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 (夫婁) 기타

부루(夫婁)는 단군과 비서갑녀 사이에서 난 아들로, 아란불의 말을 듣고 원래 있던 자리를 비켜주고 가섭원으로 건너가서 동부여를 건국한다는 전설이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삼국유사", "제왕운기"등 고려시대 기록에서부터 보입니다. 한편 부루가 중국에 가서 하나라 우 임금을 만나고 왔다는 기록도 조선시대 초기 이후로 널리 보이는 전설 입니다.


(부루는 신하 아란불의 말을 듣고 가섭원으로 옮겨간 임금입니다: 위 사진은 남원 실상사 약수암 목각 아미타여래 불상으로, 왼쪽이 아란, 오른쪽이 가섭, 아래가 석가모니 입니다.)

부루에 대한 전설은 일단 부루가 동부여를 세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동부여의 임금이 되기 전에는 중국 하나라에 찾아 가서 처음으로 중국계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전설도 같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에서 처음 이상하게 보이는 점은 부루가 곱게 아버지인 임금의 자리를 이어 받지 않고 원래 있던 곳을 떠나서 새로운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부루는 어릴 때는 아버지의 임금을 이어 받을 정통 계승자가 맞았는데, 왠일인지 부루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초기에 나온 권람의 "응제시" 주석에서 부루는 단군의 계승자를 말하는 태자(太子)였다고 뚜렷이 나와 있고,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부루가 단군의 아들이라는 말만 나오지 별달리 정통 계승자가 아니었다는 점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환웅이 환인의 서자 였다고 말하면서 출발하는 단군 왕검 이야기와 구분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설 속에서 단군의 계승자로 처음 나타났던 부루는 왜인지 막상 임금의 자리를 이어 받을 무렵이 되면, 단군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 받지는 않고, 동쪽으로 건너 가서 동부여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한다면, 부루가 동쪽으로 간 이유는 좀 이상합니다. 신하인 아란불(阿蘭弗)이 원래 있는 곳에는 하늘의 자손이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해서 부루는 동쪽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삼국유사"에는 부루가 단군의 아들이라는 기록과 부루가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같이 나오고 있고, 해모수도 그렇다면 단군의 일종인지 어떤지도 혼란스럽게 되어 있어서, 전설이 애매해지기는 합니다. 그러면서도, 부루의 전설에 대해서 적어도 부루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원래 있던 자리를 그대로 곱게 계승하지 않고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났다는 점만은 확실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라고 생각 합니다.

부루가 임금 자리를 이어 받지 않고 떠나게 된 까닭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본다면, 이야기는 조금 더 묘해 집니다. 일단 부루가 떠나는 것을 결심하는 까닭은 하늘의 자손이 나타나기 때문에 하늘의 자손을 피해서, 하늘의 자손에게 원래 있던 지역의 임금 자리를 양보하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환인이 하늘의 임금이고, 환웅은 그 자식이며, 단군 왕검은 환웅의 아들로 환인의 손자이니, 단군의 아들인 부루는 하늘의 임금 환인의 증손자격이 되어 부루 스스로도 하늘의 자손이라면 하늘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단군의 태자로서 애초의 정통 계승자인 부루가 막연한 "하늘의 자손"에 비해 별로 밀려날 까닭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전설 속에서 부루는 하늘의 자손을 피해 가기로 결심해버립니다.

부루가 떠난 이유로 일단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부루가 하늘의 자손이기는 자손이지만 진정한 정통이 아니라는 시비가 있었는데, 그것이 어머니쪽 혈통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자손이자 하백의 자식인 부루가 떠나가는 이야기는, 주몽이 하늘의 자손이자 하백의 자식인데 떠나가는 이야기와 내용과 근원면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런 뿌리를 놓고 미루어 본다면, 주몽이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가 버림 받은 사람 취급을 받고, 형제격이 되는 부여 왕자들의 위협으로 떠나가는 내용이 부루에게도 적용될만 합니다. 즉 부루도 어머니가 버림을 받았다거나, 아버지인 단군이 새로 다른 부인에게 얻은 아들과 부루가 경쟁 관계에 놓이면서 부루는 떠나가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 말입니다. 부루 역시 하늘의 자손인 셈인데, 아란불의 꿈 속에서 다른 하늘의 자손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형제 격인 다른 사람 때문에 밀려나는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보이긴 합니다.

그런 부루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점을 생각해 보기에 흥미로운 자료는 부루가 건국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루는 보통 "동부여"의 임금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좀 더 정통적인 부여인 "북부여"는 해모수가 건국했고, 부루는 거기서 이동해서 새롭게 새운 "동부여"의 건국자로 비교되어 묘사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부루는 이동해서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 비교적 명확하게 나오고 있고, 후대로 이어지면서 고구려와 연결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부루가 더욱더 진짜 부여다운 부여의 건국자로 비치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 합니다. 고려시대 기록 중에도 "삼국유사"와 비슷한 무렵에 나온 "제왕운기"에서는 부여의 건국자로 부루를 대표로 짚고 넘어 가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부루는 부여라는 나라의 건국자이고,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루가 건국한 나라인 부여의 풍속과 모습에 대해서는 단군 시대와는 먼 후대의 일입니다만, "삼국지"등에서 삼국시대 초기 무렵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 묘사되는 부여의 모습은 부유하고 평화로운 나라이지만, 예의범절과 법률이 매우 엄격한 나라라는 생각이 많이 들게 합니다.

사형이 형벌로 묘사된 부분이 잦고, 심지어 임금도 책임을 물어 사형시키는 경우도 언급 됩니다. 노예 제도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어서 높은 사람이 죽으면 추모의 의미로 생사람을 잡아 무덤에 같이 묻는 순장을 100명씩 하는 경우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특히 남녀간의 교제에 대해 엄격히 통제하여 간통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시체조차 찾아갈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의복과 장신구를 매우 중시하는 점도 나와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보면, 부루가 건국한 부여라는 나라의 특징은 엄한 예식, 절차, 상하 위계 질서와 철저한 법률과 엄정한 집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 이야기를 좀 더 넘겨 짚자면, 전설 속에서 부루가 동부여를 건국하면서 생각한 새로 만든 나라의 모습도 바로 이런 엄격한 질서와 처벌로 유지 되는 나라였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부여는 그런 식으로 나라를 운영해서, 나라를 부강하고 발달한 나라로 커 나가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점은 부여 뒤에 나온 고구려의 풍속이 속임수가 많고 싸움을 많이하고, 음란한 것이 많다고 중국 기록에서 묘사되는 점과 뚜렷이 대조를 이룹니다.

물론 이것이 실제 부여와 고구려의 풍속 차이가 아니라, 중국계 역사 기록이 나오던 당시에 중국과 고구려는 싸운 일이 많고, 중국과 부여는 친한 일이 많아서 고구려는 나쁘게 쓰고, 부여는 좋게 쓰기로 하면서, 그렇게 정착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만, 나중에 조선시대에도 부여의 이러한 몇몇 특징들은 독특한 구분되는 문화로 계속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에 사람들이 흰 옷을 즐겨 입어 "백의민족"이 된 풍습이, 부여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생각을 한 학자들은 많았고, 지금까지도 이런 주장은 강하게 남아 있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부여가 건국되면서 이렇게 엄격한 예절과 법률을 강조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거리로 갖다 붙여 보자면, 부루가 세상 살면서 인간을 다스리는데는 엄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어떤 깨달음을 얻어서 나라를 세우면서 그런 부분을 강조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루는 중국까지 사절로 찾아간 전설이 유명한데, 먼 길을 가는 험한 여정 속에서 혹독한 처벌과 규율의 가치를 알았다든가 하는 사연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원래 부루는 정통 계승자였는데, 자리를 비켜주고 새로운 땅을 찾아간 것이 너무 원칙 없고 규율 없는 일이라고 원통하게 여겨서 자신의 나라에는 임금 조차도 잘못이 있으면 처벌하는 강한 법령을 세운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좀 더 일상적인 방향으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 때문에 계승자 자리에서 밀려 났다는 것 때문에 원한이 맺혀서, 규칙을 중요시하고 남녀 관계, 간통 등에 대해서 나라의 규제를 철저히 만들었다는 말도 갖다 붙일만하지 않나 생각 해 봅니다.

부루에 관한 전설 중에 부여를 건국한 것 이외에 또 한가지 널리 퍼진 이야기는 바로 중국 하나라의 임금 우를 부루가 찾아 갔다는 것입니다. 이 전설은 우 임금에 대한 중국 기록들 중에 우 임금이 중국 각지를 탐방하여 지리와 행정 구역을 정리하고, 그 지역 근처에 있는 외국 사람들도 널리 만났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 임금은 이렇게 중국 각 지역에 대해 정리를 마친 후에 도산(塗山)이라는 곳에서 각 지역의 대표자들을 만나 봤다고 하는데, 이때 매우 많은 나라 사람들이 찾아 갔다고 합니다.

하다못해 중국의 "산해경" 같은 유명한 책만 해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볼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실제로 "산해경"은 훨씬 후대에 나온 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만, 중국 전설 속에서는 "산해경"은 우 임금이 자신이 아는 지리에 대한 지식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산해경"에 "조선"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하나라 우 임금을 만난 많은 사람 중에 고조선에서 찾아간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고, 그 주인공이 당시 단군의 태자였다는 부루라는 전설이 내려오게 된 것 아닌가 합니다.

이런 전설을 살펴 볼 때, 고조선이 아주 오랜 옛날 부터 꽤 멀리 떨어진 지역과 교류를 했다는 점을 핵심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단군이 이러한 교류를 중시여겨 태자에게 직접 임무를 맡길 정도로 대외 교류를 중시 여겼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라 중심 지역까지 가는 먼 길에 걸친 부루 일행의 고난과 모험담이 떠오를만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산해경"의 조선에 대한 이야기도 사람이 물에서 산다는 말이 있고, 괜히 천축국이 옆에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기도 하니, 바다를 건너 멀리서 배를 타고 다니는 사람에 대한 묘사로 생각할 여지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전설들 끼리 서로 맞추어 보는 이야기 만들어내기이기는 합니다만, "산해경"에 조선의 사람들이 물에서 살고 남을 사랑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과 비슷해 보인다거나, 고조선 단군의 부인이 강물을 중심으로한 세력을 나타내는 "하백"이라는 점을 묘사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끼리 이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조선 시대 이후 부루가 중국에 찾아간 것이 중국을 우리나라가 높게 대우한 시초로 보기도 합니다. 물론 따지자면야, 조선 시대의 학자들은 중국을 큰 나라로 높이고 우리가 작은 나라로서 잘 예우해 준다는 "사대(事大)" 외교는 신라가 당나라에 사대한 것을 실질적인 연원으로 삼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좀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중국과 우리나라 간의 관계의 시초를 찾는다거나, 보다 전설적인 근원을 찾는 이야기를 할 때는 부루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부루 이야기는 단군의 아들이라는 점에서는 단군 왕검의 시대인 아주 오랜 옛날을 배경으로 하는 듯 하면서도, 중국에 찾아간 때는 중국의 하나라 시대로 나오는 이야기가 되고, 한편 부여를 건국한 것을 놓고 보면 다시 훨씬 후대인 중국의 전한 시대가 배경이 되는 내용인 셈입니다. 이렇게 매우 긴 시간에 걸쳐 있는 이야기를 놓고 보면 역시 전설 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부루라는 전설 속 인물의 성격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돌아 보게 됩니다. 나라를 세우고, 외교를 맺었다는 현실적인 업적과 행동이 묘사된 부분과 신화적인 배경이 섞여 있는 독특한 면이 좀 더 눈에 띈다는 느낌입니다.

마지막으로 부루 이야기에서 짚어 볼만한 내용은 부루의 신하인 아란불과 부루가 동부여를 세운 지역인 가섭원(迦葉原) 입니다. 아란이나 가섭은 불교에서 석가모니의 제자 이름으로 나오는 것인데, 그 말을 부루와 관련된 전설에서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에게도 잘 알려져서, 이런 기록에 정확성보다는 전설적인 면이 너무 강하다는 근거로 지목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역으로, 불교에서 사용된 용어를 가져다 쓴 이런 어감 때문에, 아란불, 가섭원이 어떤 느낌이 드는 지 좀 더 이야기해볼 거리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의 아란은 석가모니의 시종이 되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수발을 든 인물로, 나중에 불교 경전을 쓸 때에 석가모니의 말을 들었던 것을 가장 많이 기억해서 자료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란불이 부루의 가까운 신하로, 부루에게 "나라를 옮겨야 된다"는 큰 일에 대한 의견을 바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친했다는 점과 통하는 면이 있어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섭원"이라는 지명도 불교의 가섭과 통하는 면을 찾을 수 있을 지 모릅니다. 불교의 가섭은 두타행을 상징하는 인물로, 검소하고 수도하는 태도를 엄격히하여 자신을 다스리며 돌아다니는 승려 생활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가섭원이라는 지명 역시, 이런 비슷한 일을 한 사람이 제공한 장소라든가, 검소하고 수도하는 풍습이 성행한 지역, 도시라는 느낌이 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앞서 이야기한 부여의 엄하고 예절을 중시하는 문화와 내용을 꿰어 맞춰 본다면, 바로 그런 지역이기 때문에 부루가 새롭게 나라를 건설할 장소로 잘 들어 맞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한 번 해 봅니다.

좀 더 진지한 생각으로는, 아란불과 가섭원이 등장하는 부루의 이야기가, 따지고보면, 아란과 가섭을 거느리고 있는 석가모니와 맞아들어서, 부루를 석가모니처럼 비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임금은 나라에 대해서 부처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바로 부루가 나라 세우는 전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임금이 불교를 보호하고 불교를 상징한다거나,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부처와 같은 태도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부류의 생각은 "삼국시대" 때에도 유행한 적이 있었으니, 아마 고려시대 이후로 널리 퍼진 부루 전설도 이런 생각이 담겨 있다고 볼만하지 않겠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하늘의 자손이 나라를 세우기 때문에 옮겨야 한다"는 꿈속의 계시를 부루가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신하인 아란불이 받는 다는 점도 묘한 점이 있어 보입니다. 게다가 아란불이 부루에게 이 이야기 해 주니, 부루가 그대로 했다는 것으로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런 점은 신하와 임금의 관계인 두 사람의 믿음, 역할분담 등등에 대해서 임금을 부처로 상징한 이 이야기에 좀 더 말을 풀어 볼 틈이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 밖에...

19세기말에는 무당과 굿에 대한 내용을 짧게 요약해 적은 "무당내력"에는 무속의 "부루단지"가 바로 단군의 아들 부루를 기리는 물건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이어간 내용은 그 후대에도 차차 보이는 듯 합니다.

- 모자란 솜씨로 이런저런 이야기 소개해 보려다가 제가 틀린 부분이나 잘못 생각한 부분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지적해 주실 말씀이나, 의견 있으시면 덧글 주시면 무엇이건 감사히 읽겠습니다. 이 글은 단군과 전설 속의 이상한 고조선 사람들 시리즈 여덟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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