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 (1973) 영화

1973년작 "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은 한국전쟁 발발전 대한민국초기에 고관대작들에게 인기 많던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가 공산당 간부와 사랑에 빠져서 이런 높으신 분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비밀 공산당 단체에게 빼돌린다는 이야기로 흘러 갑니다. 그러니만큼 일종의 반공물인 이야기이고, 공산당 스파이 잡는 이야기를 다룬 "특별수사본부" 시리즈의 한 편인데, 막상 이 영화는 줄거리만 따지고보면 반공물스러운 면이 그다지 강한 편은 아니고, 스파이물 관습대로 이야기가 꾸며져 있는 스파이물스럽게 되어 있습니다.


(공산당 스파이, 김소산과 충식: 자료 사진은 흑백입니다만, 컬러 영화입니다.)

"특별수사본부" 영화 시리즈는 일단 그 발판을 "특별수사본부" 라디오극에 두고 있습니다. "특별수사본부"는 반공검사로 한때 이름이 있었던 오제도 검사등을 중심으로 해서 40, 50년대에 특별수사본부에서 활동하면서 이런저런 공산당 스파이들을 찾아내고 뒤쫓아서 결국 붙잡는다는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해서, "특별수사본부" 라디오극은 사회 각계 각층에 이런저런 사연으로 흘러든 스파이들의 이야기를 보여 주고, 그걸 줄기차게 쫓아다니는 명망있는 검사, 수사관들을 보여 주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미난 즐길거리로 꽤나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영화판이 나온 것이 바로 "특별수사본부" 영화 시리즈인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실제 유명한 여자 스파이였던 김소산 역할로 윤정희가 나오고, 요즘은 배우 최민수의 아버지로도 널리 알려진 최무룡이 스파이를 좇아 특별수사본부를 지휘하는 오제도 검사로 나옵니다.

지금 이 영화를 보면 당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오제도와 특별수사본부 사람들을 지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신사다운 사람들로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제도 검사의 경우에는 아주 과할 정도로 엄청나게 마음 넓은 사람이 나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악명 높다면 악명 높은 40년대의 수사관들인데 잡아 온 용의자들에게 심한 말 한 마디 하지 않습니다. 공산당들은 그대로 나라를 좀먹는 악랄한 배신자, 침입자 취급을 하던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오제도 검사는 붙잡은 공산당 스파이를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공산당이었던 사람이나, 공산당 협력자들이었던 사람들도 마음 고쳐 먹으면, 바로 믿어주고, 잘 살 수 있도록 사랑으로 감싸고 도와 주고, 보살펴 주는 듯도 합니다.

이런 점은 오제도 검사의 실제 행적을 살펴보면 이상한 면이 있습니다. 오제도 검사는 반공 검사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라서, 자료를 찾아 보면 "공산당 비슷하기만 하면 앞뒤 안가리고 하여간 지옥 끝까지 쫓아다닌다"는 식의 집요한 태도로 오히려 명망을 세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제도 검사가 활약한 전후사정을 보면, 붙잡은 용의자도 최대한 존중해주는 차분한 태도보다는, 무턱대고 밀고 나가면서 좀 희생자가 발생하고 좀 억울한 사람 생기더라도, 하여간 나는 한 놈이라도 공산당 스파이는 더 잡아 내겠다는 모습이 훨씬 잘 맞아 듭니다.

널리 알려진 예만 꼽아봐도, 공산당과 관계 있을 듯 하다는 의심이 있다는 것으로 엮인 사람들을 모조리 다 잡아들이고, 후다닥 와장창 유죄판결을 내리는 방식으로 정치세력 하나를 결단 내었던 "국회프락치 사건"에서 오제도 검사의 역할도 꽤 널리 이야기가 도는 편입니다. 하기야, 이 시절은 나중에 대통령되려고 반란 일으켰던 박정희 같은 사람도 공산당으로 몰래 숨어서 활동하던 때 아니겠습니까. 대한민국 정부를 북에 넘겨 버리고 다같이 공산화 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공산당 협력자가 어디엔들 한둘 없었겠냐만은, "국회프락치 사건"은 그렇다고 해도 증거도 불충분하고 재판 절차도 부실한 모양으로 무리하게 사람을 유죄로 몰아간 것으로 비난 받아왔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나라 판검사들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들이었나... 하는 큰 오점으로도 지금껏 이야기 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오제도 검사가 정반대로 극히 자상한 사람으로 나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껄끄러워 보입니다.


(영화 속 특별수사본부, 중앙이 오제도 역할의 최무룡)

몇 가지로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텐데, 우선 드는 생각은 이 영화가 그런 상황은 앞뒤 다 생각 안하고, 그냥 "미녀 여자 스파이 윤정희", 그 "스파이를 쫓는 주인공 검사 최무룡"이 나오는 스파이물로만 밀고 나가는 면이 꽤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당시 실제 이야기를 잘 발굴해서 특색 있는 이야기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장감 있는 볼거리로 꾸미는 대신, 그냥 미녀 스파이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니, 할리우드에서 나온 다른 여자 스파이 이야기를 적당히 한국화해서 따라해 보자는 식으로 영화를 만든 느낌이 많이 났습니다. 특히, 이 영화는 여자 스파이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마타하리" 이야기들을 아주 많이 참조 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실제 현실은 어느 정도 무시하고, 미녀 스파이 윤정희를 김소산으로 나오게 하면서 "그저 사랑하는 남자만 믿고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비극적인 미녀"로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윤정희는 대한민국 정부를 뒤엎어 북에다가 넘겨 주어야 한다는 무슨 역사관이나 이념에 의해 스파이짓을 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반공물에 흔히 나오는 것처럼 무슨 사악한 욕심으로 악당짓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재미난 스파이물로 만들기에는 너무 싱거운 구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이 영화는 윤정희가 우연히 윤정희에게 접근한 공산당 간부를 사랑하게 되고, 그 공산당 간부가 부탁하기 때문에 스파이짓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 공산당 간부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여 둘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공산당에서 시키는 일들을 할 뿐으로 나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야기가 이런식으로 펼쳐지다보니 동기와 갈등이 다양해지고, 저마다 인물들이 개성을 얻는 단초는 잘 잡힌 면이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나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인공 오제도 검사의 역할은 거기에 대조되는 입장이 됩니다. 격정에 휩싸이고 일탈과 불법을 저지르고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이 공산당들의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오제도 검사는 이 공산당들을 관찰하고 차분하고 성실하게 사는 대조되는 입장의 이야기로 꾸며 놓은 것입니다.

이런 발상 역시 이야기 구도만 보면 좋았다고 생각 합니다. 김소산은 인생의 모든 것을 다바친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이 사람이 그저 스파이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기를 이용한 것은 아니었나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즐겁게 놀면서 돈 많이 벌고 잘 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반역자로 몰리며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 한탄 스럽기도 합니다. 반면에 이 김소산을 쫓는 오제도 검사쪽은 처자식 걱정 하면서 가끔 너무 빡빡한 직장생활에 한숨도 쉬는 성실하고 착한 공무원입니다.

이런 형국으로 나아가니, 나중에는 자신을 계속 쫓아다니는 오제도 검사가 김소산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김소산이 감정적으로 오제도에게 의지하게 되고, 오제도는 아름다운 김소산에게 연민을 느끼고,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도 흐르는 그런 이야기로도 자연스럽게 각본을 끌고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요즘 영화로 비교해 보자면,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철 모르는 위조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미국 전체를 두고 위조범을 추적하는 톰 행크스처럼 위치를 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영화 "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면서, 이후에 여자 스파이를 다룬 반공영화에서 주인공 여자가 공산주의는 잘 알지도 못하는데, 사랑 때문에 이념의 투사가 되어 싸우다가 도피행각을 벌이는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신파극을 꾸미는 경우가 꽤 정형화되고, 나중에는 좀 지겨울 정도로 자주 보이지 않았든가 싶은 기억도 납니다.

한편, 오제도 검사를 의롭고 자상한 사람으로 묘사한 또다른 이유로는 이 영화가 진짜 반공 홍보 목적이 강했다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단순히 반공을 주제로 잡은 영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이 영화가 개봉되었던 70년대초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공산당을 반대해야 한다는 점을 소개하고, 간첩을 잡아 보자는 것을 장려하려는 구체적인 공익 광고 같은 목표가 생각 외로 강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서 공산당 스파이를 심하게 흉악하지는 않은 인물로 해놓았습니다. 그러자니, 반대편에 서 있는 오제도 검사는 아주 천사 같이 그려 놓을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혹시 이 영화를 보는 실제 간첩이나 공산당 동조자가 있었다면, 이 영화를 보고, "아, 대한민국의 검사는 전향하고 용서해달라고 하면 자상하게 용서해 주고 새 삶을 살게 해 주는 구나"하고 선전해서 정말로 돌아 서게 만들려는 목적도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정반대 입장에서 보면, 의외로 이런 식으로 오제도 검사를 표현한 것이 사실과 똑같지는 않아도, 단순히 이야기를 지어내고, 목적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다보니 그렇겠다는 것 외에, 나름대로 오제도의 행적을 반영한 면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제도 검사는 그 행적을 보면, 자비심 없이 온갖 곳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공산당을 찾아내며 내달리던 사람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산당 협력자들을 전향시키는데도 여러 가지로 활동한 일들이 보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식으로 하나 둘 전향자들을 만들어서 더 많은 공산당들을 실토하게 하려는 작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오제도 검사는 공산당 전향자 단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보도 연맹"을 만드는데도, 역할이 있었습니다.

지금에야 "보도 연맹" 일은 역시 "공산당 좋아한 것 실토하고 전향하면 용서해준다"고 해서 실토하게 해 놓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속았지롱"하면서 도리어 다 학살 해버린 대한민국 역사에 손꼽히는 비참한 결말로 극히 악명 높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오제도 검사는 보도 연맹 창설 당시에 역할을 했던 사람들 중에서 나중에라도 "그떄 학살은 정부가 사죄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한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영화 같은" 정도는 아니더라도, 오제도 검사가 어떤 식으로든 공산당 사상을 따르는 사람을 전향시키는 문제에 관심이 정말로 있었고, 또 이 영화가 어쨌거나 실화를 재구성한 형태이니 만큼 오제도 검사 본인이 실제로 스파이 김소산에 대해 당시에 어떤 동정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던 면이 약간은 있어서 그것이 내비친 것이 지금 이 영화 줄거리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저런 소재에, 일단 유행하던 스파이물의 이런저런 이야기 거리를 최대한 "한국판"으로 갖다 붙인다는 발상이 있었던 만큼,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줄거리만은 꽤나 멀쩡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깊은 밤, 고관대작들이 놀아나는 퇴폐적인 술자리가 있는데 거기에 가장 인기 높은 미녀 주인공 김소산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펼쳐지는 줄거리를 끝까지 따라가 보자면 이렇습니다.


(신문 게제 포스터)

김소산은 우연히 정체불명의 고독한 사나이가 돈을 물쓰듯 하는 것을 알고 친해지는데, 이 정체불명 사나이는 충식이라는 사람이고, 주인공은 충식에게 점점 끌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체불명의 일당들에게 충식과 김소산은 납치당하는데, 이들은 지하 공산당 조직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충식은 지하 공산당 조직의 중요 인물이었는데, 어찌저찌해서 갈등이 생겼고 그래서 열받아서 공산당 활동 자금을 횡령해서 에라 될대로 되라 하고 펑펑 쓰면서 막나가는 삶을 살며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산당 조직 간부들에게 걸린 것입니다.

지하 공산당 조직들은 충식을 고문해서 없애버리려고 하지만, 충식을 사랑하는 김소산은 자신은 고관대작들과 친하므로 스파이가 되어 정보를 넘겨 줄테니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김소산은 본격적인 스파이 활동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충식이 정말로 김소산과 사랑의 도피를 하려다가 이렇게 일이 꼬인 것인지, 애초에 계획적으로 충식이 김소산을 스파이로 끌어들인 것인지는 편집이 망가져있어서 잘 알아 볼 수 없이 모호해 보입니다. 대충 보면 정말로 사랑의 도피를 하려다가 실패해서 스파이가 되었다는 느낌이 좀 더 강합니다. 그렇지만, 원래 그 반대로 영화를 찍었다가 나중에 그렇게 제작진이 생각을 바꿔서 일부러 편집을 망가 뜨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충식이라는 사람이 정확히 당시의 누구를 표현한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실제 사건에서 이름은 충식이 아니거나, 아예 가상의 인물을 하나 만들어서 이야기로 꾸며 넣은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조선노동당 비밀본부에 붙잡힌 충식과 충식을 살려달라는 김소산)

이리하여 김소산은 스파이 활동을 시작하고, 몇 가지 재미난 장면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서 특별수사본부에서 술꾼으로 가장시켜 보낸 수사관이 김소산 집에 갔을 때, 김소산과 수사관이 서로서로 상대방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 짐짓 서로 모르는 척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기생인척",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술꾼인척" 하면서 농담 같이 속이는 말들을 엎치락 뒤치락 늘어 놓는 장면이라든가, 고관대작으로부터 정보를 빼낸 김소산이 그 정보를 몰래 전해주는 수법이란 것이 김소산의 주특기인 플라멩코 춤을 추면서 구둣발로 바닥을 두들기는 춤 스텝을 신호로 하여 모스 부호처럼 사용해서, 지하에서 마룻바닥 울리는 소시를 듣고 있던 공산당 대원들에게 전해 준다는 것 같은 부분이 기억 납니다.

하지만 정말로 재미난 영화가 되는 데는 실패였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대충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정도로 간신히 알게만 해 줄뿐으로, 연기, 장면 구성, 촬영, 편집이 모두 상당히 누추합니다.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지켜 본다든가, 감탄하며 구경하기에는 많이 모자랍니다.

이후 영화는 중반부로 들어 서고, 오제도 검사와 특별수사본부 수사관은 김소산을 붙잡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김소산을 붙잡아 수사하는 부분에서는 느와르 영화들을 따라 합니다. 압도적인 미모로 주변을 장악하는 한 명의 악녀 주인공이 있고, 여러 수사관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둘러 싸고 있지만, 싱글싱글 수사관들을 비웃는 듯한 악녀를 당해낼 수 없는 감정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비웃음을 얼굴에 띄우는 김소산 역할의 윤정희 모습은 본격적인 느와르 영화 모양으로 나왔던 "장군의 수염" 시절을 연상케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역시 뭔가 정말로 앞뒤 사연과 연결되는 극적인 장면이 된다거나 정말로 멋진 화면을 보여주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냥 "한국판으로 느와르 영화도 따라한다"는 정도 였습니다. 오제도 검사는 김소산은 털끝도 건드리지 않고, 그저 유리 뒤편에서 지켜 보면서, 김소산이 지칠 때까지 아무것도 안시키기고 그냥 가만히 두기만 하기, 등등의 수법으로 김소산이 공산당 조직에 대해서 실토하게 하려하지만, 김소산은 아무것도 털어 놓지 않습니다.

이후에, 충식이 김소산을 배신하고 죽이려고 하는 이야기, 죽이려고 하지만 양심의 가책으로 죽이지 못하는 이야기, 등등도 나오고 김소산이 털어 놓는 이야기에 단서를 얻어 특별수사본부 일행이 공산당 비밀 기지를 습격하는 이야기, 공산당 비밀 기지의 사람들이 그냥 텅빈 창고인 척 위장하고 속여 넘기려는 이야기 등등이 나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독한 "해외특파원"에서 참조한 기색이 역력한 활극 장면도 있습니다. 이야기 중간에 특별수사본부에 역습을 하기 위해 오제도에게 사진사인척 하고 다가다거 사진찍는 척 하면서 카메라에 장치된 독침 쓰는 장치로 암살하는 내용이 나오는 데, 사건 소재나 소품, 화면 구성이 "해외특파원"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한편으로, 취조를 받다가 풀려난 김소산이 재수 없는 일 당했으니까 굿을 해야 한다면서 후배 기생들에게 춤추고 노래를 부르게 시키고 지켜보면서 술취해서 웃는 대목도 있씁니다. 김소산은 후배 기생들에게 먼저 옷 벗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겠다고 하면서 해괴한 짓을 하다가 또 허무한 지 울기도 하는 등, 점차 인간이 세상에 회의를 느끼고 망가져 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기술도 부족하고, 당시 심의기준도 있었던 관계로 이런 퇴폐상도 시각적으로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김소산이 저런 짓도 했구나"하는 사실만 겨우 전해주는 정도 입니다.

이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인민군 점령지가 되면서 김소산과 충식은 이제 내세상이다 하면서 완장차고 다니면서 설치는 장면이 잠깐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인민군 군복을 입고 있는 위엄있는 김소산의 모습과 그 동안 한 맺힌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처치하는 장면 등등이 잠깐 나옵니다. 그러다가 서울이 다시 국군 손에 들어 오면서 김소산은 도망 다니면서 숨어 사는 처지가 되고, 금은보화를 옛날에 알고 지내던 후배 기생에게 주고 몰래 남의 집에 얹혀 삽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다가 아예 김소산이 옛날에 나가서 일하던 요릿집에 "특별수사본부"를 차린 오제도 검사 일행의 추적에 김소산이 걸려서 붙잡힙니다.

그리하여, 수감 되었다가 한때 서울 시내 온갖 유명인사들이며 갑부들이 따라다니던 김소산이지만, 막판에 찾아 오는 사람이라고는 자기를 붙잡은 오제도 검사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마침내 오제도가 사주는 국수를 한 그릇 먹고 짧게 신세한탄을 하고 좀 길게 흐느낀 뒤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이 영화는 김소산이 마지막으로 형을 집행할 때 눈을 가리지 말아 달라는 말을 읊는 등, 끝까지 마타하리 이야기와 비슷하게 갑니다.

중간중간에 보면, 김소산이 아직 꿈 많은 시절일 때 김소산이 사랑했던 충식이 사준 다이아몬드 반지가 중요한 물건으로 계속 화면에 잡힌다든가 - 김소산이 망해서 한국전쟁 중에 숨어서 다닐 때 그 반지를 주고 자신을 숨겨달라고 합니다 - 김소산이 담배 피우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로 성격을 드러내는 장면을 꾸미고, 거만하게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는 느와르 영화의 악녀 장면에서부터, 즐길 것이라고는 짧은 담배맛 밖에 없어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우는 망해서 붙잡혔을 때의 모습 등등으로 활용하는 등등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 거리는 확실히 많이 끌어온 편이고 앞뒤로 잘 모아서 나름대로 밑천이 꽤 두둑한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담배)

그렇습니다만, 아쉽게도 그걸 보여 주는 방식은 아주 최소한만 겨우 버텨내는 형국 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재미있는 영화로 풀어내고, 빨려드는 영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사실을 알려 주고, 그런 소재가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 정도에만 성공하고 있습니다. 옷차림이나 소품, 세트가 중요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그냥 대충 적당한 70년대 실내 세트에서 되는 대로 때웠고, 기술이 필요한 플라멩고 장면이라든지, 아슬아슬한 연출이 필요한 대목 등등은 정확하게 안 보여주고 감추고 넘어 가는 식으로 피해 버렸습니다. 재미 없는 화면 구성이 많고, 편집한 모양도 부실해서 인상적인 이야기와 심심한 사연간에 비중 조절이 전혀 안되어 있다는 점도 아주 헐렁헐렁해 보이는 점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흥미진진한 스파이 영화가 아니라, 그저 그런 시절을 보여 주는 TV다큐멘터리의 재연 부분이나, 경찰청 사람들이나 사건25시 등의 다른 목적이 있는 TV물에서 잠깐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 정도로만 보일 뿐입니다. 배경 음악 역시 그저 그렇게 모아온 19세기 가곡풍의 간촐한 곡조가 별로 안어울리게 느릿느릿 나올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 자체가 반공 홍보라는 목적을 뚜렷하게 갖고 있고, 내용도 정말로 옛날 실제로 있었다는 일을 극화했다는 태도를 취한 만큼, 애초에 별로 극적인 연출이 강할 필요가 없는 영화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로 여러 다른 영화, 다른 스파이 이야기에서 잘 쓰이던 재료를 끌어 오고, 이 정도로 괜찮아 보이는 대립 구도를 만들어서 매력적인 배우를 주인공으로 해서 일대기로 꾸미려고 한 영화라니, 더 갈 길이 있는 데 다 못가고 멈춘 듯하게 보입니다. 혹은 반대로 보면, "놀라운 TV 서프라이즈"는 커녕, "그것이 알고 싶다"나 "추적 60분"도 없었던 시절, 당시 한국 영화판은 이 정도 재연하는 정도의 영상만 꾸며도 꽤 그럴듯한 즐길 거리가 된다고 봤던 시절 아니었겠는가 싶습니다.


그 밖에...

공산당 졸개 중 한명으로 70년대 영화에서 작은 악역으로 무수히 많이 출연했던 박동룡 http://gerecter.egloos.com/3825648 이 나옵니다.

별들의 고향으로 유명한 안인숙이 윤정희를 나중에 숨겨 주는 후배로 나옵니다. 황해는 오제도의 가장 유능한 부하 수사관으로 나옵니다.

김소산이 일 나가는 요릿집은 유명한 "국일관"이었습니다. 지금은 과거의 무수한 사연에 비하면 약간은 볼품없는 빌딩이 되어 있는 그 "국일관" 맞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여러번 "국일관" 실제 명칭으로 언급 됩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쓰이고 있는 상업적인 상호 중에는 가장 오래된 상호라는 설이 있습니다.

신문기사 등에 실린 내용을 참조해 보면, 단순 선악구도로 그려내기 보다는 재미난 극적 효과를 위해서 김소산을 사랑 밖에 몰라서 비극적인 스파이전에 빠진 인물로 끌고 가본 것이라는 제작진의 방향이 짐작되는 내용들이 좀 있었습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하여 잠정 영화활동 은퇴를 하는 윤정희가 출연한 거의 마지막 영화입니다. 그러나 시일이 흐른 후에 윤정희는 계속해서 활동을 했고, 최근에 "시"에서도 역할을 한 것은 주목할만해 보입니다.

특별수사본부 영화판 시리즈가 여러편 나온 뒤에 오제도 검사는 국회의원이 되기도 합니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에서 오제도 검사 역할을 맡은 최무룡 역시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별수사본부 영화판 시리즈의 첫번째 영화라고 볼 수 있지 싶습니다. 이 영화가 상당히 성공하면서, 속편격인 다른 일화, 다른 사건을 다룬 특별수사본부 영화판 시리즈가 계속해서 나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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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진성당거사 2012/05/06 00:46 # 답글

    이 영화를 말만 들었지 실제로는 보질 못해서 영화가 어떨까 하는 궁금함이 있었는데, 글 잘 읽었습니다. 오제도의 행적이 그렇게 미화되었다니 참 재밌습니다. 당대에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었을 터이니, 이런 미화된 초상이 당시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궁금해지네요. 사실 이런 부류는 영화보다도 오히려 TV 시리즈로 돌렸으면 더 잘 나가지 않았을까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라디오 연속극의 각색이었던 것이니 TV 보급도 안 되어있던 당시 상황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각색이었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런데 국일관 관련해서 쓰신 부분은 조금 궁금하군요. 그 옛날 종로에 있던 요릿집들 가운데 유일하게 상호와 경영 주체를 유지한채 아직껏 살아남아 있는 것이 국일관이긴 합니다만, "한국에서 쓰이고 있는 가장 오래된 상호"라는 건 약간 이해가 가지 않네요. 제가 알기로 상호 가운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활명수' 였던 걸로 압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오제도의 이력에 대한 글 가운데, 그 옛날에 지금은 이글루스에서 블로그 접으신 분이 썼던 글이 제일 재밌었는데, 그 글 읽으면서 왜인지는 몰라도 이 영화도 같이 보고 싶다는 뜬금없는 생각도 했었지요.
  • 게렉터 2012/05/06 10:20 #

    제품 상표 말고 영업하는 영업장 상호로 국일관이 제일 오래된 거라는 신문 기사에 나오는 것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국일관 역사라는 게 정확한 기록이 없고 그저 구한말부터 영업했다는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다는 정도라서 제대로된 자료수준은 아닙니다.
  • 오공훈 2012/05/06 02:55 # 삭제 답글

    오제도 검사와 간첩 김소산 사이의 이야기는 1981년 KBS에서 방영된 반공드라마 <표적>에서도 꽤 로맨틱한 분위기로 묘사됐지요..
    상당히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납니다.
  • 게렉터 2012/05/06 10:22 #

    느와르 영화 관습이 있어서인지 미녀 범죄자와 추적하는 탐정 이야기는 곧잘 그렇게 흐르는 것이 클리셰라면 클리셰라는 생각도 듭니다.
  • rumic71 2012/05/07 15:46 # 답글

    공산당의 자금을 유용했다거나, 연인을 위해 스파이가 된다거나 하는 요소는 원작판 카지노 로얄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 게렉터 2012/05/14 06:15 #

    이 영화가 스파이물의 전형을 이리저리 많이 따온 면이 있었습니다.
  • Nine One 2012/05/08 08:22 # 답글

    아마 지금 방영했다면 저 흡연씬은 당장 잘렸겠군요. 저런게 수사물의 묘미일텐데 말입니다.
  • 게렉터 2012/05/14 06:16 #

    어떻게 케이블TV등에서는 그대로 나오기는 할 겁니다.
  • 2012/05/08 13: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5/08 13:1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12/05/14 06:16 #

    귀한 자료 소개 감사합니다. 즐겁게 요즘 보고 있습니다.
  • 2012/05/08 15:0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12/05/14 06:17 #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덧글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종종 들러 주셔서 좋은 말씀 해 주시기를 앞으로도 기다리겠습니다.
  • wgundam 2012/05/08 17:22 # 답글

    이 영화에서는 공산당의 흉악함이 별로 심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은데, 이것은 그러한 묘사가 극중에서 별로 필요하지 않아서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영화 제작자가 실제로 공산당은 별로 흉악한 자들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라고 보십니까?

    저는 극중에 별로 필요없어서 흉악함을 묘사하지 않았다고 보는 입장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게렉터 2012/05/14 06:18 #

    본문에도 썼다 시피 저역시 이 영화의 경우에는 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치즈 2012/05/09 11:14 # 삭제 답글

    스틸컷으로 보는 담배피우는 모습이 굉장히 귀엽네요. 영화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 게렉터 2012/05/14 06:18 #

    윤정희의 미모가 꽃피던 시절이니 좋게 보일만하다고 생각 합니다. 이 영화보다 조금 먼저 나온 "장군의 수염"이 더 멋진 모습은 많다고 생각 합니다.
  • 2012/05/10 14:4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12/05/14 06:19 #

    여기에 대해서도 곧이어 글 한둘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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