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Melancholia, 2011) 영화

"멜랑콜리아"는 천천히 느릿느릿 진행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이게 다 왜 이렇게 돌아 가는 것인지 이해 될 듯 말 듯 하게 궁금하게 되어있어서, 어떻게 보면 별 일 아닌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점점 관심을 갖고 빠져들게 하는 맛이 일품인 영화입니다. 게다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가 극히 공상적인 이야기와 화면으로 단숨에 넘어 서며 이어지는 것이 뛰어난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도대체 이 영화가 뭐에 관한 어떤 영화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보는 것이 굉장한 재미가 되는 영화라고 생각 합니다. 그렇게 보고나면, 감성을 돋구는 음악과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배우들이 나오고, 조용하고 느린 영화지만 강한 슬픔, 절망감을 내뿜는 영화였습니다.


(결혼식의 신부와 아버지)

이 영화의 전체 구성과 내용을 어느 정도 밝혀 가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이 영화의 막강한 장점은 이 영화에서 "1부"로 묘사되어 있는 부분에서 이야기를 영화로 보여 주는 수법이 아주 뛰어났다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 영화는 일종의 "중간에서 막바로 시작하기(in medias les)" 수법 비스무레하게 출발하는 영화 입니다. 영문을 알 수 없게 갑자기 난데없이 결혼하는 남녀를 보여 주면서 시작합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남자는 누구이고, 여자는 어디이고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어떤 상황에서 저러고 있는 지 안 가르쳐 주고 대뜸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만큼, 이야기를 지켜 보면서, "저 사람은 저런 비밀을 숨기고 있구나" "저 사람은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저 사람은 왜 저러는 것일까" 이런 것을 계속 궁금해하고 관심갖게 하면서 이야기 속에 점차 조금씩 끌려들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게 절묘했던 점은, 이 영화가 느릿느릿 천천히 흘러가면서 처음에는 그냥 평범하고 단순한 결혼식 같았던 사건에 뭔가 사연이 있는 듯 하고, 뭔가 무슨 큰 일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점점 더 강해지게 살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니다. 이 영화는 사람들의 표정, 대사, 행동을 차근차근 샅샅히 보여 주고 있고, 그런 내용들을 천천히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영화 보는 사람이 상황을 관찰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느릿느릿 진행되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뭔가 이상해 보이는 점들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영화는 처음에는 그냥 평범하고 지루한 결혼식이었던 내용을 성격파탄자와 서로 감정싸움 하는 사람들이 가까스로 감정을 억느루며 버티고 있는 조마조마한 순간으로 조금씩조금씩 바꿔 갔습니다. 이렇게 되고 나면, 이제 정말 궁금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도대체 누가 성격이 제일 나쁜 녀석이고, 누가 이렇게까지 성격 이상한 놈처럼 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 녀석은 저 상황에서 왜 저렇게 계속 서글퍼하고 있는 것일까. 누가 갑자기 열받아서 판 다 뒤엎고 소리지르며 난리치는 놈이 나타나지 않을까. 음악도 없고, 진행 속도도 처지는 이야기였지만, 그래서 더 부드럽게 비밀과 궁금함이 계속 쌓인 상황으로 이야기가 은근슬쩍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불안하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카메라 화면이나, 갑자기 조끔씩 솟아 나오는 음악을 사용해서 분위기를 계속 돋구어 나가는 것도 훌륭했다고 생각 합니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영화 절반을 이렇게 천천히 그냥 결혼식을 보여 주면서 때웁니다. 결혼식에 참가한 사람들이 조금씩 이상한 구석이 있어 보이고, 그래서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굴러 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절반 부분은 보통 사람들이 보통 사람처럼 살면서 벌이는 일을 벌이는 것을 차분하고 조용히, 진짜 같고 일상 생활스럽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영화는 "2부"라는 자막을 보여 주고 다음으로 넘어 갑니다. 이제부터, 이 영화는 이야기 내용의 초점을 확 바꿔 나가기 시작 합니다.

분위기와 등장인물은 결혼식이 벌어지던 1부와 꼭 같습니다. 배경음악은 거의 없고, 사방이 조용하고, 이야기는 천천히 흘러가는 편입니다. 하지만 갈 수록 내용이 진행되는 속도는 빨라집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핵심 소재 하나가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 소재에 맞춰 가면서, 이제 이 영화는 무시무시한 공상적인 상황, 정통 SF물스러운 어마어마한 사건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다루는 이야기로 돌파해서 넘어 옵니다.

이 부분만을 놓고 보면, 이 영화의 특징은 SF물 다운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데, 그 사건을 사건과 맞서는 영웅들, 전사들, 학자들의 입장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과 멀리 떨어진 보통 사람들이 겪는 상황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우주선이 날아 다니며 대활약을 펼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지구에 살고 있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 별 역할 없는 시민들의 상황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은 관객에게 더 와닿는 생생한 실감을 전해 줄 수도 있고, SF물 다운 어마어마한 사건을 마주했을 때 보통 사람들이 겪을 수 밖에 없는 공포나 경악을 더 잘 전해 주는 맛도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특히, 긴박한 배경 음악에 맞춰서 정신 없이 불빛을 번쩍거리며 날아 다녀야 하는 영웅 중심의 SF물들과 달리, 이런 영화는 이런 대단한 사건의 변두리에 있는 보통 사람들이 TV화면을 보거나, 소문을 전해 듣는 등의 조용한 상황에서 구경하는 형식을 살리게 됩니다. 이런 느낌은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오히려 대조적으로 살릴 수도 있거니와, 그만큼 공상적인 소재가 화면에 드러날 때의 격정적인 감흥도 커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이러한 소재를 살리는 SF물은 생각해 본다면, 곁가지로 이렇게 대사건을 맞이한 일반인을 다룬 웰즈의 "우주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가 조용한 분위기로 적막감과 불안감을 더하고 있는 모습은 "싸인" 같은 영화나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이 세상의 마지막 밤"등의 소설과 아주 닮은 데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어느 시골의 조용한 저택에 살고 있는 한 단촐한 가족이 세상을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이 점차 가까워 오는 정경을 구경하고, 거기에 따라서 감정이 격변하는 것을 보여 주는 방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런 격정적인 감정 변화 조차도, 느리고 별로 대단한 사건 변화 없이 비교적 간단한 상황 변화 두어 가지로 내용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영화 전반부의 평범한 일상 생활을 느릿느릿하게 보여주는 분위기에서 쉽게 조화를 이루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 후반의 극적인 변화는 전반의 결혼식 이야기와 인과관계 상으로는 별 상관도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전반에 있었던 결혼식이 잘풀렸거나 못풀렸거나, 크게 사단이 났거나 부드럽게 끝났거나 어찌 되었던 간에 후반부 이야기는 그냥 이대로 일어 난다고 보여 줘도 상관이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멋있는 점은, 그렇게 영화를 배치해둔 것 때문에 후반부의 사소한 장면들, 작은 사건들이 굉장한 힘을 얻어 낸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전반부에서 그냥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들과 보통 사람들의 보통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는 후반부가 되면 절망적이고 극단적인 이 공상적인 상황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인지 아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효과가 생겼다고 생각 합니다. 그 보통, 평범한, 멀쩡한 사람들이 얼마나 절절하게 감정이 동요하는 지, 얼마나 강한 절망감과 두려움에 휩싸이는 지, 보통, 별것 아닌 일들이 벌어지던 영화 전반부와 또렷하게 대비효과가 일어나서, 그런 감정들이 더 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이 영화는 조용한 화면에, 간단한 사건들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다큐멘터리 촬영분인냥, 화면이 진짜 같아 보이고 생생하게 다가 온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생하고 진짜 같은 느낌을 그대로 살리고 계속 담고 나가면서도, 후반부의 감정은 격정적이고 격렬하게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이게 이렇게 되니까, 그 막막한 느낌을 더 깊게 진짜처럼 전달해 주는 맛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전반부에서 그렇게 차분하고, 현실적이고, 꿋꿋하고, 정리정돈을 잘하며 어떻게든 성실하게 상황을 다스려 보려고 노력하던 것으로 표현된 인물이, 후반부에 서서히 무너져 내려서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리는 감정 변화를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그 비교, 대조가 감정을 강하게 만드는 맛이 누구보다 강해졌다고 생각 합니다.


(또다른 주인공인 언니 클레어와 열 받으면 우주를 고문해서 문제를 해결할 듯한 예감도 은근히 생기게 하는 키퍼 서덜랜드)

이런 전체적인 틀 외에 세부적인 관점이 잘 먹힌 부분도 많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이 영화는 전반부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짜증, 화내는 모습, 답답함, 당황, 어색함, 피로감 등등의 부정적인 면모를 슬슬 드러내 나가는 이야기 였습니다. 후반부는 거대한 재난과 같은 사건을 두고 사람이 조금씩 망가져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부정적이고 추하고, 지저분한 분위기가 감돌기 쉬울 것 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등장인물 몇명을 백만장자로 만들고, 상당한 상류층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해 두었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한적한 아름다운 한 시골 저택으로 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정적인 인간성, 나쁜 감정이 계속 흘러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화면은 언제나 계속해서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옷,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여 주도록 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저마다 특징이 또렷하고 다들 표현이 훌륭한 배우들이 와르르 몰려 들어서 연기를 펼치니 구경하는 효과도 훌륭했다고 생각 합니다. 특히 이 영화 전반부가 표현하는 감정은 사실 한국 영화에서 한동안 유행했던대로 구석진 방에서 소주 마시다가 가끔 술취해서 욕하면서 헛소리 하는 인간들의 못난 모습을 조롱하듯이 보여 주는 몇몇 영화들과 별 다를 바가 없다고 해도 될법하다고 느꼈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근사하게 옷을 차려 입은 미남미녀 배우들이 멋진 대저택에서 아름다운 조명을 받으면서 펼치고 있으니 진부함은 덜어지고, 애절한 감상이 묘하게 깔리는 것이 더 눈길을 끌어 보였습니다.

그 외에 간단한 소품과 작은 몇몇 복선을 끼워 넣어서 이용하는 재주도 아주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 합니다. 이 영화가 일상적인 내용을 펼쳐내면서 워낙에 느긋하게 지나가고 있으니까, 조금 이상해서 조금 눈에 뜨일 만한 상황은 영화 볼 때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기에 좋았습니다. 이 영화는 이런 것들을 복선으로 살려서 그대로 짚어 나가면서 살려 써먹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야기 내용이 전혀 달라지는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서 이렇게 복선 몇 개를 눈에 뜨이게 써 먹어서 전체 이야기가 훨씬 더 탄탄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야기가 훨씬 더 극적으로 전환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데, 이것도 충격감, 놀라움을 살리기에 좋았다고 생각 합니다.

주인공 언니가 약병을 찾아 보고 순간 헛된 안심을 품다가 다시 그 소리를 들어 보고 경악하는 대목 같은 것은 한마디 대사도 없는 장면이지만 화면 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치솟는 감정을 뿜어내는 아주 잘꾸민 장면이었습니다. 비슷하게 사진을 남겨두고 갔다는 것을 보여줘서 주인공의 떠도는 마음을 나타내고 남겨진 사람의 박탈감을 보여주는 것도 말없이 눈으로 보여주면서 안타까움을 더 잘 살렸다고 생가합니다. 또 우주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사건을 다루는 데 나무 막대기에 철사 묶어 놓은 아무것도 아닌 어마어마하게 간단한 소도구를 등장시켜서 복잡한 아나운서의 뉴스해설이나 카운트다운 같은 것 없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풍경과 화면, 주인공들의 시선으로 우주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게 해준 것 역시 매우 뛰어난 각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점을 꼽아 본다면, 일단 1부에 해당하는 부분이 지나치게 느리고 긴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이 조금은 있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는 건가?" 하는 느낌을 서서히 살려내면서 평범한 일상 분위기를 내려면 천천히 진행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이 영화의 1부는 조금은 더 빠르게 갔어도 되지 않는가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인물들이 많기는 하지만, 몇몇 인물은 앞뒤를 생각해 보면 조금은 쓸데 없이 시간을 많이 잡아 먹었다 싶기도 했습니다. "이러다 어떻게 되려고 저러나"하는 궁금증을 주는 효과는 부족합이 없었습니다만, 좀 미쳐 돌아 가는 듯한 인물이 "미쳐 돌아 가는 듯 하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 많은 영화에서 자주 나와서 약간 지루해진 전형적인 "미친 짓"스럽게만 행동하는 점도 더 참신하게 해서 줄였으면 더 좋지 않았겠나 짐작해 봅니다.

그 외에 후반부 주인공의 모습이 갑자기 뭔가 멋있고 착한 것 처럼 나오는 것도 약간 어색해 보이긴 했습니다. 주인공은 언니에게 엄청나게 폐끼치고 살면서, 갖가지 속터지는 짓은 골라한 답답한 인생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주인공 언니가 안절부절하게 되자, 주인공은 마치 "나만 망했었는데 이제는 너도 망했네"라는 듯한 태도로 언니를 조롱하듯이 대합니다. 이 언니가 당황하고 절망한 것은 당연하고, 나름대로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용기를 내려고 노력하는 면이 있었는데, 이 주인공은 "정신 상태 망한 걸로 따지면 내가 더 선배니까"라는 듯이 뭔가 절망한 언니에게서 묘하게 우월감을 느끼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절망감에 워낙 깊이 빠져서 무기력과 슬픔에 나자빠져 있던 사람이 할만한 행동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최악의 상황을 내 그럴줄 알았다며 더 잘 감내하는 꼬인 상황이라고 볼수고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그런 식으로 주인공의 고갈된 심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주인공이 더 현명하고, 더 착하다는 식으로 묘사되는 모양이 좀 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혼자 어리광이란 어리광은 다 부리면서 얹혀 살고 있던 주인공이 영화 막판이 되면 그저 주인공이니까 영화 중심에 다시 서야 되기 때문에 그러는 지, 무슨 타이타닉호에서 "여자와 아이들 먼저" 외치던 사람 비슷하게 위로도 하고 꿋꿋하게 설치기도 하고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소리로 부질없이 멋있는 척 애앞에서 폼 잡을 정신이 있으면, 언니 살 때 집안 일이나 좀 덜 방해하지 그랬냐 하는 생각이 울컥하고 치밀 정도였습니다.

어느 정도는 이런 모습도 격렬하게 변해가는 상황을 보여 주기 위한 수법이겠습니다만, 조금은 더 납득할만한 인물로 앞뒤를 꾸밀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만만하고 성실한 부자였던 키퍼 서덜랜드는 주인공에 비해 앞뒤 행동은 더 강한 행동들이 많고 전환도 강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양반이 영화 끝무렵에 보여 주는 행동들은 주인공이 갑자기 착한 이모로 돌변하는 모양보다는 훨씬 더 극적이면서도 더 진짜 같았고, 그 감정과 상황도 더 생각하게 하는 점이 많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멜랑콜리아 포스터)

(John Everett Millais의 그림, 오필리아 - 너무나 슬픈 소식을 듣고 정신이 나가서 헤메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어 가고 있는 장면)

약간 더 좋게 꾸미고 싶은 부분을 캐내면 캐낼 수야 있겠지만, 이미 도전적이면서도 선명한 표현 수법으로 보건, 느리면서도 호기심은 유지하는 정교한 구조로 보건, 결과에 넘쳐 흐르는 풍성한 감성으로 보건 이야기하고 싶어 지는 대목, 보고 느낄 것이 많은 영화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우들도 등장하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되는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고, 특히 2부 후반으로 갈 수록 무너지는 감정을 연기하는 샬롯 갱스부르는, 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 따라 해 보고 싶을 만큼, 유연하게 감정이 변해 가면서 격해지는 모습이 뚜렷했다고 생각 합니다.

천천히 흘러가는 일상과 어림도 없는 수준의 환상적인 공상 사건을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면서 넉넉히 보여 주는, 풍경, 정물, 인물 장면들을 계속 아름다운 빛깔과 최고로 꾸민 조명 아래에서 나오는 영화였습니다. 이야기 복선 몇 가지가 묘하게 연결 되어 있고, 대사로 된 설명이 적어지게 조용히 진행되는 부분이 많아서, 관객이 자연히 되돌아 보면서 이야기를 계속 되새기고 누구나 자기도모르게 고민하도록 이끌어 내는 대목도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점이 이야기 속에 더 흠뻑 빠지고 감정들을 더 능동적으로 생각해 보게 하는 효과도 있지 싶고, 영화가 끝난 뒤에 한 번 더 돌아보면서 여운을 남기는 힘도 더 세어 졌지 않나 싶기도 했습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도 오케스트라 음악과 천천히 빛나는 우주 풍경이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이 영화의 음악은 그 이상인 듯 했습니다. 버나드 허먼의 옛 영화 음악을 연상시키는 감성으로 아주 진을 빼는 듯한 오케스트라 배경 음악이 이 음악 적고, 시끄러운 부분 적은 영화에 군데군데 작렬하면, 무슨 감정이든 감정이 치밀어 오르기 마련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생겨난 세상이 어떻게 지나가고 왜 있는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의문에서부터, 한 인생 살고 가는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하는 인생론을 생각하게 되기 쉬운 영화였습니다. 혹은 구체적인 사건을 떠나서, 이 영화가 그려내는 감정을 통해서 누군가 지금도 느끼고 있을 지 모를, 아무일도 할 수 없을 만한 무기력에 이어지는 큰 슬픔과 절망감을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효과에 초점을 둘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어느 쪽이던, 비명 소리 제대로 한 번 없고 피 나는 싸움 장면 한 번 없이 끝나기 직전까지 느리게 진행되던 영화가 격렬한 감상이 이렇게 잘 살기도 하는 구나 싶었습니다.


그 밖에...

2011년작 영화입니다만, 국내에서는 영화제에 몇 번 나온 후, 올해 상영되고 있는 영화입니다.

일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할 때, 낮은 천둥소리처럼 땅우리는 소리 같은 것이 계속 들리게 되는데, 좀 진부한 음향효과이기는 해도 녹음이 좋아서 그런지, 그동안 조용하던 영화라서 그런지 효과는 대단히 뛰어났다고 생각 합니다.

바그너 음악이 나오고, 영화 도입부가 서곡과 같은 상징적인 장면들이라서 이 영화 음악을 유도 동기 수법으로 보기도 쉬울겁니다. 바그너 음악만 나오면 유도 동기 이야기를 항상 하기 마련이니 그런 듯한데, 제가 보기에는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영화의 주제 음악 수법자체가 유도 동기 수법과 통하는 데가 있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정도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감독을 맡은 라스 폰 트리에는 바그너 음악을 이렇게 깐 영화를 만들어 놓고, 칸 영화제에사 나치 어쩌고 하는 횡설수설을 부주의하게 했으니...

이 영화 줄거리를 느낀대로 정리하면서 결말까지 밝혀 보자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이 영화는 시작 장면에 환영처럼 느린 동작으로 아름다운 음악 속에서 주인공의 몇몇 이상한 모습과 지구가 멜랑콜리아 행성과 충돌하여 멸망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이 장면은 음악에 초점을 두면 전체 내용을 상징하는 서곡처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영화 1부 부분에서, 이 영화는 주인공이 성대한 결혼식을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유는 안나오지만 조금씩 절망한 모습, 정신병적인 마음이 무너진 듯한 행동을 하는 것이 보입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 지는 와중에, 결국 결혼식을 망치게 됩니다.

영화 2부 부분에서, 시일이 꽤 흐른 후 주인공은 반폐인이 되어서 언니 집에 얹혀 살게 됩니다. 언니 가족은 지구에 충돌할 지도 모르는 멜랑콜리아 행성에 관한 소식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어느 정도 기력을 찾습니다. 운명의 날, 멜랑콜리아는 아슬아슬하게 지구에서 벗어나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멜랑콜리아는 결국 지구와 충돌하게 됩니다. 주인공의 언니는 절망하여 날뛰어 보지만, 결국 두려움 속에서 주인공을 포함한 가족과 함께 거대한 행성의 모습을 보며 종말을 맞이 합니다.

이야기를 몇몇 소재를 살리고 주인공의 무너진 마음과 지구 종말을 불러오는 멜랑콜리아 행성이 같은 것을 상징한다는 점을 그대로 더 받아 들여서 방향으로 조금 바꿔 본다면 이렇게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시작 장면은 주인공이 미래의 일을 짐작한 것 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지구 종말이 일어날 것을 막연히 두려워하여 이미 깊은 절망감과 무기력에 빠진 것입니다. 결국 낙망한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인생을 즐겨 보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보자는 의미로 성대한 결혼식을 하려고 하는 것이 1부 내용인 듯 합니다. 이때만 해도, 많은 보통 사람들은 지구 종말설을 모르거나 진지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 상황인 듯 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 지구 종말에 대한 허망감, 종말과 같은 낙심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고 결국 결혼식을 망치고, 반쯤 폐인이 됩니다.

그러다 나중에 주인공은 주인공 언니와 함께 살면서 어느 정도 정리해서 회복을 하게 되는 것이 2부 내용이라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종말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가시화된 상황이라서, 결국 주인공 언니가 두려움과 절망감에 빠지고, 지구 종말이 확실시 된 시점에서 언니는 극히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다같이 종말을 맞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 애인이 사과나무 과수원 사진을 보여 주는 것은 지구가 명망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오랜 격언에 대한 상징, 주인공의 거부를 나타내는 듯도 합니다. 한번 더 엎어 생각하면 깊게 낙망한 사람에게 누구나 해주기 마련인 힘내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아라는 말이 얼마나 덧없이 들릴 수도 있는 지 상징한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19번 골프홀이 후반에 보이는 점에 집중하면, 몇몇 장면들은 광기에 빠진 주인공이나 다른 인물의 절망이 만들어낸 망상, 환영이라고 생각하면서 보는 것도 재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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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2/06/17 13: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12/06/17 20:43 #

    in medias les 수법을 쓴다고 해도 꼭 비선형적 서사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선형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단서를 보여주고 설명하는 대사를 넣어서 과거를 굳이 직접언급 안해도 암시하는 수법도 해당하고, 오히려 후자쪽이 더 원조라고 생각 합니다. 소설 같은 경우에는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아" 부터가 중간부터 시작하는 예로 거론되니 말입니다. 영화에서는 느와르 영화나 범죄물 같은 경우에 말씀하신대로 플래시백을 써먹는 게 한때 유행한 적이 있고 그런 부류가 더 전형적이기는 한데, 역시 다른 사례도 많다고 생각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돌아보니 말씀하신대로 이 영화가 그런 부류의 영화의 전형적인 사례로 이야기 하기에는 영화 평에서 쓰는 말로는 좀 섣불리 쓴 말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용을 조금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2012/06/18 06:1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12/06/18 12:05 #

    잘 읽어 주셨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 오공훈 2012/06/20 00:02 # 삭제 답글

    제 경우는 주인공인 저스틴이 우울증을 앓는 이유가 정확하게 제시되지 않아서 1부를 보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했는데요..
    (이런 종류의 궁금증은 '야곱의 사다리' 이후 정말 오랜만에 드는 것 같습니다)
    첫 장면이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저스틴이 미래를 보는 광경이라고 이해하니, 영화의 앞뒤가 다 맞아떨어지네요.
    그러고 보니 영화 후반 저스틴이 자기는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고 언급을 하죠.
    (결혼식 이벤트였던 콩의 숫자가 678개라는 것을 맞추고요)
    상세히 설명해주신 덕분에 영화를 보며 모호했던 점이 확 풀린 느낌입니다.
    고맙습니다! *^^*
  • 게렉터 2012/06/20 07:58 #

    제가 쓴 이야기는 제가 더 좋아하는 형태의 이야기로 끼워 맞춰 상상해 본 것이지, 명백한 증거가 있다거나 정설이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말씀하신 콩갯수 장면이나, 주인공이 화려한 파티를 일부러 원했다는 것, 주인공이 유난히 처음부터 밤하늘의 별에 관심가졌던 점 등에 착안해서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다른분들, 영화먼저개봉됐던 외국에서는 이런 설은 없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오공훈 2012/06/20 10:52 # 삭제

    결혼식 중간중간 저스틴과 클레어가 나누는 대화 내용을 돌이켜보면, 게렉터 님이 생각하시는 내용이 맞는 것 같습니다...
  • 게렉터 2012/06/24 11:47 # 답글

    오공훈/ 여러 장면이 제 나름대로 최대한 끼워 맞춰 지게 해 보려고 그렇게 생각해 본 것인데, 좀 더 검색해 보면 얼마나 정설이라든가 뭐 그런 것에 가까운 지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한 번 찾아 보려고 합니다.
  • demure 2012/06/27 11:52 # 삭제 답글

    장르적 속성이나 형식이나 기법보다 주제에 초점을 맞추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멜랑콜리 말이지요. 제목까지 멜랑콜리아이니, 사실, 말 다 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회화들 가운데 뒤러의 멜랑콜리아가 빠져 있었다는 점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대신 브뤼겔과 까르바지오가 나오죠. 중요한 참조 지점일 듯합니다).

    멜랑콜리, 특히 여성적 우울에 초점을 맞추면 적어도 하나의 의문은 풀립니다. 극중 쥐스틴이라는 인물의 변화 말이지요. 1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2부에 이르러서는 무기력증이 극에 달했던 그녀가 전환의 국면을 맞는 것은, 멜랑콜리아 행성의 "기운"을 받으며 "달빛 목욕"을 하면서부터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브래드베리의 단편 멜랑콜리의 묘약을 떠올렸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앓던 소녀가 달빛에 목욕을 받은 뒤로 생기를 되찾는다는 내용의 그 단편 말입니다. 중간에 낯선 행인이 개입하고, 그 과정에서 성적 암시도 있는 듯합니다만 (펠리니의 카사노바에도 비슷한 일화가 나오죠)... 중요한 것은 달빛의 치유 효과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멜랑콜리아 행성이 그 역할을 담당한 것 같고요.

    특정한 대상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애도와는 달리, 특별한 이유를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 멜랑콜리라고 프로이드가 구별했었는데, 전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바로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정신병자"라고 부르는 이 멜랑콜리 "환자"들이, 사실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예컨대 지구 밖 천체의 움직임이라든지, 그로 인한 지구의 파멸 등등과 같은 사실들에 좀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니, 차라리, 그러한 사실들을 우리보다 미리 앞서서 받아들이는 존재 -- 말하자면 예언자라는 겁니다. 어쩌면 진짜로 성립하는 것은 그 역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많은 예언자들의 예언의 내용은 종말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멜랑콜리 환자로, 지극히 부정적이며 회의적인 세계관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라는. 감독의 세계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 영화도 그렇고, 같은 해 칸느 출품작인 Take Shelter, 심지어, 역시 같은 해 칸느 수상작인 테런스 말릭의 Tree of Life 도 그렇고, 지난 해에 유난히 우주론적/종말론/묵시론적 색채를 띤 영화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런 영화들이 그 본질은 결국 인간 심리에 두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 게렉터 2012/06/29 22:58 #

    그냥 쉽게 보자면 이 영화는 지구 종말을 앞두고 두려워 하는 사람의 심리를 정석으로 보여 주는 이야기를 절반 깔아 놓고, 앞부분 절반은 그것과 상관 없이 그냥 지루하고 평범한 행사를 하나 깔아 놓고 확 연결 해 버린 게 불안한 비대칭 구도로 재미를 자아내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틈틈히 재미를 더 할 수 있는 복선들이나, 상징들이 끼어 드는 것들이 계속 있는 형태지 싶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말씀 중에 예언자들이 멜랑콜리 환자가 많고, 회의적인 세계관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라는 부분은 조금 납득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례가 있기는 할 것이고, 이 영화에서 제가 상상한 이야기도 그런 내용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정말 예언자들 중에 회의적인 세계관의 멜랑콜리 환자가 많고 그게 자연스러운 이유까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는 불가해한 특수 사례로 주인공의 예언능력이 묘사되고, 도리어 "멜랑콜리아는 분석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점을 드러내는 면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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