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송이 피에 얼룩진 난초 (Seven Blood-Stained Orchids, 1972) 영화

“일곱 송이 피에 얼룩진 난초”(Seven Blood-Stained Orchids, Sette orchidee macchiate di rosso)는 70년대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로, 그 특색 있는 한 부류를 이루었던 지알로 영화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내용은 칼 들고 차례로 공격하는 연쇄 살인마가 나오는데, 간신히 살인마의 공격을 피한 그 희생자 중 한 명과 그 남편이 도대체 왜, 누가 이런 짓을 하는 지 하나하나 추적해 밝혀 낸다는 것입니다.


(포스터)

이 영화는 당시 지알로 영화의 소재들을 이것저것 잘 사용하고 있어서 지루하지 않고 볼만한 편입니다. 끝까지 이야기를 따라 가기에도 좋고 큰 억지 없이도 이야기가 굴곡을 갖고 잘 이어지는 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그 지알로 영화의 소재들을 인상적으로 화려하게 펼쳐 보여 주는 대목에는 도달하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억에 깊게 남는 장면은 부족했다고 느꼈습니다.

즉 그럭저럭 70년대 이탈리아산 추리물에서 유행하던 소재를 유행하니까 모아 놓기는 모아 놓았는데, 그 소재들이 왜 유행했는지, 그 소재가 어떻기에 그렇게 주목 받았는지 제대로 알 지 못해서 살리지 못하고 그냥 모아 놓기만 한 모양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 영화에는 범인일 것 같은 인물을 열심히 추적해서 겨우 겨우 정체를 알아낼 기회를 얻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 인물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당시 대표적인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였다면, 이런 소재를 가지고 “혹시 진짜 귀신이 돌아 다니며 사람을 잡는 것은 아닌가?”하는 으스스하고 신비롭고 악몽 같은 느낌을 살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연출을 안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들도 비슷했습니다. 당시 유행대로 번쩍거리는 범인의 칼날이 화면에 눈부시게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뿐으로, 그걸 공포의 심상으로 터뜨리거나 화면을 꾸며서 감상을 더 격하게 해 주는 식으로 활용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단서가 되는 기묘한 물건이나, 외국에서 와서 공항에 도착하는 등장 인물, 마귀 같은 것이 자기를 공격할 거라며 불길한 소리를 하는 정신병에 걸린 여자 등등 당시 유행하던 소재들이 여럿 나오는데, 이런 것 역시 마찬가지로 다리오 아르젠토가 감독을 맡았던 영화들에 비하면 그다지 신비롭고 화려하게 활용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서가 되는 기묘한 물건)

그런 점들이 이 영화의 약점입니다. 반면에 그래도 영화를 건사하는 장점을 찾는다면, 특색 있는 70년대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로서는 기운이 덜 살지만, 그냥 일반적인 추리물로는 그런대로 기본기가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이야기가 부드러운 속도로 지루하지 않게 진행되고, 단서들을 하나 하나 추적해 나가면서 마침내 그 단서들이 모여서 범인을 찾아내는 이야기가 차곡차곡 단계별로 잘 쌓여 있었습니다. 놀라운 결말이 있거나, 기가 막힌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대신에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모를 수수께끼 같았던 사연이 천천히 정리되면서 실체가 차차 분명해지고 마침내 한 명의 범인으로 좁혀지는 과정이 말이 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범인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방어하지 못하고 놓치는 이야기가 안타깝게 잘 들어가 있어서, 긴장감도 어느 정도 유지해 주고 있었습니다. “진실을 담당자에게 말하고 조심하라고 경고 했는데도, 정신병자라고/어린이라고/노숙자라고 무시했다가 안타깝게 당한다”라는 상투적인 수법이 나오는데, 그걸 보여줄 때, “한 번만 들여다 보지” “무시하지 말고 한 번만 속는 셈치고 믿어보지”하고 관객을 안타깝게 하는 것이 천연덕스럽게 되어 있어서 흔한 수법이라도 잘 먹히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화면 구성도 색상이나 조명이 명징한 멋이 살아 나는 편은 아니고 어딘가 좀 흐리멍텅하고 관습대로 찍은 듯이 보입니다만, 대신에 알아 보기 어려운 장면은 없고 보여 줘야 할 것은 제대로 보여 주고 있어서 이야기를 따라 가기는 좋았습니다.


("누가를 나를 해치려고 온다! 온다고!" - 한 번만 말 믿고 들여다 봤으면 살았을 정신병자)

구체적으로 내용을 결말까지 살펴 보면 대강 이런 내용입니다.

수수께끼의 연쇄살인마가 사람을 공격하고 다닙니다. 범인에게 공격 당해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사람 중 하나는 겨우 살아 남아서 가짜 장례식을 치르고 죽은 척 하기로 경찰과 짭니다. 그래서 범인으로부터 안전히 숨어 있으려고 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람은 자기 남편과 함께 범인의 정체를 추적하려고 합니다.

초장에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도대체 범인이 왜 사람들을 공격하는 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법이 잔인하기 때문에 원한이 동기가 아닌가 싶지만, 희생자들 사이에 공통점이 너무 없습니다. 범인이 노린 희생자들은 길거리에서 막사는 여자, 영어 교사, 갑부집 부인, 정신병원에 갇힌 정신 병자 등등으로 어떻게 엮이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경찰은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맛이 간 놈이라는 식으로 짐작해 볼 뿐입니다.


(범인에게 당한 인물 중 한 명: 자유분방하게 사는 사람)

그래도, 죽은 척하는 사람과 그 남편, 부부는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밝혀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범인이 꼭 시체 곁에 이상한 달 모양의 장식품을 남겨 놓는다는 사실이나, 가장 범인일 것 같은 인물이 이미 예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죽은 채로 있다는 사실, 그 가장 범인일 것 같았던 사람의 무덤에 왜인지 일곱 송이 난초가 놓여 있다는 사실 등등도 알게 되고, 안타깝게 범인을 막지 못해서 희생자가 늘어 나는 일도 생깁니다.


(범인이 남겨 놓곤 하는 달 모양의 장식품)

그러다가 마침내 중간에 한 가지 단서를 밝혀 냅니다. 그 희생자들이 모두 비슷한 시간대에 어느 호텔에서 머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범인도 그때 같이 호텔에서 머물다가 괜히 희생자들을 지목하고 공격하겠다고 결심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다 마지막으로 밝혀낸 진실인 즉슨 이런 겁니다.

가장 범인일 것 같았던 교통사고로 죽은 남자는 불륜 관계인 여자 차에 얻어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는데, 사고 났을 때 신고하면 바람난 게 들킬까봐 여자가 신고하지 않은 바람에 치료를 제 때 못 받아서 살 수 있었는데 죽었던 겁니다. 그러자, 그게 원한이 된 남자의 동생은 형의 복수를 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정확하게 형을 버려 두고 신고도 하지 않은 그 바람났던 여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 때문에 이 맛이간 놈이 그때 남자와 바람 났을 가능성이 있는 호텔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싸그리 다 죽여서 어떻게든 복수하려고 했다는 게 진상이었습니다.

범인이 남겨 놓은 달 모양의 장식품은 그때 교통사고 때 자동차 열쇠의 열쇠고리로, 희생자가 실제 복수 대상이었다면 왜 죽는 지 알게 해 주려고 던져 준 것이었다고 합니다.

막판에 범인은 남편과 마주쳐서 싸우다가 풀장에 빠져 최후를 맞이하고,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살아 남았지만 죽은 척하며 대신에 역으로 추적하는 여자 주인공)

유행하던 소재들은 제대로 살 지 못했기 때문에, 차라리 전통적인 방법으로 간다면 잔재미를 좀 더 살리는 것이 좋았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예를 들어서 등장하는 경찰이나 부인, 남편의 인물을 좀 더 재미있게 꾸민다든가 좀 더 신기한 재주나 개성을 갖고 있어서 그게 사건과 엮인다는가 하는 내용을 엮어 넣었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 당시 이런 이탈리아 영화에서는 남편이 항상 비열하거나 한심한 놈 아니면, 처음에는 멀쩡해 보이다가도 막판에 비열한 놈, 한심한 놈 심지어 범인으로 드러나는 일이 매우 잦았는데, 의외로 이 영화에서는 남편이 끝까지 제대로 된 인간이었던 만큼, 부부간의 장단이 잘 맞는다는 내용을 재치있게 살리는 것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조사 중인 부부)

몽환적인 느낌이 잘 사는 70년대 지알로 영화에서는 현실적인 범죄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꼭 악마나 마귀가 나와서 세상의 어느 구석을 돌아 다니고 있는 것을 언뜻 본 듯한 느낌이 감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이 영화 속에는 감상적인 음악이라든가, 조사하는 중에 마주치게 되는 약에 취한 얼빠진 놈들의 잔치처럼 더 몽환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소재들이 나오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냥 별로 타오르지 못하고 굳어 있었습니다. 하다 못해 화면색도 날카롭고 울적한 회색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란하고 화려한 원색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고 낡게 흐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하기야 70년대 지알로 영화라면 뭐 너무 매끈하고 거창한 영화라기 보다도 적당히 좀 모자라고 중저예산 같은 것도 제 격이니 이만하면 어울린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 밖에...

범인이 일 저지르기 전에 어떻게 뺑소니 범인을 한 명으로 잘 밝혀 내기만 했어도, 그냥 그 날 같은 호텔에 묵었다는 이유만으로 공격 당한 허무한 사람들은 걸러낼 수 있었을 텐데, 어쩌자고 뭐 이런 이야기가 되도록 일을 저질렀나 싶습니다.

이번에도 범인은 가톨릭 신부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가짜 신부로 위장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유행의 흐름에 따라 찍어야 하는 영화들을 부지런히 많이 찍은 편이던 움베르토 렌지가 감독을 맡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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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umic71 2015/10/16 17:03 # 답글

    결국 그 불륜녀는 살았나요 죽었나요...?
  • 게렉터 2015/10/19 21:21 #

    참 기막힌 지점을 질문해 주셨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문제의 불륜 저지르고 신고 안한 사람 역시 악당의 표적이 되어 악당이 공격 합니다. 얼핏 영화에서 보면 그 사람도 그래서 죽임을 당한 것처럼 나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또 나옵니다. 무슨 사연인고 하니 앙큼하게도 마침 그 사람은 쌍둥이라서 악당이 착각해서 쌍둥이 동생을 대신 죽였고, 정작 목표였던 사람은 살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도 사이를 비집고 끼워져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이야기 소재가 모인 형국은 정말 70년대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답다는 생각도 새삼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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