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기 (余守己) 기타

"여수기(余守己)"는 단군 때에 예(濊)국을 다스렸던 사람으로, 나중에 그 아홉 아들에게 자신의 땅을 나누어 살피게 했는데, 아주 좋은 정사를 펼쳐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을 잘 도와서, 칭송도 많이 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대관령 산신: 영동 지역으로 가는 관문인 대관령에서 지금까지도 이 지역을 관장하는 자로 무당들에게 숭배 받고 있는 그림 입니다. 이 그림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강릉 단오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서(徐)씨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어떻게 해서 서(徐)라는 성씨가 생겼냐는 유래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즉 여수기(余守己)가 사람들을 잘 다스리고, 인기도 얻었다고 해서, 한자 "여(余)"자에다가 부수 중인변을 붙인 글자 서(徐)씨를 성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19세기때 나온 "임하필기" 등에 이미 채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어느 정도 퍼진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먼 옛날에 한자 글자의 모양이 어떻게 조합되어서 생겼다는 이야기가 아주 오랜 옛날을 배경으로 하는 전설이 된 사례는 조선 후기에 이외에도 여럿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초적인 한자에 대해서 친숙해진 시대에, 한자 글자 모양을 따지는 수수께끼, 재담 같은 것이 유행하면서 그런 소재가 풍부해져서 생긴 이야기인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의 배경이 "아주 오랜 옛날"로 잡히다 보니, 아주 오랜 옛날의 상징으로 "단군 시대"를 쉽게 생각하게 되므로 이것이 단군 시대 배경의 전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수기 전설에서 흥미를 끄는 부분은, 오랜 옛날의 정치하는 형태를 두고, 별다른 설명 없이도 여러 단계의 임금들이 층층이 있는 형국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전설 속에서는 거의 당연하다는 느낌으로 오랜 옛날에 일종의 봉건제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여수기는 "예"라는 고조선에 소속된 작은 지역을 다스리고 있고, 다스릴 때 자기 아들에게 땅을 나누어 맡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여수기가 예국에서 작은 임금 노릇을 하고 있고, 그 아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 줄 수 있고, 여러 아들들에게 땅을 쪼개서 물려 줄 수도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수기 자신은 더 높은 임금에게 성씨를 하사 받고 있으니, 분명히 단군에게는 또 신하 입장이 되어 단군을 자기보다 더 높은 임금으로 섬기고 있는 듯 하다는 것입니다.

이 전설에서 이와 같이, 아주 오랜 옛날에 있었던 자연스러운 정치 형태로, 각 지역에 조그마한 임금 가문이 있고, 그 작은 임금들은 다시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고 있는 고조선 전체의 단군이 있다는 제도가 나온다는 것은 눈길을 끕니다.

이런 식으로 지역의 작은 나라, 작은 임금이 중앙의 큰 임금을 모시는 형태로 나라가 구성되어 있는 것은 실제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상대적으로 친숙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중국역사, 일본역사, 서유럽 역사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그런 느낌이 많이 듭니다.

지금이야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나라에도 그 비슷한 체제가 있었다거나 그 이후에도 그런 체제가 일부 보인다는 관점도 충분히 알려져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치 체계라면, 그보다는 나라 전체를 하나의 정부에서 관리하고 각 지역은 그 정부에서 파견한 벼슬아치들이 다스리는 체제가 워낙에 옛 이야기에서는 더 중심을 차지하는 듯 보입니다. 요즘 학교 국사시간에도 우리나라 역사는 유난히 중앙집권화 경향이 강했다는 말도 나오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수기" 전설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모양이 더 높은 임금 - 복종하는 신하 임금 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마 유학에서 흔히 옛날 중국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좋은 옛시절로 칭송하는 생각이 영향을 꽤 많이 끼쳤기 때문에 나온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옛날을 생각할 때에도 자연스럽게 봉건제도 비슷한 모양이었을 것으로 여겼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렇게 지역의 임금이 아들에게 자신의 지역을 물려주는 체제는 과거제도를 통해 시험을 쳐서 중앙 조정에서 임명을 받아야만 지역을 통치할 수 있는 조선시대와 뚜렷이 차이가 나 보입니다.

유학을 바탕으로 해서 벼슬자리와 과거제도를 극히 중시하는 조선시대의 입장에서 이렇게 다스릴 지역을 물려주는 옛 체제가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비판의 초점이 될만도 합니다. 그러니까, 여수기가 아홉 아들에게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라고 할 때, 누구누구의 자식이기만 하면 무조건 그 지방을 다스릴 권리가 생기냐고 따질 법도 하다는 것입니다. 유능하고 똑똑하고 정말 그 지역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다른 사람도 있을텐데, 단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물려 준다는 것이 이치에 맞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수기 전설은 그런 비판을 한 번에 막아버리듯이, 그렇게 아홉 아들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더니, 너무나 결과가 좋아서 모두가 칭송을 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사람마다 모습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듯이, 맡을 역할도 다르고, 그래서 맡은 도리에 맞게 원래부터 임금이 될 사람, 다스릴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적인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아주 오랫 옛날에는 갖고 있는 물건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사고 팔고 주고 받고 했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땅이나 산과 같이 들고 다니고 쌓아 놓을 수 없는 것도 사고 팔고 주고 받고 하듯이, 그 밖의 여러 다른 권리도 사고 팔고 주고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소유권에 대한 생각 거리도 될만한 문제입니다.

현대에는 저작권, 의장권, 여러가지 지적재산권 등과 같이 과거에는 소유물이라고 잘 생각하지 않기도 했던 것을 주고 받고 사고 팝니다. 그렇다면, 아주 오랜 옛날에는 어떤 지역을 다스릴 권리, 지배할 권리 역시 주고 받고 사고 팔 수 있을 정도로 한 사람의 소유라고 생각해서, 당연히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라 다스리는 권리도 물려 줄 수 있다는 발상을 갖는 시대도 있었다고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국이라는 별로 크지 않은 지역을 아홉 아들들에게 작게 잘라서라도 굳이 모두에게 다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는 이 전설을 듣다 보면, 이것을 비판했을 그 지역의 어느 혈기 있는 백성이라든가, 다른 명망가들의 이야기도 떠올려 볼만합니다. 혹은 그냥 한 아들에게 몰아서 나눠 주는 게 차라리 낫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아들들과 경쟁하는 아홉 아들 중에 한 사람을 떠올려 볼만도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전설의 결말은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모두 좌절로 돌아가고, 아홉 아들에게 땅을 잘 맞게 나누어 다스리게 한 여수기의 생각이 당시에는 운명처럼 맞았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야기 해볼만한 것은 이 전설 속에 나오는 "예국"이라는 지역입니다. 중국 한나라 때, 특히 후한에서 삼국 무렵에는 왜인지 "예"를 고조선의 후예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듯 합니다. "삼국지"의 기록에는 고조선에 관한 이야기가 "예" 부분에 같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고조선과 그 나라 세운 사람의 전설이 이상하게 섞여 있는 부여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 임금이 "예왕지인"이라는 도장을 사용했다고도 합니다. 즉, 부여의 임금이 스스로를 "예"의 임금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모로 "예"라는 이름이 정말 고조선의 남아 있는 후예처럼 보이는 내용 입니다.

이렇게해서 흔히 후대에 동예 지역으로 생각되던 지금 우리나라의 북동 해안 지역에 "예"에 관한 전설들이 자리 잡게 되면서, 이것이 고조선 시대, 나아가서 아주 오랜 옛날을 상징하는 단군시대로 이어지는 전설들도 여러 가지가 나온 듯 합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지금의 강릉, 영동 지역이 특히 예국의 중심지로 여겨지게 되고, 나아가 강릉 인근에서 예국과 관련된 전설들이 더욱 다채롭게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예국과 관련된 전설들을 보면, "순오지"에도 나오는 엄청난 힘을 가진 장사인 유명한 여용사, 내지는 창해역사의 전설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채록된 예국, 맥국이 서로 싸웠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 다채롭게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따져보자면야 배경이 단군 시대 보다는 훨씬 더 지난 시기를 무대로 하는 것들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이런 이야기들을 보다보면, 대체로 예국이 영화롭고 강했다는 방향의 내용들이 많다는 점도 흥미를 끕니다.

"여수기" 전설의 줄거리를 중심에 둔다면, 예국은 누가 복종하고 누가 지배하는 지, 어디를 얼마다 다스리는 지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고, 그걸 기꺼이 복종하고 따르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국"의 국력이 강해 보였다는 전설들이 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나가면, "여수기" 전설은 결국 그런 신분제 사회가 힘을 얻으려면, 백성들이 즐거워하고 고마워 할 만큼 풍요롭게 해주어서, 그런 모든 것이 정해진 사회에 불만을 갖는 생각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하고, 이게 다 통치자의 공 때문이라는 생색도 어느 정도 내야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하는 감상도 듭니다.

끝으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만한 것은, "단군"이 얼마나 높은 위치로 전설 속에서 상상되었나 하는 점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작은 나라에서 그 작은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모든 다른 사람을 뜻대로 부릴 수 있는 절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교해 보자면 그런 나라가 삼한에만 78개국이 있는 데, 그런 규모의 작은 나라들의 임금들을 모두 거느리는 노릇을 하는 정도의 위치로 "단군"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낮은 관리나 일반 백성이 자신이 보기에 어마어마하게 위대해 보이는 임금 보다도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단군 위치에 있는 사람을 생각할 때, 어느 정도의 경외감을 느꼈을 지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진진하다고 생각 합니다.

예국의 병졸이나 농부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예국 왕 보다도 더 높은 단군이라는 것은,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닌 하늘의 자손이라서 어딘가 다른 종족처럼 여기게 되고, 그래서 단군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신비로운 하늘이 내려준 능력이나 유물을 갖고 있다거나 하는 애처로운 착각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 밖에...

고조선과 "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팽우", "부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더 자세히 해 보겠습니다.

- 모자란 솜씨로 이런저런 이야기 소개해 보려다가 제가 틀린 부분이나 잘못 생각한 부분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지적해 주실 말씀이나, 의견 있으시면 덧글 주시면 감사히 읽겠습니다. 이 글은 단군과 전설 속의 이상한 고조선 사람들 시리즈 두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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