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 가시나이 (1970) 영화

1970년작 한국영화 "팔도 가시나이"는 전국 각지 출신으로 서울에서 같이 살고 있는 젊은 여자들이 껄렁한 남자들을 다 두들겨 패버리고, 마지막에는 거물급 악당도 때려 잡는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영화가 시작하면 그중 주인공인 최지희가 택시 운전을 하면서 나타나는데, 길가에 있던 택시기사를 노리는 강도단이 여자 운전수를 좋은 목표물로 여기고 택시에 탑니다. 그러나 강도단이 본색을 드러내자 최지희는 강도단을 다 주먹으로 두들겨 패서 실신시켜 버리고, 망신을 주기 위해서 바지를 벗겨 버린 모습으로 택시 뒷좌석에 태워서 경찰서로 데려 가버립니다.


(택시기사 주먹꾼 최지희)

시작 장면에서 당장 실망감이 드러나는 대목은 역시 싸움 장면이 아주 부실하다는 겁니다. 싸움 장면을 짜 놓은 것이 엉성하고 그나마 대역을 엉성하게 많이 써서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겨우겨우 누가 이기고 있는 것인지 알아 볼 수 있는 정도이지, 멋진 기술을 화면에 보여 준다거나, 아슬아슬함이나 파괴감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재미와는 아주 담을 쌓아도 높게 쌓은 영화였습니다. 이러자니, 여자 패거리들이 나와서 여자라고 무시하는 남자 건달들을 두들겨 패는 영화치고는 재미거리가 반토막의 반토막이 나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비슷한 시기 일본 영화에 많이 나온 여자들이 싸움하는 영화의 유행을 따라가는 영화 아닌가 싶습니다. 소재부터가 그렇거니와, 여배우들을 살벌한 세계에 등장시켜서 이렇게 저렇게 자극적인 장면, 관능적인 장면을 조금씩 집어 넣어 보려고 한 것도 같은 분위기다 싶습니다. 특히 이 영화 "팔도 가시나이"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일본 영화 "길고양이" 시리즈나 "여두목(女番長)" 시리즈들과 비슷한 구석이 꽤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이 어느 정도 잔혹하고 비정한 장면까지 섞어가면서 강한 싸움 장면을 만들어서 인상을 남긴 것에 비하면 이 영화는 그냥 영화의 절반쯤은 확 포기한 모양이라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영화는 진지한 싸움과 비정한 뒷골목의 피땀 튀기는 이야기를 포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즐길만한 영화로 끌고 가기 위해 코미디 요소를 대거 깔아 놓은 영화였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원천을 따져보면 그 본 바탕 계보부터가 코미디의 뿌리가 보이는 영화 였습니다. 이 영화는 제목 "팔도 가시나이"부터가 "팔도 사나이" 시리즈의 방계이자, 넓게 보면 "팔도 사나이" 시리즈의 파생(spin-off) 시리즈인 용팔이 시리즈의 한 가닥이라는 것입니다.

따져 보자면 이렇습니다. 60년대 말에, 김효천이 감독을 맡은 "팔도 사나이"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이 영화는 장동휘가 암흑 조직 총두목으로 나와서 전국의 주먹꾼들과 겨루는 데, 싸워 이기는 과정에서 주먹꾼들이 장동휘를 "형님으로 모시면서" 장동휘가 팔도의 주먹꾼들을 거느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일본 조직과 결투해서 이긴다는 90년대 "장군의 아들"시리즈나 21세기의 "야인시대"까지 어느 정도 이어져 내려온 한국 깡패 영화의 기본에 해당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어찌 보면 케케묵은 이야기이기도 한데, 이 영화에서 장동휘의 부하가 되는 전라도 출신의 주먹꾼으로 "용팔이"가 나옵니다. 이 용팔이를 상당히 재미있고 좀 웃기게 박노식이 연기를 하면서, 용팔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곁가지 시리즈 영화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리하여, 박노식이 "용팔이"로 나오는 많은 영화들이 있는데, "속 팔도 사나이"처럼 "팔도 사나이"의 용팔이와 쉽게 이어지는 모양으로 보이는 영화도 있고, 그저 전라도에서 서울에 온 어리숙한 사나이지만, 의협심이 강하고 싸움만은 잘하는데 이름이 "용팔이"라고 해서 이야기의 연결 관계는 별로 없게 등장하는 영화도 나왔습니다. 이 영화 "팔도 가시나이"는 제목만 놓고보면 이 "팔도 사나이"의 여자 판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인데, 여자 두목에 해당하는 최지희가 용팔이와 잠시 떨어져 있는 용팔이 애인으로 나오고, 영화 속에 잠깐씩 용팔이를 등장시키기도 해서 정말로 이야기가 닿아 있는 "용팔이" 곁가지 시리즈로도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용팔이 영화다운 잡다한 농담 따먹기 분위기를 확 살려 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영화는 싸움 장면은 그냥 "싸워 이겼다"는 것을 알려 주는 정도이고, 대신에 여덟명이나 내는 각지 출신의 여자들의 사연과 개성을 늘어 놓으면서 웃고 지나가는 내용으로 꾸리고 있었습니다.


(신문 광고 포스터)

그런데 이렇게 해서 팔도 각지 출신 여자들의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지나가는 이 영화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팔도 각지 출신 여자들의 이야기를 늘어 놓다가 중간에 확 대뜸 때려치우고 그만 둔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초반의 도입부에서 최지희가 싸움 잘하는 택시 기사로 소개 되고, 이 주인공 최지희가 팔도에서 온 다른 여자들의 맏언니 역할을 하면서 같이 살고 있으며, 여덟 여자들이 저마다 똘똘 뭉쳐 있는데 다들 싸움을 잘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러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각지 출신의 여자들이 자신은 어떤 사연을 거쳐서 남자에게 배반을 당하고 어두운 인생을 살게 되었는 지, 그러다가 어떻게 최지희를 만나서 "팔도 가시나이"의 일원이 되었는 지 차례차례 보여 주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출신 지역이 팔도나 되지 않습니까. 저마다 개성이 다른 여배우들이 역할을 맡기까지 했으니, 이렇게 저렇게 가지각색의 사연을 보여주면서 영화 상영 시간을 보내면 그럭저럭 볼 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주먹질로 이름난 무리들의 과거 사연을 늘어 놓는 이야기이니, 풍자도 하고 흡인력있는 호기심 생기는 소재도 풀어 놓아가면서 이런저런 줄거리를 가득 담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악인열전, 즉 피카레스크식 구성의 정석을 밟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왜인지 여덟 여자 중에, 세 명만 보여 주고 그냥 관둡니다. 택시 기사 최지희는 다른 사람들을 구해서 하나 둘 모아 놓고 같이 살게한 주인의 입장이니 빼 둔다고 하더라도, 나머지가 일곱 명인데, 왜 그 중에 절반도 채 안 보여 주는 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나온 영화 모양을 보고 있으면, 영화를 만들다가 제작비나 시간이 부족해서 그냥 대충 찍다가 때려 치우고 바로 그 다음으로 건너 뛰어 달린 것처럼 보입니다.


(일당들: 맨 왼쪽이 윤미라, 맨 오른쪽이 최지희 입니다.)

사연을 보여 준 세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가장 간단한 것으로는,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깔깔 웃으면서 해변 좌우에서 뛰어오며 서로를 부르며 중앙에서 만나 포옹한다는 요즘에는 구식 영화 패러디로 웃길 때 사용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러한 해변의 남녀는 모래톱 위에서 서로 마주 앉아 사랑의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데, 남자는 70년대 후시 녹음 성우 특유의 기름기가 강 같이 흐르는 목소리로,

"우리는 어디에서 태어 났지?"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자는 역시 70년대 후시 녹음 성우 연기 특유의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사랑 속에서."

라고 대답해 버린다는 겁니다.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그 여자가 그 사랑하는 남자를 믿고 아버지 소 살 돈을 들고 도망쳐서 남자를 찾아 가는 데, 알고 보니 남자는 다른 여자랑 바람 났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방황하고 있는데, 최지희를 만나서 같이 지내면서 마음 잡고 살아 보기로 했다는 겁니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지금은 주로 시어머니 역할로 많이 나오는 윤미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도 있습니다. 윤미라는 이떄 어린 시절의 애띤 모습이 가득 남아 있는 분위기로 나옵니다. 그래서 아직 윤미라가 한 때를 주름잡던 최대 출력의 미모를 자랑하던 시절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렇습니다만, 다른 여느 배우들과는 달리 훤칠한 키 하며 동글동글 순박해 보이면서도 훅 빨아들이는 데가 있는 눈매가 확연히 달라 보여서, 미모가 유달리 눈에 뜨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윤미라의 사연은 이러합니다. 곗돈 못 내서 빚쟁이 아줌마에게 시달리다가 그 빚쟁이 아줌마가 빚 갚으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어떤 사장님을 여관에서 만나라고 보내는데, 거기 갔더니 빚쟁이 아줌마랑 짜고 있던 사장님이 확 덥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원래 윤미라의 애인도 거기에 쳐들어오는 통에 윤미라의 애인은 사장님을 두들겨 패버리고 윤미라는 돈에 눈먼 사람 취급을 하면서 떠난다는 겁니다. 이리하여 윤미라는 인생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데 역시 그러다가 최지희를 만나서 같이 지내면서 마음 잡고 살아 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윤미라)

(왕년의 윤미라)

이상 두 가지 이야기 이외에 팔도의 여자들이 들려 주는 사연 중 영화에 나오는 세 가지 중에서 가장 막 나가는 이야기가 바로 나머지 한 가지 입니다. 순서대로라면 이 이야기가 영화에서는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제일 막나가는 이야기가 맨 먼저 나오니까, 뒤이어 나오는 나머지 두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싱거워 보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이브에서 출발 합니다. 한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10대 소녀가 주인공인데, 아버지가 전화를 해서 오늘은 일찍 집에 못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가족과 함께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했던 주인공은 실망하는데, 사실 아버지는 다른 여자랑 바람나서 그 여자랑 같이 있는 이부자리에서 전화를 건 것입니다. 실망한 주인공은 혼자 자석으로 달라 붙게 만들어져 있는 입맞춤 인형을 보며 히죽히죽 웃기 따위의 헛짓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영화 상에서는 순수한 청소년 이라는 형식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 옵니다. 어머니는 들어 오다 말고 아버지가 오늘 안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바로 "동창회에 가야지"라면서 그길로 신발도 제대로 벗기 전에 집을 나가 버립니다.

부모가 모두 크리스마스 이브에 어딘가로 가버리자 실망한 주인공은 집안에 남녀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합니다. 60년대 록큰롤을 틀어 놓고 막춤을 계속 추는 장면이 나옵니다. 막춤 추는 사람들의 솜씨나 음악은 별볼일 없이 부족한 편입니다. 이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는 안되지만 술도 뻐근하게 많이 마신 듯 합니다. 주인공은 술에 떡이 된 것인지 쓰러져 있게 되는데, 그러다가 어떤 녀석이 주인공을 알 수 없는 곳에 데려가서 덥칩니다. 화면에는 갑자기 꽃 한 송이가 꺾어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나중에 술이 깬 주인공은 뭔가 인생을 망쳤다는 생각을 했는지 가출해서 죽으려고 합니다.

한편 이때 최지희는 택시 운전을 하고 있는데, 뒷 자리에 탄 한 남녀가 어디로 가자는 목적지도 제대로 말 안해주고 뻐근하게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습니다. 최지희는 화통하게도,

"여관까지 가서 기름값 쓰고 여관비 쓸 필요 없이, 요금 조금 더 내고 차안에서 해결하시라."

고 한 뒤에 호젓한 곳에 차를 세워 둡니다. 최지희는 그리고 나서 "재미 많이 보십쇼."라고 말하고 자리를 비켜 주는데, 바로 거기서 가출해서 죽으려고 하는 주인공을 발견한 겁니다. 주인공은 죽어가는 주인공을 구출하기 위해 쓰러진 주인공을 끌고 와서 뒷자리에 있는 남녀에게 비키라고 하고는 주인공을 태우고 갑니다. 이때, 더욱 막나가는 대목은 바로 그 뒷자리에 있던 남녀가 "동창회에 간다며 나갔던" 주인공의 어머니가 맞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어머니와 딸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서로를 알아 보지 못하고, 이후 주인공은 부잣집 딸로 살던 시절은 저버리고 어느 바의 바 걸(bar girl)이 되어 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답답한 이야기 구조이기는 하고, 이야기가 잘 안풀린다 싶으면 갑자기 어디서 확 자동차가 나타나 교통사고가 일어나는 장면을 넣어서 난데 없이 우연으로 다음 장면으로 이어 붙이는 등 엉성한 구석도 많아 보이기는 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나름대로 이 막나가는 꼬인 이야기가 눈길을 끄는 구색이 있고, 여러 편을 늘어 놓으면 그럭저럭 그 열전식 구성이 재미를 주는 면이 많았다고 생각 합니다. 물론, 감정 표출 장면이랍시고, 갑자기 여자 주인공이 괜히 운율만 어색하게 쪼개 맞춘 줄거리 요약 나래이션을 줄줄 읊는 장면이 나오는 등 연출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방탕을 했다.
어머니가 방탕을 했다.
그렇지만 그래서 나도 방탕을 한 것은 아니었다."

운운하며 흐느끼는 대사가 난데 없이 나오면 이 무슨 지루한 시간의 카덴차인가 싶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군더더기 없이 좀 더 날렵한 편집으로 묶어서 시간을 절약한다면, 이 정도 수준으로 여덟 사람의 사연을 줄줄이 엮기만 했어도 훨씬 더 재밌었을 듯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세 명 분량만 보여주고 그냥 이유 없이 이야기를 중단해 버립니다. 잠깐 나오는 장면을 보면 이렇게 각자 뒷 이야기가 다른 까닭으로 여덟 여자들은 각자 "주특기가 다르다"라는 점도 있기는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항상 중국 옷을 입고 쌍칼 다루는 것을 연마하고, 어떤 사람은 배우가 되기 위해 연기를 하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문학 소녀라는 것 등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특기 역시, 소개 장면은 잠깐 대충 보여 주지만, 주특기를 이용하는 장면이 전혀 안나옵니다. 서로 재치있게 합심해서 각자 특기를 살려 싸운다...는 이야기가 꼭 나올 법도 한데, 그냥 안나오고 만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이 영화는 여덟 여자들이 몰려 다니면서 아무 특징도 없고 구분도 안되는 잡악당들과 우연히 만나서 싸우는 장면만 이리저리 몇 차례 보여 줍니다. 악당들은 그냥 "그림 좋은데" 따위의 헛소리를 하면서 집적거리다가 욕먹고 덤비는 등, 그냥 "나 한 대 맞고 나가 떨어질 악당이오"라고 이마에 써 놓은 몰골로 나타나서 한 대 맞고 나가 떨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싸움 장면도 아주 볼품 없이 나옵니다. 아침 약수터 올라가는 산길에서, 밤무대 앞에서, 밤거리 골목길에서, 분수대 앞에서 사랑 싸움 하다가 패싸움 벌이는 놈들을 보고, 등등으로 배경만 조금씩 바꿔 가면서 이런 재미 없는 단발성 싸움만 몇 번 한다는 겁니다.


(어디서 행패야?: 희롱하는 날건달을 혼내 주기 위해 등장. 중앙이 윤미라 입니다.)

그렇게 나가다가 영화가 끝날 때 즈음이 되면, 이 영화는 어차피 밑천도 다 날렸겠다, 마지막으로 이무렵 영화들이 자주 써먹던 마법이라 할 수 있는 "막판에 갑자기 반공물로 돌변하기"를 보여 줍니다. 영화를 "반공물"로 만들면 정부 정책상 유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영화들 중에는 아무 상관 없는 내용으로 진행되다가 막판에 갑자기 돌변하여 "사실은 이 모든 악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었다" 라는 식으로 반공물로 끝나 버리는 것들이 꽤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여러 날건달들을 물리치던 주인공이 어느날 갑자기 택시에 탄 이상한 승객에게 납치를 당하다는 내용이 난데 없이 확 나와 버립니다. 그리고 이 주인공을 납치한 사람들이 사실은 공산당 첩보원이라서 주인공 일행과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공산당 첩보원들이 뭐하러 길가는 택시 기사를 납치한 것인지, 납치해서 자기들 비밀 장소에 숨겨두고 뭘 하려는 것인지 아무것도 안 알려 줍니다. 그저 "준비는 되었겠지." "준비는 되었습니다." 따위의 알 수 없는 말만 서로 나눌 뿐입니다. 심지어 자세히 안 보면 이 놈들이 공산당 첩보원이라는 것 조차도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하자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데, 갑자기 장면이 바뀌더니 주인공 일행이 기거하는 여인숙에 사는 한 어린이 휙하고 주인공의 동료들이 모인 곳에 뛰어 들면서,

"큰일 났어. 주인공이 납치 되어 어디에 잡혀 있어!"

라고 알려 줘 버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어린이가 - 몇 년 후 얄개 시리즈로 대성하는 이승현이 맡았습니다. - 공산당 첩보원들의 비밀 작전을 간파하고 번개 같이 나타나 실시간으로 그 사실을 전달하는 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냥 이 영화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그저 안가르쳐주고 꾸역꾸역 이렇게 밀고 나갑니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동료들인 7인의 여자들과 군대에서 제대 한 뒤에 주인공을 찾아 다니다가 우연히 합류한 용팔이 일행이 어딘가로 뛰어 가 보니, 바로 거기에 공산당 첩보원들이 나란히 줄을 서서 얻어 맞으려고 대기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별 힘 없는 격투 장면을 한 번 보여 주면서 공산당 첩보원들은 골목의 주먹꾼에 불과한 일당들에게 산산조각이 나고, 주인공은 구출되고, 주인공과 용팔이는 재회하여 기뻐하고, 다같이 "으허허허허" 하고 기쁘게 웃으면서 영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려 버립니다.


(일당들과 함께 멋부리며 나타나는 최지희)

영화 면면을 조금 파헤쳐 본다면 당시 비슷하게 나왔던 일본 영화의 유행에 어느 정도 부합해서, 뒷골목의 어두운 정서를 생생하게, 혹은 극적으로 드러내려는 의도가 조금은 있었던 영화라고 추측해 봅니다. 이 영화에는 영화 제목에 걸맞게 사투리가 무척 많이 나오고 있고, 특히 영화 초반에는 이 사투리를 발판으로 해서 꽤 껄렁한 욕설이나 푸짐한 거친 표현이 의외로 쏟아지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껄렁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긴장감 있게 잡아 나가고, 군데군데 이목을 끌만한 자극적인 장면, 관능적인 표현도 꽤 넣어 보려는 것이 영화의 방향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을 해 봅니다.

이게 왜 상상으로 그치냐면, 안그래도 별로 골격이 좋지 않은 이 영화인데, 그나마 조금만 뭔가 자극적인 장면이 나오려고 하면 확 잘라 먹고 건너 뛰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잘린 모양을 보면, 촬영은 나름대로 했는데, 검열이나 심의 문제로 강제로 잘린 것 같이, 혹은 억지로 막 뜯어낸 것처럼 보입니다. 상당수 장면은 너무 막 자르고 넘어 가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앞뒤 상황을 보고 적당히 짐작해야 겨우 알아 먹을 수 있을 지경으로 되어 있는 모양 입니다. 이러자니 안그래도 모자란 데가 많은 영화에서 그나마 기둥 뿌리가 뽑히고 서까래가 무너진 느낌마저 났습니다. 서울로 흘러들어 갈 곳 없어 배회하는 팔도의 여자들이 서로 뭉쳐 악당들을 두들겨 패고 다닌다는 영화인데, 이것을 건전한 새마을 운동 홍보물이라도 되어야 하는 양 잘라내 버리니 안그래도 남는 것 없는 마당에 뭐가 더 남겠나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둡고 위력적인 장면은 다 죽고 얼추 코미디만 남아 뭉친 결과가 결국 이 정도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이 영화에는 코미디 전용 조연으로 트위스트 김을 모방한 "미스터 갈비"라는 여인숙에 얹혀 사는 종업원 하나를 투입시켜 두기도 했습니다. 면면의 개성이나 멋도 트위스트 김에 비해 많이 부족한데다가 각본은 한톨의 참신함도 없는 억지 웃음 대사의 바다로 파도치고 있고, 그 안에서 배우가 역시 일부러 차별성과 특징을 불살라 없애는 듯한 애처로운 자빠지고 넘어지고 얼굴 인상 구기는 코미디로만 힘을 빼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다가 잠꼬대를 많이 해서 같이 자는 주인 아저씨를 괴롭게 한다, 꿈 속에서 본 여자로 착각해서 옆 자리에서 자는 주인 아저씨를 끌어 안는다, 등등의 말해 봐야 입만 아프고, 봐봐야 눈만 아프고, 이렇게 써 봐야 손가락만 아픈 불행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외에 제대해서 사회에 나와서는 애인을 찾아 보려고 떠도는 용팔이 일행의 곁가지 이야기는 그나마 "용팔이"만의 개성이 보여서 지루함이 조금 덜할 뿐, 영화의 코미디에 도움이 크지 않다는 점은 매한가지 였습니다.

싸움 장면이나 휘몰아치는 이야기가 많은 편인 영화인데, 화면을 인상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거의 없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아무 맞춤 없이 그냥 어떨때는 가까이서 배우들 얼굴을 보여 주다가, 어떨 때는 세트 전체를 잡아 내면서 배우들을 다 보여주다가 그냥 무규칙적으로 화면 구도가 비틀비틀 변해가면서 영화가 흘러 갑니다. 주제곡도 있는 영화이지만, 음악이나 음향효과 역시 별 들을 거리들도 없고, 조금 있는 것도 맥 없이 급히 갖다 붙인 정도 입니다. 이런 점들도 영화의 기운을 빼는 데 한 몫 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스스로 처음에 다져 놓은 구성을 내다 버리고 막 찍은 기색이 역력한 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 내다버리고 어느 쪽으로든 성실하게 잘 만들어 봤으면 어땠을까 싶은 영화 였다고 생각 합니다. 구성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촘촘히 늘어 놓고, 재미난 연출 수법을 듬뿍 부려 놓을 수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여기에 최지희나 용팔이 일행의 모습은 어느 정도는 특유의 차별점이 눈에 뜨이기도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보다야 차라리 좀 더 어그러지더라도 어떻게든 더 재미난 영화로 치달아야 마땅하다고 생각 합니다.


그 밖에...

영화가 시작할 때, "귀염둥이 팔도 가시나이~" 운운하는 가사가, 어찌된 영문인지 애교 있다는 느낌으로 들어 있는 경쾌하고 트로트색이 강한 주제가가 나옵니다. 꽤나 이상합니다.

용팔이 일행은 월남전 참전 용사로 나옵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말이야." 로 시작하는 허세를 경박하게 나타내는 농담 부류의 대사가 좀 나오는 편입니다. 그 중에는 다같이 즐겁게 농담하는 자리에서 "월남에서 베트콩 네 놈 죽였지." "아녀. 네 놈이 아니라 여섯 놈 죽였당께." 라는 말을 즐거운 웃긴 농담으로 떠들면서 무슨 컴퓨터 게임 하이 스코어 이야기 하듯이 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런 영화에는 성우의 과장된 연기와 얽혀서 지금 보면 매우 괴상하게 들리는 희한한 대사가 재미거리가 되어 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그나마도 별로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선술집에서 길가는 잡건달 남자들이 주인공 일행인 여자들을 희롱하려하다가 욕을 먹자, 70년대 성우 연기 조로 이 여자들에게 느릿느릿 멋진 목소리로 욕을 한다면서,

"아아니! 이런 무허가 건축물 같은 것들!"

이라고 하는 부분은 또렷이 기억에 남습니다.


("팔도 가시나이"에 출연한 박동룡: 중앙의 남자배우 입니다.)

여자들을 희롱하는 잡건달 중 한 명으로, 수없이 많은 70년대 영화에서 작은 악당 역할을 맡았던 박동룡 http://gerecter.egloos.com/3825648 이 나옵니다. 대사는 거의 한 마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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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ECRO 2012/04/25 08:42 # 답글

    이거 재미있어 보이네요. 아지매들로 리메이크를 해도 될 듯 합니다.
  • 게렉터 2012/04/30 22:11 #

    따지고 보면 80년대의 마담물(마담시리즈) 때 발맞춰 나온 여자 싸움 영화들 중에 이런 것들이 있다면 있습니다. "특명 미녀군단" 같은 허물어져가는 영화도 비슷한 형식으로 나가고 있고.
  • rumic71 2012/04/25 16:08 # 답글

    찍어 놓고 잘려나간 부분이 엄청날 듯 합니다.
  • 게렉터 2012/04/30 22:12 #

    아주 그렇습니다. 이 영화의 잘린 부분이 복원된 판을 보아야 할 가치가 선명한 영화라고 생각 합니다.
  • 잠본이 2012/04/26 00:13 # 답글

    이런 무허가 건축물 같은... 푸하하하하
  • 게렉터 2012/04/30 22:13 #

    그런 식의 이상한 비유법 대사가 전혀 안나오고, 건축물이나 허가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안나오던 와중에 갑자기 확 진지한 어투로 튀어나오는 대사라서 훨씬 더 웃깁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가 나오던 시절에 잠깐 그런 말이 유행어로 쓰인적이 있었는지.
  • 역사관심 2012/04/26 04:35 # 답글

    마지막 대사~ 진짜 ㅎㄷㄷ합니다. ㅎㅎㅎ

    근데 영화자체의 스토리는 괜찮아 보이네요. 영화는 부실했더라도, 리메이크로 공들여 만들면 꽤 좋은 작품으로 재탄생할수도..
  • 게렉터 2012/04/30 22:13 #

    피카레스크식 구성 자체가 재미난 점이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팔도 가시나이" 한 명씩 주인공을 바꿔 가면서 관점을 바꿔서 진행하는 8부작 TV 미니시리즈 같은 것도 재밌을 듯 합니다.
  • 치즈 2012/05/01 01:42 # 삭제 답글

    제목도 엄청나고 윤미라 아줌마의 왕년 미모도 엄청나군요..
  • 게렉터 2012/05/02 20:44 #

    진정으로 윤미라가 최대출력의 미모를 자랑하는 영화들이 몇 있을텐데 머지 않은 장래에 한 편이라도 꼭 소개해 보겠습니다.
  • 2012/05/03 19:0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5/03 19:0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12/05/06 00:23 #

    그 말씀 하시니 미국 TV의 "MST3K"처럼 못만든 영화를 소개해주면서 비웃는 코미디 쇼 형식으로 잠깐 EBS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담고 넘어간 것들 중에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가 있었던 것도 생각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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