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의 검은 음표 (싸이킥, The Psychic, Sette note in nero, 1977) 영화

1977년작 영화인 “7개의 검은 음표(The Psychic, Sette note in nero)”는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로 당시 그런 영화들 중 독특한 부류를 일컫던 “지알로 영화”에 어느 정도 속한다고 할 수 있을만한 영화입니다. 내용은 텔레파시 같은 초능력으로 멀리 있는 장면이 이상하게 환상처럼 보이는 일을 겪는 사람이,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벽에 파묻어 버리는 일을 환상으로 보면서 살인 사건의 실체에 접급해 가는 이야기 입니다.


(포스터)

이 영화는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라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일단 살인의 건수가 세 건 뿐이고, 그 중에 살인 순간을 어느 정도 보여 주는 것은 한 건 뿐입니다. 게다가 세 건의 살인 중에 뒤의 두 건은 앞의 살인을 덮기 위해서 벌이는 것이라서, 당시 지알로 영화에서 정신이 이상하게 꼬여서 인간도 아닌 것 처럼 되어 버린 사람이 넋다간 표정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사람 잡고 다니는 이야기와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무렵 이탈리아의 비슷한 영화 치고는 피 튀기는 장면이 거의 없는 편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어린 주인공이 추락하는 어머니의 환상을 보는 장면에서, 절벽에서 떨어지며 바위에 찧이며 부상을 입는 장면이 잠깐 무시무시하게 나오긴 합니다. 그러나 같은 소재를 사용한 같은 감독의 영화 “새끼 오리를 고문하지 말라” http://gerecter.egloos.com/5283854 의 마지막 장면과 비교해 보자면 그나마 훨씬 간촐하고 짧게 펼쳐집니다. 그나마 이 영화에는 이 장면이 자극적인 장면으로는 거의 전부 입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상당히 볼만 합니다.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쉽게 짐작 가는 선택지 중에 하나이고, 딱히 정말 괴상한 인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계속 영화를 호기심을 갖고 지켜 볼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자극적인 장면으로 밀어 붙이는 것으로 유명했던 당시 이탈리아의 다른 영화들과 견주어 보자면, 비교적 수수한 장면으로 이렇게 다음 장면이 궁금한 진행을 해내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주인공)

이 영화가 볼만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효과적인 연출과 거기에 찰싹 달라 붙어 있는 좋은 편집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면 장면들이 정말 알아 보기 쉬우면서도 신기해 보이게 잘 잡혀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처음 환상을 보는 장면도 오묘한데다가, 점차 살인 사건에 대해 파헤치면서 환상 속에서 보고 들은 것의 의미를 하나하나 파헤쳐 갈 때, 환상과 사실을 겹쳐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바로 눈에 들어 오게 과감하게 화면에 잡혀 있었습니다. 스산한 소리나 신비로운 음악을 잘 결합해서 별 것 아닌 장면인데도 긴장감을 끌어 오는 것도 그만이었습니다.

극적인 예를 들자면, 주인공이 벽을 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할 일 없고 심심한 일의 대표로 흔히 쓰이는 말이 “벽보고 가만히 있는다”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불교에서는 벽을 보고 있는 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 방법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벽을 보고 있는 장면이 뭔가 있을 것 같은 조마조마한 장면으로 연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환상 속에서 살인마가 시체를 벽 속에다가 묻어 버린 것을 봤다는 점을 화면으로 앞서서 보여 줬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그저 벽을 보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는: 지금 눈에 보이는 이 벽 속에 혹시 시체가 있지 않을까, 아닐까, 내가 과민 반응하는 걸까, 그래도 너무 이상한데, 벽을 조금만 파 볼까, 멀쩡한 벽을 뜯어 내다니 미친 짓 아닐까, 고민하며 갈등하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비교적 간단한 이야기인데도, 뭔가 신기한 것이 금방 툭 튀어 나올 것 같고, 정말 이 다음에는 어떻게 되나 보고 싶어서 기다리게 되는 장면들이 많아서 재밌어진 영화였습니다. 게다가 사연들을 구구절절히 말로 들려 주지 않고 화면으로 나타내서 눈에 보이면 관객이 깨닫게 해 주는 형태의 장면들이 많아서, 어떻게 될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 보다가, “아, 이렇게 되다니!” 하면서 이어지는 장면에 바로 빠지게 되는 구성도 좋았다고 생각 합니다. 정말 악몽의 세계를 헤메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보여 주는 주인공 배우 제니퍼 오닐의 연기도 한 몫 했습니다.


(제니퍼 오닐)

줄거리를 결말까지 좀 더 밝혀 보면서 세부 장면들을 더 이야기 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우선 신혼인 주인공은 우연히 남편이 갖고 있는 빈 집을 찾아 갔다가 그 집이 환상 속에 보였던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갈등 끝에 결국 미친 사람처럼 집의 벽면을 직접 깨어 봅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벽 안에는 어떤 여자의 시체가 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집이 남편 소유였기 때문에 남편이 일단 검거 됩니다. 그러자 주인공은 이제 남편을 풀려 나게 하기 위해서 진범을 찾으려고 합니다.


(건실하고 자상한 남편)

희미하게 생각 날듯 말듯하는 환상 속의 장면들을 단서로 삼아서 주인공은 추적 끝에 한 진짜 범인인 것 같은 콧수염 난 남자를 발견하는데 그러다가 콧수염 남자에게 쫓겨 도망치기도 하는 이야기로 이어 집니다. 주인공이 본 환상의 실체와 벌어진 사건들의 관계, 도대체 왜 여자가 죽어서 그 벽에 묻히게 되었는지, 하는 사연에 대해서 계속 궁금함을 이어지게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사실이 밝혀 지는 것이 차곡차곡 잘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재미 있게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환상이 사실인지 아닌지 증명 하려고 애를 쓰다가 도리어 남편이 범인으로 몰리고, 그러면서도 환상에 집착해서 그걸 근거로 남편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하는 엎치락 뒤치락하는 사연도 꽤 부드러우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참신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 합니다.


(경찰에게 남편의 무죄를 밝히려고 애쓰기)

결말은 사실은 알고 보니, 환상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미래를 미리 본 것이었고, 환상의 핵심인 즉슨 사실은 남편이 바로 문제의 벽 앞에서 자기를 공격해서 자기를 그 벽에 또 묻어 버리는 예언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약 밀매 일로 남편은 벽 속에 묻힌 여자를 살해 했던 것이고, 콧수염 남자는 살인범은 아닌 마약 밀매 공범일 뿐이었습니다. 환상 대로, 주인공은 남편의 공격으로 반쯤 죽은 채로 벽에 묻혀 버립니다.

비교적 간촐한 이야기였지만 그런데도 흥미진진했던 대체적인 흐름에 비하면 이런 결말은 약간은 아쉬웠습니다. 말하자면 결말까지 그냥 간촐한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보는 환상에 속임수를 쓰기 위해 비슷한 사건이 두 번 연거푸 일어나게 하는 방식은 필립 K. 딕의 소설 원작 영화를 비롯하여 비슷한 소재를 가진 다른 이야기에서 보던 것이라서 조금 따분했습니다. 그 속임수에 크게 무게를 준 느낌도 아니었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은 너무 많이 활용된 장면을 그대로 또 따라 간 것이라서 더 아쉬웠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경찰이 찾아와서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게 여기고, 남편은 시치미를 떼는데, 그때 벽 속에서 주인공의 시계 알람 음악이 신비하게 울려 퍼지면서, 벽에 주인공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검은 고양이” 그대로이며, “검은 고양이”와 비슷한 소재와 줄거리가 워낙에 이 무렵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에서 여러 번 변용되었던지라, “또 이거냐” 싶었습니다. 연출이 재밌었던 영화치고는 이 결말 연출은 그냥 여러 “검은 고양이” 각색물의 평범한 방법 그대로라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문제의 집에서 연락을 받은 주인공)

그러니, 자극적인 장면도 없고, 딱히 크게 꼬인 줄거리도 없이, 적당한 줄거리와 신비한 소재를 거기에 잘 맞는 묘한 연출로 계속 보여 주는 것만으로 재미를 가져 가는 영화였습니다만, 그러나, 결말 정도는 좀 강하고 신선해도 좋았을 텐데 결말까지 거기에 그쳐서 아쉬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결말에서 구구한 설명이나 뒷이야기 없이 벽 속에서 음악이 들려 온다는 암시하는 장면까지만 나오고 화끈하게 팍 끝나버리는 것은 차라리 좋았다고 생각 합니다. 그 모습이, 이런 담백하면서도 경쾌한 영화다운 신비로운 맛을 어느 정도 남게 해 주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 밖에...

후기에는 점차 괴상망측한 영화의 감독으로 더 유명해지는 루치오 풀치가 정력적으로 작업하던 중기 시절에 감독을 맡은 영화입니다.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가 쏟아지던 시기에, 그 루치오 풀치가 오히려 이렇게 자극적인 장면이 적은 연쇄살인마 영화로 개성을 드러냈기도 했다는 점은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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