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 없는 부인의 금지된 사진 (Forbidden Photos of a Lady Above Suspicion, 1970) 영화

70년대 이탈리아산 추리 영화들 중 상당수는 지알로 영화로 불리우며, 그 인상적인 특징이 회자되어 왔습니다. 1970년작 "의혹 없는 부인의 금지된 사진 (Forbidden Photos of a Lady Above Suspicion, Le foto proibite di una signora per bene, 1970)"은 다른 많은 지알로 영화들처럼 연쇄살인마를 다루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지알로 영화의 특징을 상당히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한 갑부의 젊은 부인이 어느날 괴상한 남자에게 협박을 당하게 되고, 거기에 벗어나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데 자꾸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포스터)

이 영화는 다리오 아르젠토가 감독한 영화처럼 악몽 속을 환상적으로 헤메는 느낌을 준다거나, 화려한 색감의 화면 속에서 공격 순간의 강렬함이 터져 나오는 인상을 살리는 것은 못 되었습니다.

한가지 찾아 보자면야 이 영화에는 부인이 하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믿지 않아서 부인이 서서히 미쳐 가려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런 부분은 환상과 현실이 헷갈리는 악몽 분위기가 약간 날 법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별로 그런 느낌이 잘 살게 연출되어 있지 않아서, 그 맛이 살지도 못했습니다.

대신에 이 영화는 70년대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지금 보면 좀 괴상한 패션이나, 유채색의 파스텔 톤이 펑펑 쏟아지는 실내 장식 등등이 잘 담겨 있는 영화였습니다. 호사스러운 부자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라서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갑부집의 젊은 귀부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세련된 멋을 부리려고 했는지 눈에 뜨이는 영화였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어울리지만 치열한 사건과는 살짝 어긋나는 여유만만한 보사노바 풍의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이라든가, 무섭고 강한 협박자 범인의 모습과 그 정체를 알 수 없어서 궁금증이 생기게 하는 소재는 당시 지알로 영화 유행에 들어 맞았다고 생각 합니다.


(그냥 길바닥 돌아다니는 옷차림도 유채색)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서 결말까지 밝혀 보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주인공인 젊은 갑부 부인은 어느날 검은 옷을 입고 칼날 나오는 지팡이를 든 이상한 남자에게 추적을 당합니다. 처음에는 밤거리에 그냥 뒤에서 걸어 오는 남자인가 싶더니, 점점 속도를 높이면서 도망가도 악착 같이 따라 옵니다. 그 모습은 현실의 밤거리에서도 “혹시”하면서 잠깐 걱정되던 순간 만큼 현실감 있으면서도 긴장감도 있게 잘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주인공을 죽일 듯이 하다가, 너의 남편이 숨긴 무서운 비밀을 안다는 정도의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무서운 분위기만 잡더니, 그냥 갑니다.


(무서운 남자)

주인공은 이 사건을 남편에게도 말하고 경찰에게도 말하고,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도미니크에게도 말합니다. 도미니크는 약간 과하게 자유 분방하게 사는 사람이고 남편과도 끈적한 사연이 있는 듯 마는 듯 보이는 인물입니다. 도미니크는 겁먹은 주인공에게 여유만만하게 웃으면서 그냥 잊고 세상 즐기면서 살자고 말하는데, 그런 도미니크를 보고 주인공은 자기도 진정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을 공격했던 남자는 얼마 후 또 주인공에게 접근합니다. 그러더니 잠수 기술과 관련된 회사의 사장인 남편이 잠수병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녹음되어 있는 것을 주인공에게 남자가 들려 줍니다. 그리고 남편이 사람을 죽였다는 이 사실을 까발려 버릴거라고 하면서 주인공을 협박합니다. 주인공은 남자에게 돈을 주겠다면서 그 녹음을 달라고 하는데, 남자는 돈은 그냥 버리더니 주인공을 공격하기만 합니다.

남자는 계속 주인공 곁을 맴돌며 협박하면서, 주인공에게 “너는 나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녹음을 대가로 주인공을 협박하여 그녀를 학대합니다. 70년대 중반 일본의 완전 성인용 영화들이었다면 그 학대 장면에 초점을 두고 영화 상영 시간을 때웠겠습니다만, 이 영화는 그렇게 막나가지는 않고 잠잠히 앞뒤 사연을 보여 주는 식으로 연출되어 있습니다.

그 후 남자로부터 녹음을 받은 주인공은 그걸 바다에 던져 버리고 이제는 모든 것을 정말로 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다시 등장해서 또 협박합니다. 남자는 그 녹음은 조작한 것이었다고 너는 속은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사람을 죽인 일이 전혀 없는데 자기가 적당히 성대모사해서 남편으로 위장해 가짜로 녹음을 꾸민 것일 뿐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대신에 이번에는 몰래카메라로 일전의 자신과 주인공의 모습을 찍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걸 남편에게 보여 주고 세상에 까발릴 거라고 협박합니다.


(전화로 협박)

참으로 지저분하고 악랄한 놈 아닙니까? 모든 것을 친구 도미니크에게 털어 놓자, 친구 도미니크가 돈을 보태 주기까지 하지만, 남자는 많은 돈도 거부하고 계속 협박하겠다고 합니다. 참다 참다 못해, 주인공은 도미니크의 충고를 받아 들여 모든 것을 남편과 경찰에게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협박범이 자꾸 모습을 감추고 주인공에게만 살짝살짝 나타납니다. 주인공이 협박범의 집에 가 보자면서 경찰과 남편과 함께 가보니 그 집은 그저 빈집이라서 “분명히 여기에 있었는데...”라고 하는 일도 벌어 집니다. 주변 사람들은 점차 주인공의 말을 믿지 않고, 주인공이 헛소리를 하거나 정신이 이상해져서 환각을 본 거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 합니다.

이쯤 되니, 주인공은 세상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 집니다. 도미니크는 너무 자유분방한 사람이라서 애초부터 이상해 보이지 않았습니까? 괜히 자기에게 돈을 쾌척한 것이나 남편과의 과거도 다시 유난히 의심스러워집니다. 경찰도 못 믿겠습니다. 이 무렵에 비가 내릴 때 괜히 창밖에 문제의 남자가 한 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데, 이런 장면은 김기영이 감독을 맡은 한국영화 “하녀”의 장면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하녀”에 비해서 심각한 느낌은 부족합니다만, 그런 혼란 가운데 주인공은 점점 더 정신이 무너져 내립니다.


(주인공)

그러다 마지막으로 남자가 다시 주인공을 공격합니다.

남자가 주인공을 죽였다고 생각한 순간, 주인공의 남편이 나타나 남자를 권총으로 처지해 버립니다. 그런데, 요행 주인공은 아직 아슬아슬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남편이 자기를 구출해 줬나 싶어 안도하려는데, 이런! 사실은 남편이야 말로 이 모든 사건의 진짜 배후였던 것입니다.

남편은 허세만 강했지 사실 사업이 어려워서 쪼들리고 있었는데 주인공에게 생명 보험금을 왕창 걸어 놓고 그걸 노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실제 남편이 협력해 줬기 때문에 주인공도 깜빡 속아 넘어갈만큼 협박범 남자가 그럴듯한 녹음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완전범죄를 위해, 괴상한 악당 하나를 섭외해서 이상한 짓을 하고 또 주인공의 말은 의심스럽게 한 상태에서 둘이 충돌하게 하고, 둘 다 죽게 만드는 것이 남편의 계획이었던 겁니다.

남편이 주인공을 죽이려는 순간, 경찰이 들이닥칩니다. 알고 보니 경찰은 일종의 함정 수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미니크가 이상하게 행동한 것도 범죄가 그대로 이어져서 배후가 드러나도록 유도하느라 연기한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괜히 저항하다가 경찰의 총을 맞고 최후를 맞이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혼자가 된 주인공이 흥겨운 음악에 맞춰서 멋진 자동차를 타고 도미니크와 함께 자유롭게 놀러 다니려고 화창한 오후에 어딘가로 떠나는 것입니다.


(왼쪽부터 도미니크, 주인공, 남편)

이야기에서 반전의 핵심은 좋았다고 생각 합니다. 감쪽 같이 조작한 녹음, 사진, 영상으로 누군가를 속이는데, 그렇게 잘 속일 수 있었던 이유가 사실은 주인공 바로 옆의 정작 주인공이 보호해 주려던 누군가가 주인공을 배반하고 그 배후를 조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반전 다웠다고 생각 합니다.

게다가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인데, 그 남편에게는 말도 못하고 협박에 당한다는 역설적인 기구한 사연도 주인공의 복잡한 처지와 정신의 혼란을 이끌어 가기에 괜찮았다고 생각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몇 가지 장점 이외에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잘 어울린 영화는 못되었다고 느꼈습니다. 후반부에는 주인공의 절절한 심경이 중요했던 영화인데, 역시 부인이 겪는 악몽 같은 느낌이 더 환상적으로 연출되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또 그 주인공 역할을 맡은 다그마 라산더의 연기에도 한계가 있어 보였습니다. 연기가 후시 녹음 영어 더빙에 묻히다 보니 더 가짜 같이 어색하게 들렸다는 것도 이번에는 꽤 문제였지 싶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주인공을 협박하던 남자 역할을 맡은 시몬 안드레우의 모습은 악랄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정감 있는 인상이라서 호기심 나게 하는 이야기에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니 주인공의 부족함은 더 눈에 뜨였습니다.

더군다나, 도미니크 역할인 니에베스 나바로(수잔 스콧)는 주인공 보다 훨씬 재밌게 배역의 가능성 이상을 보여주는 적역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껄렁하고 슬쩍 부도덕하게 나와서는 쾌락주의적인 태도로 항상 여유만만한 인물을 보여 줍니다. 무슨 제임스 본드 비슷하게 영화 속 세상에서만 볼만한 인물형을 보여 주는데, 남자를 쾌락의 도구로 마음껏 이용하는 독립적인 여자이면서도 언제나 겁먹거나 당황하지 않고 강인했습니다. 이러니 좀 어이 없이 웃길 정도로 보이는 멋부리는 인물처럼 보이긴 해도 그런 70년대 영화 속의 자유분방한 사모님, 하면 바로 상징처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인물이 선명했습니다. 이런 도미니크는 남편을 위해 희생하다가 괴로움을 겪는 주인공과 뚜렷이 대조 되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도미니크)

대체로 70년대 이탈리아산 추리 영화의 유행 초기 무렵에 걸친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몽환적인 느낌이 잘 사는 70년대 지알로 영화에서는 현실적인 범죄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꼭 악마나 마귀가 나와서 세상의 어느 구석을 돌아 다니고 있는 것을 언뜻 본 듯한 느낌이 감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피가 튀는 공격 장면이나 환상 같은 화면은 없습니다. 완성된 유행의 잘 정비된 틀을 따라 간다는 식의 영화는 아니었고, 그래서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대신에 그 다른 점들이 개성이 되기도 했던 영화였다고 돌아 봅니다.


그 밖에...

60, 70년대에 많은 이탈리아 영화 각본을 맡았던 에르네스토 가스탈디가 각본을 맡은 영화입니다. 대강 이 영화 무렵을 기점으로 한 동안 지알로 영화 각본을 주로 쓰게 됩니다. 그렇게 나온 지알로 내지는 그 비슷한 영화들이 "워드 부인의 이상한 죄악", "피투성이 아이리스 사건", "너의 죄악은 밀실, 오직 나만이 열쇠를 갖고 있다" 등등입니다.

별 큰 상관은 없습니다만, 괜히 생각 난 것이 90년대 초에 나온 KBS 미스터리 멜로 금요일의 여인이라는 한국 TV시리즈입니다. 여기에도 "김윤경의 모성본능" 에피소드에서 김윤경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협박범에게 고통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아들이 고3이기 때문에 충격 받을까봐" 사실대로 경찰에 털어 놓지 못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의 결말은, 견디다 못한 김윤경 아주머니께서 열받아서 범인을 돌로 쳐서 처지해 버리고 입 다물고 있다가 아들이 대입에 성공하자 마자 바로 자수한다는 그야말로 한국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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