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속의 고조선 사람들과 역사 기타

1. 고조선 무렵의 기록

고조선이라고 하면 원래는 단군시대를 일컫는 말에 가까웠습니다만, 조선시대 이후로 고조선에 관한 이야기는 보통 흔히 단군시대, 기자시대, 위만시대 셋으로 구분되는 내용을 모두 이어서 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단군시대는 아득히 머나먼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이고, 기자시대는 기원전 1100년대 근처 중국의 은나라 멸망 무렵부터 기원전 194년까지를 말합니다. 위만시대는 새롭게 왕조를 연 위만과 그 손자 우거왕 까지로 기원전 194년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입니다. 요즘에는 "고조선"이라고 하면 세 시대를 모두 말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고조선 멸망과 한 세대 이상 차이 나지 않은 시절, 혹은 그 이전의 기록만을 대상으로 고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대략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은 중국 전국시대 무렵 몇몇 기록에서 처음 나타나는 듯 합니다. 그러니까 전통적으로 말하자면 기자시대 무렵인 셈입니다. 여기서 기자시대의 고조선은 연나라와 인접한 요서 내지는 요동 지역에 대한 이야기로 묘사 됩니다.

이 곳은 문피(文皮: 무늬있는 가죽), 타복(毤服: 털 옷) 내지는 무늬 있는 털가죽(文皮毤)을 사치스러운 특산물로 갖고 있는 곳 입니다. ("관자") 그리고 사람들이 강물에서 사는 듯이 지내는 문화를 갖고 있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곳이라는 풍문이 있는 곳("산해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후 기록에서 이 지역에 대해 중국의 연나라 근처에서 연나라를 위협할 수도 있을 듯한 이민족 중 하나로 언급되고,("전국책") 과거 은나라가 망할 때 은나라를 배반할 수 없어서 은나라를 떠났다는 기자(箕子)가 도망쳐서 도착한 곳("상서대전")이라는 이야기도 소개가 됩니다.

그 뒤의 고조선에 대해 좀 더 상세한 기록은 나중에 위만 왕조가 몰락하면서 고조선이 완전히 멸망한 한나라 무제 무렵이 되면 나옵니다.

"사기"에는 중국의 연나라가 강해졌을 때 진번(眞蕃)과 조선(朝鮮)이라는 지역을 공격해서 땅을 빼앗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연나라는 요동 인근 지역을 차지하고, 관리를 두고 요새를 건설해서 자기 나라 영토로 관리했다고 합니다. 기자시대의 고조선에 대한 기록 대상인 요동 지역은 연나라가 빼앗아 차지해 버린 것입니다. 이후 진시황이 중국통일을 하면서 연나라가 망하자, 이 지역은 진나라 소속이 되어 한나라에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한나라 초기에, 한나라의 건국자 유방의 부하인 노관(盧綰)이 유방에게 토사구팽 당하면서 버림 받게 되자 배반했다가 연나라 땅에서부터 흉노 지역 땅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혼란을 틈타서 그 지역에 살던 위만(衛滿)이라는 사람은, 아마 노관 소속의 병사들이었을 듯한 1천명의 무리들을 모아서 당시 한나라의 지배 지역 바깥이던 지금의 평양 근처로 강을 건너서 도망칩니다. 그리고 위만은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왕조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조선 역사의 마지막인 위만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서 위만은 중국 지역에서 살던 사람이 고조선의 임금 자리를 차지 했으니, 외국인이 우리 나라 역사를 장식한다는 생각에서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위만은 중국의 이민족인 고조선의 풍습을 처음부터 자청해서 따른 사람이라는 기록, 즉 날상투를 틀고 이민족의 옷을 입었다는 내용이 "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그 행적을 "귀화한 외국인"처럼 보는 것이 보통인듯 합니다. 좀 더 과감한 생각으로, 위만은 바로 연나라가 차지했던 고조선의 옛 땅에서 출발한 사람이니, 빼앗긴 땅에 살던 고조선의 후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위만 시대에는 왕이 장군(將軍), 대신(大臣)을 거느리고 있었고, 신하 중에 일정한 자기 세력을 가진 사람이 차지하는 "상(相)"이라는 자리가 여럿 있었으며, 군사를 이끄는 사람 중에 "비왕(裨王)"이라는 자리도 있었다고 표기되어 있는 것이 당시의 나라 모양에 대해 알려져 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위만 이후부터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의 침략으로 멸망할 때까지의 이야기는 "사기"에 어느 정도 자세히 나와 있어서, 비교적 이견이 없는 편입니다.

문제는 위만 이전의 고조선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2. 기자 시대의 고조선

전통적으로는, 연나라가 고조선의 땅을 차지했을 때 연나라가 고조선을 다 차지한 것이 아니라, 넓은 고조선의 땅 중에 일부인 요동 근처만을 차지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고조선의 땅은 연나라와 국경을 마주한 요동 지역에서부터 한반도 평양 지역까지 이어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연나라의 공격 이후에도 고조선은 대부분 계속 존속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위만이 평양 인근에서 자신의 왕조를 시작할 때에는, 원래 그 지역에 있던 임금을 쫓아내고 반란을 일으켜서 임금 자리를 차지했다는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나온 배경은 수백년후인 나중에 나온 중국 기록 "삼국지"에 나와 있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에는 "위략"이라는 책의 기록이 인용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옛날 은나라가 망할 때 고조선에 건너온 기자의 후예가 조선에서 임금이 되었고, 이후 그 자손이 왕위를 계승해 나갔는데, 연나라가 조선을 공격했을 때 땅을 빼앗겨서 약해졌지만 유지는 하고 있었다가, 위만이 도망쳤을 때 신하로 받아 주었다가 배반 당해서 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삼국지"에 실린 "위략"에는, 고조선이 연나라와 서로 대결 구도에 있었다거나, 조선의 임금도 스스로 왕(王)이라고 칭했다거나, 대부(大夫) 예(禮)라는 신하가 전쟁 시도를 멈추게 하고 연나라 임금도 설득해서 잠시 평화를 이루었다거나, 비(否) 임금, 준(準) 임금 같은 임금이 있었는데 중국 지역을 경계했고 진시황에게는 겉으로만 섬기는 척 했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고려, 조선시대 학자들도 이 "위략"에 실린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인정했고, 현대까지 이 내용은 흔히 통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현대 한국 학자들은 기자가 고조선의 임금이 되었고 그 후로 그 자손이 임금의 자리를 계승했다는 부분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 편입니다. 그저 "고조선의 임금 핏줄에는 '서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인 기자가 있다"고 자랑하려는 상징적인 전설 정도로 생각하거나, 기자의 후예로 상징되는 중국 은나라, 주나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설화로 보곤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위략"의 기록이 "삼국지"에 소개된 것은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도 한참 지난 뒤의 일입니다. 그 전의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위략"이라는 책은 정확히 어떤 체재를 갖춘 책인지 알기도 쉽지 않고, 책 전체가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마치 전설들과 비슷해서 어느 정도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막연히 떠도는 이야기를 인용하는 느낌이 감도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3. 위략의 이야기들

만약 정체불명인 "위략"을 무시하고, "사기"의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춰 보면, 원래 기자시대의 조선은 어떤 구체적인 왕조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동 인근 지역 내지는 그곳에 사는 민족을 일컫는 말처럼 보입니다. 이 지역에는 특별히 강력한 임금이나 커다란 나라 체계가 없는 듯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연나라에 의해 점령 당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위만이 그 지역에서 도망쳐서 한반도 깊숙한 곳까지 온 후에 그 후예들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면서 새롭게 자기 세력을 모았고, 비로소 그렇게 해서 왕이 있는 나라를 건설했다는 말처럼 보입니다.

즉, 기자 시대의 고조선과 위만 시대의 고조선은 부드럽게 하나로 이어지는 역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 우리 교과서등에서는 "위략"의 이야기를 최대한 살려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한반도 북부로 이동한 것이고 고조선의 역사는 하나로 오랫동안 내려온다는 식으로도 설명을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위의 내용들을 보다보면, 요동 지역에 있었던 부족들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건설한 나라, 둘로 아예 구분되는 이야기인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위만 전 시대는 그 이후 세력과 직접 연결도 약하고, 정확하게 "왕국"이 있었는지, 제후가 다스리는 작은 나라가 있었는지, 그냥 부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지 알기 어렵고, 기원전 198년 위만 시대 부터, 왕국 다운 왕국이 출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만이 평양 지역에 근거해서 세운 나라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았을 때, 옛날 기자 시대 조선 지역 그러니까 요동에 가까운 쪽도 끌어 들이고, 차지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양 근처 지역과 옛날 기자 시대 조선 지역이 하나의 왕국이 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위만 시대 이후라는 것입니다.

요동, 요서 지역의 독특한 청동기 시대 문화들이 속속 발굴될 수록 이런 생각은 여러 가지로 조명을 받는 듯 합니다. 현대에 들어 와서는 요서를 중심으로 "기(箕)"라는 나라가 있었고, 바로 이 나라가 한반도 평양 지역과는 구분되는 기자 시대의 어떤 세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에 주목하는 이야기도 자주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위략"이 전설을 소개해 놓은 듯한 면이 있다는 점에서, "삼국지"에 기자 시대 때부터 고조선이 훌륭한 나라로 요동에서 평양에 걸쳐 유구하게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곳을 위만이 빼앗았다는 "위략"의 이야기가 굳이 각별히 소개된 이유를 상상해 볼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삼국지"는 조예(조조의 손자)의 신하였던 관구검을 시켜서 고구려를 공격하여 세력을 크게 꺾어 놓은지 머지 않은 시기에 나온 책입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이 차지한 한반도 북부 위만시대 고조선의 땅을 자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스스로 고조선의 후예를 자처하는 동예 등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킨 상태 였습니다.

그런데 "위략"에 실린 이야기는 지금 고조선 땅의 마지막 임금은 반란자, 배반자 출신이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중국 한나라는 의롭게 악한 사람을 몰아낸 것이지, 치사하게 억지로 한반도 북부 지역 일부를 차지했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렇게 보면 "위략"의 조선왕, 비, 준, 등에 대한 이야기도 평화롭고 온건하게 지내면서 중국의 발전된 문화는 잘 받아 들이는 것이 좋은 일이고, 괜히 전쟁 일으키고 잘난척 하면 망한다는 내용이 주제인듯도 보입니다.

그러니까, "위략"에 실린 이야기가 당시에 유행한 것은, 고구려와 중국의 전쟁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전쟁 없는 시기를 그리워한 것, 혹은 고구려를 몰아낸 중국 위나라, 진나라 사람들이 한반도 북부는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로 말하고 싶어한 것이 원인 아닌가 상상해 봅니다.

기자가 한반도 북부를 배경으로 고조선에서 활약한 이야기 자체는 "삼국지"보다 시대가 앞서는 "한서"에도 팔조금법 이야기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야기의 뿌리 자체는 어느 정도 깊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니까 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위략"의 이야기로 기록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랬던 것이 중국 한나라가 위만 왕조의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후에, 당시 사회 분위기에 따라 전쟁은 그만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 무렵에 특히 돌던 이야기의 몇몇 부분이 널리 퍼져 자리를 잡은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4. 한반도와 요동

이런 식으로 "위략"에 나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는 관점을 갖고 보면, 전국시대의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요동 근처에 있던 "조선"이라는 지역에 살던 부족에 관한 기록이나 기자의 후예를 자처한 집단의 이야기일 뿐, 이후 우리 역사가 계승해 나가고 있는 한반도 북부 평양을 수도로 하는 고조선에 대한 이야기와는 직접 상관은 없는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동 지역 청동기 시대 유물, 유적들을 두고, 우리가 흔히 이어지는 역사로 생각하는 고조선 이야기와는 따로 분리해서 보고, 오히려 중국 내륙에 더 가까운 요동이나 요서 중심의 별도 세력인 "기자", "기자 조선" 세력으로 생각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요동 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한반도 북부 중심의 고조선을 연결해서 보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주장이 우세해 보입니다.

일단 "사기"에서는 위만이 평양 인근을 수도로 건설했던 왕조를 요동 지방의 "조선"과 한 항목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지역이 자연스럽게 같은 문화권에 있었던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당시에 생각 했거나, 적어도 위만이 적극적으로 그렇게 요동 지역의 조선을 계승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혹은 "위략"의 이야기와 궤를 같이 해서, 연나라가 요동 근처를 빼앗았을 때, 그곳에 있던 세력이 평양 인근 지역까지 도망쳐서 그 문화를 퍼뜨리고 이어간 배경이 있었다는 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고조선 멸망 무렵에는 두 지역의 문화가 하나라는 생각이 더욱더 널리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나중에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두 지역을 고조선의 후예들이 다시 계승하는 형태로 합쳐버리게 됩니다. 특히, 고구려 광개토왕 무렵이 되면 요동 지역도 이미 고구려의 중요한 지방 영토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이무렵쯤 해서는 이미 "위략"등을 통해서 전해진, 고조선이 요동 지방과 한반도 북부에 이어져 있는 채로 계속 내려왔다는 생각은 더욱 유행하기 좋은 생각이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삼국지"에 동예와 삼한 사람들이 기자 시대 고조선을 계승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묘사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고조선 멸망 무렵에도 한반도 전역에 요동 지역에 있던 부족들의 문화적 후예가 바로 우리라는 생각이 퍼져서 내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도 현대에 들어서 여전히 요동 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를 하나의 계통으로 보는 증거들이 중요하게 평가된다는 점들이나, 위만 왕조의 멸망 이후에도 기자 시대 고조선의 문화를 계승하는 곳으로 계속해서 한반도 지역이 지목 되었고, 이런 생각은 갈 수록 굳건해졌다는 면도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아마 실제 기자 시대의 한반도 지역에, 흔히 떠올릴 만한 궁궐과 관청이 있고 대신, 장군, 이속, 병졸이 있는 그런 나라가 정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동에서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고조선 지역에 공통된 문화, 풍습과 규칙 같은 것이 정리된 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잡혀서 퍼져 있었고, 나중에 위만 시대 이후에 사람들이 전설로 이야기할만한 위대한 인물, 높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의 단초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 합니다. 그런면에서, 당시 고조선 지역에 있던 "임금"이라 할만한 사람은, 전제왕권을 가진 지배자라기보다는, 제례와 의식의 주제자, 종교적 제사장의 성격이 좀 더 뚜렷하다는 시각이 그럴싸한 이야기로 비친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서" 지리지에는 중국 한나라가 멸망시킨 고조선의 풍속으로 기자의 뜻을 이어서 갖추어 놓았다는 법령과 풍습을 소개해 놓은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법령으로,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인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한 자는 노예로 만들고 죄를 용서 받으려면 50만전을 내야 한다"는 것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돈 내고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부끄럽게 생각하여 사람들이 혼인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며, 그외에도 도둑이 없어서 대문을 열어 놓고 산다거나, 여자들은 정조를 지키고 음란하지 않다고 한다는 점도 나와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보고 법을 만들고 범인을 잡고, 형을 집행하는 체계가 있었고, 돈을 만들고 유통시키려는 발상이 있었고, 노예 제도가 있었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기자 시대 이후, 고조선은 그 이전과 다르게 엄격한 예의와 체면이 강조 되고 있고, 남녀관계에 대한 관점도 엄격해졌다고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5. 단군 시대 고조선 전설의 역사

삼국시대의 고구려에서 "기자신"과 "가한신"을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 "구당서"에서 고구려의 해괴한 귀신 숭배 문화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고구려 시절에 이미 머나먼 예전 시절의 임금에 대한 숭배 풍습으로 독특한 것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와 연결되어 있으니, 그런 숭배 풍습 중에 고조선에 대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자 시대의 조선과 위만 시대의 조선을 연결해서 생각 하면서 그 후예가 삼국 각 나라의 각 지역으로 계승했다는 생각이 당시에 잘 퍼져 있기도 했으니, 그 공통 문화권을 상징하는 옛 임금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 왕검 이야기와는 꽤 다른 점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 합니다. 해모수 이야기와 단군 이야기가 혼란스럽게 섞여서 내려오고 있는 상황을 보면, "단군"이라는 명칭이 삼국시대에 구체적으로 있었는지, 어땠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단군에 대한 전설의 원형은 기본적으로는 지금도 전국 각지에 있는 "오랜 옛날에 영험한 산에 신선스러운 사람이 있었다"는 형태로 내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런 전설 중에서 고조선의 중심지이자, 고구려의 중심지인 평양 인근을 배경으로하는 이야기는 고려 전기에 상당히 유명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부각된 듯 합니다.

묘청이 주장한 전국의 신선들을 숭배하는 8성당의 숭배 대상 중에 단군과 관련이 깊어 보이는 "구려 평양선인" "호국백두악 태백선인"이 있고, 동시에 묘청의 숙적인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도 평양이라는 지명을 언급할 때 꽤 이례적으로 그 지역에 왕검에 관한 신선 전설이 있다고 굳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묘청이 반란을 일으킬 때 자신의 근거지인 평양에 대해 선전을 하면서 그 지역의 신비로운 전설을 널리 퍼뜨려서 당시에 유행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이미 당시에 삼국시대 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상당히 유명한 전설이었기 때문에 묘청 일파가 중요시여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단군 왕검 이야기는 이렇게 고려 전기에 평양 지역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전국적으로 유행되기 시작한 이야기가 고려 후기에 정착된 모습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유행한 불교에 빗대어 표현한 묘사가 많이 나타나기도 하고, 고구려의 뿌리에 대해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전설인 부여에 관한 전설들과도 섞인 이야기로 나타난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이때에 단군 시대를 기자 시대 이후의 "조선"과 구분하여 특별히 "고조선(古朝鮮)"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고조선"이라는 단어도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고려 후기 "제왕운기" 정도의 기록에 이르면 단군 왕검을 부여, 삼한 계통의 모든 나라의 확고한 뿌리로 보면서 고조선과 관계 있는 나라들 전체를 아우르는 먼 옛날의 원조로 삼고 있습니다. 여기에, 몽골의 침입을 피해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 머물렀을 때, 강화도를 배경으로 하는 전설들도 부각되었을 것으로 생각 합니다.

단군 전설은 이후 조선 시대에 옛 기록을 연구하고 "조선"이라는 이름에 대해 파헤치기 좋아한 유학자들에 의해, 좀 더 진지하게 해석되기도 했고, 마침내 세종 무렵에는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역사를 시작한 임금으로 지정해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고, 드디어 전국에 널리 기초 상식으로 제도적으로 홍보된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렇게해서, "단군 시대"라고 하면 먼 옛날의 대표로 자리잡게 되어, 조선 후기 무렵이 되면 막연히 "먼 옛날"을 배경으로하는 전설들이 단군 시대의 이야기로 정착되기도 하고, 가문의 조상이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할 때 배경을 단군 시대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조선 말엽에는 도술, 주술, 무속에 대한 신비스러운 전설에서 오랜 옛날의 신비로운 이야기로 단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들도 나오게 된 듯 합니다.


그 밖에...

- 모자란 솜씨로 이런저런 이야기 소개해 보려다가 제가 틀린 부분이나 잘못 생각한 부분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지적해 주실 말씀이나, 의견 있으시면 덧글 주시면 무엇이건 감사히 읽겠습니다. 이 글은 단군과 전설 속의 이상한 고조선 사람들 시리즈 부록 입니다.

이 다음에는 고조선에 관한 이야기의 배경으로 흔히 언급 되는 청동기 문화에 대한 글을 올려 보려고 합니다. 진지한 이야기 보다는, 우리나라 청동기 유물, 유적에 재미난 이야기 거리가 있을만한 것들을 간단하게 훑어 보는 정도로 해 보겠습니다.

핑백

  • 게렉터블로그 : 단군과 전설 속의 이상한 고조선 사람들 2012-10-24 19:14:39 #

    ... 글을 앞으로 한 편씩 차례로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신지 2. 여수기 3. 팽우 4. 선인 5. 고시례 6. 배천생 7. 비서갑녀 8. 부루 9. 삼랑 부록1) 전설 속의 고조선 사람들과 실제 역사 그 밖에... 몇 년 전 평양에서 "단군릉"이란 것을 건설한다고 하면서, 주변을 장식하는 석상들을 세울 때에도 위 인물들은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 ... more

덧글

  • 역사관심 2012/10/25 09:21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게렉터 2012/10/25 14:09 #

    감사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2/10/25 12:58 # 답글

    잘 보았습니다. 기후와 관련해서는 요서 인근에서 기후 관련 유물이 발굴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동은 기후로 대표되는 중국계 세력과는 별개의 문화권으로 파악되고 있더군요. 게다가 기자동래설 자체가 현대 한국사에서는 사실무근으로 비판되고 있는지라... "요동의 기자 세력"은 상정하기 어렵지 않나 생각됩니다.
  • 게렉터 2012/10/25 14:12 #

    말씀 감사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모아서 소개하는 정도로 이야기 하다보니 대강 "요동 근처"라고 썼는데, 말씀하신대로 다른 오해가 없도록 이부분은 "요서"로 밝혀 쓰겠습니다.

    궁금한 것이, 야스페르츠 님께서는 기후와 연나라가 차지한 요동 지역의 "조선"은 실제로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 하십니까? 그렇다면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이야기와 기후 관련 유물 내지는 조선에 대해서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 야스페르츠 2012/10/25 21:11 #

    저도 기자동래설은 완전히 가짜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기후 관련 유물로 보아도 기자 세력이 이주했다고 해봤자 기껏해야 요서 방면이 한계이고, 요동 지역은 별개의 문화권이거든요. 기자조선 관련 문헌도 선진시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철저하게 한나라 이후에 보이는 점도 지적할 수 있겠지요. 고조선의 자체적인 숭조설화(?)라기보다는 한나라에 의해 낙랑군이 형성된 이후에 성립된 신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위만 이후에나 생긴 신화겠죠.

    참고로 송호정 교수는 요동 지방의 고인돌+미송리식 토기와 서북한 지방의 고인돌+팽이형 토기를 고조선 관련 문화권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두 문화권이 이어지는 지점인 압록강 인근에서 문화적 단절이 좀 있어서 섣불리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게렉터 2012/10/26 23:04 #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비파형동검처럼 요서-요동 문화가 연결되어 있는 것들도 상당히 나타나는 듯 하고, 요하 이서와는 관계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위만 이전 시대 고대 문화의 유물, 유적이 다소 약한 듯 해서, 저는 어떻게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높지 않겠나하는 생각도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은나라 충신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해서 예의와 도리의 이상적인 나라를 건국했다"는 기자동래설이 문자 그대로 사실일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겠지만, 저는 흔히 고조선의 역사를 설명할 때 흔히 "위략"의 기록을 가져와서 설명하면서도 "위략" 기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자" 자체만은 너무 골라서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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