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눈 (High Noon, 1952) 영화

1952년작 "하이눈"은 지금에 와서는 대표적인 서부 영화이자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름난 옛 명작으로 칭송 받는 영화 입니다. 이 영화에서 용감한 보안관을 연기한 개리 쿠퍼의 모습은 서부 영화 속 용감한 보안관 모습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고, 이 영화에서 무법지역 서부에 어울리지 않는 젊고 착한 숙녀를 연기한 그레이스 켈리 역시 수없이 회자된 모범이지 싶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이 영화는 대작과는 거리가 멀고 2시간이 조금 못되는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을, 그것도 그리 복잡할 것도 없는 단순한 일을 다루는 어찌보면 소박한 영화라는 점도 계속 이야기 거리가 된 영화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리 쿠퍼와 그레이스 켈리)

이 영화는 보안관과 무법자 악당들이 싸우는 가장 전형적인 구도를 배경에 깔고 있고, 총싸움은 기본적으로 그것 딱 한 판만 하는 영화 입니다. 특별히 꼬인 사연도 없고 딱히 재치있는 머리 싸움도 없이, 내용도 그냥 그대로 입니다. 보안관은 정의의 사나이이고, 무법자들은 마을을 위기에 몰아 넣는 비열한 악당들입니다. 이 영화가 무대로 하고 있는 마을도 그저 술집 하나, 보안관 사무실 하나, 판사 한 명, 황야에 펼쳐진 작은 기차 정류장 하나가 있는 서부 영화에 흔히 나오는 그 마을 그대로 입니다. 이야기 내용도 무슨 주인공의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모험을 다루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날 정오에 벌어지는 한판의 총싸움과 그 싸움이 벌어질 때까지 주인공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준비하는 이야기 그게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가 다루는 시간이 실시간인 듯 하다는 점도 자주 이야기 되는 편 아니었나 생각 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 상영시간이 1시간 반 정도인데, 이 영화가 다루는 사건들도 한 시간 반 정도 동안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싸움이 벌어지는 12시를 앞에 두고, 그 한 시간 반 전에 영화가 시작 됩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싸움이 벌어지기 까지 얼마나 시간이 남았나 시계를 보여 주는 장면이 가끔 나오는데, 이 시간이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과 거의 같이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이러한 점을 "24" 같은 이야기처럼 적극적으로 이 영화의 특징으로 활용한 편은 아닙니다.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본다면 그냥 실시간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눈에 뜨이지 않는 영화로 보일 정도 입니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그런 형식의 특이함을 눈에 뜨이게 재미거리로 내세우지 않는다고 해도, 그래도 여전히 이 영화에 장점을 더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정해 두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긴장감이 살아난다는 재미가 더해지는 데다가, 목숨을 건 결투를 눈앞에 두고, 그 큰 사건을 마주한 사람이 온갖 상념에 빠지고 별별 생각을 다하는 그 심정을 충실히 드러내는 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조한 시간, 큰 일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시간은 길게 느껴지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이 영화에서는 삶과 죽음이 걸린 결투를 앞두고 주인공의 모습을 영화 전체, 영화 내내 보여 주면서 그 긴 시간, 긴 고민을 잘 드러냅니다.


(그레이스 켈리)

이 영화의 진짜 재미거리는 주인공과 악당이 정형화된 서부 영화 구도이고, 벌어지는 사건도 서부 영화에서 흔히 벌어지는 보통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준비하는 시간 동안 마을 사람들, 마을 이곳저곳의 면면을 꽤 그럴싸하게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을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주인공의 복잡한 심경이 변해 가는 모습과, 그 속에서도 명예, 용감함, 정말로 옳은 일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 주면서 심금을 울리는 맛이 있다는 점입니다.

동화 속 인물과 같이 주인공, 악당, 여자 주인공이 위치를 잡고 출발했지만, 마을 여기 저기의 다양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다양한 성격을 보여 줍니다. 그저 악당인 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천사 같은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비겁한 사람이나 열등감이 있는 사람, 한 때는 뛰어났지만 지금은 실의에 빠진 사람, 의욕은 있지만 재주가 없는 사람, 쓸데 없는 얼치기 공명심에 빠진 사람, 등등 여러 사람들이 등장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모습과 감정에는 사실적인 보통 사람의 모습이 듬뿍 느껴지는 맛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서부극이 과거를 무대로 해서 전설적인 인물과 사건을 다루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이 있는 현대적이고 현장감 있는 느낌을 살릴 수 있다는 오묘한 맛을 더욱 잘 살린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런 영화 속의 "입체적인 묘사" 중의 백미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돌아온 악당과 보안관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입니다. 그저 의리 있는 의견과 사악한 의견이 충돌을 빚는 것이 아니라, 공허한 헛소리를 하는 사람, 말만 앞서는 사람, 야비하게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 가지각색의 의견이 펼쳐집니다. 이 장면은 동시에, 악당이 나타나고, 정의의 보안관이 맞서 싸운다는 아주 간단한 사건을 두고, 거기에 조금씩 들어간 세부 사항들에 의해서 이 사건을 어떤 식으로 조망할 수 있는지, 어떤 관점을 갖고 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 대처하는 방법을 세워야 하는 지 다양한 의견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기본 구도가 단순하고, 그 단순한 이야기를 두고 2시간 동안 온갖 고민을 하는 내용을 보여 주는 만큼, 이 간단한 사건도 현실적으로 얼마나 고민거리가 많은 지 영화 장면으로 풀어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영화가 절정 장면에 이르면, 드디어 한때 여러 사람이 많았던 거리가 싸움이 날 걸 모두들 알기 때문에 적막해 집니다. 정오의 햇살이 흙먼지 날리는 길가에 내려 쪼입니다. 그 아무 소리 없는 광경은 나른하고 지루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주인공과 악당이 목숨을 걸고 총격전을 벌이는 무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리 없이 햇살만 환하고 즐겁게 내려 쪼이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 무심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죽음을 걱정하는 주인공의 심정은 더욱 부각되어 보이는 느낌이 됩니다. 많은 서부 영화에서 바람 부는 황야에서 마주한 두 사람이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흔히 나오는 것입니다만, 이 영화에서 이 한 낮의 태양아래 적막한 공기에서 결투를 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명장면이라고 생각 합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이 홀로 남겨진 쓸쓸한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자기 앞에 닥친 악당과 결투하는 일을 앞두고, 겁도 나고 이게 다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사람들이나 운명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어서 뚜벅뚜벅 걸어 나선다는 겁니다. 정오, 12시에 벌어지는 사건을 앞두고 벌어지는 사연을 다루면서 계속해서 진행해 온 영화이고, 그 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의 모습과 성격을 보여준 영화였기에, 이 절정 장면에서 혼자 거리로 나서는 주인공을 보여주며 잠깐 분위기를 잡는 이 모습은 확실히 감흥이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 합니다. 다른 배우들도 대부분 훌륭히 제 역을 하고 있지만, 주인공 개리 쿠퍼의 모습은 단연 눈에 뜨입니다. 중심은 건장한 체격에 적당히 늙수레하고 찌푸린 표정 잘 짓는 서부 영화 주인공의 폼잡기로 용광로처럼 불타오르고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 때우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에 고민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어쩔수 없는 사람의 다양한 감정도 무척 와닿게 잘 잡아내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 모습은 한 배우가 연기해 내면서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

정형화된 서부극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했습니다만, 의외로 당시 시대상을 비판적으로 잡아내는 장면들도 눈에 뜨이는 영화 입니다. 멕시코인에 대한 관점도 상당히 진지하면서 선명하게 보이고, 남북전쟁 직후의 혼란기가 흔히 서부 영화의 배경이 되는데, 이 영화 역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무법자들이 많고 직접 총으로 다스리는 서부 지역에 대해, 도시 중심으로 현대적인 사법 제도와 법 집행을 하는 것으로 북부는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발단이 "우리 마을의 날강도를 잡아서 북부로 보냈더니, 거기서 교수형 받아야 할 악당이 감형되어 종신형이 되더니 몇 년 지나는 사이에 정치인들이 선심쓰고 헛짓하는 사이에 그냥 휙 사면되어 풀려 나 버렸다"는 것으로 언급되는데다가, 이야기 중간에는 북부의 부유한 기업/정부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땅값 집값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잠깐 나옵니다.

이런 내용들은 우선은 당시 시대를 비추기도 합니다만, 한 편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영화의 제작진이 사회 문제에 대한 현대 미국의 관점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면도 있다는 기분도 듭니다. 거대 산업, 정부 주도의 행정, 전향적인 발전, 인도주의나 법적인 체계에 대한 존중, 개인적인 명예, 의리, 선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 등등의 여러 가지 정치적인 대립이 일어날만한 항목을 짚어 가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멋 중에 하나는, 이런 것을 한 편으로 뭉뚱그려서 어느 한 쪽을 지지하고 "좋은 사상"으로 계몽하려고 단순하게 밀고 나가기 보다는 복합적인 대립과 다양하게 섞인 문제들을 담아 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은 영화 이야기에도 어울려서, 사실감을 높이는 데도 그럴싸하게 먹히고 있었고, 고민하는 주인공을 보여 주면서 정말 "고민스럽다"는 느낌을 살리는 데도 효과가 좋았다고 느꼈습니다.


(정오의 태양 아래)

맑고 맑은 서부의 태양 아래, 악당이 나타나 주인공을 죽이려고 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반. 악당이 타고 있는 기차는 정확히 정오에 도착합니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드디어 영화가 결말로 치달을 때 기차가 도착하면서 기적 소리를 요란하게 울립니다. 이 커다란 기적소리는 요란하게 외치는 함성 같기도 하고 무서운 괴물이 쳐들어 오는 울음 소리 같기도 합니다. 이 소리가 울려펴지면 그동안 쌓여 왔던 긴장이 드디어 총격전 장면으로 터져 나오면서, 어떻게 싸우고 누가 죽는 지 드디어 결판이 나는 것입니다. 영화 시작 장면에 잠깐 나오는 주제곡 가사로 기본 줄거리가 다 요약되는 짧은 이야기라서 너무 작은 이야기라면 작은 이야기다 싶지만, 그런만큼 시간을 정해 놓고 계속 고민을 거듭해 가는 가운데, 그 마을, 그 사람들이 정말로 거기 있다는 생생함이 더 감정을 살려내는 영화입니다.


그 밖에...

흑백영화입니다만, 나중에 색깔을 인위적으로 입힌 컬러판도 나와 있습니다. 운치를 즐기려면 흑백영화가 낫습니다만, 이 영화는 나중에 억지로 색깔을 입힌 흑백영화치고는 색깔 입힌 판도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습니다. 감독은 끝까지 컬러판을 만드는 데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IMDB Trivia에 실려 있습니다.

IMDB Trivia에 따르면 28일만에 촬영한 영화라고 합니다.

덧글

  • 팬텀 2015/07/22 21:35 # 삭제 답글

    어렸을 적 이 영화를 분명히 컬러로 본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흑백영화여서 어리둥절했었습니다. 덕분에 이제야 의문이 풀렸네요.
  • 게렉터 2015/08/13 20:34 #

    흑백판을 보는 것이 더 운치가 사는 영화라고 생각 합니다. 이야기가 담백한 편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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