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 제왕의 첩 (2012) 영화

조여정을 앞세우고 있는 궁중사극 영화 "후궁"은 어찌저찌하다가 선대 임금이었던 배다른 형님의 후궁인 조여정과 지금 임금, 그리고 임금의 어머니가 대립하고 여기에 조여정의 과거 애인이었던 내시 등등까지 모여서 삼각관계, 사각관계로 암투를 벌이며 모의 하고, 누명 씌우고, 바람 피우고, 밤에 잠자리에 찾아 가고, 죽이니 살리니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매우 많은 부분에서 60년대 한국영화인 "내시" http://gerecter.egloos.com/2154879 의 영향이 역력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조여정)

(1968년작 "내시"의 여자주인공과 임금)

일단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서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은 이 영화에서 재밌게 보여 주겠다는 소재와 소재들을 이어나가는 줄거리가 갈리는 부분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일단 이 영화에서는 궁중에서 암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부의 높은 사람들이 서로 암투를 벌이면 참 미친 것 같은 짓을 잘도 하는구나, 하는 점을 보여 준다는 목표에 방향을 맞춰서 소재를 끌어 모아 놓기는 했다는 생각은 듭니다.

이렇게 목적을 정해 놓고 모아 놓은 것은 평범하기는 해도 대체로 얼개는 맞는 느낌이기는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극히 예의범절을 중시해야 할 듯한 궁중 사람들의 나이트 라이프(...)를 위선적이거나 광적이라는 느낌으로 보여 주고, 마지막에 넋나간 듯한 표정의 배우를 중앙에 둔 채 이게 다 무슨 미친짓이냐는 듯이 점차 멀어져 가는 화면은 정말로 제대로 미친 임금님을 다룬 옛 영화 "칼리귤라"의 장면들을 연상케 하는 맛도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물론 "칼리귤라"처럼 정말 막나가는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침실 창살문에 비치는 사람들의 둘러싼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 비슷하게 정신 나간 세상이라는 감흥은 자아내기는 하되, 정갈하고 깔끔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부드럽게 장면을 꾸려 놓아서,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얽혀 들고 인물들의 감정도 좀 더 친숙하고 인간적으로 잘 전해지게 되어 있어서 전체 영화가 더 잘 조율되어 흘러간다고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긴장감을 자아내는 참신한 이야기라거나, 인물들의 특징이 잘 살아나는 볼거리가 된다고 하기에는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일단 이 영화는, 임금-내시-후궁이 삼각 관계를 벌이는 이야기가 한 축으로 있고, 시어머니인 임금 어머니와 며느리뻘 되는 선대 임금의 후궁이 시어머니-며느리 다툼을 하는 이야기가 또 한 축으로 있어 보였습니다. 이 두 길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이리저리 섞여서 나오는 형국인 것입니다.

중반부까지는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후반부에는 무슨 이야기로 넘어 간다는 식으로, 뚝잘려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생각 합니다. 나름대로 이야기 거리들이 교대로 잘 섞여 있어서 언뜻 보면 입체적이고 복잡한 갈등 상황을 만들 수도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에 물려 있는 사람들이 눈물 흘리고 성질 내면서 감정 폭발 시키는 장면들이 많으니, 이런 이야기들 사이에 소리지르고 놀라서 날뛰는 사이에 얼렁뚱땅 대강대강 내용을 연결시켜내서 심하게 어색한 부분도 적당히 숨긴 편이기는 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렇게 어느 정도 가려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며느리 싸움과 삼각관계 이야기가 이상하게 잘 묶인다는 점만은 어쩔 수 없었다고 느꼈습니다. 별 뾰족한 묘수를 못 생각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엮다 보니, 이상하게 꼬인 속임수, 그냥 쉽게 처리하면 되는 데 빙빙 돌려 처리하려는 꾀 등등이 억지로 억지로 달라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다보니, "그냥 저기서 쟤를 죽이면 될텐데 왜 저럴까" "쟤랑 쟤는 지금 서로 친하게 지낼 이유가 없는데 왜 저럴까?" "저게 무슨 좋은 수법이라고 오히려 자멸할 가능성이 극히 높아 보이는 복잡한 꾀를 살아날 수법이랍시고 밀고 나갈까?" 이런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사람이 너무 감정이 폭발하다보면 엇나가는 마음에 저럴 수도 있다"고 억지처럼 이해해야 할 때가 여러 번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점들은 좀 깎아 보자면, 연속극으로 만들던 흘러간 옛날 모험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살아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악당이 주인공을 바로 죽이지 않고 괜히 시간을 끌면서 길게 자신의 음모를 설명해 주는 연설을 한다거나, 그냥 총으로 쏴서 바로 처리하면 될텐데 꼭 무슨 1시간 동안 서서히 공포를 느끼며 죽는 복잡한 기계 속에 집어 넣고 기다린다거나 하는 억지 술수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인상적인 화면이나 감정 표출 장면을 자주 넣어서 장난 같아 보이지는 않을 정도로 피해 가기는 합니다. 하지만, 실감 나지 않을 정도로 과하게 음모가 복잡하고, 사연이 쓸데 없이 꼬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 영화는 격정에 휩싸인 궁중 사람들이 궁전 안에서 칼든 사람들과 많은 신하들을 몰려 다니게 하면서 휘몰아치게 하는 이야기이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죽이니 살리니 하면서 무거운 일들을 계속 저지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라면 뚜렷하게 갈등이 정리되고, 행동의 동기와 결과에서 느낄 감정이 훨씬 더 명백하고 강하고 끈끈하게 보일 만큼 잘 정리된 이야기인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내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시가 되어서 뭘 목적으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권력"을 틀어 쥔 쪽이 어느 쪽이고 그게 어떻게 넘어 가게 되는 지, 엉성해 보였습니다. 이 영화는 무슨 통찰력 있는 대사라는 듯이 "권력이 있는 쪽에 붙는 것이 미천한 우리가 사는 길이다" 같은 말이 나오는 영화인데, 막상 그 "권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한쪽에 쏠릴 수 있고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별 고민 없이 대충 때우는 느낌이었고, 아마 그러다보니 꾸며내는 음모나 음모가 파국을 빚는 과정이 생기도 없고 뜬구름 잡는 듯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는 막판에 이르면, 그나마 설명을 하기 위해, 주요 등장인물들이 한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이상한 무대 쇼 같은 대화를 하는 장면도 튀어 나와 버립니다. 일견 추리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다 모아 놓고 "범인은 이중에 있다"고 탐정이 줄줄줄 길게 해설해 주는 장면 같기도 하고, 일견 웅변대회 같기도 했습니다. 그냥 봐도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대사로 등장인물들이 서로 소리를 지르는 연극 무대 같아 보이고, 보여주는 화면이나 등장하는 방식, 몸짓을 하고 꿇어 앉고 자빠지는 모양도 과장하여 극적으로 꾸민 몸부림을 보여 주는 것이 영 이상했습니다. 무서운 암투를 담아낸 실감나는 영화 장면 같지가 않고, 정말 실제로 일어날 법한 정치, 역사, 궁정의 현장 같지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어떻게든 결말로 뽑아내려고 다들 불러 모아다고 핑계, 해설 시간을 주는 구나 싶은 정도 였습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이 영화의 다른 장점도 꽤 손해를 본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영화는 묘하게 빛이 들어 오는 세트로 만든 궁중의 조명을 화면을 만드는 재료로 잘 살리는 영화였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니만큼, 이 영화에서 궁전 속의 숨겨진 무서운 장소인 지하 감옥은 굉장한 재미 거리가 될만한 공간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이야기들은 돌아 보면, 지하 감옥이 없어도 별 문제 없이 그냥 다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슷하게, 이 영화에는 수없이 많은 궁녀들이 빨랫감을 개는 장면이 한 번 나오는 데, 그야말로 옛 전제군주 시대의 왕궁을 상징할만한 풍경인데도 아무 영향도 상관도 없이 그냥 찍었으니 집어 넣었다는 식으로 대충 흘러 가고 말았습니다.


(세트 촬영)

대신에 남아 있는 장점들은 다른 면에서 영화를 살리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일단 이 영화는 언젠가부터 고질적인 사극 연출 방법이 된 대로, 등장인물들의 면상을 크게 화면에 잡는 부분들이 많은데, 이런 장면들이 그 효과가 괜찮았다고 생각 합니다. 아무래도 사극인 만큼, 배우 모습에 다소 서사시적으로 큰 연기가 많아서 그런 연기의 세세한 표정을 살리려는 면이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냥 TV극에서 화면 전환할 때 처럼 무작적 얼굴만 화면에 잡아 내는 것이 아니라, 복도를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 앉아 있다가 찾아 오는 사람을 보는 인물의 모습 등등에 자연스럽게 연결해서 이 얼굴 표정을 잡아 내고 있었습니다. 화면 이동이 힘을 얻고 별것 아닌 장면도 긴장감을 더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이런 점은, 이 영화의 좋은 장점이었던 세트 촬영의 인공 광선이 잘 살아 있는 특징적인 조명과 어울려서 한 장면 한 장면들을 더 보기 좋게 꾸며 주는 재주가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빛이 새어 드는 실내의 통로를 그늘을 만들며 움직이는 궁중 사람들의 모습은 2000년대 이후 장예모 감독작이나 그 비슷한 세트와 소품을 중시하는 중국 영화의 영향도 꽤 크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억지로 화려한 모양을 살리려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정갈한 색상과 매끈한 가구를 차분한 직선 구도로 보여 주는 것이 "스캔들" 같은 영화가 모범적으로 보여 줬던 바로크, 고전파스러운 귀족 분위기와 통하기도 하면서, 좀 더 죽음과 칼질이 가까이에 있는 과거의 이야기, 중세암흑시대 스러운 느낌도 감돌아 있어서 훌륭했다고 생각 합니다. 시어머니 쪽 머리모양은 우스꽝스러운 면도 있었고, 막판 무대쇼의 배경이 되는 옥좌 앞은 너무 허하니 값싸 보여서, 차라리 조선 시대 실제 고증을 좀 더 살리면 더 좋았겠다 싶을 때도 있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보기에 좋은 것들이 더 많았다고 생각 합니다.


(복도를 걸으며 말하는 사람들)

틈을 보이는 이야기 입니다만, 그래도 많은 소재들이 계속 돌아가면서 나오는 것을 계속해서 짚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고문 장면이 직접 나오는 것은 거의 없으면서도, 쉽게 사람을 죽이고, 고문을 잘 하는 옛 시대 다운 음습한 정취를 살린다는 점도 득이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배우들도 연기 하나하나에는 모자란 점이 있을 지라도 일단 겉보기 어울리는 모습은 다들 무척 잘 어울리는 배우들로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배우의 얼굴을 화면에 담는 장면이 많은 이야기에서 조여정의 아름다운 자태와 몸매로 화면을 꾸며낸 것도, 눈길을 사로 잡는 대목들이 있어서, 조명과 세트로 잘 치장한 화면과 어울리는 것도 꽤 좋았다고 생각 합니다. 이런 것들이 벌어지는 이야기의 틈도 어느 정도는 봉합하려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배경 음악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준비 되어 있고, 연주도 꽤 좋은 듯 해서 따로 떼서 들어 보면 들을 것들이 꽤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펼쳐 지는 이야기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요란하게 너무 화려한 음악이 쏟아지는 기색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 정도 수준에서, 재미난 부분은 재미나고, 인상적인 장면들은 남지만, 또 허술한 부분은 어쩔 수 없이 허술하하게 보이는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그 밖에...

영화 도중에 보면, 반란을 일으켰다는 죄를 이야기 하면서 "반정을 도모 했다"고 하는 데, 반정은 옛말이기는 하지만, 잘못된 것을 되돌려 바로 한다는 뜻이니 만큼 욕이 아니라 칭찬으로 쓰이는 데 더 어울리는 말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어서 박정희 장군이 일으킨 5.16을 누군가 막아냈는데 그 막아낸 사람이 비판 하면서, "장군은 나라를 바로 잡는 혁명을 일으키려한 죄를 지었다"고 하는 괴상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쉬운 말로 "난을 일으키려고 했다" "역적질을 하려고 했다" 정도면 무난했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1968년작으로 신상옥이 감독을 맡은 "내시"의 리메이크로 기획 되었다가 제작진행 중에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는 영화라고 합니다. "내시"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에, 어머니의 수렴청정, 내시와 여자 주인공이 만드는 삼각 관계, 궁녀들 간의 동성애스러운 묘사, 내시대장의 괴상하게 끈끈한 우정, 지하 감옥, 지하 감옥에 너무 오래 갇혀 있어서 정신 나간 노파, 지하감옥의 세트 모양, 여자 주인공의 야반 도주, 여자 주인공이 방바닥을 기어 가고 임금이 기어가면서 따라 붙는 장면, 여자 주인공이 상대를 찔러 죽이는 장면, 등등 굉장히 많은 소재들이 이 영화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 정도라면 원안대로 리메이크로 가는 것이 더 마땅했다고 생각 합니다.

"내시"에는 시대 배경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기로 정해져서 나옵니다. 이 영화는 알 수 없는 시대, 장소로 나옵니다. 문정왕후 하니까 드는 생각인데, 이 영화는 "내시" 이야기에서 소재를 살려서 영화를 만들되, 뭔가 조금 더 박진감 넘치게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여인천하"에 나온 궁중 여인들끼리 무섭게 다투는 이야기를 섞어 치려고 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내시"쪽 이야기하고 "여인천하"쪽 이야기가 잘 못 섞여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처럼 보인다는 짐작을 해 봅니다.


("내시"의 여자주인공)

("내시"의 내시 대장과 임금)

("내시"의 삼각관계 내시)

"내시"에는 내시 역할로 신성일(전직 국회의원 강신성일)이 나오고, 임금 역할로 남궁원(전직 국회의원 홍정욱 부친)이 나오고, 여자 주인공 역할은 윤정희("시" 주인공), 내시 친구와 친구 역할은 박노식(박준규 부친), 허장강(허준호 부친)이 맡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세계 최강 수준의 영화 관련 공공 서비스라 할만한 KMDB VOD 를 통해 인터넷에서 언제나 500원에 볼 수 있습니다.

덧글

  • Jaha 2012/06/14 12:32 # 답글

    내시라는 영화가 있었군요. 전 이상한 세트장 분위기 때문에 중국 사극의 짝퉁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같이 본 언니랑은 황후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했습니다. 뒤에서 보고 나서 욕을 퍼붓는 분도 계셨지만 그정도는 아니더라도 스토리나 레이아웃 모두 왠지 중국스러워 좀 불편하더군요. 지금 기억 남는 건 야한 영화란 느낌은 아니었지만 조여정 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인터뷰 기사에서 자주 보이는 조여정씨를 보면 측은한 생각마저 드네요. 이러면 안되는 건데.
  • 게렉터 2012/06/14 22:39 #

    중국영화 영향은 아쉽지만, 그래도 일전의 쌍화점 에 비하면 그래도 황후화나 야연, 연인 영향에서 훨씬 더 벗어나지 않았나 합니다. 스캔들 이나 궁녀 처럼 조선시대 고증으로 더 재미난 화면으로 가보는 시도는 부족했던 것 같아서 저역시 아쉽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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