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살인자를 향하여 옷을 벗으세요 (Nude per l'assassino, Strip Nude for Your Killer, 1975) 영화

70년대 이탈리아 연쇄살인마 영화들의 제목이 괴상한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만, 이것은 또 새롭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영화의 장사 밑천을 제목에 드러내니까 더 특이한 겁니다. 게다가 이 영화 "당신의 살인자를 향하여 옷을 벗으세요"는, 그 제목 값을 톡톡히 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정말로 간단하게 등장인물들을 죽이는 연쇄살인마의 공격과 그 사이 사이에 아름다운 여자 희생자들의 몸매를 보여 주는 장면들을 가느다란 줄거리로 살짝 묶어 놓은 내용이 거의 전부인 것입니다. 마치 2000년대 조직폭력배 소재 한국영화의 제목을 "바보 조폭들과 갑작스런 신파극 결말"로 붙이는 형국인 것입니다.


(포스터)

이 영화를 보고 나면, 80년대와 90년대에 양산 되듯 쏟아져 나왔던 다양한 "13일의 금요일", "할로윈" 시리즈 아류작들이 생각 납니다. 그런 영화 중에는 내용이 별로 없는 것들도 많아서, 그냥 살인자가 여러 사람 돌아 다니면서 칼질하고, 사이사이에 다른 자극적인 장면들이 좀 들어 있는 것이 전부인 이야기들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별 걱정 없이 대충 그럭저럭 "칼질하는 살인마 나오는 공포 영화"라며 한 편 적당히 팔아치울 수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부류의 영화들은 여러 나라에서 긴 시간 동안 많이도 나왔던 것입니다.

한국영화 중에서 꼽자면 2000년 초에 쏟아져 나왔던 좀 대강 만든 여름용 공포영화들을 꼽을만 하겠습니다. 전형적인 영화로는 "찍히면 죽는다"가 생각나는데, 이 영화와는 심지어 살인마의 동기와 정체도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 합니다. 별 밑천 건질 것이 없는 대충 만든 영화이지만, 한채영 같은 요즘엔 거물로 취급되는 배우가 중간 정도 비중의 역할을 맡아 나온다는 것도 일치하는 점입니다. 이 영화에는 1970년대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에 자주 출연한 에드위지 페네크(Edwige Fenech, 에드위지 페네치, 에드비지 페네쉬)가 조연 정도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고 대충 만든 듯 보이는 영화이지만, 기이하게도 바로 그런 특징 때문에 주목 받는 영화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80년대, 90년대에 "13일의 금요일" 시리즈의 잡다한 아류작들이 범람하기보다 10년 이상 앞서서, 그러니까 원조가 제대로 나오기도 한참 전에 아류작 같은 영화를 먼저 선구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묘한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칼질 하는 연쇄살인마가 나오면서 하나 하나 죽어가는 것으로 내용을 채우고 대충 적당히 배경이나 배우를 달리해서 개성을 살리는 후다닥 만든 영화들은 요즘 한국영화에서도, "고사"나 "4교시 추리영역" 같은 영화에 이어지며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영화는 이탈리아 영화계가 이미 70년대 중반에 그런 영화들을 양산해 내는 경지로 들어 왔다는 증언과 같은 의미가 서려 있다면 서려있는 영화라고도 잠깐 생각 해 봅니다.

이제부터, 이 영화의 결말을 포함해서 모든 줄거리를 다 밝혀 보겠습니다.


(봐도 안봐도 상관 없는 추리 장면)

우선 이 영화는 시작되면, 산부인과 진료를 하는 모습을 불길하게 화면에 담아내면서 출발합니다.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고 누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이어지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뜬금없이 바로 어느 수영장 장면으로 건너 뜁니다.

이 수영장 장면에서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에 해당하는 인물이 지나가는 수영하는 여자 한 사람에게 접근하고, 자기는 잡지 사진 찍는 사진 작가인데, 여자가 좋은 모델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 나옵니다. 말하는 것이 끈적거리는 것이 지나가는 파리라도 달라 붙어 사망해 버릴 것 같습니다. 사진 모델이 되어 달라고 접근한 남자 주인공은 옷을 벗은 사진을 찍자고 하더니 곧이어 뭐 사진하고는 상관 없는 일을 하는 식으로, 바람을 피우며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이 영화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이 바람둥이 사진작가는 실제로 잡지 사진을 찍는 사진 스튜디오의 사진작가 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여러 사람들이 돌아 가면서, 오토바이 헬멧으로 얼굴을 감춘 정체 불명의 칼질 살인마에게 차례로 당해서 죽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줄거리의 사실상 전부입니다.

몇년 앞서 나온 "피투성이 아이리스 사건" http://gerecter.egloos.com/5220647도 줄거리가 간촐한 형식이긴 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사이사이에 몇가지 특이한 연출이나 뒷이야기, 옆이야기 거리들이 펼쳐지고 있고, 몇 가지 눈에 뜨이는 소재와 배경을 특징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정말 다른 내용들이 적습니다. 중간에 잠깐 신문기사에 실린 사진에서 희생자의 보석을 보고 뭔가 단서를 추리하는 것 같은 내용이 살짝 나오긴 합니다만, 전체 내용에 거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진 스튜디오)

줄거리가 아주 단순한 이 영화는 그래도 내용을 채워 넣기 위해서, 이 사진 스튜디오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좀 특이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면서, 눈길을 끌거나 헛웃음을 한 번 웃게 해 준뒤에, 그 다음 장면에서 죽게 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의 몸을 보여 주는 장면들을 흩뿌리듯 자주 넣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자 모델과 몰래 바람이 난 실질적인 스튜디오 사장인 유부녀라든가, 여자 모델-남자 직원 등등 사이에 혼란스럽게 양다리,삼다리를 걸치고 있는 여자 모델 등등이 나옵니다. 비록 조연이지만 가장 출연료가 높아 보이는 에드위지 페네크는 짧은 머리로 새로운 느낌을 강조했는데, 본래 사진 작가를 꿈꾸지만 출세하기 위해서 남자 사진 작가에게 "내 몸이 모델로서도 괜찮지 않냐"면서 모델이 되겠다고 으슥할 때 덤벼 드는 직원으로 나옵니다.

등장인물들 중에 가장 한심하지만 가장 인상이 깊은 인간은 이 스튜디오의 바지 사장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볼품 없는 남자 입니다. 이 남자는 스튜디오의 한 여자 직원을 자동차에 태워 출근시켜 주겠다고 하면서 길가에서 데려 가는데, 난폭운전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가서 자기 집으로 이 직원을 끌어 들입니다.

그곳에서 바지 사장은 여자 직원을 덥치는데, 여자 직원에게 두들겨 맞고 그냥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자 좌절하며 별별 헛소리를 다하면서 징징거리는데, 그러자 여자 직원이 보다 못해 협조해 주려고 합니다. 바지 사장은 옳다꾸나 하며 신명나 하는데, 이번에는 스스로 실패해 버리고 말아서, 더욱더 절망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바지 사장은 혼자 쓸쓸히 자신의 인형을 들고 "내 옆에 있는 건 너 밖에 없다" 따위의 말을 주절거리며 집안을 거니는데, 그때 연쇄살인마에게 공격을 받아 죽어 버립니다.


(에드위지 페네크)

하얀 살결의 희생자 피부에 새빨간 빛깔이 뿌려지는 장면들이 자연히 색조를 내세우고 몇 차례 화면에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슥삭 만든 칼질 살인마 영화의 평균에서 오락가락하는 정도 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럴듯한 장면을 찾으려고 시도 한다면, 후반부에 나오는 에드위지 페네크가 사진을 찾으러 잠입하는 장면 하나는 볼만 합니다.

이 부분에서 부상을 당해 병원에 누워 있는 남자주인공이 살인마를 밝힐 증거가 사진 현상실에 있다고 하여, 에드위지 페네크는 혼자서 어두운 사진 현상실로 들어 갑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독한 "이창"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말을 듣고 아파트에 잠입하는 그레이스 켈리와 같은 구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서로 전화를 주고 받으며 서서히 사진을 찾아 걸어 가고, 어둠을 표현하면서도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조명이 딱 맞아서 다른 느낌입니다. 밤 장면인데도 안보여서 답답한 느낌이 없고, 불이 갑자기 꺼진다든가, 쿵하는 소리가 들린다든가 하는 것이 차근차근 잘 나와서 긴장감을 살살 불어 넣는 것이 훌륭했습니다.


(필름 찾으러 오는 장면)

결말은 황당하게도, 끝날 때가 되니까, 그냥 헬멧 쓴 악당을 남자주인공이 "주먹으로 세게 때리니까" 쓰러져서 정체가 드러나는 식입니다. 살인마의 정체는 누구인고 하니, 스튜디오 사람들 때문에 낙태를 하다가 죽게 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의 동생이 복수를 위해 죽이러 다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람둥이 남자주인공)

몽환적인 느낌이 잘 사는 70년대 지알로 영화에서는 현실적인 범죄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꼭 악마나 마귀가 나와서 세상의 어느 구석을 돌아 다니고 있는 것을 언뜻 본 듯한 느낌이 감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신비로운 느낌과는 거리가 먼 80년대 칼질 살인마 영화 아류작 분위기 였습니다. 돌이켜 보자면야, 전혀 건전하지 않은 방식으로 막 얽혀 있는 취한 것 같은 관계의 사람들이 차례로 살해 당해 죽는다는 이야기인데, 영화 시작할 때와 끝나기 전 무렵에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재즈, 블루스가 엮여 있는 음악이 묘하게 취해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잘 살리는 면이 있었다는 점이 기억 납니다.


그 밖에...

남자주인공은 열받으면 분을 삭이지 못해 잠자리에서 갑자기 에드위지 페네크의 목을 조르기까지 하는 인간입니다. 게다가 에드위지 페네크는 이제 사진작가는 그만두고 당신의 모델이 되겠다면서 남자 주인공 앞에 나서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제목인 "당신의 살인자를 향하여 옷을 벗으세요"와 딱 맞아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처음에 너무 살인마 같은 사람은 절대 살인마가 아니다"라는 70년대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의 법칙에 따라, 이 사람은 연쇄살인마는 아닙니다.

밑도 끝도 없이 "물구나무 서기가 몸에 좋지"라면서 자다가 일어 나서 옷도 별로 안 입고 괜히 침대에서 물구나무 서기를 하는 남자주인공이 에드위지 페네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등등과 같이, 웃기지는 않지만 뭐 안웃기지도 않은 장면들이 몇 들어 있었습니다.

에드위지 페네크가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에 출연한 거의 마지막 영화입니다. 이 영화 이후로 에드위지 페네크는 코미디 영화에 주력하여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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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역사관심 2014/02/28 02:53 # 답글

    의미가 왜곡되겠지만 표제음악같은거로군요 ㅎㅎㅎ. 제목, 내용 참으로...
  • 게렉터 2014/03/01 05:17 #

    70년대 지알로 영화들이 내용과 상관 없이 멋있어 보이는 제목만 짓는게 산으로 가던 시절이었는데, 이 영화는 정반대로 또 너무 내용을 그대로 나타내는 제목이라서 또 제목이 특이하게 느껴지는 경우입니다.
  • rumic71 2014/02/28 11:18 # 답글

    여자 모델과 여사장이 바람이 났다면... 레즈?
  • 게렉터 2014/03/01 05:16 #

    바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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