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하이힐을 신고 걷는다 (Death Walks on High Heels, 1971) 영화

“죽음은 하이힐을 신고 걷는다” (Death Walks on High Heels, La morte cammina con i tacchi alti, 1971)는 1971년작 이탈리아산 추리물로, 비슷한 영화들을 일컫는 지알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내용은 클럽에서 끈적한 춤을 추는 댄서인 주인공이 있는데, 그 아버지가 거액의 다이아몬드를 훔치고 도주하다가 살해 당하는 바람에, 그 딸인 주인공이 다이아몬드의 행방을 알 거라고 생각하고 여러 악당들이 모여 들어 협박하는 음모를 펼친다는 것입니다.


(주제곡 음반 표지)

이 영화는 크게 굽이치면서 영화 분위기가 세 번 정도 바뀌는 느낌이었습니다.

초장은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댄서인 주인공과 그 주변에 덤벼드는 정체 불명의 살인마, 의심스러운 남자들이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중장은 영국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뭔간 음침한 음모가 있는 듯한 느낌으로 꿍꿍이를 숨긴 사람들이 알듯말듯한 일을 벌이는 대목입니다. 종장은 주인공 대신 그 남자 친구와 형사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지금까지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대목이었습니다.

저는 그 중에 도입부인 첫번째가 제일 재미있었고, 두번째는 약간 지루했고, 세번째는 혼란스러워서 진기하다는 느낌 반, 억지로 뭔가 해 보려다가 실패했다는 느낌 반 이었습니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남자의 부인)

초장에는 이야기 진행하다 말고, 주인공을 맡은 니에베스 나바로(수잔 스콧)의 몸매 자랑을 하면서 장황하게 춤 추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야 말로 몸매 자랑만이 목적인 장면이라 이야기를 다 끊어 먹고 그냥 그 장면만 막 들이 밀고 보여 줍니다. 그래도 당시 70년대 유행을 퍽퍽 살려서 괴상한 반짝이 의상을 입힌 모습을 보여 준다든가, 몸에 약간 어두운 톤으로 화장을 온통 발라서 피부색을 이상하게 어두우면서 빛나게 꾸민다든가 하는 괴상한 모습으로 나와서 신기한 점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장에는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되려고 그러나, 싶은 재미난 소재나, 이무렵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다운 장면을 골라 놓은 것들이 몇 박혀 있었습니다. 도시 생활에서 살아가는 멋쟁이 남녀들의 모습,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럴싸하게 폼 잡는 남자 친구이지만 가끔 술 먹고 자기는 여자 친구에게 얹혀 사는 쓰레기라고 자학하면서 동시에 화를 내는 남자 주인공, 경찰에서 다이아몬드가 어디 있는 지 알면 말하라고 하는데 정말 모른다고 하는 주인공, 등등이 나옵니다.

갑자기 나타난 얼굴을 가린 정체불명의 악당도 무섭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날카로운 면도칼을 들이대고 나타나 협박하더니 다이아몬드가 어디있는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칼날의 무서움과 촉감이 살아나게 화면에 잡혀 있고, 무서워하는 표정도 화면에 섬뜩하게 잡혀 있었습니다. 니에베스 나바로의 연기가 훌륭했고, 악당의 행동은 드러나는 낭자 장면이 없이도 음산하고 자극적이었습니다.

악마 같은 악당은 칼이 너무나 예리하기 때문에 처음에 건드릴 때는 고통이 없겠지만 이후 고통이 몰려 오며 최후를 맞이할 거라고 겁을 주면서 협박 합니다. 그리고 그 느낌에 집중해 보라는 듯이 주인공의 눈이 보이지 않도록 주인공의 옷으로 눈을 가립니다.

“싸이코” 같은 영화에서 쓴 방법처럼, 몸이 드러나 더욱더 무방비상태처럼 화면에 보이는 주인공이 나오고, 악당은 칼을 들이밉니다. 악당은 칼의 칼등 부분으로 건드리는데, 보이지 않는 주인공은 그게 칼등인지 뭔지 모르고 악당의 말을 생각하며 더 큰 공포를 느낍니다. 나중에 다시 주인공의 눈을 보이게 해 준 악당은 “다음번에 올 때는 칼등이 아니라 칼날로 할테니까, 다음번에는 반드시 다이아몬드가 어디있는지 말하라”고 낄낄거리며 말한 다음에 떠납니다.


(주인공을 위협하는 칼)

이렇게 시작해 놓고, 갑자기 중장에서는 도시가 아닌 영국 시골로 분위기를 확 바꾸고, 그 악마 같은 악당도 안나오고, 도시 배경의 주변 인물이나 상황도 안 나와 버립니다. 대신에 낯선 동네의 부잣집에 온 여자 주인공이 그 부자의 저택과 그 주변에 무슨 숨겨진 무서운 비밀이 있는 거 아닌가, 하면서 헤매는 고전적인 고딕 풍의 분위기로 변해 버리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저는 점차 지루해졌습니다. 게다가 막판 종장에는 이야기가 혼란스럽기까지는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해서 이야기의 핵심이었던 주인공의 비중도 확 줄어 버립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엄청난 도둑의 딸이며, 동시에 주변에서 “밑바닥” 취급을 받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당당하고 자신감 있고 여유 있는 인물로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핵심으로 활약하던 인물인데 활약이 없어져 버리다니, 너무 아쉬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연으로 이야기가 이렇게 변해 가고, 주인공의 비중이 약해져 가는 지, 이제부터 결말까지 밝혀 가며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주인공이 영국으로 갑자기 가게 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악당의 가린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괴상하게 파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목격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탐탁찮은 면이 많았던 주인공의 남자친구가 파란색 콘택트 렌즈를 숨겨 놓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인공은 자기 주변에 무서운 악당이 있고, 남자친구가 그 악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질린 나머지 어디로든 도주하려고 합니다.

마침 주인공의 쇼를 보고 반해서 추근덕거리는 호구 같은 영국 부자가 한 명 있었고, 그 영국 부자에게 “당신 하자는 대로 할테니, 당신 나라로 멀리 날 데려가 주쇼”라고 거래해서, 영국 부자의 별장이 있는 음침한 시골 어촌 마을로 온다는 것입니다.

이 마을에서 주인공은 뭔가 숨기고 있는 듯, 혹은 자기에게 괴상하게 대하는 듯 하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이 영국 부자와 영국 부자의 아직 이혼하지 않은 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어딘가 찜찜해 보이는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현란한 나이트 클럽 풍경에 도시의 아파트로 숨어 드는 살인마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음모가 숨어 있는 저택을 배경으로 하는 구식 공포물, 추리물처럼 변해 버립니다.

여기서는 촬영된 화면도 생기가 줄어 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여러 색깔의 인공 조명과 다양한 구조의 지하 댄스홀, 아파트등이 공간으로 등장했던 초장에 비해, 중반은 칙칙한 영국 날씨의 별 것 없는 마을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목조 주택 세트가 화면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색채나 선이 사는 연출이 거의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영국 부자와 함께 걷는 주인공)

게다가 종장에서 주인공의 비중이 확 줄어드는 것은 더욱더 당황스럽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바로 주인공이 악당에게 당해 확 사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부자의 연인으로 잘먹고 잘살 때의 주인공)

이것도 관객들은 상상도 못한 줄거리로 돌진해 나가 버리는 “싸이코” 같은 영화에서 썼던 수법입니다만, 그러나 이미 “싸이코”라는 잘 알려진 영화가 있는 마당에 더 이상 상상도 못한 줄거리가 못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싸이코”에서 주요 인물이 악당에게 당하면서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 사상 길이 남은 명장면으로 온 힘을 다해 연출되어 있는데, 이 영화에는 주인공이 어떻게 당했는지 그 모습도 제대로 안 나와 있고, 그냥 시체 발견 되는 것만 보여주고 끝이었습니다.

주인공의 퇴장을 장식 하기에 걸맞는 장면은 커녕, 정작 죽는 장면조차 안 나오고 너무 썰렁하게 처리 되어 있어서, 저는 “이 영화도 이 시절 이탈리아산 영화에서 흔히 쓰던 수법대로 ‘죽었는 줄 알았는데 사실 안 죽고 살아 있었다’ 수법을 쓰려고 하는구나”하고, 끝까지 보면 언젠가 주인공이 다시 살아서 나타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끝까지 주인공은 죽은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점이었습니다.


(악당의 칼날)

이야기의 종장은 프랑스에 남겨져 있던 주인공의 원래 남자 친구가 주인공을 추적하기 위해 영국의 이 마을까지 왔다가 사건을 추리하는 노릇을 하고, 얼빠진 만담을 서로 잘 주고 받는 2인조 경찰이 사건을 계속 추적해서 진상을 밝혀 낸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죽기 전에 주인공을 몰래 망원경으로 엿보고 있던 지저분한 놈의 목격담에서 애매했던 점이 슬슬 밝혀지기도 하고, 주인공이 의지했던 호구 같은 부자도 총을 한 방 맞기도 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안과 수술을 받고 있던 중이라 보지는 못하고 악당의 소리만 들었던 사람의 목격담도 잠깐 나옵니다.


(주인공을 멀리서 훔쳐 보기 - 훔쳐 보는 사람이 범인인가?)

막판에 밝혀지는 사실은 여자 옷 입고 하이힐 신은 것으로 자신을 위장하던 어떤 남자가 범인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경찰의 추리에 따르면 얼음을 구해서 주인공 시체에 묶어 두는 방법으로 시체를 보존해서 범행 시각을 속이는 수법도 쓴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건은 종결 되려는 듯 한데, 막판에 길가던 어떤 어부가 얼음과 생선을 싣고 가다가 호구 같은 부자에게 “선생님이 나눠 주신 얼음을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합니다.

그게 빌미가 되어 경찰은 호구 같은 부자야 말로 진짜 범인이 아닐까 생각해서 조사를 합니다. 조사 과정은 생략되어 있고, 그냥 자백의 말을 듣는 것으로 처리해서, 친절하게 호구 같은 부자가 모든 사건의 진상을 줄줄이 제 입으로 설명하는 것이 나옵니다.

알고 보니 이 호구 같은 부자는 원래 죽은 주인공 아버지의 동업자 도둑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기 위해 주인공 아버지를 죽였는데,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그 딸인 주인공을 찾아 간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인공에게 접근하기 위해, 댄서에게 반하여 추근거리는 호구 같은 부자인척 위장한 것이었습니다.

이 호구 같은 부자는 자기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이런 저런 짓을 하다가, 여러 사람을 죽인 것인 셈인데, 사실 명확한 동기와 수법 같은 것은 끝까지 봐도 애매 합니다. 한편, 다이아몬드는 다름 아닌 주인공이 춤 출 때 입던 반짝이 의상에 숨겨져 있었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막판에 부자는 부질 없이 그 다이아몬드는 가짜고 내가 진짜를 따로 숨겨 놓았다 어쩌고 하는 긴치 않은 수작을 부리며 한 번 도망치려고 해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더니, 주인공의 옛 애인에게 얻어 맞고 실신해 검거 됩니다.

마지막 장면은 이제 긴 모험을 끝내고 돌아간다면서 주인공의 옛 애인이 비행기를 타고 떠나고, 그를 전송하려고 나온 만담 담당 두 경찰이 서로 마주 보고 왜인지 씩 웃는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난데 없이 만담 콤비였던 조연 형사 두 사람을 웃기게 보여주며 끝)

몽환적인 느낌이 잘 사는 70년대 지알로 영화에서는 현실적인 범죄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꼭 악마나 마귀가 나와서 세상의 어느 구석을 돌아 다니고 있는 것을 언뜻 본 듯한 느낌이 감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도 써먹으면 재미있을 만한 그런저런 잡다한 소재 자체는 여럿 있었습니다. 지알로 영화에 단골로 나오는 것처럼, 뭔가를 얼핏 보기는 했는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기에 자꾸 그 장면에 대해 떠올리며 고민해 본다거나, 특이한 물건이 하나 있어서 그 물건이 뭐고 어떻게 거기 있는 지 밝혀지면 범인이 알려진다는 것 등등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무게를 잘 잡아 주고 있는 것은 없었고, 다들 그 사연은 적당히 땜질하는 별 것 아닌 이야기로 드러나는 것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파란색 콘택트 렌즈는 결정적인 증거처럼 처음에는 무슨 무서운 음악까지 들려 주며 보여주더니, 나중에는 그냥 악당이 “내가 누명 씌우려고 숨겨 놓은 거였다”하고 한 마디 말만 하고 끝일 뿐입니다.

장면 장면의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악당의 공격 장면은 천천히 갈 곳 없는 인물을 몰아 넣는 칼질 공격인데, 공포감과 깊게 공격하는 충격이 붉은 색채와 함께 힘 있게 드러나 보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정작 이 공격이 이야기 중에 꼭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이 인물이 결정적인 전환점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초장에는 밤장면이 많은 영화고 중반 이후로는 흐린날 같은 장면이 많은 영화인데, 그탓에 또렷한 영상을 못살리는 점이 악영향이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비슷하게, 중간에 주인공과 호구 남자가 괴상하게 끈적거리는 음식을 서로 마주 보며 먹는 장면이 역시 끈적거리는 음악과 함께 한참 나오면서 괴상하게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잡는 장면이 좀 웃기다 싶게 기나길게 나오는데, 관능적인 느낌이 없었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역시 이야기의 방향도, 곧 퇴장할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주는데에도 별 공이 없어 되돌아보면 무의미한 장면 같았습니다.


(초장에 댄서로 일하는 주인공이 가발 쓴 모습)

자신감 있으며 매력적이고 또 은근히 유혹적인 인물로 나오는 니에베스 나바로의 모습은 다시 보아도 장점인 영화였습니다. 그외에도 인물을 보여 주는 연기가 괜찮아서 초장 이후로 재미가 없어진 이야기를 그나마 버텼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옛 남자친구를 연기한 시몬 안드레우는 다른 영화에서 나온 모습처럼 이번에도 악당 편도 우리 편도 그 중간인지 어딘지 알 수 없는 느낌도 어느 쪽도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서, 궁금하게 하는 이야기에 잘 어울렸습니다. 호구 같은 부자를 연기한 프랭크 울프 역시, 호구 다운 모습도, 냉혹한 범죄 기획자의 모습도 양쪽으로 다 잘 어울리게 보여 주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 밖에...

괜히 무서운 분위기를 내려고 그랬는지, 중간에 목격자 한 명이 눈이 잘 안보여서 안과 수술을 받는 장면이 길게 나옵니다. 삐끗하면 눈을 다치기라도 할 것처럼 조마조마하게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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