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폭소판 살사리 몰랐지 (1966) 영화

1966년작 ”007 폭소판 살사리 몰랐지”는 한국 트래쉬 무비의 전통 아닌 전통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는 영화 입니다. 따지자면야 그래도 내용을 알아 볼 수는 있는 수준의 영화이므로 본격 트래쉬 무비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얼척 없는 줄거리, 대충 무성의하게 이어 붙인 만듦새에 난데 없이 중간중간 등장하는 터무니 없는 장면까지 한국 트래쉬 무비의 핵심은 모두 담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 합니다.


(용기 있는 포스터)

이 영화는 시작되면 우리의 주인공 서영춘이 복면을 쓰고 왠 사람에게 칼 부림을 하고, 양훈을 찾아가 음험하게 위협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만, 곧이어 이것은 007이나 첩보나 작전 따위와 아무 상관도 없이, 그냥 아르바이트생인 서영춘이 심심해서 제임스 본드 소설을 보고 마네킹과 사장에게 장난을 쳐 본 것으로 드러납니다.

마네킹이야 그렇다치고 사장에게 칼부림하는 흉내를 낸다음에 “장난”이라고 하면 짤리는 것을 넘어 서서 경찰에 입건 될 것 같습니다만, 이곳은 웃긴 표정을 지으며 저지르는 일은 뭐든지 다 코미디로 간주되는 신비의 한국 트래쉬 무비 속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사장은 그냥 “이 녀석” “예끼” 어쩌고 하는 소리만 몇 마디 하고 넘어갑니다.


(이것이 장난)

그리하여 이 영화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이 영화는 제목 “007 폭소판”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첩보 영화 패러디 코미디가 전혀 아닙니다. 이 영화는 007이나 첩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영화로, 그냥 서영춘이 나와서 그냥 이러저러한 잡코미디를 닥치는대로 하는 영화입니다. 다만 극중에서 서영춘이 제임스 본드 소설의 팬으로 나오는 것이 007과의 유일한 연결점입니다. 좀 더 살펴 보자면, 이 영화 “007 폭소판 살사리 몰랐지”는 제목에 007 어쩌고가 들어가 있지만 그와 아무 관계 없이 그냥 서영춘이 떼인 돈 받으러 서울에서 기차 타고 부산까지 찾아 다니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초반에 서영춘이 돈 떼이는 장면만은 깔끔하게 잘 되어 있습니다. 왜 007 폭소판인데, 제일 잘 되어 있는 장면이 돈 떼어 먹는 장면인가 싶습니다. 굳이 돈 떼어 먹는 사기를 치는 것이 자신의 신분을 속이는 첩보원의 행태나 약간 “미션 임파서블” 같은 속임수 첩보 작전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 수야 있을 겁니다. 물론 그 다음 장면을 보면 그런 식으로 굳이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게 아무 부질없는 짓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만.

돈 떼먹는 전문 사기꾼 역할을 도금봉이 맡았는데, 연기가 안정감 있고 사기 수법도 괜찮습니다. 이 사람이 쓴 수법은 이런 것입니다. 돈 전해주고 받는 중간에 한의사 한 사람을 끼워 넣은 뒤에, 그 한의사에게 “서영춘은 정신병자라서 괜히 아무한테나 자기 돈 내놓으라고 떼쓰며 헛소리를 하는 습성이 있으니 치료를 위해 노력해 주라”고 언질 해 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영춘은 돈 떼이지 않기 위해 일을 챙기려 하지만, 김희갑이 연기하는 한의사가 그것을 정신병적인 발작 행동으로 알고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그냥 말리면서 치료하려고만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버는 틈을 타서 도금봉은 돈을 떼먹고 도주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돈을 떼인 서영춘은 죄책감과 괴로움에 시달리며 서울 거리를 방황하다가 괜히 아무 이유 없이 서울역 앞에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역시 우연히 이유 없이 악당 일당에게 휘말려 괜히 아무 이유 없이 기차를 타게 되고, 그 악당들이 또 마침 기적적인 공교로움으로 돈 떼먹은 도금봉과 한패거리이므로 추격전이 시작됩니다.


(서울역에서 우연히 이유 없이 공교롭게 마주치는 악당)

이야기는 점점 더 종잡을 수 없이 흘러 갑니다. 중간에 악당과 맞닥뜨린 서영춘은 제임스 본드 소설을 보고 감명 받아 장치해 놓은 신발 밑창에서 튀어나오는 칼날로 위협해서 한 번 승리할 뻔 합니다. 하지만, 발길질을 하다가 그 칼날이 벽에 박혀서 발을 못 움직이게 되어 얻어 맞기만 하고 실패합니다. 이 정도 장면이면 재미는 없어도 예의는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 합니다.

예의 조차 없는 장면으로, 한국 트래쉬 영화의 어떤 혈통 같은 것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바로 서영춘이 무전취식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배가 고픈 서영춘은 대구까지 기차를 타고 와서 싸돌아 다닙니다. 그러는 도중 만난 주연과 함께 다짜고짜 중국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푸지게 먹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주연이란 배우의 이름으로, “맨발의 청춘”에도 나온 박재희의 예명입니다. 이름은 주연이지만 여기서는 조연으로 나옵니다.

서영춘이 주연을 끌고 데려가 돈 한 푼 없지만 중국집에서 태연히 많은 음식을 큰소리치며 시켜 먹는 것은, 뭔가 공짜로 밥을 먹는 재미있는 꾀를 보여 줄 것처럼 펼쳐진 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밥을 다 먹자 서영춘에게는 별 대책이 없습니다. 이 각본을 쓴 각본가 역시 대책이 없었는지, 한동안 서영춘이 밥값 못내서 고민하며 괴로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나서, 이것이 어떻게 해결되냐면, 아름답게도, 서영춘이 마침 중국집 벽면에 아무 상관 없이 붙어 있던 “권투 대회 포스터”를 보고 권투 대회에 출전해서 상금을 탄 다음 밥값을 내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사이키델릭한 줄거리로 흘러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국집에 동행한 주연만 남겨 놓고 갑자기 서영춘은 밖에 나가더니 권투 대회에 참가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난데 없이 권투 대회 장면이 나옵니다. 권투 대회 장면이랄것도 별 게 있는게 아니라, 그냥 서영춘이 어떤 사람하고 공터에서 코미디 권투하는 게 한 판 나오는 것입니다. 코미디 권투라는 것도 별 게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각본도 없고 연출도 없이 그냥 서영춘이 계속 개인기로 혼자 웃긴 짓을 하는 게 전부 입니다. 한 대 맞고 웃긴 표정을 짓는다든가 쓸데 없이 심판을 공격한다든가 하는 비린내 나는 것 같은 코미디가 처량하게도 여러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관중 엑스트라를 동원하는 것이 귀찮았는지, 그 코미디 권투 대회를 보는 관중들은 그냥 지나가는 대구 시민들이 서영춘이 영화 촬영하고 있으니까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재미있다고 보고 있는 1960년대의 어린이들이 대거 화면에 잡혀 나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코미디를 보면서 1960년대의 어린이들을 자라나게 했기 때문에 현재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코미디 권투 장면)

그리고 나서도, 영화는 계속 그 모양으로 흘러 갑니다. 이러다 말고 갑자기 영화를 팍 잘라 먹고 서영춘이 주연에게 접근하면서, “이제 옷을 벗자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연은 묘한 표정을 짓는데, 이건 무슨 또 거지 같은 희롱인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이 영화는 마지막 남은 한 톨까지 그냥 내던지는 모양으로 흘러 갑니다. 바로, 망하는 코미디의 마지막 바닥에 도사리고 있다는 “여장”으로 나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서영춘은 부산에 있는 악당들의 조직에 잡입하기 위한 아이디어로 정체를 숨기기 위해 주연과 옷을 바꿔 입고 여장을 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게 무슨 논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리하여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서영춘은 아무 의미 없는 여장으로 때우게 됩니다.

대충 “뜨것운 것이 좋아” 같은 영화를 베끼는가 싶습니다만, 또 그렇게 쉬운 길로 흘러 가지도 않습니다. 이 영화는 또 막판에 감동의 신파극으로 굳이 물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무슨 사연인고 하니, 중간에 우연히 서영춘과 만난 주연은 알고 보니, 하필이면 절묘하게도 다른 아무 이유도 없이 기적적이게 공교로운 우연으로 돈 떼먹은 도금봉의 동생이었다는 겁니다. 도금봉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기 상관인 악당 조직 인간들의 공격을 대신 막으면서 죽고, 죽으면서 “이 못난 언니를 용서해 다오” 어쩌고 하는 긴긴 신파극 대사를 눈물을 철철 흘리며 합니다. 갑자기 신파극 대사를 성의를 다하여 길게 읊는 도금봉 배우의 애절한 모습을 보면, 그냥 각본 썩었다고 비웃기도 민망하고 참 착찹해지게 되고 그렇습니다.


(눈물의 도긍봉)

그렇게 도금봉이 죽으면서 악당들이 제압 되고 나면, 바로 그 다음에 주요 배역이 죽었거나 말거나 갑자기 해맑은 분위기로 돌변하여 서영춘은 생글생글 웃으며 주연과 서울로 돌아가 결혼하겠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주연의 언니가 방금 전에 그렇게 처절한 신파극을 찍으며 죽은 직후인데 말입니다. 그러고나면, 왜인지 돌아온 서영춘과 주연을 마중 나온 양훈과 김희갑도 거기 와서 서로 같이 쳐다 보며 해피엔드 결말에 맞추려는 웃음을 같이 웃고, “살사리 이건 몰랐네” “정말 몰랐네” 따위의 대사를 나누더니 마주보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면서 끝이 납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최대한 접어 주고 이야기 구조를 살펴 보자면, 답답한 일상 중에 막연한 꿈으로 무엇인가를 아주 동경하던 주인공이 모험을 겪으며 평소 상상해 오던 재치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러는 가운데 자신도 성숙한다는 틀의 이야기로 맞춰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주로 어린이 영화 중에 이런 구도가 꽤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구니스”라든가, “악마군단”이라든가 하는 괴짜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말입니다.


(기차를 타고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따라 가며 모험)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는 어린이 대신 서영춘을 밀어 넣었고, 괴짜 주인공에 걸맞는 참신한 이야기 대신 대강 때우는 막개인기에 막판 신파 돌변의 허수아비 같은 줄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도금봉의 연기가 안정감 있고, 서울을 출발해서 경부선을 따라가면서 모험을 한다는 구조가 최소한의 틀은 갖추고 있어서 뭐가 뭔지 이해는 할 수 있어서 더 심하게 망한 다른 비슷한 부류의 한국 영화 보다는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 밖에...
잠깐이지만 철거 되기 전의 예전 대구 역사의 모습이 비치는 영화입니다.

극중에서 서영춘이 탐독하는 제임스 본드 소설은 “카지노 로얄” 입니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뭔가 재치 있는 꾀를 자기가 썼다는 듯이 "요건 몰랐지?" "요건 몰랐을 거다" 이런 대사가 굳이 밀어 보는 유행어처럼 반복해서 계속 나옵니다.

이 영화의 각본은 바로 그 신봉승이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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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동사서독 2016/06/07 21:07 # 답글

    주성치 주연의 홍콩 마스크, 홍콩 레옹 같은 영화를 머리 속에 떠올려 봤습니다. 구봉서 주연의 당나귀 무법자도 생각났구요. 신봉승이라면 임충과 더불어 사극 작가 투톱이었던 바로 그 분 ?!!!
  • 개렉터 2016/06/08 08:58 # 삭제 답글

    그런 영화와 방향만은 닮은 영화 맞습니다. 신봉승은 기록상 그분이 맞는것으로 나옵니다
  • rumic71 2016/06/08 21:06 # 답글

    당시 TV에서 유행어처럼 써먹던 "요건 몰랐을 거다" 한 마디를 가지고 영화 한 편을 만들어내었군요. 그런데 카지노 로열엔 비밀무기 같은 건 안나오는데...도청기 같은 건 나오지만.
  • 게렉터 2016/06/09 18:50 #

    대강 그런 분위기 맞습니다. 물론 역시 카지노 로얄하고도 아무 상관도 없는 내용입니다.
  • 잠본이 2016/06/09 00:37 # 답글

    '어쩌면, 이런 코미디를 보면서 1960년대의 어린이들을 자라나게 했기 때문에 현재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 슬프군요(...)
  • 게렉터 2016/06/09 18:51 #

    정말 실컷 웃을 수 있는 코미디가 부족하다는 것은 질과 정도의 문제이지 요즘도 유효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 2016/06/16 07:1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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