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의 무적자 (1970) 영화

“극동의 무적자”는 제임스 본드 아류작으로 만든 1970년작 한국 영화로 007대신 HS7이라는 번호를 가진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남궁원이 맡았고 악당 두목은 허장강, 악당 부하로 실제로 자주 맞서 싸우는 사람은 이대엽이 맡았으며, 소위 제1 본드걸에 해당하는 역할로 남정임, 제2 본드걸에 해당하는 역할로 윤미라가 나왔으니, 이만하면 당시 한국 영화의 A급팀이 힘을 합해서 제임스 본드 분위기에 도전한 영화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포스터)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는 화려하고 호쾌한 제임스 본드 부류의 여유로운 모험담과는 좀 빗겨 나갔습니다. 아류작 중에 비교해 봐도, 코미디 요소를 키운 맷 헬름 시리즈 같은 영화들과도 거리가 있고, 홍콩에서 만든 제임스 본드 아류작인 “금보살”이나 “철관음”에 비하면 다른 나라에서 만든 아류작만의 개성조차 훨씬 덜한 영화였습니다. 대체로 보자면, 제임스 본드의 이야기 구조를 그냥 그대로 건드리는 것 없이 찍어 내듯이 가져와서 따라 가되, 그러면서도 가능한한 저예산으로 가 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일단 중심 사건부터 부피를 줄였습니다. 007 영화에서는 우주선 탈취나 특수 폭격기 쟁탈전 같은 소재를 다루는데, 그걸 화면에 보여 주자면 돈이 많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악당의 음모는 사람 한 사람을 납치하는 것입니다. 좀 더 살펴 보자면, 일본의 악당 조직이 원자력 분야의 과학자를 납치해서 이 사람을 공산당들에게 무기 개발을 하라고 팔아 먹으려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신매매범들과 싸우는 이야기인데, 이 인신매매 조직 악당들이 마침 원자력 분야의 학자를 잡았기 때문에 첩보물이 되는 형국인 것입니다.

여기까지야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만, 다른 세부 내용들도 다들 이런 식으로 따라 하되 줄이고 약화시키는 것들만 너무 많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름다운 호텔 모습이나 화면에 가득 펼쳐지는 이국 정경 대신에 적당히 도쿄 근처를 적당히 찍은 화면 몇 개로 때우고 있고, 자동차 추격전이나 특수한 장치로 싸우는 내용들도 겨우 흉내만 내는 수준입니다. 몬테 카를로의 카지노에서 드레스를 입은 귀족들에 둘러 쌓여 도박을 하는 장면 대신에, 담배 연기 모락모락 피어 나오는 어두침침한 구석에서 화투 치는 듯한 느낌으로 도박하는 장면으로 바뀌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것만의 독특한 점을 살려 보겠다는 노력도 딱히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비밀 요원으로 임무 소개를 듣고 있는 윤미라: 이야기 속 비중은 아주 적습니다.)

줄거리 세부를 살펴 보자면, 인신매매 조직이 있는 도쿄의 밤거리에 홍콩에서 온 정체 불명의 날건달 같은 인간이 나타납니다. 다름 아닌 날건달인 척 위장하고 있는 대한민국 첩보원 남궁원인데, 도박하고 술마시고 미인한테 집적거리면서 지내는 놈입니다. 주인공은 날건달로서 이런저런 범죄적인 일을 하는 청부업자가 될 수 있다는 듯이 악당 조직에게 접근합니다. 악당 조직은 의심하면서도 남궁원을 일단 받아 들이고, 남궁원에게 남정임을 가까이 접근시켜서 살펴 보라고 합니다.

아,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남궁원에게 남정임이 정말로 반해 버리고, 남정임은 남궁원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주어서, 남궁원은 믿을 수 있는 진짜 날건달로 악당들 사이에 잠입할 수 있게 됩니다. 한편 다른 요원인 윤미라는 남궁원을 악당에게 붙은 진짜 날건달 같은 놈으로 그대로 믿어 버리고, 남궁원을 오히려 공격하려 듭니다. 그러다가 남궁원이 정체가 들통날 상황이 되자 남정임은 사랑 때문에 배신을 하려고 하기도 하고, 뭐 그런 내용으로 흘러 가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이런 내용으로 특별히 개성을 보여 주려고 한다기 보다는, 그냥 그런 제임스 본드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어떻게든 전달하는 것 자체가 목적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60, 70년대 한국 영화의 배경 때문에 괴상한 개성이라도 살아 나는 면을 따지면, 같은 첩보물이라고 해도 이 영화 보다는 오히려 “그 여자를 쫓아라”“왜?” 같은 영화가 훨씬 강렬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그런 영화들 보다는 영화가 좀 더 정상적이고, 제정신인 편인 이야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그래도 중간에 이야기를 확 잘라 먹어 버리고 산으로 들로 막 나가는 대목은 없는 편이고, 줄거리를 돌아 보면 대충 사연이 들어 맞는 편이기는 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사연들과 그 표현이 심심했던 것은 아쉬웠습니다. 이야기를 보면 아이디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대로 첩보물 하면 떠올릴만한 이야기 거리들을 생각은 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별 마땅한 재주가 없으니까 그걸 재밌게 보여주지 못하고 그냥 ‘뭐 이런 소재도 한 번 담아 볼까나... 너무 무리는 하면 안되겠지만’ 하면서 제대로 꽃 피우지 못하고 넘어 가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영화에서는 악당들이 주인공을 납치하기 위해서 주인공에게 약을 먹이려고 하는데, 주인공은 그게 약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러면 약을 먹지 않고 어떻게 재미난 속임수를 쓴다든가, 그걸 역이용해서 뭘 다른 이야기로 나간다든가 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악당이 주인공에게 약을 먹인 뒤에 어딘가로 납치해 가지 않으면 다음 이야기로 잘 연결할 방법을 못 생각하겠으니까, ‘약 먹이는 건 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놈들을 추적하려면 일단 약 먹은척 하자’라고 하면서 사실상 모르고 약 먹은 것과 아무 다를 바 없는 이야기로 연결 됩니다.

제가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결말 즈음하여 악당 기지에 잡힌 주인공 남궁원을 (왜 악당 기지에서 안 붙잡히겠습니까) 허장강이 바로 안 죽이고,

“네 놈이 그렇게 구하려고 했던 제임스 박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한 번 하게 해 주마.”

라고 하는 부분 그 다음이었습니다. 허장강은 이렇게 제임스 본드 악당 답게 주인공을 바로 안죽이고 괜히 시간을 주고 빈틈을 주고 있습니다. 자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임스 본드 영화들에서 맨날 하는 것처럼 이틈을 타서 주인공이 재치를 발휘하거나 특수 무기를 사용해서 탈출하고 기지를 다 폭파 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허탈하게도 정말로 그냥 마지막으로 서로 인사만 하고 말아 버립니다!


(악당의 비밀기지)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야기로 그럭저럭 꾸려나갔던 영화이긴 했는데, 그렇게 만든 이야기 자체가 아주 평범한 제임스 본드 이야기의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이 새삼 얇게 느껴졌습니다. 두 명의 미녀 여자 주인공을 제임스 본드와 자연스럽게 차례로 엮어 주기 위해서, 처음 나왔던 여자 주인공은 죽어 버리게 하는 제임스 본드 영화의 상투적인 구성도 아주 표본처럼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악당 두목이 자기 부하들에게도 잔인한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버튼을 누르면 부하가 서 있는 바닥이 벌컥 열리면서 떨어지는 함정을 작동시키는 장면이 마치 추억처럼 나올 때에는, 심지어 정겹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소박한 정취를 즐긴다면 그런 면에서는 볼만한 영화였습니다. 악당 연기로 한 시대를 제패한 허장강이 악당 연기의 한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본드 악당 두목을 연기한다는 점도 찾아 볼만한 면은 있습니다.


그 밖에...

남정임이 죽을 때 길게 신파극 대사를 주인공 남궁원과 주고 받으면서 죽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좋았어요.”
“나도.. 나도 기미코가 좋았어!”
“안아주세요. 당신의 품 안에서 죽고 싶어요.”

이런 용기 있는 대사들을 주고 받는데,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해피엔딩으로 연결해야 하니까 남정임 죽은 지, 작중시간으로도 몇십초도 되지 않아서 심지어 남정임 총맞아 죽은 시체가 저기 뻔히 보일 거 같은데, 남궁원은 윤미라와 경찰들이 도착하자 “하하(진짜 이렇게 웃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동료들에게 즐겁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윤미라와 사랑의 눈빛을 주고 받으며 유쾌하게 끝이 나 버립니다.

결말을 좀 더 설명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주인공과 별 상관 없이, 공산당과 인신매매조직은 자기들끼리 못 믿고 싸우다가 자기들끼리 그냥 반쯤 망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혼란한 틈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남정임이 홀연 나타나서 주인공을 구해줍니다. 그러다 혼란스러운 총격전 와중에 남정임은 죽고, 잠시 후 경찰과 함께 나타난 윤미라 일행이 상황을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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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5/03/18 14:1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rumic71 2015/03/18 15:30 # 답글

    왕우가 주연이었으면 더 어울렸을지도...
  • 게렉터 2015/05/04 20:19 #

    왕우 주인공의 비슷한 영화가 있기는 한데, 사실 연기는 남궁원도 부족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영화에 액션이 너무 적고 전체적인 액션 연출이 왕우 영화류에 비하면 한 수준 낮았습니다.
  • 치즈 2015/03/28 19:48 # 삭제 답글

    킹스맨의 여운을 이어서..ㅎ
  • 게렉터 2015/05/04 20:20 #

    글을 올리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고보니 이런 부류의 한국 첩보물을 패러디로 계승하는 21세기 영화가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일텐데, 저는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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