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중단편 소설들 기타

이병주 작가는 여러 소설을 썼습니다만, 지금와서 주로 회자되는 것은 "지리산" 같은 소설이 "태백산맥"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빨치산과 한국전쟁 전후의 좌우 대립 문제를 다룬 것으로 종종 언급되는 경우, "관부연락선" 같은 소설에서 일제시대에 학병으로 제2차 대전에 참전한 시각으로 친일파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시각을 다루는 것으로도 종종 언급되는 경우 등이 많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여기에서는 이병주 작가의 알려진 중단편 소설들을 한 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이병주 작가는 수필 같은 소설들을 많이 쓴 편인데, 그런 만큼 본인의 경험담이 소설로 간결하지만 그 독특한 경험의 핵심은 잘 보이는 것들이 여러 편 있어서 눈이 가는 면이 있었습니다.


1. 마술사
이 이야기는 로알드 달의 "기상 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와 매우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는 점이 있었습니다. 액자 형태로 기이한 사연을 듣는데, 기이한 사연은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마술을 현대 사회에서 터득하려는 사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실 도대체 무슨 사연인지도 모르고 "어쩌다가?" "무슨 사연일까?"라고 궁금해 하면서 그 다음, 그 다음을 넘겨 보는 것이 재미인 소설이었습니다만, 결말은 빼놓고 구체적으로 내용을 말해 보면 이렇습니다. 지리산에서 우연히 들은 이야기를 늘어 놓는 형식인데, 이야기란 것이 일제시대에 악명 높은 임팔 작전의 일환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 학병으로 미얀마에 투입된 주인공이 탈영을 한 뒤에 인도인 마술사를 만나 거의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마술을 전수 받아 최고의 마술사가 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터로 가는 사람의 심경과 이국의 정경, 마술이라는 신기한 소재와 명상과 수련이 중시되는 인도식 신비주의가 차례로 아주 부드럽게 얽혀 드는 내용입니다. 초반부에서부터 지리산의 밤에 이상한 소동이 벌어지는 것으로 시작해서 호기심을 환기시키는 것도 재밌었고, 조상 묫자리 살펴 보러 산에 올라가는 토속적인 소재로 시작해서 삽시간에 인도인 마술사의 무대인 이국적인 세계로 이야기가 쑥쑥 넘어 가는 모습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 속에서 환상적인 이야기와 함께, 현대사의 풍경들도 같이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단점이 있다면, 이병주 소설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못어울릴만큼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교훈적으로 펼쳐지는 "바른 역사관 설교" 대사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야기와 잘 섞이지 않을 정도라서, 군데군데 어색한 느낌인데, 그래도 지금보면 옛날 소설 다운 소박한 흥취가 있어서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야기의 결말도 이런 환상적인 내용을 다루는 이야기가 자주 택하는 표준적인 결말을 택하면서도 그야말로 표준에 가깝게 깔끔하고 흥미로우며 여운이 남게 매듭 짓고 있어서 즐거운 느낌이었습니다.

약간 과장해서 평가하자면, 1968년에 나온 소설입니다만, 요즘의 김영하나 성석제 작가의 소설과 같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인간성을 다루는 주제가 잘 버무러진 느낌이 살아 있어서 유행을 훌쩍 앞서간 느낌도 난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2. 철학적 살인
단편 소설로 주인공이 부인이 늦게 들어 와 걱정을 하는데, 정체 불명의 사람에게 전화가 오고 그 사람은 부인이 바람나서 지금 남자와 호텔에 있다고 말을 합니다. 주인공은 당황하는데, 돌아온 부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발견하고 정말 바람이 났음을 직감합니다. 게다가 바람난 상대방은 과거 학창시절 주인공이 깊은 열등감을 갖고 있던 라이벌로, 어린 시절 가난했던 주인공이 이만큼 성공한 것은 바로 그 라이벌을 이기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결말을 밝혀 보자면, 결국 주인공은 바람난 상대방인 라이벌을 만나는데, 뻔뻔한 라이벌 때문에 다투다 그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라이벌이 주인공의 부인을 짝사랑했기 때문에, 주인공 부인에게 약을 먹여서 한번 바람난 것처럼 위장했을 뿐, 주인공 부인은 잘못한 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열등감 때문에 꼬인 관계라서 묘한 갈등이 되는 이야기인데, 그런 점이 별로 잘 살아나지는 않고 적당히 마무리해버린 느낌이 들었던 이야기.

그렇지만 초반에 일상 생활에 있던 주인공이 갑자기 의심과 위기에 빠지는 긴장감, 몰입감은 재밌었습니다. 이야기 말미에, 주인공은 그래도 왜인지 부인과 그냥 이혼했다고 나옵니다.


3. 삐에로와 국화
변호사인 주인공이 국선변호인 일을 맞게 됩니다. 피고인은 북에서 내려온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는데, 괴상하게도 적극적으로 변호를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공산당에 충성하는 것 같지도 않은 이상한 인물입니다. 호기심을 느낀 주인공이 이 사람의 뒷 이야기를 찬찬히 파헤쳐 보는 것이 내용입니다.

사연을 밝혀 보자면 이렇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부잣집 자손으로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는데, 얼렁뚱땅 하다 보니 북에서 살게 되었고, 하필 북에서 갖고 있는 끈이 남로당 계통이라 숙청 대상으로 찍혀 죽을 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북에서는 죄가 없는 사람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남에 간첩으로 가라는 임무를 주면서 내려 보낸 뒤에 아무 지원도 해 주지 않아서 잡혀 죽게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는데, 거기에 걸려서 이 사람은 그냥 잡혀 죽으라고 그냥 남으로 쫓겨 나듯이 남쪽으로 파견 된 것입니다.

임무 자체는 전향한 스파이를 암살하는 것인데 그 스파이는 그냥 자연사해서 임무도 없어졌고, 마땅히 지낼 방법도 없어서 막노동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다가, 북으로 넘어 가지 전에 결혼했던 전처가 너무 비참하게 사는 것을 보고 간첩 신고해서 돈 받으라고 일부러 신고하게 하고 잡혀 준 것입니다. 그런데도 북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해코지 당할까봐 또 적극적으로 공산당에 반대하는 말은 못하고 그냥 입 다물고 모든 죄를 받아 들이기만 합니다.

사상 충돌과 분단 때문에 기구한 삶에 빠진 사람들의 사연이 변호사가 과거를 조사하면서 차차 펼쳐지는 것이 극적인 재미가 상당했습니다. 양쪽 어느 곳에도 갈곳이 없어진 냉전시대에 유행한 울적한 스파이 이야기 형태를 잘 살리면서도, 당시 한국 배경이 잘 결합된 점이 와닿는 느낌도 멋졌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사람의 사연을 섞어 놓은 것이 오히려 이야기를 좀 늘어지게 하는 면이 있다고도 느꼈습니다. 기구한 사연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밝혀지는 대목이 다소 건조하고 극적인 꾸밈이 없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이 사람은 사형 당하기 전에 유언으로 서울에 다시 돌아 왔을 때 어떤 낯선 아가씨가 길가다가 밝은 모습으로 국화 몇 송이를 준 일이 기억이 난다면서, 자신의 전처에게 국화 한 다발을 선물해 주라고 합니다. 변호사는 국화를 전처에게 주는데, 그녀는 우연히 편지를 받고 간첩 신고를 했을 뿐, 그게 자기 옛 남편이란 것 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연을 전해 듣고 받은 꽃다발을 땅바닥에 떨어 뜨립니다. 나중에 작가인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나오는 말이 “꽃이 그렇게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부잣집 자손인 그 스파이가 어떻게 날품팔이하며 하루하루 사는 삶을 버텼을 지 그게 궁금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80년대 초에 영화화 되어서 나온 적이 있습니다. 갈곳 없는 스파이 역할은 신성일이 맡았고, 신성일이 목숨을 버리게 되는 여자는 윤정희가 맡았습니다.


4. 8월의 사상
이병주가 자주 쓰던 수필에 가까운 소설로, 그 중에서도 거의 수필이라 해야 마땅한 소설입니다. 내용은 주인공이 8월만 되면 술을 끊으려고 결심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는 것으로, 특히 금년은 술을 끊으려고 결심하자마자, 일제시대에 일본군에 학병으로 복무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는 바람에 거기서 술을 마시게 되어 실패한다는 것이 결말.

이야기를 하면서, 8월에 얽힌 여러가지 잡다한 사상적인 이야기, 학병 복무에 대한 작가의 의식과 감상을 같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21세기까지 살아서 21세기에는 김일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남북통일은 되는 지 궁금해서 장수하려고 술을 끊는다는 내용도 나옵니다만, 이병주는 1992년 사망했습니다. 이 글의 배경은 1980년.


5. 박사상회
60, 70년대 한국의 고도 성장기를 배경으로 박사상회라는 가게를 차린 조진개라는 한 사나이의 성쇠를 동네 영감님들 복덕방에서 잡담하는 듯한 느낌으로 웃어가며 다룬 단편. 일제시대에 일본인 주인 밑에서 일하던 한 늙은 부부가 있었는데 광복 후 일본인들이 떠나가면서 늙은 부부가 그 가게를 자연스럽게 이어 받게 됩니다. 늙은이의 유일한 자식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그런데 얼마 후 조진개라는 한 사나이(별명은 면장, 비웃는 별명은 조진깨)가 나타나 그 가게 한 켠에서 구두장사를 하겠다고 세를 달라고 합니다. 그 사나이는 세련된 구두를 팔면서 갖가지로 선전을 해서 점차 자리를 잡고, 늙은이들의 신뢰를 얻은 뒤, 늙은이들이 세상을 떠나자 그 가게를 통째로 차지 합니다. 그리고 나서 가게를 더 넓히고 나중에는 건물을 새로 지어 여러층으로 된 멋진 건물을 가진 건물주가 됩니다.

그러나 너무 거들먹거려서인지 동네 사람들이 조진개를 싫어하게 되고, 마침 키가 작은 것이 특징이었던 조진개는 키가 큰 부자집 딸과 결혼을 하는데, 이 부자집 딸이 애를 낳지 않고 살겠다고 주장하는 통에 조진개 어머니와 머리끄댕이 잡고 동네에서 난리 부리는 일을 기점으로 조진개는 기울기 시작합니다.

결말은 건물에 입주한 천금순이라는 다방 주인과 조진개가 싸우는 것입니다. 천금순은 조진개가 설치해 놓은 커피 자판기를 두들겨 패버리는데, 조진개가 무슨 행패냐고 하자, "다방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렇게 커피 자판기를 설치해 두면 다방에서 파는 커피 못 팔게 하는 영업 방해가 아니냐"고 따지고 그러다가 싸움이 붙었다는 것인데, 조진개가 키가 작고 덩치가 작아서 천금순에서 얻어 맞고 도망치게 됩니다. 이후 조진개는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

한국 특유의 고도성장기에 가게를 해서 성장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는 점이 장점이고, 정말 그런 동네에서 떠돌만한 풍문, 영감님들 사이의 잡담등이 자연스럽게 문체에 자리 잡아 재미를 더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한편으로는 지금 보면 조진개가 도리어 불쌍해 보이는 면도 있을 만큼 조진개에 대해 혐오로 기울어진 시각이 드러난다는 점도 특징이었습니다.

배경은 “불로동”이라는 서울 외곽지역으로 나오고, 뒷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가지 설이 나오는데, 조진개는 부인이 바람이 나서 바람난 현장을 붙잡았더니 바람난 상대가 거물이라서 합의금으로 돈 1억을 받았다든가 해서 한 몫 잡았다는 설과, 조진개가 탈세, 밀수한 일이 들켜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1983년작.


6. 바둑이
마찬가지로 이병주가 자주 쓰던 수필에 가까운 소설로, 형식은 그냥 수필 그 자체인 단편입니다. 내용은 딸들은 주인공에게 용돈 받을 때 외에는 무심하게 대하고, 부인은 주인공에게 바가지만 긁기 때문에 바둑이가 유일하게 정을 주는 대상이었는데 바둑이가 죽어서 슬프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주인공은 부인 눈을 피해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려고 궁리를 하기도 하는 사람인데, 바둑이가 주인공이 여자 만나던 길을 그대로 따라 가는 바람에 부인에게 들키기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도 나옵니다.


7. 패자의 관
주인공이 선거운동을 해주던 후보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아깝게 탈락하여 실망한 뒤, 비슷하게 한국전쟁 직후 국회의원에 입후보했던 노신호라는 사람을 주인공이 회상해 보는 이야기입니다.

노신호는 대학교수인데 한국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진주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후보로 나섭니다. 노신호는 주인공에게 도와 달라고 하는데, 주인공은 처음에는 마뜩 찮았지만 노신호의 생각이 깊고 연설을 잘 하는 것에 감동 되어 선거 운동원으로 나섭니다. 주인공과 몇몇 동료들은 마치 “예수를 따르게 된 12제자들 처럼” 노신호를 따라 다니며 열성으로 선거 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과연 얼마지나지 않아 무소속 후보인 노신호는 사람들로부터 지지도 꽤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러자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위기감을 느껴 방해공작을 시작합니다. 방해 공작은 간단하게는 선거 유세용 차량을 “주차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끌고 가 버리는 수법부터, 화끈하게는 선거 운동원들에게 “빨치산이라는 혐의가 있어서 조사를 해 봐야겠다”면서 끌고 가 버리는 것까지 다양합니다. 당시 진주는 빨치산 관련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아무 죄가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냥 조사만 해 보자”면서 데려 가는 것만으로도 노신호와 그 선거운동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기피 인물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노신호는 선거에서 패배하고 선거 비용으로 잡혔던 집과 땅을 날립니다. 노신호는 그래도 일이 잘 풀렸던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2공화국 시절이 되자 다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는데, 이번에는 민주당 쪽에서 역으로 “노신호가 공산당과 가깝다는 것은 거짓이고, 노신호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산당 부역자 신고를 한 사람이다”라고 선전을 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일대에는 공산당 부역자로 몰려서 험한 꼴을 당한 사람도 많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런 선전이 돌자 그것대로 또 원한을 사 버려서 또 선거에 패배해 버립니다.

나중에 노신호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인공은 찾아 가 보는데, 노신호는 모든 것을 잃고 노숙자 같은 몰골로 다 허물어져 가는 판잣집에서 비를 피하면서 하루하루 막노동으로 연명하면서 걸인과 같은 몰골로 사는 삶을 살다가 그냥 죽었다는 이야기.

역시 이병주가 자주 쓰던 수필 같은 소설 형태의 내용이라 극적인 부분도 간단히 서술되어 있는데, 이런 것이 또 멀쩡한 사람이 선거 바람 들었다가 억울하게 완전히 망해 버린 이야기를 언급하기에는 오히려 더 적합한 면도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노신호의 멋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중간에 노신호가 펼치는 사상에 대한 설명이 지금 보면 그저 교과서적인 정론을 그냥 또박또박 서술한 것에 그쳐서 그렇게 인기가 많았다는 노신호의 매력이 덜 살아 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재능 있는 사람이 억울하게 망하는 안타까운 이야기 틀을 잘 따라가는 데다가, 사연이 실감나고 몇몇 비유가 그럴 듯한 곳이 있어서 재밌었습니다. 제3공화국 시절인 이야기가 나온 시점을 생각해 보면 과거 회상으로 현실을 은근히 비판하는 느낌도 났습니다. 1971년작.


8. 겨울밤
그냥 두런두런 할 말을 이리저리 늘어 놓는 수필 형식으로 된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이병주의 데뷔작으로 흔히 언급되는 "소설 알렉산드리아"에서 감옥에 갇힌 형의 이야기와 거의 비슷 합니다. 아예 몇몇 대목, 몇몇 문장은 그대로 반복해서 나오는 수준이라 봤던 것 또 본다는 느낌마저 있었습니다. 다만 "소설 알렉산드리아"에서 형의 이야기가 어딘가 서사시적으로 무겁고 약간 과한 어조로 주절 주절 읊어대는 관념적인 느낌이 강했다면, 이 "겨울밤"은 그보다는 더 가볍고 더 감성적이고 웃어 가는 느낌으로 감옥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상을 이유로, 혹은 정치적 혼란상 대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을 짤막짤막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이야기들은 이 이야기가 전체 구성에 극적인 느낌이 약한데도, 그 하나하나는 진솔하게 와닿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야기 중에 좌파라는 죄로 감옥 살이를 20년 동안이나 하고 나온 뒤에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살고 있는 원래 부잣집 아들이었던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감옥에서 나온 뒤 처음으로 입을 떼는 계기가 된 것이 화자가 건네 준 마쓰모토 세이초(사회파 추리작가 그 마쓰모토 세이초 맞습니다)가 쓴 “북의 시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9.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
주인공이 감옥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작 “겨울밤”의 속편 격에 가까운 단편.

“겨울밤”에도 나왔던 좌파라는 죄로 감옥 살이를 20년 동안이나 하고 나온 뒤에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살고 있는 원래 부잣집 아들이었던 사람이 나옵니다. 화자는 이 사람을 찾아 가는 작가로, 그 사람을 만나서 소설도 보여 주고 자극적으로 말을 걸었던 덕택에 이 사람은 화자에게는 한 마디씩 말을 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꽤 말수가 많아져서 이 사람을 오래토록 옥바라지하던 부인은 희망을 갖고 옷도 차려 입는 듯 기뻐하게 됩니다. 화자는 단장한 부인의 모습을 보고 젊은 중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듯했다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화자와 대화하면서 점점 사회성을 회복하고 나중에는 목공일을 소일 삼아 하면서 다시 사람 답게 사는 일도 시작하는데, 그러나 그러고 얼마지나지 않아 죽어 버린다는 것. 마지막 장면에서 화자가 찾아 갔더니, 부인은 얼마전의 단장한 아름다운 모습은 다시 온데간데 없어지고 노파의 모습으로 슬프게 울고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평이한 편이고 인물 변화의 계기가 되는 주인공과의 대화가 별로 인상적이지 않은 흔한 이념에 대한 이야기라 약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신에 풍경 묘사라든가 인물을 지켜 보는 부인, 부인의 하녀(화자는 20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한 사회주의자의 집에 평생 부인을 따를 것을 맹세한 충성스러운 몸종 같은 봉건적 하녀가 있다니 모순이라고 묘사 합니다) 등등에 대한 표현이 생동감이 풍부해서 마지막 장면의 쓸쓸한 감성은 제대로 사는 편이었습니다. 1975년작.


10. 추풍사
가을 감상을 이야기하는 감성적인 수필처럼 시작하지만, 곧 작가인 주인공이 최근에 겪은 고민거리를 늘어 놓는 것으로 바뀝니다. 고민거리인 즉, 최광열이라는 어떤 평론가 지망생이 주인공이 대뜸 옛날에 “N당” 소속이었다면서 평론을 낸 사건입니다. 여기서 N당은 과격하게도 다름 아닌 남로당을 암시하는 것인 까닭에 가만히 있다가 사람들에게 꺼림의 눈길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자칫 집안이 사단이 날 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주인공은 최광열이라는 사람과 그 평론을 내어준 출판사가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 일을 벌인다는 데 대해 차츰 감을 잡게 되고, 신문지상 등을 통해 정면으로 반박하면 오히려 최광열을 유명하게 해 줄 뿐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해서 감옥에 넣어 버릴까 말까 고심을 합니다. 그 와중에 최광열을 직접 만났다가 너무 뻔뻔스러운 태도에 열 받아서 뺨을 때렸다는 이야기나, 이 사건을 두고 자기 제자들이 모였는데, 그 중에 변호사, 사업가 등등 쟁쟁한 사람들이 있어서 도와주겠다고 다들 나섰다는 이야기를 약간 자랑스럽게 서술해 놓은 등등 그야 말로 이런 일을 당한 아저씨가 할만한 일들이 솔직하게 묘사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보다는 그 과정에서 작가 이병주의 실제 과거사를 상당히 반영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주인공의 과거 회상이 재밌습니다. 내용인즉, 광복 직후 진주농고에 교사로 부임했을 때 교사들 중에는 남로당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고, 학생들 중에도 거기에 휩쓸려 좌파 학생들이 많았는데,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보 취급을 당하자 주인공이 나서서 막았기 때문에 자신은 오히려 적극적인 남로당 반대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역으로 과거 남로당에 영향을 받았거나 좌파로 기울어진 학생들이 가혹하게 탄압 당하는 분위기로 돌변해 버리자 그때 다시 반대로 그것을 말렸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다가 조봉암 선생을 잠깐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조봉암의 사상은 공상적이라고 비판했는데 너무 어른한테 버릇없이 군 것이 미안해서 나중에 진보당 사람에게 용돈, 차비로 쓰라고 3만환인가를 줬는데 그걸 받은 그 사람이 진보당 후원금으로 받은 것으로 기록해 둔 것 때문에, 나중에는 진보당의 비밀 후원자로 취급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주인공은 5.16 이후 박정희 장군 전성기에 살짝 정부 비판적인 글을 한 번 썼다가 경찰에 끌려 갔는데 거기서는 진보당 비밀 당원 경력이 있었다는 식으로 간주 당해 무려 징역 10년을 받고 감옥 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3년을 채 덜 살고 석방되기는 합니다만.)

이 회상 부분은 서술이 자세한 것은 아니고 짧게 짧게 언급되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과연 있을 법한 사연들이고 성격이 분명한 주인공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였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을 남로당으로 몰아 버리는 상대에 대한 분노감이 잘 드러나면서도 동시에 상대를 징역살이로 몰아 버리는 것은 꺼려지는 주인공의 딜레마에 빠진 심정과도 잘 연결되는 묘한 사연이라는 점도 재밌었습니다. 주인공도 바로 과거에 글을 쓴 게 문제가 되어 감옥 살이를 했는데 그게 정말 끔직했던 기억이 있으니, 남이 그렇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과연 최광열을 어떻게 할 지 결론은 나지 않는 채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1978년작.


11. 빈영출
빈영출이라는 한 시골 면장의 웃기다면 웃긴 일대기에 대해 돌아 보는 이야기. 빈영출은 초등학교를 늦게 들어 가서 결혼도 한 상태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똘똘한 한 어린이에 이어서 맨날 2등만 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어린이에게 부탁해서 한 번만 1등을 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게 교사에게 들켜서 실패한 이후 이상하게 서로 의리가 깊어진 친구가 됩니다.

똘똘한 어린이는 대학도 갔다가 일제시대에 학병으로 2차 대전에 참전도 했다가 무사히 귀환해서 서울서도 살다가 하면서 자리를 잡습니다. 한편 빈영출은 일제시대 경찰 지서 옆에 대서소를 차리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동네에 빈영출의 어쩌고 저쩌고 덕으로 일제의 마수로부터 마을을 지켰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도는데, 다름 아닌 경찰에 지서장으로 온 일본 사람의 아내들마다 빈영출과 바람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빈영출이 침대에서 힘을 써서 지서장 아내를 통해 은근히 뜻을 전해서, 이 동네 사람들은 일제의 수탈과 관련한 험악한 일을 피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광복 후에도 빈영출은 명망을 얻어 면장이 되는데,(마을에는 농담으로 빈영출이는 선거 운동도 어쩌고저쩌고 힘으로 하나, 라는 말이 돕니다) 이번에는 빈영출이 동네 장터의 가게하는 아주머니들과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돌게 됩니다. 이에 면의원들이 추문을 막아야 된다고 해서 빈영출을 면장에서 탄핵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자 빈영출은 지금 면장에서 쫓겨 나면 면 재산을 헤먹은 걸 채워 놓을 방법이 없어서 망한다고 소식을 전하면서 어릴 때의 똘똘한 어린이에게 한번만 도와 달라고 합니다.

나름대로 동네에서는 똑똑하고 반듯한 사람으로 명망이 있었던 그는 면의원들을 찾아 다니면서 한번만 용서해 주면 빈영출이 정신 차릴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빈영출 대신 빌고 다니는 데, 결국 그 얼굴을 봐서 면의원들은 탄핵을 취소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다같이 화해의 의미에서 밥을 먹으러 갔더니 밥집 아줌마가 다른 사람 밥은 그냥 밥을 주면서 빈영출 밥은 뚜껑을 덮어 주고 계란도 하나 얹어 주는 바람에, 면의원들은 갑자기 다시 격분해서 빈영출을 탄핵해버린다는 것이 결말 입니다.

골자만 놓고 보면, 껄렁한 소문이 도는 동네의 재미난 사람을 두고 동네 아저씨들이 술 한잔 먹고 하는 껄쩍지근한 이야기 정도 입니다만, 빈영출과 주인공에 대한 별명, 동네와 시대상에 대한 묘사 면면, 그러면서도 역사에 따라 변해 가는 풍경 등등이 잘 어울려 있고 그러다 보니 중심내용이 아닌데도 헐렁한 옛날 시골 풍경 속에 부정 부패가 어떤 식으로 엮여 드는지에 대한 점도 은근히 비쳐서, 그런 점들이 재밌었습니다.


12.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
달동네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하는 일 없는 노인이 있는데, 알고 보니 젊어서는 독립 운동하는 단체들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하며 활동하던 사람이었고, 그 사람의 여러 사연을 이야기하고 한편으로는 이 영감님의 장황한 사설도 들어 보는 내용. 자세한 것은 다른 곳에 별도의 글로 올린 것 http://onuju.com/board_writer.php?b_id=112&mode=view&board_id=Jaesik 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TV문학관에서 영상화 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암살 이야기만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병주는 PD에게 영상화하기 어려울 거라고 걱정했다는데, 영상화 된 후에 PD에게 새벽 4시까지 술을 사줬다고 합니다.


13. 소설 알렉산드리아
뱃사람인 주인공이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신비의 스페인계 댄서, 유쾌한 프랑스 선원, 정체불명의 독일 남자 등등을 만나 친해지는데, 느와르 영화 같은 암살 사건에 엮이게 된다는 것. 환락의 도시로 묘사된 알렉산드리아의 환상적인 지중해 풍경에 대비되어, 감옥에 갇혀 있는 주인공의 형이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 사이사이에 들어 가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다른 곳에 별도의 글로 올린 것 http://onuju.com/board_writer.php?b_id=107&mode=view&board_id=Jaesik 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보통 이병주의 데뷔작으로 이 소설을 꼽습니다. 1968년작.


* 전체적으로 정치나 현대사를 다룬 소설은 수필형 소설이라는 작가의 특징에 걸맞게 작가가 주로 체험한 내용이 바탕이 되면서도, 21세기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공감하기 쉬운 점이 더 많은 중립적인 작가의 입장이 눈길이 가는 곳이 많이 있고, 반대로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60년대, 70년대 사람들의 사고방식, 눈높이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 감성도 잘 전해지는 편이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덧글

  • 2014/12/21 18:3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2/21 18:4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2/29 11:1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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