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래자 설화의 뿌리는 어디인가? 기타

아래 이야기는 제가 괴물 백과 사전 만들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읽다가 본 것으로, 당나라 때 책인 "집이기"에 실려있다는 기록으로 "태평광기" 456권에도 실려 있습니다.


- "주근"은 진주, 채주 지방의 사람으로 여남에 놀러갔다가 한 객점에서 묵게 되었다. 당시 객점 주인 "등전빈"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아하고 아름다웠으나 항상 요괴에게 홀려 있었다. 밤이 되자 매우 곱고 깨끗한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등전빈 딸의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방안에서 매우 즐겁게 담소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주근은 잠을 자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 기다리다가 활을 쏘아 젊은이를 맞추었다. 젊은이가 도망가자, 핏자국을 따라 추적했는데, 핏자국은 집에서 5리쯤 떨어진 고목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고목을 베어 냈더니 눈처럼 흰 뱀이 있었는데, 길이는 1장 남짓이었고, 화살을 맞고 죽어 있었다. 등전빈은 주근과 딸을 결혼시켰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의 대표적인 설화집, "수신기")

보시다시피, 밤마다 찾아오는 정체 불명의 남자, 남자의 정체는 요물, 남자를 무기로 찔러서 추적한다는 것 등등의 내용이, 우리나라 역사의 후백제 견훤 설화, 즉 야래자 설화 유형과 비슷합니다. 견훤 이야기에서는 보라색이고, 여기서는 흰색이라는 점, 견훤 이야기에서는 침을 꽂아 추적하는데, 여기서는 핏자국으로 추적하는 점, 견훤 이야기는 지렁이, 여기서는 뱀 이라는 점 등이 다릅니다.

그런데, 견훤의 이야기가 신비로운 왕의 이야기로 멋있게 갖다 붙인 것 처럼 보이는 이야기인데 비해서, 이 이야기는 시대도 더 앞서거니와 담백하게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서, 아마 이 당나라 이야기가 더 오래된 형태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태평광기"에는 이 외에도 비슷하게 둔갑한 동물이 밤마다 여자를 만나고 간다는 내용들이 여러 편 더 있습니다.

제 생각에 중국에서 소설, 지괴소설이 크게 유행했던 남북조와 당나라 시대 때 나온 이런 이야기들이 이 설화의 원조 아닌가 생각 합니다. 아마 당나라 때 쯤에 책으로도 만들어져서 여기저기 유통되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신라의 장보고로 상징되는 활발한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에 의해 신라, 일본 등등으로 퍼져 나간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왜 하필 이런 이야기가 견훤 설화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당시 그만큼 문화 교류가 활발했다는 이야기라든가, 이 이야기가 나타내는 몇가지 속성이 당시 견훤과 관련된 어떤 사회의 인식과 비슷하게 닮아 있었을거라는 생각도 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육조시대 전후로 중국 소설의 성장은 환상적이라서, 특히 환상소설과 SF단편 소설은 정말 아름답고 신비로운 것들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전반적인 수준도 대단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송나라때 나온 "태평광기"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짧고 간단해서 신비로운 것 부터, 완연한 소설의 형태를 갖춘 것 까지 끝이 없을 듯이 많은 분량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문화를 잘 배워와서 우리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잘 활용해서 써먹었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대표적으로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조신의 꿈" 설화는 소설적인 표현과 구성이 매우 훌륭하기도 한데, 바로 이렇게 탄생된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 합니다.

육조시대, 당나라의 중국 소설 발전에 의해서 특히 수준높은 농담집이 나오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소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소림"은 중국 삼국시대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실린 농담으로 대표적인 것이 요즘 흔히들 아는: 졸고 있는 학생에게 "링컨을 누가 죽였어?"라고 물어 봤더니 "제가 안죽였는데요"라고 대답한다는 농담이 실려 있습니다. "소림"에는 진문공의 아들을 누가 죽였냐고 물어 봅니다. 이게 그 먼 시절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연히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이 농담이 같이 생겨서 전해진 것이건, 아니면 "소림"에 실려서 당시 중국에 유행했던 농담이 긴긴 세월동안 조금씩 조금씩 퍼져서 "링컨을 누가 죽였어?"로 농담이 변형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건 간에, 이 농담은 "쌍팔년도 농담" 정도가 아니라 1,800년 가량 묵은 농담이면서도 지난 1,800년간 끈질기게 유행해서 요즘 농담 책에도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덧글

  • 무명병사 2013/05/31 00:21 # 답글

    뱀이 아니라 지렁이라는 전승도 있고, 용이라는 전승도 있어요. 뭐, 지렁이라고 한 건 굳이 말씀을 안드려도 짐작하시겠지만, 견흰 디스랍니다(...)
  • 게렉터 2013/06/03 21:05 #

    똑같은 형식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는데 금돼지인 전설도 있고, 조선 후기까지 이런 형태로 변형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유행도 널리한 편인 전설이라고 생각합니다.
  • 중문과 2013/05/31 07:50 # 삭제 답글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게렉터 2013/06/03 21:05 #

    도움되었다니 기쁩니다.
  • 미마나 어라하 2013/05/31 14:34 # 답글

    일본서기 고사기가 8세기니까 당나라하고 시점이 비슷하네요. 야마토 신화가 당나라로 전승된게 아닐까요.
  • 게렉터 2013/06/03 21:07 #

    제가 이런 분야에 뭐라고 단언을 드릴 말한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제 느낌으로는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육조괴담들에서 이런 형태의 이야기들은 좀 더 다양하게 나타나서 이러저러한 발전 관계를 거쳐서 이런 형태로 정착되었구나 싶은 역사도 대략 드러나고 있고, 윗글에 나와 있는 대로, 중국쪽 이야기가 "지나가는 사람"에 대한 떠도는 이야기 형태로 되어 있어서 보다 원형으로 보입니다.
  • 역사관심 2013/06/01 13:47 # 답글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견훤설화도 몰랐는데 배웠습니다. 고려때 편찬된 삼국시대의 지괴문학집 '수이전'이 어디선가 튀어나와주면 얼마나 환상일까요.
  • 게렉터 2013/06/03 21:08 # 답글

    맞는 말씀이십니다.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밝힌다는 쪽으로만 대중 역사 교육이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데, 그런 것에 집착하기 보다는 다채로운 이야기와 재미난 사연들을 많이 발굴해 내서 지금 현재 우리 입장에서 우리 역사, 전통 문화를 다양하게 즐기고 되살릴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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