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 2011)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파리에서 잠시 머물고 있는 미국인 작가가 약혼녀와 장인, 장모들과 함께 조금씩 엇나가서 고민하고, 쓰는 소설이나 앞으로 작가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데에도 고민하는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이 영화는 파리를 멋있고 좋은 곳으로 보여 주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영화이고, 음악도 옛날 샹송에 재즈를 중심으로 매우 그럴듯하게 집어 넣어서 좋은 여행지 추억 분위기가 잘 사는 편인데, 그러면서도 의외로 SF물 줄거리 하나를 핵심에 배치해서 계속 이러다 어떻게 되려고 저러나 하는 신비로운 사건의 전말을 따라가 보는 재미도 잘 섞인 영화였습니다.


(비오는 길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을 꼽아 보자면, 말많은 대사들과 보기 좋은 풍경들로 되어 있는 감상적인 장면 장면들과, 정통 SF물 다운 선명한 줄거리가 아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문학, 미술, 음악등 예술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 관점을 이야기하는 대사들부터, 그런 대사들자체를 농담거리로 써먹는 장면, 소소한 생활 속의 헛소리 대사들 등등이 넉넉히 배치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대사들이 고즈넉하게 화면에 들어 오는 다양한 시간, 날씨의 풍경과 함께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꾸며 본다면, "생활의 발견"이나 "봄날은 간다" 같은 차분하고, 일상적인 내용을 많이 다루고, 보면서 관객이 그때그때 좋아하거나, 비판하거나 넌덜머리를 낼 시간을 주는 것으로 가기 쉬울 거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어느 정도 그런 방향으로 진행하면서도, 시간여행 SF물의 핵심을 모두 다 잘 챙겨 담고 있습니다. 과거로 가서 과거에 있었던 유명한 역사적 인물을 만나고, 그래서 놀라기도 하고, 현대 문물을 과거의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주어서 과거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반복되는 시간 여행 속에서 주인공은 비밀을 간직하게 되기도 하고, 그 와중에 곁다리 이야기로 잠깐 짚고 가지만 심지어 시간 여행의 역설을 하나 다루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결말과 해결로 나아가면서 주제를 드러내는 것 자체도, 정말로 시간 여행을 다룬 SF물 답게 해내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이런 이야기만 모아 놓으면 짤막하니 "환상특급"이나 "제3의 눈"에 나오는 단막극 SF물로 그대로 써먹을 수 있어 보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결론으로 치단는 부분은 비교적 연출이 갑작스러워서 그런지 꼭 그런 TV 단막극 시리즈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 놓으니 잔잔한 대사들로, 잡담하는 내용에 많이 치중한 이야기이면서도 줄거리가 또렷하고, 그 줄거리가 어떻게 흘러 갈 것인지, 이 줄거리가 일으킨 문제가 과연 어떻게 풀릴 것인지 계속 궁금하게 해 놓는 점이 확 살았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전체 이야기가 훨씬 흥미롭고 재미나게 보이는 부분이 많아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작가가 주인공인 이야기"로 "작가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공식 지정 진부한 이야기 흐름이라 할 수 있는 "작가가 글 쓰다가 잘 안돼서 고민하는 데, 우연히 어디 갔다가 만난 여자에게 이끌리면서 돌파구를 얻는다"를 복종하듯이 따라가는 영화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이 SF 줄거리에 많은 부분 힘을 실은 덕분에 이제 많이 식상해진 "작가의 고통"을 다루는 "작가가 꾸민 작가의 환상" 같은 이야기의 답답한 점들을 많이 지웠다고 생각 합니다.

동시에 한 장면 한 장면의 꾸밈새가 살아 나는 이야기들도 솜씨가 출중했다고 느꼈습니다. 빛이 환하게 들어와서, 풍경의 건물들과 나무들이 또렷한 색으로 분명히 보이는 밝은 화면들이 경쾌하게 시내 곳곳을 보여 줬습니다. 파리의 풍경을 담는다고 에펠탑, 개선문, 퐁네프 다리를 줄창 멋지게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동차 지나가는 언덕길과 비가 오는 도로 사이에서 여러 도시 정경을 잡아 냅니다. 물론, 에펠탑, 개선문, 퐁네프 다리도 빼 놓지 않고 보여주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밤풍경은 실존주의를 다룬 책에서 말하는 "삶의 무도회에 참여하라"고 할 때, 떠올릴 법한 바로 그런 정경들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은, 바로 그런 사상이 한창 피어 나던 시대가 이 영화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1920년대이고, 이 영화의 주제가 그런 부류라는 점과 어울려서 더 즐겁게 보였습니다.

이 영화의 큰 재미거리 중 하나는, 20년대로 돌아가서 유명한 작가들, 화가들을 구경하는 모습입니다. 이 부분은 자신감 있을 만큼 잘 꾸민 화면과 대사들에다가 충직한 SF 물 줄거리가 섞여서 이 영화만의 쏠쏠한 재미를 자아내는 부분들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유명한 사람들은 사실 그대로 다큐멘터리처럼 나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우리가 흔히 작품과 그 사람의 행적을 다룬 이야기를 통해 갖고 있는 그 심상을 잘 나타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헤밍웨이는 우리가 헤밍웨이하면 생각할만한 옷차림으로 헤밍웨이 하면 생각할만한 대사를 하는 사람으로 나오되, 나름대로 최대한 그럴듯한 진짜 인간인것처럼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걸 이용해서 슬슬 농담을 주워 담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도 사실은 SF물 다운 특징인데, 이 영화에서는 "액설런트 어드벤처"에서 칭키즈칸이 야구 방망이들고 사람 패는 장면 나오는 것처럼 막가는 대신에, 풍성하게 여러 예술가들의 다양한 농담거리들을 잡아 내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 살바도르 달리가 등장하는 장면은 이런 SF 코미디 물의 특징을 이 영화다운 개성과 어울어지게 잘 뽑아낸 전형적인 모양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관객들이 친절하게 해설을 해주지 않으면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빙빙 돌아가고 주렁주렁 "요즘 관객들에게 친숙하도록 새롭게 꾸몄다" 어쩌고 하는 점들을 달아 넣는데 집착하지 않아서 더 재밌게, 즐겁게 지나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조선시대의 김종서가 여진족과 전쟁하는 영화를 찍는데, 김종서는 사실 문관 출신이었지만 "요즘 관객들에게 친숙해 보이도록" 괜히 여진족 두목이랑 무술 대결을 하는 장면을 넣는다... 뭐 이런 식으로 안 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친숙한 예술가는 친숙한 예술가대로, 덜 친숙한 예술가는 덜 친숙한대로 구경할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잠깐씩 등장하는 위인이라도, 그 예술가에 대한 제작진의 감상, 관점을 하나씩 포착해서 풀어 놓는다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 위인들을 흉내내는 배우들도 저마다 각각 초점을 두고 즐겁게 연기해 내는 구경거리로 신날 때가 많았습니다. 아마 새로운 형식과 도전이 넘치던 이십세기 초반 문학계 고전에 애정이 있다면 이런 내용들은 더 흐뭇한 구경거리가 될만도 하ㄹ 것입니다.


(삶의 무도회)

끝까지 구경해보면, 작가가 주인공이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서 안풀리던 작품 때문에 고민하다 돌파구 얻는 이야기 답게 군데군데 이야기가 약간은 빠진다 싶은 데가 있기는 했습니다. 일단, 이 영화의 막판 결론을 위해 주인공 약혼녀의 비밀이 드러나는 부분 같은 것은 어째 주인공이 우리의 주인공이니까 핑계거리를 하나 만들어 주는 수작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앞뒤로 부드럽게 이어지지도 못하고, 출발할 때만 해도 나름대로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장단점이 있고 특징적이었던 것이, 끝날 때쯤 되면, 주인공편은 착한편, 상대편은 나쁜놈들로 그냥 휙 편가르기 되어 버리는 구성이라서 그냥 우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도 이상한 자의식과 열등감을 겪으면서 별로 공감도 안갈만한 괴상한 낭만주의에 민폐끼치면서, 막판에는 갑자기 주인공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그래서 행복을 찾는다는 교훈적인 식으로 흘러가는 통에 엇나가 보일 때가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렇지만 주인공 역할을 맡은 오웬 윌슨은 사실 허우대 멀쩡한 할리우드 영화 배우면서도, 이 영화에서는 별로 잘난 인물이 못되는 열등감과 패배감, 혼란에 살짝 빠져 있는 사람을 참 잘 보여 줬다고 생각 합니다. 이 배우 덕택에 잡다한 농담 대사들도 잘 잡아 챙기고, 항상 코미디언 다운 명랑하고 밝은 면이 은근히 깔려 있기 때문에 영화 분위기가 잘 잡힌 점도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사실 제목부터가, "파리의 자정"이니, 이 영화는 "프라하의 연인", "파리의 연인" 같은 첫 2화는 해외에서 시작하는 한국식 로맨스 TV극 감성과 통하는 점도 여러 곳에 있어 보입니다. 이 영화에 보이는 파리는 대단한 도시고, 아름답고, 골목마다 추억이 있고, 운운하는 이야기는 그냥 닳고 닳은 해외여행 소개 문구에서 별 차이가 안날 때도 많았습니다. 한동안 "뉴요커" 운운하는 말이 한국 옷선전, 음식선전에서 유행했듯이 미국 광고에서 걸핏하면 "유로피언" 운운하는 단어를 남용하는 술수에서 별로 못 벗어난 치장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 관습적인 동경을 주로 이야기거리로 삼느라, 프랑스 문화나, 파리라는 도시의 특징을 잘 꿰뚫어 잡아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정, 우연히 만난 옛날 자동차)

그러면서도, 마지막 한 수로, 이 영화의 단점은 감싸주고 장점을 북돋워 주는 것이 이 영화의 음악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이 영화 음악은 20년대 콜 포터 재즈 음악과 프랑스 샹송으로 되어 있는 것들이 기본 뼈대라서 어찌 보면 그냥 평범한 선곡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잘 골라낸 곡들하며, 관객이 잠깐 이야기 지켜보는 것을 멈추고 감상에 빠질 빈틈을 찾아 음악을 넣어 주는 시점하며, 영화에 보탬이 될 때가 무척 많았다고 생각 합니다. "프렌치 키스" 배경 음악처럼, 별 특이하게 고른 것이 아니라도, 영화에서 음악 선곡했던 것 하면 "프렌치 키스"도 한 번 생각나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생각 해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제작진도 어느 정도 이 음악들에 애정과 자신감이 있었는지, 이 영화 시작 장면은 아예 반 뮤직비디오로 때우기도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 밖에...

시작할 때 이름 유심히 안 보면, 박물관 가이드로 나오는 배우가 눈에 익은데 누구더라 누구더라 생각 잘 안나시는 경우 있을 겁니다. 카를라 브루니. 바로 얼마전까지 프랑스 대통령이던 사르코지 선생의 부인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카를라 브루니가 도대체 무슨 역할로 나오려고 이러나 하면서 구경하는 것이 이 영화의 반전아닌 반전이기도 할 겁니다. 촬영할 때 일대 교통을 차단하고 수많은 경호원들이 둘러싼 채 촬영하기도 했다는 기사도 보입니다. 대통령 영부인이던 시절에 출연한 영화이니, 월드 와이드 개봉 영화에 배우로서 출연한 역사상 거의 몇 안되는 대통령 영부인 아닌가 합니다.

우디 앨런 감독작 영화 중에 액수로 보면 역대 최고 흥행작이라고 합니다.

한국판 제목이 "미드나잇 인 파리"입니다. 어차피 "미드나잇 인 패리스"도 아닌데, 그냥 "파리의 밤" 정도로 제목 붙이면 무슨 문제였을까 싶습니다.

우디 앨런 감독 작인데, 우디 앨런은 안나오는 영화입니다. 우디 앨런이 주연으로 안나오는 우디 앨런 감독작을 골라 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꽤 있는데, 그렇다면 딱 볼만한 영화 아닌가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에 나오는 오웬 윌슨은 우디 앨런 영화에 나오는 우디 앨런 흉내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많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웬 윌슨의 개성이 다 사라져 없어지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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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2/07/11 08:27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게렉터 2012/07/12 07:53 #

    스캇피체랄드 역은 어느 정도 공을 들인 듯도 합니다. 처음 주인공을 끌어 들이는 듯한 역할이니 그럴싸한 첫인상을 주려고 좀더 정성 기울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동사서독 2012/07/11 11:24 # 답글

    로마 여행을 하던 중에 시저도 만나보고 마키아벨리도 만나보고 무솔리니도 만나보고 이러면서 권력은 참 무상하군. 인간의 욕심이란 참 부질없는 것이로다. 이렇게 결말을 맺는 영화는 어떨까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파리(Paris)라는 이름 때문에, 순진한 미국 남자가 파리 여행 중에 만난, 자존심 강한 세 여인의 내기 때문에 어부지리로 마피아 보스 메넬라우스의 아내를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아름다운 아내가 젊은 양키와 바람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된 시실리안 보스가 피의 복수를 다짐하는 스토리도 생각해보게 되네요. 시실리안 마피아 조직에게 쫒긴 파리스는 형 헥토르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손씻고 착하게 살려던 헥토르는 동생을 위해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며 무기상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인다. 한편 특제 방탄복으로 중무장한 아킬레우스는 ...
  • 게렉터 2012/07/12 07:56 #

    패리스 이야기는 정말 어디서엔가 재해석을 가한 연극판 정도로 있을법도 합니다. 재밌습니다.
  • 2012/07/11 12:1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7/12 07:5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카방클 2012/07/12 06:15 # 삭제 답글

    비슷한 콘셉으로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곤 하지만 쓸데없이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반만년 역사속 역사인물들이 하룻밤안에 다 나온다면...작가의 입장에선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
  • 게렉터 2012/07/12 08:05 #

    이 영화에서는 과거로 갔지만 그 시대도 나름대로 현대적이어서 주인공이 동질감을 느낄수 있는 점이 중요했다고 생가합니다. 우리나라는 근대화 속도가 워낙 빨라서 그냥 비슷하게는 어려울 거고, 오히려 과거의 인물이 현대로 왔다가 흔적만 남은 옛극장, 백화점 자리등을 보고 애상감에 젖는다는 식의 내용도 생각해봅니다.
  • FlakGear 2012/07/13 04:40 # 답글

    '파리의 새벽' 이라는 이름도 은근 낭만적일것 같은데 말이죠.
  • 게렉터 2012/07/14 08:56 #

    맞습니다. "파리의 밤"이건 "파리의 12시"이건 뭘로 하든 간에 "미드나잇 인 파리"보다 뭐 많이 이상할 듯 하지도 한데. 요즘 영화 제목 짓는 우리나라 유행이 이런 가 봅니다. 연예,예술 업계의 유행이란 것이 무서운 것이 망할 때 "뭐 때문에 망했다"라는 소리 안들으려면 "나는 남들 하는 대로 했다"는 게 워낙 중요해서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 2012/07/14 08:5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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