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펙터 (Spectre, 2015) 영화

요컨데 “007 스펙터”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어둡고 진지한 느낌을 유지하면서도 줄거리 흐름은 과거의 여유롭고 느긋한 제임스 본드 영화를 따라 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임스 본드는 제목 뜨기 전에 나오는 시작 장면에서 화려하게 싸우면서 의아한 점을 발견하고, 본론으로 들어 가면 의아한 점을 파고 들어 악당을 추격합니다. 악당은 제임스 본드 악당들이 하는 짓을 줄기차게 계속 하고, 제임스 본드는 악당 본부에 한 번 붙잡혔다가 결국 다 박살내고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휴가를 떠납니다.


(포스터)

여유와 무뚝뚝함을 연결해 놓은 이런 조절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이미 그 자체로 대중문화의 커다란 한 영역이 되어 있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이야기 거리들을 살려 가면서도 나름대로 개성은 있는 이야기를 하려면 이 방법이 잘 먹히는 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가장 멋있는 장면은 맨 처음 시작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멕시코 시티에서 벌어지는 “죽은 자들의 날” 축제 행렬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암살과 추격전을 다룹니다.

이때 행렬의 기괴하면서도 화려하고 요란한 분위기와 가면을 쓴 모습에서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느낌, 가슴을 두근 거리게 하는 드럼 소리가 분위기를 고조 시키는 것이 잘 어울려 있었습니다. 특히 음악 사용은 헬리콥터 싸움이 이뤄지기 직전까지 기가 막혀서, 영화 화면과 특수 효과를 자유롭게 섞어 놓은 오페라를 만들었다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들리는 소리와 영화 배경 음악으로 깔아 넣은 음악이 어울리고, 그 음악의 변화가 공간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면서 화면도 같이 움직입니다.

제임스 본드가 악당을 쫓아 뛰어갈 때 추격전 음악이 나오는데, 가장 행렬 속으로 악당이 뛰어 들어 악당을 놓치게 되자, 화면은 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축제 행렬의 수많은 화려한 옷차림들로 뒤덥혀 버리면서 색채가 완전히 바뀌고, 동시에 음악도 일변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추적은 포기된 것이 아니라 계속 되고 있으니, 배경의 타악기 소리는 그대로 부드럽게 이어져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박자에서, 추적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 화려한 행렬 속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멋있게 폼 잡을 줄 아는 사나이로 불리우는 007이 마치 정령들이 만들어 준 것처럼 보이는 기막힌 양복 정장을 입고 뛰어 가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의 날)

대충 60년대의 “007 골드핑거” 무렵 즈음 해서, 제임스 본드 영화는 첩보물 다운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기 보다는, 줄거리는 핑계거리일 뿐이고 그냥 제임스 본드라는 멋있는 사람이 나와서 이리저리 경치 좋은데 다니는 거 보여 주고, 그러면서 옷 자랑, 자동차 자랑 하고 아름다운 여자 등장인물도 나오면서 동영상으로 만든 패션 잡지 화보 같은 느낌으로 진행하는 내용이 오히려 더 중요했다는 기억 입니다.

그러면서 가끔씩 너무 지루하면 안되니까 좀 황당할 정도로 신기한 새로운 첨단 무기를 보여 준다든가,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만한 정신 나간 묘기 장면을 한 두 가지 보여 주자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이거 다 그냥 거짓말인거 아시죠 라는 느낌이 되어, 영화 스스로도 그 영화 장면을 그냥 슬슬 농담거리 취급을 해가며 웃긴 이야기로 빠져 버리기도 했습니다. “007 문레이커”의 우주에서 날아 다니며 레이저총으로 싸우는 장면이나, “007 어나더 데이”에서 투명 자동차 같은 것은 그 예라고 할만할 것입니다.

이번 “007 스펙터”도 기본 방침은 여유롭고, 줄거리에 별 대단한 것이 없고, 진지한 감정 보다는 멋있는 옷차림 보여 주는 게 더 중요한 방향이었다고 느꼈습니다.


(차 자랑, 옷 자랑. 시계 자랑도 한 번 합니다)

대표적으로 이 영화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 영화 악당 두목이 그야말로 전형적인 제임스 본드 영화 악당 두목이 하는 짓을 그대로 하는 점이 눈에 뜨입니다.

이 영화의 악당 두목은 제임스 본드를 붙잡는데 성공합니다. 아주 철저하게 잘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붙잡으면 그냥 바로 처단하면 될텐데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기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자랑하려고 제임스 본드에게 천천히 수다스럽게 길게 설명해 줍니다. 자신의 세계 정복 방법과 배경은 물론이요, 그 의의와 앞으로 해야할 일까지 이해하기 쉬운 영상 자료까지 보여 주면서 길게 설명해 줍니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어지간히 뛰어난 사람이 발표하는 과학 세미나 같은 데에 가도 제임스 본드 악당이 제임스 본드 죽이기 전에 설명하는 것 만큼 짧고 명쾌하지만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곳은 아주 드물지 않습니까?)

설명이 다 끝나고 나서도 제임스 본드를 바로 처단하지 않고 놔 둡니다. 대신에 “더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어쩌고 하면서, 꼭 제임스 본드를 오래 붙들고 함정에 넣어서 어떻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제임스 본드가 탈출할 빌미를 만들어 주는 겁니다. 온갖 이야기에 너무나 많이 남용된 장면이라서 이제는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점이 잘 알려진 농담거리가 되었고, 심지어 최근의 “킹스맨” 같은 영화에서는 제임스 본드를 들먹이며 그런 이야기를 비웃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부담 없이 그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한 가지 멋있는 장면과 다른 멋있는 장면을 별 고민 없이 갖다 붙이기에 쉽게 써먹을 수 있는 수법이니까 그냥 밀고 나갔던 것입니다. 어차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야기가 정교하게 이어지는 것 보다는 그렇게 연결해 놓은 장면 그 자체라는 느낌 이니까. 게다가 이 영화는 진짜 제임스 본드 영화 아닙니까? 양심에 거리낄 것도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그 비현실적인 점 자체가 이 영화에서는 제임스 본드 영화를 찾아 보는 관객들에게 고향에 돌아온 듯한 즐거운 순간이 될 것입니다.


(악당 두령이 세계 각지의 부하들을 모아 놓고 벌이는 회의)

그렇습니다만, 그러면서도 등장하는 신기한 기술은 웃기지는 않을 만한 수준으로 자제 되어 있고, 다니엘 크레이그의 굳건하지만 어둡고 무뚝뚝한 느낌도 맞아 들게 대사와 행동은 조절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주인공에게 잘 어울리는 장면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비정하고 거친 남자지만 화려한 비단 드레스를 입은 여자 주인공과 호사스러운 열차에서 식사를 하거, 기가 막힌 자동차를 타고 아름다운 유럽 도시를 누빕니다. 이런 장면을 멋지게 화면에 다마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앞뒤 이야기의 치밀함은 대충 무시하고 느긋하게 보여 주는 호사를 마음껏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면 장면을 보기 좋게 즐길 수 있다면 즐거운 영화였다고 생각 합니다. 더군다나 크리스토프 발츠의 연기는 그 전통적인 역할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것처럼 아주 즐기면서 신나게 해내고 있다는 느낌이고, 레아 세이두의 모습 역시 제임스 본드 영화 여자 주인공에 잘 걸맞는 모습이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기하고 황당한 장면도 여기에 어울리는 적당한 형태로 조절되어 멋있게 화면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바이러스를 퍼뜨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는 수준의 음모는 안 나오고, 모터 보트를 타고 가다가 강물 속으로 들어 갔는데 그 강물을 헤치고 가는 물 속에서도 넥타이를 바로 고쳐 잡아 모양을 잡는다는 식의 농담 같은 멋부리기 장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조금 더 쓸쓸하고, 조금 더 건조한 분위기의 신기한 소재들이 나왔습니다. 사방에 아무 것도 없는 넓디 넓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누가 올 지도 모르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지평선 저 너머에서 수십년 묵은 고급차 한 대가 나타나 영문도 모르지만 그 차에 타라고 정중히 안내한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시무시한 악당 두목이 궁전과 같은 넓은 방에 자리 잡고 있는데 어스름한 야간 조명 때문에 그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런 것들이 잘 조율된 조명과 속이 확 트이게 넓은 화면 속에 잘 잡아낸 빛깔 좋은 영상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에서 도대체 뭐가 있을지 기다리는 제임스 본드 일행)

아쉬운 점을 고른다면, 이야기의 진지함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흔적이지 싶은 곳에서, 약간씩 보이는 지루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이야기 속에는 첩보 조직 내부의 적 이야기나, 너무 과격한 방법을 써서 정직 상태가 된 주인공이 홀로 조사한다는 이야기, 개인 정보를 모두 장악하고 있어서 힘을 발휘하는 악당 등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최근의 다소 진지한 첩보물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던 것이라서 “또 21세기는 정보의 시대 운운하는 악당이냐” 싶었습니다. 정말로 관심을 쏟게 되는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그저그런 내용이었고, 그렇다고 그냥 대충 넘어 가는 이야기로 치기에는 연출은 중요한 이야기인 듯이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싸움의 무게를 잡기 위해, 온통 출생의 비밀, 아버지의 원수, 어린 시절의 숨겨진 사연, 등등으로 다들 태어날 때부터 뭔 사연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들어 가 있었는데, 이것은 개중 재미 없게 보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오랜 세월 연결 되고, 태어난 운명 이야기까지 엮여 있으면 숙명적인 대결 느낌이 나서 싸움이 더 무겁게 보이라고 한 것 아닌가 싶은데, 뭔 같은 골품들끼리만 상종하는 신라 시대 이야기도 아니고 어떻게 하나 같이 다들 저렇게 과거의 깊은 사연으로 연결 되어 있는 인간들만 나오냐 싶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 부시, 아들 부시, 남편 클린턴, 부인 클린턴, 아버지 박대통령, 딸 박대통령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런 구구한 핏줄과 출신에 얽힌 이야기는 그냥 싸그리 다 없애는 것이 차라리, 차가운 도시 남자 같은 주인공 모습 보여 주며 성큼성큼 몰아 가는 이 영화에 더 어울리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비슷하게 중반에 악당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지 겁주면서 드러내기 위해 "악당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는 모른다" 운운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인물이 나오는 것도 악당 무섭게 해주느라 요즘 자주 써먹는 수법 그대로 해묵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서슴치 않고 무서운 행동을 하는 제임스 본드의 맞수격으로 나온 악당 부하 행동대장쯤 되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제임스 본드에 맞먹기 어려운 그저 떡대만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건 또 진지하듯이 하던 이야기에 반대로 엇나가 돌아간다 싶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은 나오고 얼마간은 꽤 그럴싸하게 나오지만, 보면 볼 수록 그냥 제임스 본드가 구출해 줘야 하는 옛날 제임스 본드 영화 여배우로 돌아 갑니다.)

영화의 결말은 나쁘지 않았다고 느꼈습니다. 결말 역시, 전통적인 007 이야기의 놀면서 쉬는 결말과, 조금 더 진지한 이야기로 기울어진 편이었던 다니엘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마감한다는 분위기, 두 가지를 잘 결합한 의미 있는 끝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동료들과 함께)

다른 이야기로, 최근의 “미션임파서블 5”에 나왔던 오페라 극장 싸움 장면은 화려한 연출에 치중하는 느낌이 제임스 본드 영화와 비슷한 기색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제임스 본드 영화에는 막판이 되면, Q와 M, 머니페니가 팀을 이루어 뛰어 다니며 같이 싸우는 장면이 나와서 “미션임파서블” 분위기가 났습니다. 둘 다 막판 결전이 런던 시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 밖에...

변장하고 숨어드는 스파이 제임스 본드가 아니라, 암살자로서 제임스 본드를 강조한 측면이나, 어두운 분위기가 상당히 깔려 있으면서도 불사신 같은 무적의 주인공이 활약한다는 것, 게다가 다니엘 크레이그의 무뚝뚝하고 굳은 표정까지 어울리자니, 이번 007은 일본 만화 “고르고13”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는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최고의 천재나 거대한 첨단 대기업의 매끈한 총수가 어마어마한 기술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으로 종종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로, 오히려 더 잡스럽게 싸우는 게릴라들과 더 값싸고 쉽게 만드는 가내수공업 무기를 이용하는 테러리스트의 위협이 점점 커지는 모양인 듯 합니다. 제임스 본드 영화 속 악당들은 비밀기지 한 켠을 뒤덮은 커다란 수십 개의 화면에 연결 된 전용 통신 컴퓨터를 이용해 세계 정복 지도를 펼쳐 보지만, 현재 테러리스트들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써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덧글

  • 細流 2015/11/16 21:26 # 답글

    엊그제 스펙터를 보고 와서 영화밸리에 올라온 리뷰들을 거의 다 읽어본 것 같은데(다른 분들 감상은 어떤지 궁금해서^^;), 거의 유일하게 음악 얘기를 자세히 언급해 주셔서 반갑게 읽었습니다. 스카이폴부터 시리즈를 맡은 샘 멘데스 감독이 본인과 여러 차례 함께 작업했던 작곡가인 토마스 뉴먼을 데려왔는데, 제가 이 작곡가의 음악을 전체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스카이폴 음악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 마찬가지로 스펙터의 음악도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첫 장면인 축제 부분의 음악이 정말 좋았어요! 타악기 소리가 흥겹게 나면서 007의 유명한 테마가 섞여드는 게 일품이었죠.^^
    저는 개인적으로 M 역을 맡은 랄프 파인즈의 연기가 참 좋았습니다. 본드와 본드걸은 뒷전이고 저는 어째 M과 C의 대결을 더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되더라고요..orz
  • 게렉터 2015/12/21 21:56 #

    시작할 때 첫째 부분의 음악은 뮤직비디오나 정교하게 연출한 오페라 이상으로 음악 중심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저 역시 M이 보기 좋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에 비해 활약은 적어서 조금 아까웠습니다.
  • 잠본이 2015/11/18 00:59 # 답글

    동영상으로 만든 패션잡지화보ㅋㅋㅋㅋㅋㅋ정확한 표현이십니닼ㅋㅋㅋㅋㅋ
    근데 확실히 어두침침했던 크레이그 007로 그런걸 하려고 하다 보니 뭔가 엇나가는 느낌이 들더군요.
    영국과 미국쪽 감상평이 확 갈리는 것도 흥미롭고...이래저래 뜯어보며 얘기하기엔 좋은 영화 같습니다.
  • 게렉터 2015/12/21 21:57 #

    저는 기대한 바가 딱 맞게 정해져 있어서 그랬는지, 그래도 다니엘 크레이그 시절 제임스 본드 영화 중에서는 그럭저럭 제일 재밌게 본 듯한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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