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라 (安羅) 기타

-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 … 신라성(新羅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가야 도깨비 얼굴 무늬 기와)


1.
아시랑(阿尸郞)은 아라가야(阿羅伽倻) 사람이다. 아시랑은 아라가야 지방에 있는 안라국(安羅國)에서 나라를 뒤엎고 역적질을 할 모의에 가담했다고 의심을 받았다. 때문에 아시랑은 고구려 영락(永樂) 10년(서기 400년)에 안라국 병졸들에게 붙잡혀서, 알 수 없는 곳에 갇히게 되었다.

아시랑이 있는 곳은 깜깜한 굴과 같은 곳이었다. 빛은 조금도 들지 않았고, 바닥과 사방이 그냥 돌과 흙으로 되어 있었고, 앉으면 천장이 닿을만한 매우 좁은 곳이었다. 아시랑은 어디 즈음에, 얼마나 깊은 곳에 와 있는 지도 모른채 누워서 뒤척거리고 있었다. 누워 있으니, 무슨 벌레인지 모를 것이 축축하니 꿈틀거리며 흙바닥을 지나가 아시랑은 깜짝 놀랐다.

"아무도 없소? 나는 죄가 없소. 나를 풀어 주시오."

아시랑은 소리를 지르며 사람을 부르기도 했으나 굴 속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아시랑은 안라국에서 천리만리 떨어져 있는지 모르는 무덤과 같은 깊은 땅 속에 갇힌 채로 누가 자기를 버려 놓은 것은 아닌가 싶었다.

"세상 바깥에 억조의 사람과 짐승들이 저마다 별별 생각과 별별 말을 하며 살고 있건만, 이 땅 밑에 내가 이와 같이 있는 것을 아는 자가 어느 누가 있겠소?"

아시랑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가 마침내, 기운이 다해 그저 짧게 짐승이 우는 것처럼 긴 소리를 내었다. 그와 같이 있는 가운데 몇날 며칠이 지났는지 몰랐으니, 갈수록 점점 더 겁이 나서 마침내, 하루 이틀 아무것도 안 보이는 이곳에 갇혀 있으면 처음에는 눈이 멀고, 그 다음에는 오가며 다닐 수 없으니 팔다리를 쓰지 못하여 굽어 못쓰게 되고, 마침내 굶어 죽던지, 배가 고파 잡벌레 따위를 먹다가 그 독 때문에 피와 신물을 토하다가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아무도 없소?"

아시랑은 어찌된 영문이며 누가 왜 있는 지 밝혀 줄 사람이면, 누가 있어도 좋겠다고 믿게 되었다. 아시랑은 소리치기를,

"나를 붙잡아온 구천간(九天干)의 무리들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반가울 것이니, 잠깐이라도 나와서 왜 이렇게 되어 있고, 언제 어떻게 죽인다거나 살린다거나 하는 말이라도 해 주면 좋겠소."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시랑은 이때 불과 열 몇 살 밖에 안된 젊은 사람이었으므로, 마침내 마음을 잃고 울다가 쓰러져 정신을 잃을 듯 하였다. 그러다가 아나백이 자기와 같이 잡혀 있다면 어떻게 할 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시랑은 평소 따르던 아나백(阿耶伯) 어른을 떠올려 보았다. 아시랑이 처음 아나백을 따르게 된 것은 아나백이 귀한 향신료로 꾸며 놓은 안라성(安羅城)의 꿩고기 구이를 기분 좋게 맛 보여 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나백을 몇 차례 찾아가 만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따르다 보니 갈 수록, 아나백이 대단해 보이는 일이 많았다.

아시랑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큰 일에는 언제나 겁을 먹고 떨었다. 또 아시랑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꾸짖을 때에는 제대로 할 말을 꾸밀 줄을 몰랐다. 그런데, 아나백은 항상 침착했으며, 잡스러운 무리를 꾸짖을 때에는 말이 많지가 않으면서도 근엄하고 분명하였다. 아나백 어른이라고 하지만, 아시랑 보다 고작 대 여섯살 정도 나이가 많을 뿐이어서, 아나백도 젊은 사람 이었다. 그런대도, 아시랑이 보기에 아나백은 이미 단단한 자리를 딛고 올라선 노련한 사람처럼 보였다.

아시랑은 항상 아나백과 같이 되고 싶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일을 벌여 보거나, 아나백을 흉내내는 일이 많았다. 그렇지만, 아시랑이 따라하는 것이 말끔하지 못했으므로, 아나백처럼 보이기는 커녕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아시랑은 역시 아나백처럼 되는 것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과연 아나백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더욱 믿고 따르게 되었기도 하였다.

아시랑은 굴 속에서 뒹굴며 헤집고 다니던 끝에, 아나백처럼 한다면, 좀 덜 겁을 먹고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시랑은 아나백처럼 해 보겠다고, 우선 차분하고 조용히 궁리하려고 애를 썼다. 아시랑은 우선 소리를 지르면 마음이 어지러워 지고, 몸을 움직일 수록 흙먼지가 많이 일고 다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아시랑은 일단 가만히 누워 있기로 하였다. 그래도 누운 채로, 꼼짝도 하지 않다가 서서히 굶어 죽어 버리면 이대로 굴이 무덤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참마다 확 치솟듯이 겁이 났다. 그렇게 겁이 나게 되면 갑자기 속이 뒤틀려 저절로 소리가 나고 몸을 버둥거리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아시랑은 그럴 떄마다 끙끙대면서 참으면서, 조용히 잠을 자듯이 가만히 있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 아시랑은 멀리서 조금씩 들리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깜깜한 곳이었으니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소리였고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지만 들리는 것은 분명히 있었다. 벌레들이 움직이고 푸드덕 거리는 소리는 선명히 들렸다. 가끔 어디선가 흙무더기나 돌더미가 조금 무너지고 구르는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다. 어디인지 알 수 없었으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무엇인지 쿵쿵 거리는 소리나,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아주 먼 산에서 들려오듯이 나는 듯 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소리를 계속 듣고 있지나, 아시랑은 점차 듣는 것이 예민해졌다. 밤이 오는 지, 낮이 가는 지 모르면서 가만히 누워서 듣는데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 아시랑은 마침내 멀리서 오는 작은 소리의 방향을 따라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랑은 이곳 저곳으로 조금씩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흙바닥이나 벽에 귀를 대어 보았다. 어떤 곳에서는 물소리가 잘 들렸고, 어떤 곳에서는 바람소리 같은 것이 작게 들리는 방향도 있었다. 아시랑은 이렇게 잘 듣다보면 방향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굴 안 왠갖 곳을 샅샅히 들어 보았다.

마침내 아시랑은 어느 단단한 바위에 귀를 대고 있으면, 바위를 따라 소리가 꽤 잘 전해지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귀를 대고 가만히 마음을 하나로 하고 들어보고 있으면, 자그마한 소리가 꼬물꼬물 들려 왔다.

아시랑이 들어본 즉, 그것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소리 였다.


2.
아시랑은 듣던 끝에, 그 바위의 저쪽 끝에서 사람들이 가끔,

"오늘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까? 북굴(北屈)입니까? 남굴(南屈)입니까?"

하고 묻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었다. 무엇이 북굴이고, 무엇이 남굴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하면서 발자국 소리가 울리는 것이 들렸다. 그러니 아마 걸어가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더는 알기 어려웠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하루에 한 두번씩 하는 저마다 묻는 말이,

"오늘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라고 하면서, 북굴인지 남굴인지 묻는 것일 뿐이었다.

여러 차례를 그런 말을 듣던 끝에 아시랑은 우선 북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시랑이 있는 굴에서는 꽤 멀리 떨어져 소리가 거의 안들리는 곳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사람이 우는 소리와 괴로워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상하게 비웃는 웃음소리 같은 것도 들리는 듯 하였다. 북굴은 사람을 괴롭히는 곳이었다. 무엇을 하는 지 분명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을 붙잡아 두고 때리거나 아프게 하면서, 캐묻는 것을 답하도록 하는 것이지 싶었다.

남굴이 무엇인지는 훨씬 더 알기 어려웠다. 가끔 남굴인듯한 곳에서 나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었다. 그러나 들리는 소리는 짤막짤막했고 잘 들리지 않는 말로는 뭘 하는 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한 번은 "남굴"이라는 곳들 중에서 우연히 아시랑이 있는 곳과 매우 가까운 곳에 사람이 온 일이 있었다. 이때 아시랑은 훨씬 더 분명한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아시랑은 남굴에서 무엇을 하는 지 알게 되었다.

남굴에서는 구천간의 졸개들이 굴 속에 갇힌 사람들을 끌어 내어 두고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는 곳이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명령을 따르면, 다른 명령을 내리고,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죄를 물어 때리고, 북굴로 가게 해서 괴롭히는 것이었다. 구천간의 졸개들은 아주 간단한 명령부터 내렸다. 처음에는 자리에서 일어나라거나, 앉으라거나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 조금도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매를 맞기 싫은 사람들은 그 시키는 대로 따라 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서 점차 서서히 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린다. 바닥을 구르라고 하기도 하고, 힘든 일을 시키기도 한다. 계속해서 명령 한 대로 따라하는 일을 하다보니, 명령대로 잘 해서 맞지 않고, 북굴로 끌려가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명령을 따를 까닭이 없고, 사람을 굴 속에 붙잡아 두고 멋대로 놀리는 구천간의 졸개들을 멈추게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작은 일들을 따라하도록 거듭하고 하지 못하면 맞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기 전에 일단 시키는대로 어떻게든 해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게 된다.

마침내 구천간의 졸개들은 견디기 어려운 더러운 짓이나, 옳은 사람이라면 버틸 수 없는 흉악한 짓을 시키기에 이른다. 보통 사람들은 이 일을 따르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러나 그러면 곧 북굴에 끌려가서 크게 당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남굴로 돌아오면, 북굴로 끌려가서 괴롭혀질 바에야 차라리 시키는 대로 하면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저히 못버틸만한 추잡한 일을 시키게 되면 견디지 못하고 다시 북굴로 가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몇 번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결국 구천간의 졸개들이 시키는 짓을 하게 된다. 이대로 버티다가 죽겠다거나, 구천간의 졸개들에게 덤벼 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처음부터 조그마한 명령들을 따르면서 어쨌거나 맞지 않고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빠른 길은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만 믿게 된다. 이렇게 하고 난 뒤에, 마침내 구천간의 졸개들이,

"네 놈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무엇이냐?"

따위를 물으면, 당하던 사람은 어머니 아버지도 배반하고, 벗과 스승도 팔아 넘기고 그저 구천간의 졸개가 시킨 것을 따라 괴로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묻는대로 모두 답하는 것이다.

아시랑이 가만히 따져 보니, 구천간의 졸개들은 사람들을 좀 더 쉽게 움직이기 위하여, 굴에 갇혀 있는 다른 사람들로 꾸며서 구천간의 졸개들과 짜고 있는 가짜들을 두기도 햇다. 이 자들은 한 번 괴로움을 당하고 많은 재물을 벌면 그것이 쉽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이었다. 구천간의 졸개들은 이런 자들을 재물을 주고 부렸다. 그래서 끔찍한 명령을 받고 시키는 대로 할 지 말 지 머뭇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옆에서 같은 처지인척 하는데 그대로 명령을 따르도록 시켰다.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옆에서 시킨대로 하고 있으면, 자연히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참고 할 수 있는 가보다 싶어 그대로 따라 구역질나는 짓거리들을 참으며 시키는 대로 하였다.

아시랑이 남굴에서 구천간의 졸개들이 벌이는 여러 수법들을 하나 둘 알아나갔다. 좁은 굴속에 처박힌 채로 가끔 눕거나 엎드린 모양을 바꾸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시랑은 남굴의 일들을 알아가면서 거기에 놀라고 또 겁내기도 하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지루함을 버티게 되었다.

그러고 있을 때, 이제 배가 고파 점차 몸이 망가져 간다는 것이 역력해 질 무렵에 문득 굴 한쪽 벽이 열렸다. 등잔의 작은 불빛이 새어 나왔으나, 아시랑은 눈부신 것을 견디지 못해 얼굴을 바닥에 쳐박으며 괴로워 하였다. 불빛을 든 사람은 구천간의 졸개였다. 구천간의 졸개가 걸어 들어 오자, 아시랑은 입에서 말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늘,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까?"


3.
아시랑이 물은 것에 답하는 목소리는 이러했다.

"남굴로 간다."

그리고 먹을 것을 던져 주었으니, 그릇에 담긴 죽과 꿩고기 구이였다. 아시랑은 허겁지겁 죽을 먹고 이어서 꿩고기 구이를 먹으려 했다. 그런데, 꿩고기 구이는 꿩고기 구이의 양념 속에 꿩고기 대신에 흙을 발라 꼭 고기 모양으로 보이게 한 돌덩이가 있을 뿐이었다. 아시랑은 그것을 잘못 씹었으므로 이가 아파서 소리 내어 괴로워 하였다.

그것을 보고 먹을 것을 던져준 졸개가 말하기를,

"굴 속에 있던 놈을 끌어 내면 항상 젊은 놈이나 늙은 놈이나 여자나 남자나 거지나 갑부나 아무도 다를 바 없이 모조리 여기에는 속는구나.'

하면서 웃으며 몇차례 아시랑이 업드린 앞을 차 흙먼지가 입에 들어가게 하였다.

곧 아시랑은 남굴이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남굴에 도착하니 불을 네 개씩 붙인 등잔이 환하개 여럿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방이 꽤 밝았다. 남굴에는 여자 하나와 그 졸개인 칼 든 남자 둘이 서 있었다. 졸개들은 얼굴에 눈썹을 모두 깎아 버리고 어지럽게 문신을 하여 꼭 도깨비와 같은 꼴로 꾸미고 있었다. 아시랑은 그 졸개들의 얼굴을 보고 귀신을 본 듯이 놀라서, 처음에 소리를 질렀다. 한편 여자는 구슬 목걸이와 귀고리로 치장하고 호사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여자가 말하기를,

"이 앞으로 다가 오라."

하였다. 그런데, 아시랑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칼을 든 졸개들이 아시랑을 때리고 칼 끝으로 아시랑의 팔에 상처를 낸 뒤에 발등으로 몇번 그 자리를 찼다. 아시랑은 아파서 소리쳤으나, 계속 움직이지 않았다. 칼을 든 졸개들이 차고 때려서, 겨우 끌려가서 여자 앞에 오게 되었다.

그러자, 여자는,

"다시 물러나라."

하였다. 아시랑은 이번에도 꼼짝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졸개들은 또 아시랑을 때렸다. 이에 여자가 말했다.

"너는 지금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당한 것을 생각하고, 내가 시키는 말은 결코 따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너 혼자 다른 많은 사람과 똑같이 당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너는 다른 사람과 달라 보이려고 버티고 있다.

과연 처음 이야기하는, 가까이 오라, 다시 물러 나라, 따위의 말을 따르지 않으려고 이렇게 두들겨 맞는 멍청한 놈이 드물기는 하다. 그러나, 결코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너 같은 놈을 본 것도 열 번 스무 번은 헤아리겠구나. 이제 돌아 보니, 너와 같이 굴 속에 쳐박혀 땅강아지의 허물과 같이 있는 놈이, 고작 대단해 보이고자 자랑하려고 하는 짓이라고 결심한 것이 '다가 오라' 따위 아무 것도 아닌 한 마디를 버텨 보느라고 맞는 일 뿐이니, 이와 같이 가소로운 것이 있겠느냐?"

아시랑은 이 말을 듣자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는 듯이 답했다.

"저는 도대체 여기에 왜 왔는지도 모르는 죄 없는 사람 입니다. 움직이지 않은 것은 본시 몸이 약하여 오래 갇혀 있었더니 제대로 기어다닐 수도 없게 되었기에 못 움직인 것 뿐입니다.

젊은 나이에 호방한 것을 좋아하고, 옛 사람이 큰 공을 세운 이야기를 좋아하여, 이런 저런 떠도는 무리들과 뜻없이 어울린 적은 있으나, 그저 재미로 술 몇 잔을 마시며 옛 이야기를 한 것 뿐인데,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가두어 괴롭히십니까?"

그러자 여자의 답이 이러 하였다.

"가야 여러 나라의 길은 사방으로 배를 띄우고, 만리 바다 가운데를 가로지르게 하여, 온갖 나라들의 물건을 주고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쪽 바다 건너 오월국(吳月國)과 동쪽 바다 건너 왜국(倭國)을 왕래하는 것은 극히 중한 일이며, 장사꾼들이 재물을 주고 받는 것에 거침이 없도록 하는 것만큼 중한 일이 없다.

지금 구천간께서 안라국을 다스리는 염사공(廉斯公)을 돕고 계시니, 옛날의 골치거리들은 모두 없애고, 안라국이 나날이 부유해 지고 있지 않은가? 다만 구천간께서 장사꾼들이 노비를 마음대로 사들이게 했고, 사들인 노비를 주인이 죽을 때 따라 죽도록 할 수 있도록 한 일이 있는데, 마음 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이것이 너무 잔인하다하여 구천간을 미워할 뿐이다.

그러나 노비로 태어난 자는 그 선대가 죄를 지어 그와 같이 된 것이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요, 안라국에서 노비를 팔고 사는 것이 편해야 팔고 살 것이 늘어날 것이니 안라국에 모일 장사꾼이 많아 지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찌 이 일이 염사공을 충성스럽게 모시는 구천간의 훌륭한 뜻이 아니겠느냐?

구천간께서는 고귀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를 때 노비들이 따라 죽는 모양을 보기 좋게 꾸미기 위해, 노비들을 사서 따라 죽는 모양을 이리저리 꾸며 보는 것을 좋아 하신다. 가운데의 한 사람은 따라 죽는 것이 싫어서 무서워 하여 울면서 산채로 묻힐 때 잠에 들게 하는 술을 억지로 마시고, 그 사람을 둘러 싼 네 사람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여 따라 죽고 싶어 하기에 슬퍼서 울도록, 그 대형을 만들고, 따라죽는 모양에 어울리는 모양과 몸짓과 죽는 순서를 짜기 위해 밤낮으로 구천간께서 힘을 쏟고 계신다.

이는 사람의 목숨으로 시를 짓는 것과 같은 일이니, 이와 같이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는 분들이 구천간 외에 어디에 또 있겠느냐?"

이 말을 듣고 아시랑이 답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소란 피우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구천간은 염사공을 묶어 두고, 다른 신하들은 억누르고 제멋대로 안라국을 휘젓고 다니니, 오직 배를 많이 띄워 장사하는 이들이 많이 드나드는 것만을 알 뿐, 사람들 사이를 어지럽힌다' 하는 말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냥꾼일 뿐으로, 그런 말은 듣기만 하였을 뿐이니, 어찌 저를 이런 곳에 가두어 두십니까?"

그러니 여자는 답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북굴로 가야겠다."

하였다.


4.
아시랑이 북굴에 오니, 어느 남자 한 사람이 있었다. 남자는 서생과 같아 보였는데, 다만 두 팔은 힘이 좋은 백정과 같아 보였다. 등잔의 불빛에 눈이 부셔서 아시랑은 고개를 숙이고 빛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남자가 말했다.

"이와 같이 만나서 서로 겨루려고 하니 이름이라도 서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골포부(骨浦夫)라고 하네."

골포부가 이와 같이 말할 때에 웃는 것이 많고, 짐짓 즐거워 하는 빛이 있었다. 아시랑과 잠시 한담을 하먼서 골포부는 아시랑의 몸 이곳저곳을 보더니,

"혹, 흙 바닥에 귀를 너무 바싹 대고 이런 저런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자네 모습을 보니, 그와 같이 발버둥을 치면서 이 안에서 어떻게든 참아 보려던 사람으로 보이네."

하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이어 골포부가 긴 쇠꼬챙이를 꺼냈다. 골포부는 쇠꼬챙이를 등잔불에 달구었다. 쇠꼬챙이를 달구면서 골포부가 말했다.

"자네는 너무 두려워 말게. 지금 이 옆 쪽의 굴이나, 뒤 쪽의 굴에는 별별 더럽고 흉칙한 짓들을 시키고 죽인 시체가 많다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네. 부끄러운 기분과 놀람으로 사람을 괴롭힌다면 쉽게 이길 수는 있네. 그러니 그런 식으로 이겨 보고자 말로 알려 주기조차 역겨운 짓거리들을 많이 한다네. 자네와 나는 서로 이름을 알고 같이 지내는 사이인데, 지금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시키는 지 말로 그런 것을 밝히기조차 마음이 편하지 않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람이 너무 쉽게 정신을 잃고 미쳐 버리기 쉽다네. 혹은 오직 죽어서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없애 보고자고 하여, 그냥 죽고 싶어 하기만 하는 일이 많다네. 그래서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죽는 사람이 죽는 마당에 하는 말은 옳은 지 그른 지 따지기도 어렵고, 사람이 한 번 죽어 없어지고 나면 나중에 거짓말을 한 것을 알았을 때 다시 죄를 물을 수도 없는 것 아니 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런 따위의 더러운 짓거리들은 하지 않는다네. 오직 나는 아프게 해서 견디지 못하게 하는 재주를 부릴 뿐이네. 그저 몸 이곳저곳을 극히 아프게 하여, 발발 거리며 뛰어 다니고, 데굴데굴 구르고, 그냥 아픈 것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 아무렇게나 소리를 박박 질러대도록 만들 것이네. 그러다보면, 자네는 도대체 역적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지 말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서 골포부는 제 입을 크게 벌렸다. 골포부는 입안을 아시랑에게 보여 주려고 했다. 아시랑은 아직도 눈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입안에 이가 몇 개가 없고, 그 몇 개 없는 자국이 흉칙해 보이는 듯한 것을 알았다. 아시랑은 골포부가 왜 갑자기 입을 사람 얼굴에 들이대는 가 싶었다. 이내 골포부가 말했다.

"옛날 변한(卞韓)에 있었던 일 중에 이런 것이 있네. 남자가 그 아끼던 친동생을 잃어 슬퍼하니, 그 남자를 사모하던 여자들 중에 하나가,

'나 또한 그대와 같이 슬퍼하며 아파하는 것을 같이 느끼고자 합니다.'

라고 하면서, 남자가 괴로워 하는 심정을 자기도 같이 느껴 같이 괴로워 하는 데 더 진짜 같아 보이고자, 자기 송곳니를 철집게로 뽑아내어 그 아픈것을 느끼며 사모하는 뜻을 나타낸 적이 있다네. 이러한 변한의 옛일을 따라하는 자들이 종종 있으니, 요즘에도 사랑을 보인다, 충심을 보인다 하면서 생니를 뽑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네.

내가 그렇게 이를 뽑아내는 재주가 좋았으니, 역적질을 한 무리들을 모아 놓고, 그 사악한 뜻을 캘 때에 그 죄인의 이를 뽑아 내며 괴롭히는 것이 내 재주라네. 살살 견딜 수 없이 아프게 하면서 점점 더 겁을 주면서, 그렇지만 정신을 완전히 잃고 미치광이가 되지는 않도록 하며 그저 아프게만 아프게만 하는 그 재주로 나는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세 자식을 먹여 살린다네.

그런데, 이런 재주는 쓰일 데가 많지 않다네. 세상에 역적이 많지가 않으니, 역적들을 붙잡아 괴롭히는 나와 같은 사람이 시장터 옷감 장수처럼 많다면 팔 곳이 없네. 그러니 나는 구천간께서 나를 버리시지 않고 이 일을 계속 하도록 하기 위해 나날이 내 재주를 갈고 닦아야 했다네. 그런데, 남이 아무리 아프다 한들 나는 아픈 것을 내가 느끼지는 못하지 않는가? 어떻게 해야 더 아프게 할 수 있는지 똑똑히 알기란 쉬운일이 아니라네.

어쩔 수 없이 나는 내 이를 스스로 뽑으면서 어떻게하면 더 아파지는지 따져 보았네. 이리저리 아픈 것을 똑똑히 느껴가면서 일부러 썩게도 하고 일부러 곪게도 하면서 나는 내 이를 뽑을 때에 어떻게 하면 더 아프게 할 수 있는지 알아 보았다네. 만약 제대로 재주를 더 좋게 하지 못한다면, 겨우 생니를 뽑는 재주를 어디에 쓴다고 어떻게해서 날 마다 먹는 것이 많아지는 세 자식들을 먹여 살리겠는가?

요즘 가끔 술집의 부유한 한량들 중에는 변한의 옛일을 따라하여 여인을 앞에 두고 술김에,

'내 이를 뽑아 그대와 함께 슬퍼하겠노라.'

하는 자들이 있네. 그 자들은 어떻게든 덜 아프게 이를 뽑으려고 안달이라네. 그러나 가난한 나는 도리어 더 아프게 이를 뽑는 것을 알아 보고자 하였네. 이것 또한 서글픈 일일세."

골포부가 말을 마치자, 아시랑은 크게 겁을 먹었다. 아시랑이 말했다.

"도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십니까? 짐승이나 잡을 줄 아는 사냥꾼인 저 따위에게 무엇을 알고자 이러십니까?"

그러니 골포부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달군 꼬챙이를 불에서 꺼내어 가늠해 보았다. 골포부는 아시랑이 물은 말에 답을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내 장기가 이를 뽑는 것인데, 다짜고짜 내가 잘하는 재주부터 보이면, 겁을 먹고 조마조마하게 자네를 떨게하는 것을 오래할 수가 없다네. 그래서 오늘은 다른 것을 하겠네. 그렇게 하면, 자네는 내가 뛰어난 재주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아프고 괴로운 데, 내가 이를 뽑으려 들면 얼마나 더 아프겠는가 하고, 틈틈이 때때마다 두려워 할 것일세.

자네는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가? 그렇게 두려워 하면서 캄캄한 굴 속에 쳐박혀 있으면, 자뭇 여러 생각이 몰아친다네. 젊은 선남선녀들이 오가는 시장터에서 자네가 좋아하는 음식의 냄새를 맡으며 언제 한 번 먹어볼까 아쉬워하던 그 흔한 일이 아득한 옛 일처럼 느껴질 것이네. 굴은 깊고 문은 두텁네. 자네는 지금 혹시나 이 문을 뚫고 나가고, 이 굴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도대체 얼마나 망망히 떨어진 어느 먼 땅에 외따로 떨어진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혹시라도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그저 하는 일 없이 흔한 안라성의 사람 많은 밝은 한낮 길가에서 잠시 한가롭게 걷기만 하는 일이라도 간곡히 바라는 지극히 부러워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것이네.

오늘은 이 쇠꼬챙이를 써 볼 것이네. 물론 더 쉬운 것도 있다네. 얼굴에 칼을 대어 그림을 온통 그려 넣는 것도 해볼만한 것일세. 그렇게 해서 자네 얼굴을 저 도깨비와 같이 무서운 꼴로 조금씩 바꾸어 꾸미면, 아프기도 하거니와, 거울을 들이 밀 때마다 더 괴로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네. 그렇지만, 이 방법을 쓰다보니 너무 빨리 미친 자들이 생기는 일이 많아 보여서, 요즘에는 다른 방법을 쓴다네.

변한의 옛 일 중에 이런 것도 있었네. 젊은 두 사람이 누가 더 굳세고 용감하고 힘이 좋은가를 서로 겨루기 위해, 통나무를 끌며 겨루었다네. 두 손으로 통나무를 들고 끄는 것을 다투다가 승패를 알 수 없었으므로, 한 팔로 통나무를 끄는 것을 겨루었다네. 이때에도 두 사람은 비겼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손가락 끝에 줄을 묶어 통나무를 당기며 겨루기도 했고, 목에 줄을 묶어 당기기도 했네. 그러다가, 마침내 등가죽에 갈고리를 꿰어 줄을 걸어 놓고 그 줄로 통나무를 당기는 것을 겨루기에 이르렀다고 하네.

오늘 그대가 한 번 얼마나 용맹한 지 나에게 보여 주게. 내가 그대의 등가죽을 꿰뚫어 놓고, 거기에 줄을 매어 통나무를 하나, 둘 씩 걸어 놓아 무겁게 할 것이네."

그 말을 듣자 아시랑은 더욱 놀랐다. 아시랑은 다시 소리쳤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사냥꾼일 뿐입니다. 구천간이나, 염사공과 같이 높은 분들에 관한 일을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골포부는 아시랑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아시랑의 몸을 구부려 등을 보이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일을 벌이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정말 죄가 없을 수도 있다네. 그러면 나는 자네에게 자네가 생각하기에 가장 죄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 볼 걸세. 자네가 누구라도 한 사람을 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붙잡아 올 걸세. 그리고 다시 괴롭히며 물어 보겠네. 그 사람은 그 사람 대로 가장 죄가 있을 것 같다고 짐작되는 사람을 말할 것이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을 또 잡아들일 걸세. 이렇게 계속 하다보면, 네 다섯 번을 거치지 않아 정말로 죄가 있는 사람을 붙잡을 수 있다네. 그러니, 자네는 죄가 있건 없건 무슨 말이든 해야 하네.

자네가 이곳에 붙잡혀 온 것은 자네가 사냥꾼이라고 하면서 사슴뼈를 파는 것이 자뭇 이상했기 때문이네. 꿩고기를 사러 간 요리집의 젊은 여자가 우리에게 이상한 것을 본 적이 있다면서 말하기를, 자네는 사냥꾼인데도 사슴을 파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슴을 사고 있었다고 했네. 알아본 즉, 자네는 사슴을 사들이고 사슴뼈를 파는 사람이었네.

우리는 자네를 몰래 살펴 보았네. 그러니, 자네는 사슴과 같이 좋은 짐승을 잡을만한 재주가 있는 자가 아니었네. 그러므로 자네는 사슴을 사다가 사슴뼈를 발라내어 팔았던 것이네. 그런데 자네의 사슴뼈는 기이하게도 비싼 값에 팔렸네. 그 까닭을 알아보니, 자네의 사슴뼈는 묘하게도 점쟁이들이 좋아하여 값을 높게 치르고 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네.

왜 점쟁이들이 자네 사슴뼈를 사가는 지 궁금하여 살펴보니, 자네는 사슴뼈에 송곳으로 작게 깨진 틈을 이리저리 만드는 재주가 있었네. 요즘 점쟁이들이 사슴뼈를 태워서 그 갈라진 모양을 따져서 세상의 이런저런 일들을 따지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게 미리 몰래 송곳으로 뼈에 깨진 틈을 만들어 놓으면 그 결대로 뼈가 갈라진다네. 그렇게하면 점쟁이가 바라는 대로 점괘가 나오게 할 수 있네.

무릇 안라성의 점쟁이들은 높은 사람의 아들딸이 태어났을 때 점괘를 물어 보면 복이 많다고 하여 기분을 좋게 만들어 더 많은 재물을 받아내고자 하고, 혼인을 반대하는 남녀가 있거든 혼인을 하면 망한다는 점괘를 나오게 하여 뜻대로 되게 하고 또 재물을 받아낸다네. 이와 같이 자기에게 좋은대로 점괘가 나오게 하기 위해 자네처럼 몰래 꾸며 놓은 사슴뼈를 긴히 구하고자 하는데, 자네는 그런 것을 잘 만들어 팔았던 것이네.

이런 수법은 고구려 사람들이 잘 아는 것이네. 고구려에는 지금 불교가 널리 퍼지고 있으니, 점쟁이와 무당을 비웃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서 이와 같은 속임수를 밝히고 꾸미는 것이 자뭇 정묘하다네. 이러하니, 자네가 갑자기 사냥꾼이라고 하면서 이와 같이 교묘한 일을 벌이는 것은 고구려 사람에게 몰래 배운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러한 수법으로 갑자기 점쟁이들과 알고 지내지려고 하는 것은, 그 중에 나라의 큰 일을 위해 점을 치는 높은 점쟁이와 무당과 친해 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나라의 사정을 알고 구천간의 동태를 알아 보려는 것 아닌가? 그리고 마침내 구천간을 방해할 틈을 찾고, 나라를 배반하여 구천간을 해를 끼칠 나쁜 일을 할 기회를 알아 보려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듣자 아시랑은 눈물을 흘리며 억울하다고 외쳤다. 아시랑은 무서워 하며 침을 흘리며 울었다. 그렇게 우는 소리로 아시랑이 말했다.

"제가 무당과 점쟁이들이 하는 꼴을 보고 꾀를 내어 사슴뼈에 미리 깨진 결을 만들어 비싼 값에 팔았던 것은 말씀하신 대로 입니다. 그것이 죄가 된다면 저는 죄값을 받겠습니다.

그러나, 역적질은 당치 않습니다. 저는 다만 젊은 사람들 사이에 술을 먹고 호기롭게 탐관오리들을 욕하고 세상을 통탄하는 것이 멋지게 보여, 아나백 등의 무리를 몇 번 따라다닌 적이 있을 뿐입니다. 구천간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르고, 고구려, 백제, 가야, 왜국의 섬들에 대한 일은 어렵고 이상하여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제가 어떻게 고구려 사람과 내통하고 나라를 넘보는 따위의 흉한 일에 작은 몫이라도 하겠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니, 부디 한 번만 다시 살펴 주십시오."

골포부가 답했다.

"간혹 아파서 뒹굴며 날뛰다가 온갖 해괴한 짓을 하는 죄수들을 보면서, 그 모양이 기이하다면서 우습게 여겨 웃음거리로 삼고 떠드는 무리들이 있네.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네. 나는 내 스스로 어떻게 하면 가장 아픈 지 안다네. 그리고 아파서 괴로워하다가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똑똑히 궁리해 알고 있다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이 그와 같이 괴로워하지 않고, 어서 나라를 위해 그저 참된 말을 차분히 들려주는 때가 오는 것만을 바랄 뿐이네.

자네가 말한 아나백이라는 자는, 지금 고구려가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싸우는 것을 두고, 우리 안라국도 신라와 고구려의 편에 서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무리들 중에 꽤 이름이 있는 자라네.

아나백이 말하는 것이, 신라가 옛날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亂)이 일어 났을 때에 안라국이 망해 가던 때에 원군을 보내어 구해 준 적이 있으므로 그 은혜를 잊지 말고 갚아야 한다는 것이네. 그런데, 포상팔국의 난은 벌써 200년 가까이 지난 옛 일이니, 어찌 그와 같이 까마득한 먼 일을 두고 은혜를 갚느니 하는 말이 황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래도 허황한 말의 멋을 좇는 자들이 있어서 젊은이들이 따르고 있으니, 그 이름이 이제 꽤 널리 퍼졌다네.

그런데 아나백은 구천간이 간신배들이라서, 염사공을 위협하여 마음대로 일을 휘둘러, 오히려 백제와 왜국섬에서 온 자들의 편을 들고자 하고 있다고 하네. 그리고 나라를 위해 구천간을 몰아내야 한다고 떠든다네. 이것이 바로 역적이 아니겠는가? 안라국에서는 요즘 백제와 왜국섬으로 무수히 많은 배를 오가게 하여 큰 재물을 벌어들인 사람들이 많고, 구천간도 바로 그렇게 해서 재물을 모아 힘을 얻으신 분들이시네.

그러니,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허황된 의리와 은혜를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뜻대로 백제와 왜국섬에서 온 무리들과 함께 힘을 합치는 것이 옳다네. 자네도 그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니 아시랑이 고개를 수차례 빠르게 끄덕이며,

"어려운 뜻은 제가 아는 것이 얕아 알아 듣지 못하겠으나, 참으로 맞는 말인 듯 들립니다."

하였다. 그러니, 골포부가 기분좋게 한 번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자네는 이제 자네가 아나백 등의 무리 속에 어울리면서 무슨 술수를 짜고 어떤 꾀를 꾸몄는 지 나에게 털어 놓게."

그러자 아시랑이 답하기를,

"어찌 자꾸 그와 같이 말씀하십니까. 저는 무슨 꾀를 벌이는 지 구천간의 무리가 어떤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모두 아는 대로 털어 놓겠으며, 보고 들은 바 또한 모두 돌이켜 말씀 올릴 터이니, 제발 저를 믿어 주십시오."

하면서, 발버둥을 칠 듯이 안달했다.

골포부가 말했다.

"아나백 등이 하는 말 중에, 지금 고구려의 기세가 굳세고, 그 임금이라하는 담덕(談德: 광개토왕을 말함)이 군사를 부리는 재주가 많다고 하니, 결국은 고구려에 붙어야만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네. 이는 자뭇 그럴듯한 이야기이네. 또한 구천간은 옛날 신라 때문에 망한 포상팔국의 후예 였는데 갑자기 요즘에 백제가 싸우는 바람에 배를 잘 움직여 부유해진 무리이므로, 하루 아침에 안라국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간신의 무리가 되었다고 욕을 하는 말이 젊은이들에게 자뭇 통쾌하게 들릴 법도 하네.

그러나, 옳고 그른 것과 좋고 나쁜 것은 내가 따지는 일이 아닐세. 나는 그저 자네가 참된 마음으로 하는 말을 듣고 싶을 뿐이네. 차라리, 당당하게 자네가 나라를 구하고 염사공을 진정으로 모시기 위해 이러저러한 일을 꾸미는 데 힘을 보탰다고 자랑스럽게 말해 보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아시랑은 도무지 말할 것이 없다고 하며 한탄했다. 그러자 골포부는,

"이곳은 문이 두텁고 땅이 깊으니, 자네가 아무리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이 굴 밖에서는 아무도 듣지도 못한다네. 하물며 다른 굴에 갇힌 죄수들 조차 자네가 지르는 애처로운 소리를 아무도 못듣게 되니 땅 속 깊은 한 굴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목이 아파하는 것이 애절하다네."

하고 말하고는, 마침내, 골포부는 아시랑을 이런저런 수법으로 한바탕 괴롭혔다.

아시랑이 북굴에서 나와 원래 있던 굴 구석에 들어오니, 과연 골포부가 말한대로, 그저 원래 살던 길거리에서 잠깐 햇빛을 쏘이며 별 일 하지 않고 잠깐 걷는 것만 하더라도 얼마나 좋은 일인지 부러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깊은 데인지도 모르는 데 갇혀, 두려워 하고만 있는데 뒤척이는 가운데 아까 먹으려 했던 꿩고기 요리를 흉내낸 돌덩이가 보였다. 아시랑은 그 돌덩이를 입에 넣고 꿩고기 요리를 먹는 듯이 하였다.

아시랑은 돌덩이를 입안에 넣고 어떻게든 먹겠다는 듯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입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아시랑은 이때 정말로 두려워 발발 떨었는데, 귓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멀리 다른 굴에 갇힌 사람들이 끌려 나올 때 마다 무서워서,

"어디로 가야 합니까? 북굴입니까? 남굴입니까?"

라고 말하는 소리 뿐이었다. 아시랑은 그 말 소리가 정말로 귀에 들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 말 밖에 들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그렇게 잘못 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시랑은 입안에 가득 돌덩이를 물고 있는 채로 통곡을 하며 살려 달라고 살려 달라고 울부 짖었다. 지나가던 졸개 하나가 듣고,

"아직 사람이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동안에는 저마다 살아 보려고 이짓 저짓을 하니, 나도 웃긴 짓거리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저러다가 금방 넋을 잃고 바보가 되어 버리면 구경거리가 줄어 들지 않겠는가?"

하며 아쉬워 하였다.


5.
한참 만에 아시랑의 굴로 다시 사람이 찾아 왔다. 이번에도 그 얼굴에 문신을 하여 괴물과 같이 꾸민 모양이었다. 구석에 쳐박혀 있던 아시랑은 허겁지겁 기어나오더니, 어김 없이 다른 자들과 같이 물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북굴입니까, 남굴입니까?"

아시랑이 조마조마하게 떨며 말하니, 아시랑을 찾아온 여자가 자리를 둘러 보고 아시랑이 돌로 만든 가짜 꿩고기 요리를 몇 번이고 씹고 입안에 물고 있었던 꼴을 보고 말하기를,

"가련한 사람아, 벌써 정신이 나갔는가? 이제 어찌하겠는가, 너는 북굴로 가야 한다."

라고 말했다.

북굴로 가게 되자, 아시랑은 자리에 앉은 채로 손을 뻗게 한 모양으로 묶였다. 거기에 조그마한 다리 달린 그릇이 몇 개 있었는데, 그릇에 구멍이 나 있었다. 아시랑의 손가락은 펼쳐져 손가락 마다 그릇의 구멍에 집어 넣은채로 묶이게 되었다. 그릇 안에는 뾰족한 철 바늘이 가시처럼 날카롭게 가득 돋아 있었다. 그러므로 손을 잘못 움직이면 그 가시에 찔리도록 되어 있었다.

골포부가 말했다.

"싸움터에서 말을 타고 달려 오는 기병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악랄한 것을 만들었으니, 바로 땅에 뿌려 놓는 쇠로 된 가시 라네. 쇠로된 가시를 땅에 뿌려 놓으면 말이 멋모르고 채찍질에 달려 오다가 가시를 밟고 발굽이 찔려 아파서 피를 흘리며 날뛰게 되니, 말에 탄 병사는 땅에 떨어지고 말은 아파 날뛰다가 더 많은 쇠 가시를 밟게 된다네. 아무것도 모르고 주인이 시키는대로 달리기만 하는 말에게 이처럼 야비한 것이 있는가?

지금 자네가 손가락을 넣고 있는 가시 그릇도 그와 같네. 사람을 꽁꽁묶어 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사람을 괴롭힐 수도 있을 것이나, 이런 것 속에 넣어 두면 묶인 사람이 안찔리려고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려고 버틴다네. 사람을 때리고 아프게 할 때에 참으려는 사람은 자연히 온 몸에 힘이 바싹 들어가기 마련이니, 그런 와중에도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하는 것이 사람의 정신을 찔러대는 것과 같다네. 뿐만 아니라 만약 한 번 손가락을 가시에 찔리면 그 가시에 찔린 것을 피한다고 움찍하여 손가락을 움직일 때 다른 편의 가시에 찔리게 되어 있으니, 가시가 어떻게 돋아나 있는 지 눈으로 볼 수가 없으니, 한 번 찔려서 아프다고 손가락을 함부로 흔들면 더 찔리네.

이런 것은 모두 사람들이 말에게 나쁜 짓을 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안라성에는 여러 옷감들을 다루기 위해 좋은 바늘을 파는 사람들이 많은데, 흔히 아름다운 옷을 입고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들의 자태를 볼 때만 그 옷을 만드느라 바느질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바늘이 뭇 사람들의 죄로 이와 같이 쓰이는 것을 아는 자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나서 골포부는 아시랑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과연 아시랑은 더욱 견디기 어려워 하였다. 참다 못했는지 아시랑은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을 하려고 했다. 그 말소리가 마치 죽어가는 사람과 같았으나 "구천간"이라는 말이 희미하게 들렸다. 골포부는 기뻐하며,

"드디어 말을 하겠는가?"

하고는 아시랑에게 말을 다시 하도록 다그쳤다. 아시랑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하는 힘이 너무 적어 말이 잘 들리지가 않았다.

"뭐라고 하는가?"

골포부는 말을 잘 들으려고 아시랑의 얼굴 가까이에 귀를 갖다 댔다. 아시랑이 보니 골포부가 드디어 말을 듣게 되었다고 기뻐서 웃는 얼굴이 눈앞에 다가 와 있었다. 흐뭇하게 웃는 입의 안이 보였으니, 이가 빠진 더러운 자국이 희미한 가운데 알아 볼 수 있었다. 아시랑은 "구천간"이라고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시랑은 그러나 말을 계속하지 않고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아시랑은 바로 입을 더 크게 벌려 가까이 다가온 골포부의 귀를 날카롭게 갈린 이로 물었다. 골포부가 황급히 피했으므로 아시랑은 정확히 귀를 깨물수는 없었다. 그러나 눈 두덩이와 귀 사이에 이를 댈 수 있었다. 아시랑의 이는 차돌에 예리하게 갈려 있었다. 이리저리 돌을 입안에 굴리며 이 끝 마다 날카롭게 만들었으니, 이 끝이 마치 창칼과 같았다. 아시랑의 이는 살 안으로 파고 들었다. 또한 아시랑이 일부러 두 개의 이 끝을 깨어 뾰족하고 날카롭게 해 놓았으니, 깨진 이 끝이 골포부의 눈꺼풀에 꽂혔다.

골포부는 아파서 몸을 피하고 아시랑을 후려 쳤다. 그러나 수없이 많이 맞고 괴롭힘을 당한 아시랑은 아픈 것을 견디며 쉽게 놓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되니 아시랑의 손가락이 가시 그릇 안에서 이리저리 찔렸다. 아시랑은 더욱 아팠으므로 자연히 턱에 힘이 들어가 이를 더 물게 되었다. 골포부는 발길질을 하며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아시랑이 꽉 물고 있었으므로, 몸을 떼어 놓으려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마침내 골포부가 아시랑을 짓밟고 떨어져 나가게 되었으나, 한쪽 눈의 커다란 살점이 떨어져 나가서 피가 콸콸 흐르게 되었다.

골포부는 아파서 소리를 지르며 눈을 감싸쥐고 길길이 날뛰었다.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사방에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어 있으므로, 누가 오지도 않았다. 골포부는 철촉이 달린 몽둥이를 붙잡고 아시랑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눈이 아파 제대로 볼수가 없었다.

이때 아시랑은 고개를 뒤로 홱 젖혀 벽쪽으로 돌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구천간, 구천간이야말로 안라성을 다스리는 염사공을 농락하고 제멋대로 흉칙한 일을 끝없이 벌이는 역적들이니, 어찌 옛 포상팔국의 난 때에 있었던 일을 배운 사람이라면 구천간을 죽이는 일을 목숨을 아껴 마다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골포부는 소리가 뒤쪽에서 들렸으므로, 그 소리를 따라 자리를 가늠하고 엉뚱한 곳을 몽둥이로 때리려 했다. 그러니 몽둥이가 빗나가 잘못 휘두르게 되었다. 골포부는 몽둥이에 맞는 것이 없었으므로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다른 곳을 더듬다가, 다시 아시랑 가까이에 오게 되었다. 아시랑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골포부가 다가오는 거리를 가늠하고 있다가, 다시 물어 뜯을 수 있는 거리에 왔을 때, 다시 골포부를 물었다. 이번에는 목의 핏줄에 이를 대려고 했다. 그러나 어긋나서 목덜미를 물게 되었다. 아픈 골포부가 다시 몸을 움직이다가 쓰러져 넘어졌으니, 넘어지면서 아시랑의 손가락을 넣어둔 그릇을 깨부수게 되었다.

가시그릇이 부서지면서 아시랑의 손에 가득 가시가 찔렸다. 그러나 골포부 또한 마찬가지로 몸이 가시에 찔리게 되었다. 가시가 잘 빠지지 않아 골포부는 비척거리는 와중에 잠깐 아시랑과 서로 가시로 엮여 붙어있게 되었다. 아시랑은 그 틈에 다시 골포부의 목을 깨물었다. 물고 재빨리 혀로 핥아 툭 튀어 나온 핏줄의 위치를 알아 차렸다. 아시랑은 밤새도록 갈린 날카로운 이로 힘을 다해 그 핏줄이 끊어지도록 했으니, 곧 온 입안과 얼굴로 뜨뜻한 핏물이 흘러 나왔다.

골포부는 마지막까지 아픈 것을 참으며 아시랑을 때리려고 했다. 아시랑은 턱뼈가 부러지고 손에 가시가 더욱 깊이 박혔다. 그러나, 정신을 잃을 만큼 크게 다치지 않았다. 골포부는 잘못해서 등잔을 넘어 뜨려 북굴 안에는 불이 났다. 마침내 골포부가 쓰러져 정신을 잃었으니 아시랑은 불길이 번져 환하게 밝아지는 굴 안을 한참 보고 있었다.

아시랑은 한쪽 손의 그릇이 깨져서 손가락 몇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시랑은 손가락을 뻗어 한쪽 손에 묶인 것을 조금씩 풀어 내려고 했다. 손목이 쓸리고 박힌 가시는 더욱 깊게 들어와 몇 번이고,

"이래서는 될 일이 아니니 그냥 그만두고 죽는 것이나 기다리자."

라고 흐느끼며 혼자 소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번 다시 칭얼거리며 움직인 끝에 아시랑은 묶인 것을 풀었다.

아시랑은 드디어 문을 열고 북굴 밖으로 나섰다. 제대로 걸을 수 없었으므로 기어서 가는데,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겨 문으로 움직이고 마침내 문밖을 나설 때, 아시랑은 기뻐서 몸이 허공에 붕 뜨고 물 속에서 헤엄치듯이 두 손 두 발을 휘져어 기어 가는 듯 하였다.

아시랑이 보기에, 북굴과 연결된 다른 굴들을 따라 다른 병졸 한 둘이 더 있을 듯 했다. 그러므로, 아시랑은 맞서서 싸우기 위해 갇힌 굴의 다른 사람들을 나오도록 열어 주었다.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와 꼭 같은 꼴로 당하고 있는 아나백이 있었다. 아시랑은 평소 높이며 따르던 아나백을 보고 크게 놀라고, 기뻐했다.

이와 같이 풀려 나오는 사람들마다 영문을 모르고 그저 문이 열리고 빛이 보이니,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북굴입니까? 남굴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아시랑이 소리쳐 대답하는 말이 이러 하였다.

"이제는 천리강산 만리 바다에 그대가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가십시오."


6.
아시랑이 아나백과 함께 굴 밖으로 나와 보니, 이는 어느 마을 뒤의 이름 없는 낮은 산으로 흙이 보드라운 나지막한 언덕배기였다. 굴에서 나와 산 속 나무 사이에 서 보니,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떠 있었고, 조용한 겨울 산에 멀리서 새가 우는 영롱한 소리가 가만 들려 왔다. 날씨가 추웠으므로 불을 지피는 마을 집에서 한가롭게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달빛에 비쳐 보일 뿐이었다. 그러고 잠시 서 있으니, 아시랑은 도대체 그 굴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런 굴이 세상에 있는지 조차 까마득하였다.

아시랑은 아나백을 데리고 황급히 기어 내려 갔고, 굴에서 가져온 골포부의 칼과 옷감을 맡기고 말을 빌렸다. 이 때 아나백은 아시랑과 헤어지고자 하였다. 아나백이 말하기를,

"나는 그럴싸한 말을 하고 좋은 얼굴을 보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끈 사람이라네. 자네가 오늘 큰 일을 벌일 때, 나는 나대로 내가 잘하는 일을 해야 하네. 그런데 지금 내 몰골이 이러하니, 나는 내 집으로 가서, 좋은 단장할 옷을 꾸미고, 얼굴의 상처와 그 초췌한 꼴을 다듬어야 하네. 그렇게 해야만 나는 내 몫을 할 수 있다네."

라고 했다.

아시랑은 아나백이 갈 길을 가게 해 주었다. 그러나 아시랑은 아나백에게 짐짓 실망했다. 아시랑은 아나백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에 오히려 겁을 내어 피하고, 그저 멋지게 높은 사람인 척 헛꾸밈만을 좋아하는 자인 듯 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아시랑은 구천간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는 소도(蘇塗)로 갔다. 가 보니, 소도의 무당이 굿을 하는 것을 따라 기도하는 척 하면서 그 집에 모인 무리들이 몇 있었다. 아시랑은 자신이 사냥꾼으로 지낼 때에 이름난 무당들을 만나서 알아낸 바를 모인 사람들에게 모두 알려 주었다.

"바로 오늘 밤이 구천간을 모두 없앨 수 있는 돌아 오지 않을 기회요. 지금 당장 뛰어 가서 일을 벌여야 하오."

이때 미리 준비해둔 계획이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싸우는 재주를 잘 모르는 어린 사람들 뿐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머뭇거릴 수 없어 급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모인 사람들끼리만 같이 쳐들어 가기로 했다.

아시랑과 그 무리들은 무기를 대어 주기로 한 신라 사람을 긴히 찾아 가서 고구려에서 만든 철갑옷과 말과 말에 입히는 갑옷을 받았다.

"이 갑옷을 입으면 싸움에 익숙지 않은 자가 휘두르는 칼이나 화살 쯤은 몇 차례 막을 수 있소. 그러니 너무 겁을 내지 말고, 곧장 뛰어 들도록 하오. 그 후에는 아무렇게나 창을 휘두르지 말고 몸통의 넙적한 곳을 향해 한번을 찌르더라도 깊이 찌르겠다고 하면서 찌르기만 하면 되오.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 빨리 일을 치르고 뛰쳐 나오면 오히려 쉽게 살 수가 있으니, 주저하지 말고 빨리 뛰어 들어가도록 하시오."

아시랑은 굴 속에 갇혀 있을 때 궁리해둔 대로 그와 같이 무리들에게 말했다.

아시랑과 그 무리들은 아시랑이 점쟁이에게 들었던 대로, 구천간들이 몰래 모여 놀고 있는 곳으로 갔다. 어느 물흐르는 냇가의 경치 좋은 곳에 있는 정자였는데, 몰래 모여 노는 곳이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자의 문에 어른거리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이고, 냇물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웃고 있는 남녀의 소리, 그윽하게 울려 퍼지는 가야금 연주소리가 가만히 들려 왔다.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때를 엿보다가 아시랑의 무리는 한 꺼번에 박차고 쳐들어 갔다.

정자의 문을 부수고 들어 보니, 구천간들은 새의 날개 모양, 깃털 모양으로 꾸민 하얀 천을 이불과 옷처럼 어지럽게 이리저리 덮어 놓고 두루미와 백로의 흰 깃털을 한가득 뿌려 놓은 곳에서 여러 남녀가 혼잡하게 어울려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질탕하게 놀고 있었다. 이는 가야에서 고귀한 사람이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르면서 새의 깃털로 정갈히 덮어주는 모양을 흉내낸 것이었다. 이때 모여서 놀던 구천간들은,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의 모양 아닌가?"

라고 하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아시랑 등의 무리가 뛰어다니며 창을 찔러 대니, 소리지르는 소리와 악쓰는 소리, 상이 엎어지고 가야금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엉켜 한 바탕 뒤집히는 소리가 났다. 그 많은 흰 깃털들에 온통 피가 묻었으니 소란한 가운데 산산히 흩어져 시뻘겋게 흩날렸다.

이 날 밤 아시랑의 무리들이 구천간의 무리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이 소식이 퍼지자 구천간의 부하이던 몇몇 군사들이 자기들이 구천간의 자리를 이어 받으려고 군사를 모아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아나백이 나타나 안라성의 성주인 염사공을 모시고 나왔다. 아나백은 극히 위엄있는 모습으로 여러 신하들과 군사들 앞에 서서,

"이제 간신배들을 없애고, 나라를 바로 세우며, 다시 염사공께서 바로 서시게 되었다."

라고 말을 하며, 그럴듯하게 위세를 보였다. 그러니 과연 그 모습이 대단해 보여, 구천간의 남은 무리들은 싸우기를 포기했고, 모두 구천간의 권세는 다하고 다른 세상이 오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니 하루 밤, 하루 낮 사이에 안라국이 모두 바뀌어 단숨에 구천간의 무리들은 힘을 잃고, 고구려와 신라를 따르는 무리들이 권세를 얻었다.

그 모양을 보더니 아시랑은 아나백을 두고,

"과연 내가 따라하고 흉내내지 못할만한 분이 맞구나."

라고 다시 칭송하며 예의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이후 구천간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무리들이 일부 모여 드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곧 신라의 군사들이 안라성에 들어 오게 되었으므로 그 위세에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나라가 싸우는 데 힘을 보태어 주었으니 신라의 장군들은 200년전의 의리를 지켜 주었다 하여, 염사공과 아나백 등의 앞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고맙게 여겼다.

곧이어, 신라에서 고구려, 신라와 싸우다가 도망치던 백제, 가야, 왜국섬에서 온 무리들이 안라성 쪽으로 들어 왔다. 이들은 구천간이 안라성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 군사들이 자신들을 맞아 주고 도와 줄 것으로 알고 온 것이 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상황이 바뀌어 있었으므로 크게 놀랐다. 안라성에서 이들을 앞에서 막고 뒤를 좇아 온 고구려군이 뒤에서 함께 공격하니, 힘없이 패했고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 때, 가야의 종발성까지 고구려군이 들어가서 적을 몰면, 적이 바다로 도망치는 길이 막히므로 서쪽으로 도망쳐 백제로 넘어가기 위해 안라성 쪽으로 갈 것이라고 내다 본 사람은 담덕이었다. 그러자, 안라성에서 적을 막아 몰살시킬 꾀가 있다고 한 사람은 신라에서 온 신라 임금의 친척 갈문왕(葛文王) 실성(實聖)이었다. 실성이 말한대로 신라 사람들과 함께 꾸민 꾀가 맞았으므로, 실성은 이때 크게 이름을 높이게 되어 신라에서 큰 힘을 얻었다.

아시랑은 이 때 세운 공으로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다. 오래도록 신라와 고구려가 안라국과 같은 가야 동쪽 지방의 여러 나라들을 휘두르게 되었으므로, 그와 같은 편이던 아나백을 따르던 무리들과 아시랑 등은 이후에는 별 큰 일 없이 편안히 지냈다. 아시랑은 형편이 넉넉해져서 쉽게 꿩고기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므로 늙어서는 자주 꿩고기 요리를 먹었다. 그런데, 꿩고기 요리를 먹을 때마다 옛날 굴에서 갇혀 있다가 도망나오던 이야기를 매번 거듭하였다. 그러므로, 그 부하들과 자손들이 지겨워 하였다.

한편 골포부는 그 시체를 찾지 못했으므로, 그때 굴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도망쳤다고들 짐작 했다. 안라국의 정세가 바뀌었으므로 골포부는 이후 숨어 사는 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시랑은 이때문에, 매번 새로운 사람을 볼 때 마다 혹시 골포부는 아닌지 유심히 살펴 보곤 하였다. 아시랑은,

"저 길거리에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을 하루 종일 가만히 보고 있어도 저 중에 어느 하나 골포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기를 쓰고 하루종일 바라보며 계속 샅샅히 살펴 보게 될 뿐, 도무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굴 속에서 워낙 불빛이 눈부신 가운데 보았기에 아시랑은 골포부의 얼굴을 똑똑히 알 수가 없었다. 또한 골포부라는 이름도 진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평생 골포부를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 아시랑, 염사공, 아나백 등은 모두 아라가야의 옛 이름, 다른 이름에서 가져온 말로 아라가야, 즉 안라국 사람이라는 뜻으로 쓴 말입니다. 골포부는 포상팔국 중에 중심이 되는 나라로 이야기되는 골포국 사람이라는 뜻으로 쓴 말입니다. 광개토왕릉비의 "안라인수병"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의견이 매우 분분합니다. 크게 보면, "안라국"의 병사들이 고구려군을 도왔다거나 맞서 싸웠다는 말이라는 해석과, 가야의 어느 지역에 신라인 또는 가야인을 보내어 고구려와 한 편이 되어 지키는 군사로 삼았다는 해석으로 나뉩니다. 위 이야기에서는 다소 애매하게 양쪽 모두와 비슷한 뜻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되, 현재 아라가야의 옛터로 이야기되고 있는 함안의 함안박물관 소장 유물들과 가장 쉽게 이야기가 맞아 떨어지도록, 안라국이 가락국등의 다른 가야나라들과는 달리 고구려와 재빨리 손을 잡았다는 쪽의 이야기를 우선으로 꾸며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광개토왕릉비 만록편 http://gerecter.egloos.com/4983524"에 포함된 7회 이야기로 지어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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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채소야 2011/07/16 18:04 # 답글

    잘 읽고 갑니다!!!! 완전 몰입해서 읽었어요..

    정말.. 왕권이 강해도 문제고 약해도 문제인거 같아요.. ㅠㅠ 게다가 막바지에 골포부의 얼굴 물어뜯는건 정말 실감나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네요

    진짜 압권은 아시랑인거 같습니다

    전 아시랑이 고문당하다가 뭔가 말하려고 할때 '그럼 그렇지..'라고 할 뻔 했거든요. 반면 .. 아나백... -.-;;; 실망스러워요..

    인물들의 묘한 반전이 멋진것 같습니다. 마치 지금 이순간 제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일것만 같은.

  • 게렉터 2011/07/18 20:42 #

    고대에 우리가 떠올리는 형태의 "왕국"이라는 단계로 가야가 발전하지는 못했다는 통설에 따라, 채소야님 표현대로라면 "신권"이 훨씬 강한 것으로 짜두고 이야기를 꾸며 봤습니다. 아나백은 처음에 동경하던 보던 시각에 비하면 좀 실망스러운 인물로 드러나게 해 두었습니다만, 그래도 나름대로 선동가나 조직자로서 제몫은 톡톡히 하는 인물로 세워 놓았습니다. 아나백이 처음 언급에 비해 실망스러워지는 것은 아나백 자체의 이중성이 까발려진다기보다는 아시랑의 관점이 아나백 팬으로 치우쳐져 있다가 장단점을 알아보는 균형잡힌 시각으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2011/07/18 10: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11/07/18 20:39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덧글 어투를 보면 굳이 비밀글로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될만한 내용입니다만... 따로 연락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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