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와이어 (Haywire, 2011) 영화

2011년작 영화 "헤이와이어"는 특수 임무 수행 요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무적의 여자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몰려서 혼자 도망다니면서 악당들과 싸우고, 왜 자기가 누명을 썼는지 밝히고 누명을 벗으려고 노력하는 이야기 입니다. 여자 주인공의 싸움 실력을 나타내는 장면이 많은 편이지만, 대체로 싸움장면이나 추격전 장면이 화려하거나 긴장감 넘친다고 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느꼈습니니다. 언뜻보면 차갑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비정한 음모의 세계를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듯하기도 한데, 끝까지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은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인공 등장)

이 영화는 우선 시작하면 한 평범한 마을의 식당에서 남녀 주인공이 대화를 하며 밥을 먹으려는 장면으로 출발합니다. 이 장면은 얼마 되지 않아 싸움 장면으로 이어지고, 싸움판을 벌이고 나면, 과거 회상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싸움판을 벌이는 신세가 될 때까지, 누가 왜 배신했으며 누구의 음모는 무엇이고 어떻게 도망쳐 나갈 수 있는지 꼬인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구조로 이 영화는 진행 됩니다.

언뜻 보면 이 영화는 "펄프 픽션"과 줄거리만은 닮아 있는 느낌도 듭니다. 시선을 끌면서 식당에서 싸움판이 벌어지는 도입부에, 과거 회상 장면을 이용해서 흘러 가는 중반부를 보면서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야기에 잡담이 많고 항상 껄렁한 헛웃음을 달고 가는 것이 "펄프 픽션"의 중대한 재미거리라고 본다면, 그런 면에서야 이 영화는 아주 다르겠습니다만, 복잡하게 꼬인 사연이 있는 듯한 느낌에다가, 뭔가 중대한 비밀이나 모든 사람들이 달겨 드는 음모 같은 것이 있는데, 영화내내 그게 뭔지는 안 알려주면서 복잡한 갈등이 있는 듯 하는 흥취는 그대로 또 닮은 면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의외로 끝까지보면 기대가 무너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까지 잠깐 언급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이 영화는 무슨 대단히 복잡한 음모와 꼬인 관계가 있어서 벌어진 일을 다루는 것 같고, 그 사이에서 누구를 믿어야할 지 모르는 상황을 다루는 듯 하지만, 결국 드러나는 진상은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 영화의 사연이란, 그냥 나쁜놈이 나빠서 나쁜짓을 했고, 주인공이 거기에 걸렸다는 것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대단한 두뇌싸움을 할 것처럼 근엄한 대사를 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별볼일 없는 내막이 나와버리니, 실망스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조용한 분위기의 대단한 두뇌싸움을 할 것 같은 연출이라는 것도 정말로 효과적이고, 잘 어울리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개성이 있다고는 느꼈습니다. 신다게 패대기치면서 싸우고 총질도 하지만, 배경음악은 전혀 나오지 않고 공간도 텅빈 느낌이 많이 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현실 같은 느낌, 진짜 세상에서 펼쳐지는 실제 사건 같은 느낌이 살기도 했고, 무심하고 냉혹한 느낌이 더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는 시각 덕택에 묘하게 비웃는 듯한 장면도 조금씩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싸움 도중에는 음악이 나오지 않다가, 싸움이 끝난 직후 정도에 재즈 풍의 가볍게 돌고 넘어 가는 배경음악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이런 운치를 북돋는 듯 합니다. 대사들도 자연스럽고 그럴듯하지만, 정결하고 냉랭한 분위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일부러 웃겨 보려는 농담이 매우 적고, 울고 웃는 감정을 발산하는 대사들도 없었습니다. 그냥 약간 애둘러 말하는 비유법, 사소하지만 독특한 풍자를 담은 말투 정도가 옷을 잘 차려 입은 사업가들이 사교 모임에서 한두마디 하는 것처럼 나오되, 각자 배우에 잘 어울리게 조절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것들은 서로서로 잘 맞아 들어서, 과연 충분히 특출 나 보인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는 심각하게 기선을 잡아 두고 그 내막에 숨겨진 사연이 특히 대단할 것이 없는 영화인 대신 막상 영화의 가장 중요한 구경거리는 여자 주인공의 격투 장면에 있는 영화였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옹박"이나 한창 때의 성룡 영화들 처럼 정말로 격투 자체를 중심소재로 다루는 영화도 아니면서, 격투에 할애하는 시간도 많고 또 여자 주인공이 격투를 잘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의 나름대로 멋지다면 멋질 수 있었던 연출이 별 도움도 안되고, 오히려 방해만 된다는 생각도 잠깐씩 들었습니다.

그러니만큼, 여자 주인공이 자기만의 매력을 충분이 살릴 바탕이 있는 영화이기는 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화 배우"처럼 생겼으면서도, 덩치도 듬직하고 싸우는 장면을 아주 잘 보여 줍니다. 격투 장면에서 기술이 좋아 보이는 장면이 많고 몸놀림도 빠르고 힘있어 보이는 장면도 많았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런 다양한 격투 기술이 인상적으로 눈에 뜨이는 장면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냥 "싸움을 잘한다"는 게 표현만 잘 되어 있는 정도로, 몸동작 하나하나가 감탄을 자아내는 수준도 못되고, 그렇다고 해서 주변의 환경과 소도구를 이용하는 재치나 처절함을 보여주는 장면도 별로 없었다고 생각 합니다.

어떻게 보면, 왕년의 양자경보다 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을만한 배우였다고 생각 하는데, 예스마담 시리즈에서 양자경이 좁은 비행기 안에서 소화기를 휘두르며 악당과 피튀기게 싸우던 놀라운 모습을 구경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영화였다고 생각 합니다. 정반대로 그런 특출나고 신기한 장면 보다는, 스파이 영화, 특수 요원 영화의 닳고닳은 몇몇 장면들은 안이하게 몇 번 재연하는 장면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어차피 이 영화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같은 냉랭하고 살짝 우울한 첩보물 분위기를 써먹는데가 많은 영화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블록버스터류의 추격전 장면을 아예 하지를 말고 다른 걸 해도 되었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이런 뛰고 부수는 장면들은 그냥 별 생기 없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러면서도 주인공이 다양한 기발한 생각과 교묘한 수법을 만들어서 함정을 돌파하고 추적을 따돌릴 기회들이 있어도 그냥 버려 버리고 괴이하게 다음 장면으로 건너 뛰는 것들도 많았습니다.


(과거의 한 때)

전체를 놓고 보자면, 이 영화의 내용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엄청난 초강력 첩보원이 있어서 다들 벌벌 떨고 있고, 이 첩보원을 사악한 음모로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지독하게 덤벼들어서 모조리 다 극복해버린다는 그런 이야기에 맞아 든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전설적인 천재 첩보원으로 나와서 사람들을 놀래키고, 경악하게 하는 것에 어울리는 틀에서 활약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치고, 주인공이 이유 없이 허약하고 인간적인 보통사람 같은 장면이 박자에 어긋나는 대목도 많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어디까지, 왜, 복수를 하느냐, 하는 대목에서도 "정말로 무서운 요원" 답지 않게 엉성한 기준을 같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인공이 주인공의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에서 부녀간의 애틋한 마음을 보여주는 장면 같은 것도 딱히 별 소용 없이 그저 그렇게 나와서 괜히 영화 속도만 한 박자 느리게 가게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갈팡질팡한 구석이 좀 있는 영화 아닌가 싶었습니다.

갈팡질팡한 중에는, 이것저것 궁금하고 기대하게 해 놓고 결론으로 보여주는 내막이 빈약하고, 그 걸 보여주는 방식도 상투적이었다는 점이 허한 맛이 커지는데 결정타인 듯도 합니다. 차라리 아예 영화에서 진상이 안드러나는 결말로 가고 뭐가뭔지 모를 수수께끼 뒤죽박죽이라는 이야기로 맞춰 갔다면 더 재밌지 않았겠나 싶었습니다.

그러니, 몇몇 특징, 몇 가지 장면들 중심으로 기억에 남은 영화였습니다. 맨 마지막 장면에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코미디 재주를 살려가며 한 마디 대사를 말하는 실없이 웃긴 장면이라든가, 편안한 조명에 고요한 배경음악을 바탕으로 냉정하게 서로 싸우고 죽이는 묘한 감흥을 멋드러지게 잡아낸 호텔 침대 곁에서의 격투 장면도 기억에 남습니다. 앞서 "펄프 픽션"과 비슷해 보이네 어쩌네 했습니다만, 시작 장면도 진짜 같은 생동감에 싸움 잘하는 사람들의 솜씨와 날렵함도 잘 드러나 보이는 것이 역시 기억에 남습니다. 워낙에 인상적인 여자 주인공 배우에게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고 생각 합니다.


그 밖에...

이 영화를 보면서 여자 주인공 배우가 도저히 전문적으로 저 바닥에서 일한 사람 아니면 할 수 없는 솜씨를 보여 준다고 생각 했습니다. 저는 여자 주인공의 덩치나 얼굴 표정으로 봐서, 프로레슬링 선수가 아니었나 싶었는데, 이종격투기 선수로 활약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작인데, 스티븐 소더버그가 이종격투기에서 이 여자 주인공 배우를 보고, 뭔가 이 사람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해서 나온 결과물이 이 영화라는 말도 IMDB에서 봤습니다.

국내에서는 요즘에 개봉한 영화입니다.

덧글

  • rumic71 2012/07/10 13:12 # 답글

    구성이 솔트 같은 건가요?
  • 게렉터 2012/07/10 21:07 #

    줄거리만 놓고 보면 바탕이 비슷한 점이 많은데, 이야기 분위기나 절정, 결말 장면 구성한 내용은 아주 많이 다릅니다. 이 영화는 냉전시대 심각한 첩보물 분위기 같은 조용하고 우울한 느낌이 슬슬 깔려 있습니다. 뭔 코엔 형제 영화처럼 말입니다.
  • 123435 2012/07/10 13:40 # 삭제 답글

    레드얼럿3의 나타샤네요
  • 게렉터 2012/07/10 21:09 #

    옳습니다. 배우 모습이 한 세대 전에 비디오 게임 풀모션비디오 등에 워낙 잘 어울릴 것처럼 생겼기도 합니다. 더 재미난 영화에서 보고 싶은 배우이기도 합니다. 그런식으로 나가면 은근히 싼 배우 취급 받는 흐름이 있기는 합니다만, 또 쿠엔틴 타란티노나 로버트 로드리게즈 같은 성격 분명한 사람의 감독작에서 멋지게 해내면 한계를 돌파할 수도 있어 보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소르르 2012/07/10 23:31 # 삭제 답글

    이거네요. 제가 영화보고 느꼈던 실망감과 당혹감 같은 걸 막상 글로 적으려니 어쨌든 복수 영화라는 골격은 갖춘지라 어딜 지적해야 할 지 당황스러웠는데..... 진짜 딱 이거네요 게렉터님 접때부터 영화 리뷰하시는 거 봐왔지만 늘 딱딱 잘 찝어서 말씀해주시는 거 같아요
  • 게렉터 2012/07/11 08:03 #

    꾸준한 방문 감사합니다. 듀나님 같은 평론가는 기대할 점을 미리 알고 봐야되는 영화라고도 하시던데, 저는 그허면 차라리 격투 장면들이라도 좀 많이 다양하게 나왔다면 더 좋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 치즈 2012/07/30 14:56 # 삭제 답글

    누군지도 잘 모를 여자주인공이 수많은 A급 스타 남배우들을 떄려눕히는 재미는 있었던 영화같습니다. 음악은 제 취향에 딱 맞게 쓰였지만 액션은 기교를 절제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의도적으로 심심하게 찍어놔서,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는 조금 속상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첩보영화로써의 재미는 솔직히 그다지 느끼지 못했습니다.
  • 게렉터 2012/07/30 20:07 #

    저 역시 비슷한 생각 입니다. 저는 심심하게 찍어 놓은 것까지도 나름대로는 색다른 것이 재밌는 점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나마 분량이라도 좀 많았으면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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