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개의 그림자 (1969) 영화

이만희가 감독을 맡은 1969년작 한국 영화 “여섯개의 그림자”는 한 여자를 둘러 싼 세 명의 남자가 살인, 협박, 사기를 하며 속고 속이는데, 중간 중간 반전이 겹쳐서 나오는 영화 입니다.


(신문 광고)

기본 줄거리는 이만희가 감독을 맡은 5년 후에 나온 영화 “삼각의 함정” http://gerecter.egloos.com/4755843 과 같고 또 7년 앞서 나온 영화 "다이알 112를 돌려라"와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 "여섯개의 그림자"는 "다이알 112를 돌려라"의 리메이크이고, 나중에 나온 “삼각의 함정” 역시 같은 내용을 또 만든 리메이크로, 볼 수 있을 만 합니다. 내용인즉 껄렁하게 덤벼드는 시정잡배 악당 허장강에게 여자 주인공 윤정희가 공격 당할 뻔 하는데, 그때 멋진 “행인” 신성일이 나타나 윤정희를 구해준 뒤에 둘은 연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후 등장인물들 사이에 꼬인 관계와 과거에 얽힌 비밀이 있고, 몰래한 작당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삼각의 함정”과 비교해 보자면, 이 영화 “여섯개의 그림자”가 촬영과 편집이 더 안정되어 있습니다만, 대신에 묘한 분위기가 개성이 있기로는 “삼각의 함정”이 더 재밌었습니다.

이야기의 반전, 결말을 다 펼쳐 놓고 가면서 설명을 해 보자면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 입니다.


1.

(비열한 협박자 남궁원)
우선 첫번째 국면 전환으로 마음에 잘 맞는 미남 신성일과 결혼을 꿈꾸며 행복하게 지내는 주인공 앞에 갑자기 전남편 남궁원이 나타나는 대목이 나옵니다.

미남 배우라 멋진 역할도 곧 잘 맡곤 했던 배우가 남궁원입니다만, 이 영화에서는 아주 눅진눅진하게 썩은 쓰레기 역할로 나옵니다. 사실 남궁원은 악역 연기도 좋았던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남궁원은 “육체의 문” 같은 영화에서도 뭔가 잘 해보려는 모습 뒤에 숨겨진 비겁한 인간이라는 악역을 무척 잘 보여 주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이중적인 모습이나 입체적인 모습도 볼 것 없는 그야 말로 확 썩은 악당으로 나옵니다.

이 악당 남궁원이 윤정희에게 협박하는 빌미란 나름 아닌, “네가 나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 애인인 신성일에게 말하겠다”는 것 입니다. 아무리 60년대 배경의 영화라고는 하지만 이게 무슨 그렇게 절체절명의 협박거리인지는 사실 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윤정희는 이런 인간들에 비하면 상당히 멀쩡한 인간이라서, “협박 따위 개수작은 하지 말아요”라고 하고, 그냥 직접 자기가 “나 결혼한 적 있다”고 신성일에게 말하려고도 합니다. 그런데 신성일은 60년대식 기름칠 목소리로 윤정희의 말을 막고, “당신의 과거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부모님을 일찍 잃고 부유한 고모님 아래에서 너무나도 깨끗하고 아름답게 자라 났음. 끝” 이라고 말하고 윤정희가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실실 웃은 뒤에 내일 보자고 그냥 떠나가 버립니다.

만약, 이 대목 전에, 신성일이 과거에 결혼한 적이 있는 여자와는 절대절대 결혼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생각을 투철하게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으로 전제를 깔아 놓고 있고, 윤정희는 모든 조건과 관계 없이 너무너무나 신성일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판을 벌여 놓았다면야, 이러한 남궁원의 협박은 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런 배경은 표현되어 있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신성일과 윤정희는 혼자서 우아한 아파트를 꾸미고 사는 세련된 도시남녀로 등장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서로 재치 있는 농담을 나누는 장면 정도만 멋있으라고 보여 주다 보니, 윤정희의 고민을 진지하게 할 만한 묘사는 별로 안 나와 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일단 뭐 대충 그렇다치고, 하여간 남궁원의 협박이 의미 있다고 그냥 이해해 주자고 넘어가 주면, 그럭저럭 구도는 나옵니다. 남궁원은 자꾸만 윤정희 앞에 나타나 윤정희를 지긋지긋하게 만드는데, 전화를 걸고, 신성일과의 데이트 자리에 슬며시 나타나 멀리서 말 없이 눈에 뜨이는가 하면, 윤정희와 신성일이 경치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을 때 지나가는 행인인 척 하면서 사진에 괜히 같이 찍히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들러 붙은 저주처럼 윤정희에게 붙어 스토킹하는 느낌은 과연 악당 같았습니다. 자꾸만 나타나는 남궁원을 슬쩍슬쩍 보면서 윤정희는 조마조마해 하는데, 신성일은 알아채지 못해 멋모르고 허허허 하고 있는 모습이 같이 나오면 윤정희의 숨겨 놓은 비밀, 걱정하는 심정이 화면에 더 잘 살아날만한 내용이었습니다.

남궁원이 여차하면 깽판 치겠다는 위협하는 느낌도 불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밝혀져서는 안 될 과거라는 것이 윤정희와 자기와 함께 했던 시절 그 자체라는 점을 스스로 드러내며 협박을 한다는 면에서, 그야말로 자신의 더러움 자체를 그대로 쳐바르면서 협박을 하는 그 추악한 느낌도 살고 있었습니다.


2.

(범죄를 저지르러 가기 전에 변장하는 윤정희)
이 상황을 깨는 것이 바로 두 번째 국면 전환입니다. 남궁원의 스토킹과 협박을 견디다 못한 윤정희는 남궁원에게 돈을 줄테니 떨어지라고 합니다. 남궁원은 이제 목표를 이룰 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윤정희의 거짓말로 사실 윤정희는 남궁원을 잡아 죽여서 없애 버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윤정희는 남궁원이 부산으로 가는 열차에 탔을 때, 같이 열차에 따라 탑니다. 그리고 남궁원이 화장실에 갔을 때, 마취약으로 남궁원을 기절 시킨 뒤에, 열차에서 내던지는 수법으로 남궁원을 없애 버립니다.

이 두번째 국면 전환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결정적인 대목이라고 생각 합니다. 일단 계속 당하기만 하던 윤정희가 남궁원에게 반격을 가하는 이야기라는 점만으로도 힘을 확 받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키가 큰 편이고 힘이 세어 보이는 남궁원을 윤정희가 날쌔게 제압하는 이야기라서 재밌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주인공 윤정희의 직업이 약사로 되어 있는데, 약사로 일하는 윤정희의 모습을 복선으로 보여 준 뒤에 윤정희가 숨겨 온 마취약으로 남궁원을 공격한다는 것이 절묘한 점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밀어 붙이고 휘젓는 순간이라는 것도 윤정희의 살인이 중요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원래 이 이야기는 비밀리에 서로 짜고 있는 남자들이 윤정희에게 협박을 해서 우려먹는 범죄가 있고, 그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는 형태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윤정희가 그냥 당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확 살인을 해서 사건을 정리해 버리면서 판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남자들의 계획은 확 꼬여버렸고, 이후로 이야기는 얼마든지 날아갈 수 있게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 이 부분의 연출은 “삼각의 함정”에서 같은 장면의 연출 보다는 훨씬 재미 없는 편이었습니다. “삼각의 함정”에서 문숙의 살인 장면은 몽환적인 화면 구도에 흥겨운 음악을 곁들여서 그야말로 휘몰아치는 장면으로 연출해 두고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냥 평이하게 보여 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대사가 거의 없이 철컥거리는 열차 소음만 들리는 가운데, 멋모르고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피해자 남궁원과 불안한 표정으로 공격 시점을 기다리는 가해자 윤정희의 서로 뒤바뀐 듯한 표정이 번갈아 가며 나오고, 안들키려고 조심하는 장면, 급박하게 공격하는 장면이 잘 섞여 있어서 영화 전체에서 가장 긴장감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3.

(신성일과 윤정희의 단란한 한때)
이후, 이어지는 세번째 국면 전환은 살인을 저지른 윤정희 앞에 애인 신성일이 나타나더니, 윤정희가 저지른 살인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윤정희에게 경찰에 말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돈 내놓으라고 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나서 신성일은 사실을 까발리는데, 신성일이 말하는 사실이라는 것은, 애초에 신성일, 남궁원, 허장강은 모두 한 패였고, 허장강이 윤정희를 공격할 때 신성일이 멋있게 구출해 주는 것으로 연기를 해서 윤정희에게 신성일이 접근할 수 있도록 짜고 한 것이었고, 일단 그렇게 해서 윤정희가 신성일이 사귀게 되면 남궁원을 보내서 협박하고 돈을 뜯어 내는 계획이었다는 겁니다. 일이 꼬여서 윤정희가 남궁원을 죽여 버리기는 했지만, 대신에 신성일이 그 장면을 목격했으니 이번에는 살인 사실 폭로 협박으로 돈을 뜯어 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허장강, 남궁원, 신성일, 세 사람의 계획이란 것은 들으면 들을 수록 참으로 허점이 많은 계획 입니다. 아무리 한국 영화에서 건들거리는 잡깡패를 남자 주인공이 멋지게 제압해 주면 구출된 여자 주인공이 좋아하게 되는 장면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무슨 강제 수행 의무가 있는 공식 악당 대응 규정도 아닐진데 그렇게 무조건 연애로 이어지는 거겠습니까? 거기다가 연애를 하면 무조건 그렇게 돈도 뜯을 수 있을만큼 깊게 빠지게 될 거란 말입니까? 신성일은 그렇게나 연애의 대가로 자신감이 넘쳤다는 말입니까? 그런 이상한 것을 다 그렇다친다고 해도, 이제 살인 목격으로 돈을 뜯어내는 시점인데 굳이 그런 과거의 사기 협잡을 친절하게 다 고백하면서 윤정희에게 이야기 해 주는 이유는 뭡니까?

뭔가 좀 이야기를 가다듬어서 더 말이 되고 더 진짜 같이 꾸미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이야기도 신성일이 그냥 세트 한 가운데에 서서 줄줄줄 길게 설명하는 방식 말고 좀 더 보기 좋게 꾸며도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도 좋은 점만 따져 보자면 꽤 재미 거리가 되는 소재라는 생각도 듭니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이 있는데, 그 옆에 모여 드는 남자 주인공들이 알고 보면 전부다 다 한통속으로 비열한 놈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구도는 참 기구해서, 영화 같은 면, 극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비교해 보자면, 이런 이야기 형태는 70년대 이탈리아산 연쇄 살인마 영화, 지알로 영화에서도 가끔 나왔던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어 에드위지 페네크가 나오는 영화 하나는 정말 비슷한 인물 구도를 반전으로 써먹고 있기도 합니다.


4.

(허장강)
다음으로 나오는 이 영화의 네번째 전환점은 괜찮은 소재와 미진한 표현의 틈이 가장 크게 벌어진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소재는 아주 썩 괜찮은데, 그걸 보여 주는 줄거리와 영화 내용 표현은 무척 조잡합니다.

뭐냐면, 바로 이렇게 해서 신성일이 혼자서 윤정희에게 협박을 성공시켜서 돈을 뜯어 냈는데, 그렇게 돈을 뜯어 냈지만, 돈은 부질 없고 스스로 정말로 윤정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청춘 영화에서 “상대를 낚을 수 있다고 내기로 접근했지만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상투적인 구성과도 비슷한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더 아슬아슬하고 더 극단적인 상황이라고 생각 합니다. 더군다나 굳이 짜맞춰 보자면 아귀도 들어 맞습니다. 윤정희는 남궁원의 협박에는 굴복하지 않고 남궁원을 죽여서 입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신성일의 협박에는 모든 것에 허망함을 느낀듯이 순순히 돈을 주고 더 이상 나타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적어도 한 때는 윤정희와 신성일 사이에 뭔가 진정한 것이 있었다고 하면 잘 맞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런 묘한 심정의 변화가 아주 괴상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삼각의 함정”에 나온 같은 대목도 매한가지 입니다.

일단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돈 보다 사랑임을 깨닫는 계기가 난데 없이 “어머니가 돌아 가시자 너무 슬퍼서” 입니다. 주인공은 돈을 싸들고 고향인 부산의 어느 바닷가 마을에 가 보는데, 어머니를 찾아 가 보니 어머니는 안계시고 이웃집 아주머니가 어머니는 홀로 외롭게 벌써 돌아 가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지금껏 왠갖 느끼한 놈, 비열한 놈으로 나오고 있던 신성일이 이 장면에서는 갑자기 정통파 “오열하는 효성스러운 자식” 연기를 하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이상해 보입니다.

사실 “삼각의 함정”에서는 갑작스러운 것이 한 결 더 심합니다. “삼각의 함정”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돈 벌었다고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 뒤에 그 다음에 정말 확 뭐가 튀어 나오듯이 갑자기 시골 마을에서 지나가는 장례 행렬이 나오고, 그 옆에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남자 주인공이 다가 와, “아아아니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니!”라면서 바로 울부짖어 버립니다. 어찌 이렇게 편집을 해버렸을까 괴이할 정도입니다.

“여섯개의 그림자”는 그 정도 수준까지는 아니고, 신성일이 드디어 돈을 손에 넣었다며 좋아서 고향으로 오는 장면, 기대하며 어머니를 찾아 다니는 장면, 어머니를 못 찾고 당황하는 장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는 장면으로 그럭저럭 차례대로 나옵니다. 복선도 아주 없지는 않은 이야기로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지금 돌아 보니, 그게 꼭 “삼각의 함정” 보다 나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삼각의 함정”에서는 갑작스럽고 연결도 잘 안되게 튀어 나와 버립니다만, 어차피 “난데 없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반성한다”는 정도의 당황스러운 줄거리를 갖다 붙일 참이라면, 그냥 그렇게 짧게 두눈 질끈 감고 넘어 가는 식으로 가는 것도 차라리 괜찮은 것 같기도 합니다. “여섯개의 그림자”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시간을 써 가며 길게 보여 주니, 더 괴상하고 더 부끄러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의 남자 주인공은 절대 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뭔지, 악하지만 사실은 사연이 있을 거야, 아아아, 봐라 이 놈도 사실 자기 어머니에게는 이렇게 효자 잖아, 그런 구구한 말들을 더 구구하게 들리게 길게 늘어 놓아서, 느글느글한 기분만 더 들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성일은 윤정희에게 다시 돌아 옵니다. 윤정희는 썩 꺼지라고 합니다만, 신성일은 윤정희에게 미안해 하는 눈치입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또 미안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합니다.) 윤정희는 신성일에게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역시, 극적인 인물 대립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괴상한 관계를 보여 주어서 영화 상영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좋은 대사와 상황은 이번에도 안타깝게 부족했습니다. 기껏 감정의 발산 장면이라고 나오는 것이, 윤정희가 속옷 차림을 드러내며 신성일에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차라리 짐승 같이 덤벼요! 차라리 나를 마음껏 짓밟아 봐요! 짓밟아 보란 말이에요!”라고 한탄하며 우는 장면입니다. 대사 자체가 전혀 상쾌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만, 유난히 길고 늘어지게 신파조로 연출되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런 똑같은 대사가 반복 되어 두 번이나 나오기도 해서, 영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허장강은 뭔가 이상하게 돌아 가고 있다는 냄새를 맡고 윤정희에게 접근했다가, 협박 건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 채기도 합니다. 허장강은 윤정희를 협박하며 “나는 돈이나 노리고 당신을 협박하는 그런 놈들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나는 돈을 노리는 것이 아니오.” 따위의 말을 하더니, 돈을 달라고 하는 대신에 윤정희를 덮치려고 하는 새로운 형식의 쓰레기 같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다가 신성일에게 또 두들겨 맡고 쫓겨 납니다. 이번에는 짜고 때리고 맞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맞고 쫓겨 난 것입니다.


5.

(돌아온 남궁원)
이 영화의 다섯번째 전환점은, 죽은 줄 알았던 남궁원이 사실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남궁원은 열차에서 떨어져서 다리 하나를 절게 되었고, 얼굴에 흉칙한 상처가 생기기는 했지만 살아 있는 것입니다. 다들 남궁원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궁원은 지옥에서 돌아 와 이 꼬이고 섞인 판국을 다시 또 엎어 버리는 반전을 펼치려고 합니다.

이것도 재미난 이야기 거리였다고 생각 합니다. 일단 꼬여 있는 이야기를 일거에 풀어 버릴 수 있는 좋은 칼이 될 이야기 거리라는 생각도 들고, 영화 속에서 협박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윤정희가 되살아난 남궁원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는 장면 등으로 복선도 잘 들어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궁원의 악역 연기가 흉칙한 악당 모습과 잘 어울리게 펼쳐지고 있기도 해서, 이것도 보기 그럴 듯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역시 화려한 막판 결전을 터뜨린다거나, 더 기묘한 이상한 줄거리로 가는 발판이 된다거나 하지는 못하고 그저 적당히 끝맺는 수준에서 그쳤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아주 이상할 것은 없었습니다. 결말은 남궁원이 허장강과 신성일을 다 죽여 버리고, 윤정희까지 죽이려고 했는데 죽기 전에 신성일이 경찰서에 신고했기 때문에 붙잡혀서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경찰에 신고 하니까, 그냥 잡혔음" 뭐 이런 느낌이라서 좀 심심하고 허망하기는 했고, 대신에 그만큼 무리수가 없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허장강과 남궁원이 서로 속고 속이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자잘하게 나오기도 합니다만, 큰 이야기 거리는 못되고 마는 정도였습니다.


*.

(윤정희)
나중에 나온 “삼각의 함정”과 이 영화를 비교해 보자면, 저는 품질로만 본다면 “삼각의 함정”이 조금 더 낫다고 생각 합니다. “삼각의 함정”은 쓸쓸하게 다리 위에 서 있는 문숙의 모습과 그 배경에 흐르는 음악으로 대표되는 환상적인 정취가 어느 정도 있는 영화였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앞서 언급한 70년대 이탈리아산 지알로 영화처럼, 악몽 같은 이야기, 신비로운 수수께끼라는 느낌을 만들어 주어서, 이 괴상하게 꼬인 이야기에 잘 맞아 들어 가는 느낌이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뿐만 아니라, 격정적인 장면 몇몇의 연출이 더 과감하고, 몇몇 대사와 장면들이 조금은 더 그럴듯하게 다듬어져 있었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 “여섯개의 그림자”는 다른 개성이 있어서 또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 영화는 인물과 배우들, 연기가 조금 더 재밌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사실 “삼각의 함정”에 나오는 남자 악당들은 당시 악당 연기를 곧잘하던 오지명, 백일섭이고, 여자 주인공은 개성적인 면이 강했던 문숙이라서 더 정확하게 들어 맞는 배우들을 꼽자면 역시 이 영화 “여섯개의 그림자” 보다는 “삼각의 함정” 쪽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는 악역 전문 배우 대신에 당시 한국 영화의 대표 미남 배우들인 신성일과 남궁원이 썩어 빠진 악당을 연기하는 연기하는 것을 아주 잘 하고 있어서 그게 볼 만했습니다.

남궁원은 비열해 빠진 더러운 놈 연기를 다른 어울리는 배우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해냈고, 신성일은 미끈하고 신사적인 인물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면에 더러운 수작을 부리는 이중인간의 모습을 전말 보기 싫을 정도로 연기해 내고 있었습니다. 악역 연기의 대가인 허장강은 또 나름대로 절묘해서, 역시 추잡해 빠진 놈이긴 매한가지이지만, 어두운 악당들인 남궁원, 신성일에 비해서 또 슬슬 농담을 주워 삼기는 치졸하게 웃음거리가 되는 인간으로 나오는 것이 특색이라서 두 배우들 못지 않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허장강은 술집 종업원의 옷에 돈을 찔러 주면서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데, 그게 또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이라 종업원은 치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정보를 이야기해 주기는 하는데, 이야기를 다 듣자 허장강은 농담 한 마디를 던지고 옷에서 다시 돈을 꺼내서 도로 가져 간 뒤에 잽싸게 자리를 뜨는 인간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윤정희는 여러 남자 악당들 사이에 놓인 전통적인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으로 역할에 어울리는 모습을 잘 해내고 있었습니다. 밤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이 많은 영화인데, 가끔 실내 조명 아래에서 윤정희의 유채색 의상 색채가 잘 나타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역시 눈에 뜨이는 좋은 대목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 밖에...

이 영화에서 “사실은 죽은 줄 알았던 남궁원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보면서 생각한 것인데, 이만희 감독작 중에 “죽었던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있다”, “죽인 사람이 복수를 위해 지옥에서 돌아 온다”는 이야기가 꽤 여러 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은 머리” http://gerecter.egloos.com/4758771 도 비슷하고, 따지고 보면 “마의 계단” http://gerecter.egloos.com/2682789 도 그런 계통으로 묶일 수 있는 이야기이니 말입니다. 여기에 같은 이야기를 세 번이나 만든, "다이알 112를 돌려라", "여섯개의 그림자", "삼각의 함정"은 물론입니다.


(1962년 "다이알 112를 돌려라" 신문광고)

(1969년 1차 리메이크 "여섯개의 그림자" 신문광고)

(1974년 2차 리메이크 "삼각의 함정" 장면)


(1차 리메이크인 "여섯개의 그림자"에서 냄새 맡고 여자 주인공 윤정희를 협박하러 온 잡범, 허장강)

(2차 리메이크인 "삼각의 함정"에서 냄새 맡고 여자 주인공 문숙을 협박하러 온 잡범, 백일섭)

리메이크 관계에 대해 조금 더 파헤쳐 보자면, "다이알 112를 돌려라" 보다 2년 앞서 나온 1960년작 영화 "사랑의 함정"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도, 사랑하는 남녀와 과거에 엮인 남자가 있는데, 여자가 고민하다가 확 살인을 저지른다는 내용이 같습니다. 아마, 이 영화 또는 이 영화가 모방한 다른 일본 영화/TV물의 영향을 받아서 그 중심 갈등을 살리고 반전을 더 집어 넣은 것이 "다이알 112를 돌려라"였고, 거기서 리메이크 하면서 차츰 더 발전해 나간 것이 "여섯개의 그림자"와 "삼각의 함정"이었지 싶습니다.


("사랑의 함정" 포스터)

60년대식 문어체 대사로 나오는 농담들 중에는 잔재미가 되는 대사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윤정희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자, 경찰이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서 경찰이 오자, 윤정희는 “악몽을 꾸어서 소리를 질렀다”고 말하면서 경찰에게 미안하다고 둘러댑니다. 그러자, 아무것도 모르는 경찰들은 아름다운 잠옷차림의 윤정희를 향해 허허 웃으면서 “꿈 속의 도둑이라도 쫓아드릴 수 있다면 저희들은 출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물러 갑니다. 다른 장면으로는 허장강이 깐죽거리며 폭로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다가 “계속 그렇게 나불대면 재갈을 물려 버린다”라는 말을 듣는 부분도 있습니다. 여기서 허장강은 돈을 주면 입을 닫고 있겠다는 뜻으로, “50만원짜리 재갈을 물려 주면 아무 말 못 할텐데”라고 합니다.

핑백

  • 게렉터블로그 : 한국영화의 고전과 괴이한 옛영화들 글목록 2015-05-05 07:33:36 #

    ... 어라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 열차를 타라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 1976년판) 암살자 애꾸눈 박 언니는 말괄량이 (1961) 여(女) 여마적 여사장 (1959) 여섯개의 그림자 (1969) 여자 대장장이 여자 형사 마리 염통에 털난 사나이 (1970) 영 (影) 왜? (1974 - 포스터 자료 추가) 용호대련 웃음소리 (1978) 장군의 수염 지옥 ... more

덧글

  • 진보만세 2015/05/05 07:59 # 답글

    “꿈 속의 도둑이라도 쫓아드릴 수 있다면 저희들은 출동을 하겠습니다"...

    지금 들어도 손발이 퇴갤할 대사입니다..

    정성어린 추억의 영화 포스팅 고맙습니다..^^
  • 게렉터 2015/05/05 09:28 #

    그 대목은 그래도 헛웃음 나올만한 장면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괜찮은 장면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제가 잊어서 그런데 그런 괴상한 문어체 대사가 재미있게 되는 부분들이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 rumic71 2015/05/05 16:17 # 답글

    "짜고 치는 구원자 놀음" 이라면 킨다이찌(손자)에서도 비슷한 발상이...
  • 게렉터 2015/05/07 21:34 #

    따지고 보면, 윤정희 주인공 한국 영화에서 자주 보던 오드리 헵번 영화에도 이런 것들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예를 들어 "샤레이드"에서 오드리 헵번을 캐리 그란트가 구출해주는데, 그 영화에서는 한번 더 꺾어 놓아서 오드리 헵번이 캐리 그란트가 "가짜로 짜고 치는 구원자 놀음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그게 또 반전이 되는 모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역사관심 2015/05/06 02:41 # 답글

    고전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텍스트가 꼭 고전소설읽는 '맛'이 있단 말이죠..^^
  • 게렉터 2015/05/07 21:35 #

    저는 옛날 영화 속에 비쳐 나오는 옛날 한국, 서울 모습들이 순간순간 재밌어 보이는 것이 요즘에는 이런 영화를 보는 또다른 흥미거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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