도 강력한 결정적 무기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 거리 하며. 몇 년 전 유행 같았다면 가히 "잭 블랙이 사실은 유태인이었다"라는 음모론도 나올만한 밑천이 있는 영화라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은 데에는 소인국이 유럽문화권으로 묘사된 탓도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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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검투사 2011/02/03 23:29 # 답글

    결론은... 극장까지 가서 볼 건 못 된다는 거군요. 0ㅅ0;

    근데 저 정도 스토리를 넣었으면서 거인국 얘기도 때려넣었나요?

    예고편들이 하나같이 다 소인국 얘기만 보여주니...
  • 게렉터 2011/02/05 08:57 #

    거인국은 거인국 이야기라기보다는 잠깐 주인공이 잘못 휩쓸려서 거인 한 명에게 납치 되었다가 탈출한다는 정도로 짧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섬"으로 거인국이 묘사되어 있어서 약간 반전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 Reverend von AME 2011/02/04 03:26 # 답글

    이제까지 본 걸리버 여행기 리뷰 중에선 가장 공감가는 리뷰네요. 다들 덮어두고 혹평만 해 대는데, 저는 솔직히 가볍게 웃자고 만든 영화에 무슨 그런 큰 의미들을 두는 지 이해가 안 갔다는... 극장에서 말도 안되는 로맨틱 코미디/조폭영화 같은 건 잘도 돈 주고 보면서 이런 건 오히려 까내리는 게 참 웃기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약간의 political view 가 들어있는 작품이라 더 좋더군요. 전 사실 JB 보단 Chris O'Dowd 에게 더 감명받았지만. ㅎㅎㅎ
  • 게렉터 2011/02/05 09:00 #

    다들 연기는 멀쩡했다고 생각합니다. 단련된 기본기에 모자람없는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면 어쨌거나 즐길만한 수준으로 올라선다는 걸 보여준다 싶은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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