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 (三郞) 기타

삼랑(三郞)은 단군의 아들 삼형제를 일컫는 것으로, 강화도 정족산의 정족산성이 "삼랑성(三郞城)"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며 단군의 삼형제가 쌓은 성이라는 전설이 있어서 생긴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려사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도 채록되어 있는만큼, 조선 초기부터 그 기록이 널리 확인되는 전설입니다.


(강화도 고려 고종의 무덤인 홍릉에 세워져 있는 석상들)

보통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나 구월산 근처로 나타나는 전설이 많은 만큼, 단군에 관련된 전설도 그 지역 근처에 많이 있는 편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스럽게도 그 두 지역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강화도 지역에 단군에 관한 전설이 얽혀 있는 곳이 두 곳이나 있습니다. 바로 마니산 정상 근처에 있는 참성단(塹星壇)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성벽인 삼랑성입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초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기록에서 발견되는 전설 입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 이후에 널리 퍼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단군과 관련된 전설의 중심지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이런 이야기가 자리 잡은 어떤 원인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려 시대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 전설인데, 조선 초에는 꽤 굳어진 모양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고려 후기의 어떤 상황, 변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지 않나 짐작해 볼만합니다.

한 가지 그럴듯한 생각은, 단군에 대한 전설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고려 시대, 그것도 특히 후기라는 점에 착안해서, 고려 조정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자리를 옮겼을 때 이런 전설이 자리 잡은 것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강화도에 아주 오랜 옛날에 생겼다는 어떤 신성스러운 곳에 관한 전설이 있었는데, 그 지역에 단군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던 고려 조정의 사람들이 건너 오면서, 바로 그 먼 옛날이라는 배경이 옛 시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단군 시절"이라는 말로 표현되면서 자리 잡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몽골 침입 시절의 고려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의식을 치르기 위해 예로부터 강화도에 내려오는 신성스러운 장소를 찾아서 행사를 치르려고 한 내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역으로 생각해 보면,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고대의 신성한 사람이나, 신선, 신, 하늘 등에 대해 의식을 치르려는 움직임이 생겼고, 그런 행사를 치를 만한 장소로 강화도에서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는 것이 오히려 출발점일지도 모를 일 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묘청을 필두로, 이런 식으로 신비한 의식을 치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들이 조정에 자주 드나드는 편이었으니, 그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꽤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랬던 것이, 나중에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다시 개성으로 돌아간 후에 강화도의 신성한 장소들에 점차 구체적인 내용들이 잊혀졌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조선 초기 쯤이 되자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 머물던 당시에 정했던 신성한 장소들이 그저 "아주 오랜 옛날의 신비로운 존재에게 빌던 곳", "신성한 장소", "신선스러운 장소"라는 정도의 기억만 남아 있게 되었고, 그리고 나서 그런 신비로운 옛 시대에 대한 상징인 "단군 시절의 이야기"로 자리잡았을 수도 있겠다고도 상상해 봅니다.

단군의 세 아들이 삼랑성을 쌓았다는 전설은, 이후 "성호사설" 정도의 기록에 이르게 되면, 정족산의 세 봉우리를 삼형제 중의 각각 한 사람이 맡아서 관장했고, 삼랑성에서 각각의 봉우리에 해당하는 부분들을 삼형제 중에 한 사람 씩이 나누어 건설했다는 식의 이야기로 좀 더 구체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만 왜 하필 강화도 지역에, 그것도 단군이 직접 아들을 보내서 요새를 건설하게 했는지는 안나옵니다. 성을 건설했으니 적을 막으려고 한 것인데, 그 성에 근거를 두고 누구와 싸웠는지 하는 부분에 대한 내용들도 별달리 나타나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삼랑성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 시대에는 강화도에 대한 상식처럼 널리 퍼졌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학자들은 이곳에 생긴 성이 단군이 국경을 수비하기 위해 쌓은 요새로 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즉 삼랑성 지역이 단군시대 고조선의 남쪽 경계선이라는 것입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단군시대의 고조선은 그 중심지가 평양 내지는 구월산 인근이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나라를 유지하고 있는데, 나라의 남쪽 경계는 강화도가 나타내는 한강으로 짐작하는 생각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조선의 범위는 한강 이북까지이고, 한강 이남은 고조선 지역과 구분되는 또다른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고조선을 한반도 남부와는 별도로 구분되는 지역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뿌리가 꽤 깊기도 합니다. 단군 시대에서는 멀리 떨어진 위만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당시 고조선의 원래 임금이었던 준왕이 위만을 피해서 남쪽 지역으로 도망쳤고, 그렇게 해서 남쪽에 건설한 나라가 삼한(三韓)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국지" 등 중국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이니만큼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각 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조선이 한반도 남쪽 지역과는 구분된 나라이고, 한반도 남쪽은 고조선을 집어 삼킨 위만의 손에 미치지 않는 지역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아닌게 아니라, "한서"등에서는 위만이 고조선을 차지 한 이후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흔히 위만이 진(辰)이라는 곳에서 중국에 이르는 길을 막았다는 묘사를 대표적인 내용으로 꼽습니다. 이때 진은 흔히 삼한 지역, 그러니까 한반도 남부 지역이라고 생각했으니, 이 역시 고조선 지역과 한반도 남부 지역은 서로 다른 지역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모양이 됩니다.

물론 고려시대의 "제왕운기" 등에서는 삼한과 삼국등 모든 후대 나라들의 뿌리가 고조선에 있다고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생각을 굳이 굳게 지키자면, 원래는 고조선이 모두를 다 거느리고 있었는데,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서 중심지인 평양일대를 장악했고, 그때문에 나머지 지역은 위만에게 복속하지 않고 떨어져 나갔다는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꼭 다른 두 나라로 나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안정복의 의견에도 나와 있듯이, 일단 고조선 중심지 지역과 한반도 남부 지역은 어떻게든 일단 구분 되는 것으로 보아온 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생각이었던 듯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고조선의 남쪽 끝 지역 내지는 단군의 세력이나 문화가 비교적 잘 미치는 지역의 끝 지역이 강화도 즈음이라는 식으로 삼랑성 전설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삼랑성을 건설한 단군의 세 아들은 고조선의 임금인 단군의 아들이면서도 멀리 변방에 떨어져서 힘들게 국경을 지키고 성을 쌓은 역할을 하는 셈이 됩니다.

이런 전설을 두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단군이 군사력을 이끌고 움직이는 사람을 잘 믿지 못해서 아들에게 임무를 맡긴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군사력으로 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릴 수도 있을 테니, 아들이 아니면 중요한 군사력을 나눠주지 않았다는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로 어떤 이유로 아들을 미워하게 되거나 수도에서 쫓아버리고 싶어해서 아들에게 국경지역에 요새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겨서 내몰은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단군의 태자인 부루가 원래 있던 지역의 임금 자리를 이어가지 못하고 동부여로 옮겨 갔다는 전설과 엮어 본다면, 서울에서 쫓겨나듯 떠나가게 되어 귀양살이 하듯 성쌓는 임무를 맡게된 고달픈 이야기도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이야기를 엮어서, 군사력은 아들에게 맡길 수 밖에 없다는 핑계로 아들들을 서울에서 먼 곳으로 몰아낸 뒤에, 그틈을 타서 단군의 임금 자리를 빼앗듯이 이어 받는 사람이 있었다는 식의 사연도 상상해 볼만 합니다.

특히 삼랑성이 있는 정족산은 세 봉우리가 세 개로 균형을 이루는 솥 발 모양이라는 점이 특징이라는 것도 재밌어 보입니다. 이렇게 서로 균형을 이루는 세 봉우리를 삼형제 중에 한 사람이 각기 맡도록 했으니, 마치 세 명의 형제가 서로를 견제해서 한쪽의 세력이 커지지 못하도록 막는 느낌이 납니다. 그런 식으로 세 형제를 묶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렇게만 엮어 놓기에는 강화도의 단군 전설은 또다른 특징도 있습니다. 그것은 강화도에는 삼랑성 뿐만 아니라 단군이 직접 와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 전설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성단은 그 모양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천지관을 상징한다는 말도 있을만큼, 정성들여 건설한 신성하고 귀중한 제단으로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초기 기록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참성단에 대한 묘사와 기록이 삼랑성 보다도 더 많이 보이는 편이라서, 보기에 따라서는 강화도 단군 전설의 중심은 참성단이고 삼랑성 이야기는 곁가지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참성단은 하늘과 땅의 모양, 별이 움직이는 이치에 대해서 고민한 철학적인 상징의 의미가 중요하게 보입니다. 단군 무리들이 그러한 세상의 모양과 이치에 대해서 관심을 하고 고민을 했다는 전설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의 결론으로 "참성단"을 건설했으니, 그런 여러가지 내용 중에서 밤하늘의 "별"을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결론을 내렸다는 점도 눈에 띄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단군이라는 이름 자체는 나무에 대한 숭배로 보이기도 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태양 숭배나 강물에 대한 숭배에 대한 풍습이 있는 사례도 나타나는데, 하필이면 고조선의 단군은 그런 것들보다는 결국 "별"에 대한 숭배를 중시했다는 것이 묘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엮어 보면, 단군이 강화도를 중요한 요새 지역으로 중시했다는 느낌도 납니다. 이것을 고조선에 대한 다른 내용들과 이어 본다면, 단군, 기자 시대의 고조선과 그 이후 반란으로 고조선을 차지한 위만 시대와의 차이를 갖다 붙일만도 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남쪽 지역 사람들이 중국으로 배를 타고 가려면 강물과 바닷가를 따라서 갈 때 강화도 인근이 중요한 교통의 요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단군 시대에는 이 지역을 잘 개발해서, 이런 교통이 잘 이루어지게 했지만, 위만 시대에는 이 지역을 틀어 쥐고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참성단에서 숭배한 "별"이라는 것은 방향을 따지는 방법이나, 항해의 길잡이를 나타낸다는 생각도 한 번 해 봅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동서남북을 오가는 배들, 상인들, 사람들이 많아서 풍성하게 재물이 모였던 곳이 강화도라고 상상해 볼만한 전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저렇게 궁리해 봐야, 삼랑성 전설이 단군의 버림을 받아 변방으로 쫓겨난 아들의 이야기인지, 단군의 믿음을 받아 군사력을 맡아서 온 아들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강화도 지역 자체를 교통의 요지로 개발하려는 이야기인지, 셋 중 어느 것이 중요한 점인지 분명히 성격을 정할만한 내용은 아닐 것입니니다. 그렇습니다만, 세 봉우리를 각기 나누어 맡은 세 형제처럼 이 세가지 이야기 거리가 다 나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한 번 해 봅니다.


그 밖에...

"청학집"등에는 단군의 아들 셋의 이름이 각각 나타나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형제마다 특별한 임무를 갖고 있다는 식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시간을 갖고 널리 퍼진 전설로 보기에 어려운 기록인데다가, 이런 부류의 기록간에 서로 이름이 일치하는 사례도 적어서 별도로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 모자란 솜씨로 이런저런 이야기 소개해 보려다가 제가 틀린 부분이나 잘못 생각한 부분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지적해 주실 말씀이나, 의견 있으시면 덧글 주시면 무엇이건 감사히 읽겠습니다. 이 글은 단군과 전설 속의 이상한 고조선 사람들 시리즈 마지막 아홉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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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렉터블로그 : 단군과 전설 속의 이상한 고조선 사람들 2012-10-22 23:0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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