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왕 랄프 (Wreck-it Ralph, 2012) 그리고 투표합시다. 영화

"주먹왕 랄프"는 "다고쳐 펠릭스"라는 옛날 오락실용 비디오 게임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랄프가, 따돌림 당하는 자신의 악역 신세에 한탄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랄프는 따돌림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도 훈장을 따려고 합니다. 그래서 랄프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모험을 펼친다는 이야기 입니다.


(포스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고전 게임"이라고 불리우는 옛날 게임들에 대한 향수를 소재로 삼은 이야기였습니다. 재미난 면이 많은 영화입니만, 먼저 결정적으로 아쉬운 면부터 꼽아 본다면, 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의 배경이 대부분 "슈가 러쉬"라는 카트 레이싱 게임 한 가지에 그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 핵심이 랄프가 다른 게임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이니만큼, 랄프가 이 게임 저 게임 돌아다니며, 여러가지 게임의 특징들, 옛날 게임들의 우스꽝스러운 점, 정겨운 점들을 이야기 거리로 삼는 것이 재미거리가 될만할 것입니다. 시작 부분은 정말 그런 이야기처럼 생겼기도 합니다. 팩맨에서부터, 스트리트 파이터 2, 소닉의 등장인물들이 한데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가하면, 화면을 향해 총을 쏘아야 하는 최신 FPS 게임 속으로 주인공이 들어 가는 내용도 잠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러다가 주인공이 "슈가 러쉬" 게임 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거기에서 나올 줄을 모르고, 오직 "슈가 러쉬" 게임 속 이야기로만 계속 진행되다가 그냥 이야기가 끝나 버립니다.

그나마 "슈가 러쉬" 게임 속이 별로 재미난 곳도 아니어서 더 아쉬웠습니다. "슈가 러쉬"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실 중간에 잠깐 "보너스 게임"나오는 장면을 제외하면 별로 비디오 게임 같은 특징도 없는 곳이고, 특별히 진기한 구경 거리가 많은 곳도 아니었다고 느꼈습니다. 이 "슈가 러쉬" 게임 속에서 벌어지는 일도, 따돌림 당하는 어린이가 꿈과 용기를 잃지 않고 자기 자신 그대로의 모습에 자신감을 갖고 날뛰면 복이 온다는, 어린이 애니매이션들이 처음 나올 때부터 하던 이야기를 그냥 그럭저럭 또 펼쳐 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등장인물들의 모습이나, "슈가 러쉬" 세상 풍경도 "헨젤과 그레텔" 이래로 너무 자주 봐온 동화속 풍경의 흔하디 흔한 모습으로 되어 있어서 그럭저럭 듣던 장단 또 두드리는 정도였다는 점도 조금 지루했습니다.


(슈가 러쉬 속 세상)

굳이 유명 게임의 등장인물들을 등장시키지 않더라도, 플랫폼 게임, 슈팅, 벨트 스크롤 액션 게임, 퍼즐 등등 전형적인 장르를 이루는 여러가지 오락실 고전 게임의 특징들을 다양한 이야기 거리로 꾸밀 수는 있었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다채롭게 나가지 않고, 그냥 성에서 왕, 공주가 나오는 평범한 동화로 꾸미기 좋은 배경 게임을 하나 골라서 그 게임 한가지에만 주저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사실 초반에 잠시 나온 FPS를 소재로 하는 이야기 같은 것은 게임 장르의 특징을 살리는 것이 어느 정도 재미나게 펼치기도 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기대를 하게 되다보니, 이 영화가 "슈가 러쉬" 이야기만 너무 많이 하는 것이 더 맥 빠지지 싶었습니다. 아마 속편을 만들어서, 속편은 또다른 게임들을 무대로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만든 것 아닌가 합니다만, 에피소드별로 계속 이어지는 TV물도 아닌다음에야 "슈가 러쉬"만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것이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일단 이것만 넘겨 놓고 보자면, 나머지 면에서는 어린이 애니매이션을 꾸며 내는 틀에 새로운 소재를 부어 넣는 방법이 잘 맞춰진 재미난 영화였다고 생각 합니다. 일단 이 영화를 돌리는 축은 크게 두 가지로 보였습니다. 하나는 "토이 스토리"처럼 우리가 보는 일상 세계 너머에 신비로운 비밀 세계가 있다는 방식의 이야기 입니다. 여기에다가 최근에 자주 등장한, 흔한 이야기들의 이어져 내려온 관습들을 소재로 삼아 농담거리로 삼거나 불평하는 이야기도 또다른 축으로 보였습니다. 옛날 대중문화의 향수를 끌어 들이면서 어린이 관객 이외의 관객들도 관심을 끌어 보려고 하는 것은, "인크레더블"에 가깝기도 했고, 전형적인 이야기에서는 악당이어야할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구도는 "슈렉" 시리즈나, "메가 마인드"와 가까운 모양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영화가 선택한 "추억을 돋우는 소재"인 고전 게임은 그런 중에서도 방향이 좋았다고 생각 합니다. 일단 "고전 게임"이라는 소재가 어린이 관객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볼 나이 많은 관객들에게 옛 생각을 불러오면서 즐거움을 불러오게 하는 면이 어느 이야기 거리 못지 않게 강하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도 1980년대에 오락실에 가서 팩맨을 하던 중장년층부터, 1990년대에 오락실에 가던 20,30대에 같이 관통하는 재미 거리가 됩니다. 이런 점은 이야기를 정겹게 받아들이게 되는 면이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오락실에서 줄서서 오락하기 위해 기다리는 아이들이 다음에 한 판할 권리를 표시하기 위해 오락기 위에 내 동전을 올려 놓는 풍습이 나오는데, (미국 오락실에서도 이렇게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장면은 그냥 슥 지나가고 마는 사소한 부분이지만 어째 심금을 울리는 맛이 있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최근의 고전 게임 유행을 재빨리 할리우드가 소재로 잡아챈 것으로 보입니다. 따져보자면야, "주먹왕 랄프"보다는 이런 요즘 고전 게임 유행의 대표로 꼽을 만한 유튜브의 "Angry Video Game Nerd" 같은 시리즈가 훨씬 더 정곡으로 고전 게임의 추억을 재미거리로 살려 나가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디오 게임"이라는, 어찌보면 사소한 놀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목숨을 걸고 온 신경을 쏟으며 웃고 우는 모습을 재미 삼아 보여주고, 옛날 구닥다리 비디오 게임의 부실하고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웃음거리로 삼는 이야기들은 우스워서 재밌기도 하고, 옛날 생각도 많이 나게 해서, 오히려 "주먹왕 랄프" 보다도 훨씬 더 원조답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더 편안하고 어린이 애니매이션 다운 안정된 볼거리로 펼쳐낸 것에 "주먹왕 랄프"다운 한계도 있고 성취도 있다고 돌아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영화는 비디오 게임을 소재로 잡은 덕택에, 옛 비디오 게임 화면 표시에서 흔히 보이는 저해상도 화소(pixel)가 도드라지는 모양이라든가, 애니매이션이 뻑뻑하게 표시되던 한계 같은 것이 독특하고 재미난 이 영화만의 시각적인 표현 거리로 삼아서 화면을 즐겁게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괜찮은 방향이었다고 느꼈습니다. 칩튠류의 옛 비디오 게임 음악스러운 전자음을 살린 몇몇 소리, 음악들도 재미난 점들이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다고쳐 펠릭스 게임 화면)

그 밖에는, 주요 인물인 랄프와 펠릭스의 표정 표현과 목소리 연기가 좋았다는 점도 영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깨끗한 표준적인 애니매이션 등장인물 같은 랄프에 비해, 펠릭스는 좀 더 재밌었다고 생각 합니다. 목소리를 맡은 배우 잭 맥브래이어의 주특기가 한껏 살아 있어서, 어림없이 얼빵하면서도 순박한 면이 잘 살아 있고 그러면서도 옛날 동화 뮤지컬 같은 수다스러운 면도 엮여 있는 개성이 풍부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 밖에...

현재 우리나라 게임 산업은 나름대로 세계 수준이기도 하고, 자유의 투사, 폭스레인저에서부터 시작해서 RTS 모방작들이 쏟아지던 시대를 거쳐 온라인 게임 전성기까지 컴퓨터 게임 산업에는 우리만의 역사라면 역사도 있다고 생각 합니다. 게다가, "게임 속의 판타지 세계에 들어가는 이야기"가 하나의 장르를 이룰 정도로 이미 소설들도 쏟아져 나와 있는 마당에, 우리나라에서는 "주먹왕 랄프" 같은 영화가 제작되고 흥행할 수 없는지, 아쉽기도 하고 여러가지 다른 제반 상황에 대한 비교도 해보게 되고 그렇습니다.

본문 내용과 관계 없습니다만, 유신헌법으로 국민들의 대통령 선거가 폐지 되기 전에, 우리나라 각지의 시골 마을에서는 대통령 선거날이 되면 중요한 잔치집에라도 가듯이 다들 옷단장을 하고 온 가족이 함께 길을 나서서 투표하고 오는 것이 중요한 행사 같이 펼쳐지는 풍경이 있었습니다. 다시 대통령 선거를 겨우겨우 시작시킨 후로, 점차 투표율이 낮아지고 있기는 하고, 어찌보면 지금 돌아보기에 그때 뒷짐지고 두루마기에 바지 저고리 차림으로 근엄하게 투표하러 나서든 어른들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면도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그게 또 멋이라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됩니다. 다들 오늘 투표 잘 하시고 오시기를 바랍니다.

덧글

  • wizmusa 2012/12/19 23:03 # 삭제 답글

    저는 폭스레인저 정품 구매자입니다. ^^ 박스 포장을 열면서 두근거렸던 기억이 나네요.
  • 게렉터 2012/12/20 23:36 #

    반갑습니다! 폭스레인저는 괴상하게도 한국 컴퓨터 게임의 시초작 중 하나면서도 음악이 아주 좋았다는 점도 기억에 남습니다.
  • 남선북마 2012/12/25 17:15 # 답글

    아케이드 게임을 소재로 한 토이스토리더군요.. 특히나 슈가러시 파트부터 전형적인 디즈니 공식으로 가던데 뭐.. 나쁘지 않던데요..
  • 게렉터 2013/01/08 19:52 #

    말씀하신 내용에 공감합니다. 다만 저는 슈가 러쉬 이후로 너무 전형적으로 가는 것이 약간 김빠져서 싱거웠습니다.
  • 치즈 2013/01/03 23:25 # 삭제 답글

    그러고보니 우스꽝스러움과 멋스러움은 종이한장 차이인 것 같습니다.
  • 게렉터 2013/01/08 19:53 #

    그게 어느 수준인지 알고, 분수, 수준, 수위에 맞게 잘 꾸며 가느냐 아니냐 차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 원한의 거리 2013/10/26 13:01 # 삭제 답글

    이 애니메이션은 우리말 더빙판도 아주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주인공 랄프 역을 맡았던 정준하의 경우에는 연예인 더빙은 대개 질이 형편 없다는 편견을 깨고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정준하가 개그맨일뿐만 아니라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음을 감안하면 아주 의외는 아닙니다.

    특히 연예인 더빙의 경우에는 유명 개그맨들을 불러와서 제대로 된 연기는 뒷전으로 하고 TV 프로에서 하던 개인기같은 것에만 열중하는지라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이런 예상을 뒤엎고 상당하 멋지게 더빙을 해준 경우인지라 향후 연예인 더빙의 지표로 삼아도 될 듯 합니다
  • 게렉터 2013/11/03 22:23 #

    과연 특수한 사례였다는 생각 듭니다. 말씀하신대로 문제점들이 잘 막아져있었다면 연예인더빙의 지표로 삼아도 될만하다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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