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블린이 무덤에서 나온 밤 (La Notte che Evelyn uscì dalla tomba, 1971) 영화

1971년작 이탈리아산 연쇄살인마 영화 “에블린이 무덤에서 나온 밤”은 당시 유행하던 비슷한 부류의 영화들, 그러니까 지알로 분위기가 슬쩍 가미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지알로 영화라기 보다는 지알로가 섞인 전통 공포물에 가깝긴 합니다. 내용은 큰 성채에 사는 좀 맛이 간 귀족 갑부 남자가 있는데, 돈으로 여자를 사서 끌어 들인 뒤 살인하는 놈이라는 것으로 출발 합니다. 중반에 이 남자는 그 중 한 여자와 깊게 빠져 결혼을 하는데, 그 후 전 부인의 귀신이 본격적으로 등장 합니다.


(변태 부자 남자, 아직까지 모르고 있는 여자)

세부사항이 달라서 눈에 안뜨여서 그렇지,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만 놓고 보면 “공포의 허니문”과 거의 같은 이야기입니다. 거장 대접을 받는 마리오 바바가 감독을 맡은 “공포의 허니문” 역시 맛이 간 갑부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들을 끌어 들여 살인한다는 것이 출발이고, 후반이 되면 전 부인의 귀신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로 바뀐다는 것까지 같습니다. 울긋불긋한 조명으로 성채 곳곳을 보여 주는 수법이나, 심지어 주인공 갑부 남자의 연기하는 모습 역시 “공포의 허니문”과 닮은 데가 많았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세부 내용은 다른 데가 많아서 그런 닮은 점은 어느 정도 덮여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중에 앞부분의 맛이 간 남자 이야기에 관한 것은 꽤 재밌었고, 중반부터 나오는 귀신 이야기에 관한 것은 재미 없는 축에 속했습니다.

맛이 간 남자 이야기는 도대체 이 놈이 뭐 하자는 놈인지 보여 주는 것이 사람의 궁금증을 자아내면서 으슥하게 조금씩 이야기를 밀고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공포의 허니문”과 이런 점은 다릅니다. “공포의 허니문”은 애초에 1인칭 시점으로 남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비해, 이 영화에서는 이 남자의 속을 관객이 알 수가 없습니다. 뜬금 없이 돈으로 산 여자에게 막대한 돈을 주면서 자기 집으로 끌어 들이는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계속 궁금해하고 걱정하면서 지켜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켜 보게 만들면서 계속 의문을 들게 하는 관찰 거리를 관객에게 던지는 것입니다. 이 남자는 여자와 대화하다 말고 갑자기 여자의 머리카락을 당겨 봅니다. 그리고나서 “혹시 가발인가 싶어서”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입니까? 왜 이러는 겁니까? 그리고 이 남자는 꼭 빨간 머리 여자에게만 돈을 줍니다. 여자를 성채에 끌어 들이고 나면, 무슨 부츠를 갖고 와서 꼭 그걸 신으라고 합니다. 이건 또 뭡니까?

이 영화에서는 이 남자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어떤 탐정에 해당하는 인물이 나온다거나 해서, “음, 그 남자는 왜 꼭 머리카락을 당겨 볼까?” 이런 대사로 영화의 의문점으로 대놓고 떠들지 않습니다. 그냥 관객이 그것을 반복해서 보게 하고, 비슷한 구도로 반복해서 장면을 나오게 하면서, 관객이 스스로 직접 의문을 갖게 만들고, 추리를 하게 만듭니다. 관객을 영화에 끌어 들이고, 이야기에 참여 시킵니다.

이런 것은 효과가 좋았다고 느꼈습니다. 서서히 진행 되는 이야기에 따라 주인공이 왜 이딴 짓을 하는 지가 밝혀지고, 의외로 주인공이 살인을 멈추고 결혼을 하는데 까지는 차곡차곡 궁금증을 던지고 차곡차곡 답도 펼치는 내용이 잘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야기가 귀신 이야기 중심으로 흘러가면서 저는 내용이 지루해져 버렸습니다.

우선 남자의 사연은 대충 밝혀집니다. 남자는 바람 난 부인, 에블린을 목격하고 분노한 나머지 에블린을 살해 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정신병 판정을 받아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에 이제 퇴원한 상태입니다. 이후 시간이 지났지만 남자는 에블린의 바람나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마치 환상처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지금도 에블린과 같은 빨간 머리카락의 여자를 계속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돈을 주고 여자를 끌어 들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또 격렬한 분노의 기억으로 살해 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 머리카락을 괜히 당겨 본 것은, 이 사람이 진짜 빨강머리인지 아닌지 구분해 보려고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머리카락을 당기는 것은 살인마의 희생자 물색 기준 테스트였던 겁니다. 여자에게 입히는 복장은 죽은 에블린의 것이었습니다. 이런 변태가 또 있습니까?

남자는 이후 한 여자와 결혼을 한 후 살인을 멈춥니다.


(변태짓 하려다 말고 갑자기 청혼해서 결혼하기)

그런데 그때부터는 에블린의 귀신이 본격적으로 돌아 다니는 것 같습니다. 남자만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결혼한 새 부인도 빨강머리의 이상한 여자가 스윽 돌아 다니는 뒷모습 같은 것을 언뜻언뜻 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영화는 옛 성채를 배경으로 무슨 에드가 앨런 포처럼 죽은 부인의 망령이 돌아 다니는 고딕 공포물 비슷하게 바뀝니다.

이게 이 영화의 중반도 채 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한 1/3쯤 지났을 때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때부터는, 별 내용이 크게 바뀌는 것이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귀신 보고 놀라는 장면, 죽는 장면을 보여 주며 시간만 끄는 느낌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남자가 진짜 전부인이 되살아 났나 싶어 무덤을 열어 확인해 보려는 장면도 있는데, 조마조마하게 무덤을 열어 본다는 공포물의 단골 연출 내용이기는 합니다만, 평균을 넘을만큼 잘 된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이 귀신 이야기가 재미가 없었던 이유는 일단 그 바탕이 수십번, 수백번 온갖 소설, 영화, TV극 등에서 반복되어 써먹던 반전인 “산 사람인 범죄자가 변장하고 귀신인 척 무섭게 해서 사기 치려고 한다”는 것인 데다가, 오직 그 길로만 집중해서 이야기가 치닫고 있어서 새로운 맛이 너무 없었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도 귀신, 그러니까 사실은 귀신 같이 생긴 가면을 쓰고 변장한 사기꾼이 마침내 그 모습을 달빛 아래 드러내는 장면 하나 만은 깔끔하게 연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비슷비슷한 당시 공포물의 귀신 모습을 무난히 보여 주는 수준 정도였다고 생각 합니다.


(무덤에서 나온 에블린 모습!)

결말 역시 상쾌한 아이디어가 하나 있기는 했습니다만, 잘 살리지 못하고 그냥 허겁지겁 악당들은 서로 싸우다가 다 죽게 한 뒤에 휙 끝내고 말았습니다.

결말의 상쾌한 아이디어란, 그 무시무시하고 신비롭게 등장했던 환상 속의 에블린이 애초에 죽은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에블린은 다쳤지만 회복해서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정신병에 걸린 남편은 그런 걸 정확히 잘 따지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남편에게 사기를 친 일당 중 한 명이 바로 에블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귀신 흉내를 낸 사람들 중 한 명은 다름 아닌 진짜 에블린이었습니다.

남자의 환상 속에서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욕망의 화신처럼만 나왔던 그 에블린, 귀신으로 나타나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영혼과 같았던 그 에블린이, 멀뚱히 살아서, 그냥 돈 많고 옷 잘 입는 멋있는 현대의 여자로 웃으며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기묘한 느낌과 오묘한 대조감은 영화 막판에 잠깐이지만 건질만한 재미였다고 느꼈습니다.


(혹시라도 빨강 머리, 죽은 부인 닮은 여자를 보고 놀랠까 싶어서 모든 하녀들을 같은 무습으로 꾸미도록 지시해 놓은 괴이한 광경)

그럴듯할 수도 있었던 밑천이 고만고만하게 사그라든 점도 꽤 있는 영화라는 생각도 듭니다. 브루노 니콜라이의 음악은 서정적이고 곡조가 선명한 70년대 이탈리아 영화 음악의 전형이라고 할만한데, 인상적으로 쓰이는 부분도 적고 별로 많이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정신병자의 망상이지만 그래서 더 꿈처럼 떠오르는 에블린에 대한 환상 장면도, “워드 부인의 이상한 죄악”이나 “모든 어둠의 색깔” 같은 다른 더 지알로 영화 다운 지알로 영화에 나오는 꿈, 환상, 회상 장면에 비하면 별 내용이 없는 편입니다. 영화 내용에 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도 못합니다.


그 밖에...

같은 사람이 감독을 맡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영화 “레드퀸은 일곱번 죽인다”의 귀신도 이름이 레드퀸입니다. 이 영화도 고딕 공포물과 슬쩍 통하는 데가 있으니, 둘을 엮어서 “에블린 시리즈” 정도로 불러도 될 듯 합니다. 실제로 두 영화는 DVD 박스 세트로 묶여 나온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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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umic71 2016/07/12 17:24 # 답글

    엔니오 모리코네 이상으로 제가 좋아하는 영화음악가가 브루노 니콜라이인데 좀 아깝군요. 뭐 저 시절에는 가는 곳마다 그 이름이 보이긴 합니다만...
  • 게렉터 2016/07/13 21:21 #

    음악만 따로 들으면 이 영화 음악도 딱 이시절 브루노 니콜라이 음악이라서 듣기 괜찮습니다. 사용된 게 좀 부실했다고 생각 합니다. 음악 나오는 시간 자체도 적었던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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