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의 암살자 (Le Samouraï, 1967) 영화

1967년작 “한 밤의 암살자”는 알랭 들롱이 연기하는 살인 청부 업자가 한 건을 벌이고, 경찰에게 추적 당하고, 동시에 범죄 조직으로부터 추적 당하는 이야기를 하는 영화입니다. 내용은 천천히 차분하게 진행되고, 말이 없고, 알랭 들롱은 차갑고 강한 눈빛을 뿜으며 쓸쓸하게 혼자 싸돌아 다닙니다. 중요한 일 뿐만 아니라 그 앞뒤의 그냥 걸어 다니고 주변 두리번 거리는 것도 다 실시간으로 보여 주는 것이 많아 느릿느릿한 느낌이 드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자잘한 구경거리가 많고 알랭 들롱 한 명에게 집중된 영화라서 지루함은 덜어지는 영화였기도 합니다.


(폼 잡는 알랭 들롱 모습이 있는데 뭔 딴 포스터가 필요하겠습니까?)

살인 청부 업자가 있고, 살인을 저지르는 데, 경찰에게도 쫓기고 범죄 조직에게도 쫓긴다는 이야기라니, “첩혈쌍웅”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클럽의 음악가와 어째 엮이고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니 더 비슷하게 느낄만도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오우삼 감독은 이 영화의 감독을 맡은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도 하고, “첩혈쌍웅”이 이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파다하게 퍼져 있습니다.


(클럽의 연주자와 만남)

그러나 두 영화의 방향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첩혈쌍웅”은 이야기가 빠르고 번쩍번쩍 화면이 요란하게 펼쳐지는 이야기이고, 무엇보다 수다스러운 대사가 많은 영화 입니다. 명대사로 꼽히는 몇 가지 말들도 그렇지만, 경찰 역할의 이수현과 총잡이 역할의 주윤발이 서로를 미키마우스와 덤보라고 부르면서 대치하는 장면은 그 만담 같은 대사가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차분하고 천천히 진행되는 영화이고, 대사는 꼭 필요한 말 말고는 어지간해서는 안 나옵니다. 말 없이 걸어다니고, 말 없이 쳐다 보고 고민하는 장면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심지어 꼭 필요한 말인데도 안 하고 넘어가서 생략해 버리는 놀라운 시도까지 태연히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총알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첩혈쌍웅”에 비해 이 영화에서는 총을 몇 발 쏘지도 않습니다.


(면상에 총을 들이 대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폼을 잡습니다)

폼을 잘 잡는 것이야 주윤발이나 알랭 들롱이나 난형난제이지만, 그 폼 내는 방식은 또 전혀 다릅니다. “첩혈쌍웅”의 주윤발은 어떤 감정을 갖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다 드러내고 이야기를 통해 절절히 다 알 수 있습니다. 그 휘몰아치는 감정과 사연을 다 알려주어서 거기에서 영웅 비슷한 비극적인 인물을 드러내며, 주윤발의 폼 잡기는 완성 됩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과거를 갖고 있고, 뭘 위해 사는지 알기가 힘듭니다. 심지어 좀 무리를 하면 “사실은 알랭 들롱은 냉혈한 살인자가 아니라, 나름대로 좋은 사람이었다”는 결론을 낼 수 있는 뒷 이야기도 상상할 수 있을 정도 입니다. 이 영화는 어렴풋 짐작되고 상상될만한 단서 장면만 살짝살짝 흘릴 뿐, 내용을 완전히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알랭 들롱은 그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항상 비정하고 무표정하게 한편으로는 조금 쓸쓸해 보이는 듯이 그저 무심한 얼굴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무슨 정령이 밤 거리를 돌아 다니며 권총을 꺼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 입니다.

그러니 신비로운 느낌이 여운과 얽혀 재미를 더하는 영화였습니다. 도대체 왜 주인공이 막판에 무모한 짓을 감행하는지, 처음 주인공이 죽인 사람은 도대체 왜 죽은 것인지, 주인공이 밝혀 내고 짐작한 악당 조직의 비밀은 어디까지인지, 다 안 가르쳐주고 그냥 끝내 버립니다. 굳이 추측해 보자면 상상해 볼 수 있을만한 여지만 살짝 남겨서 영화 다 보고 나서도 생각만 많이 하게 해 주되, 모호하게 그냥 끝내는 겁니다.


(전체 줄거리 흐름이나 장면 장면에는 옛날 할리우드 느와르 영화에서 참조한 것도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영화 진행 속도가 느린 것치고는 계속해서 화면을 지켜 보게 하는 이야기는 꾸준히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주인공 알랭 들롱이 뭘 하러 저렇게 부지런히 싸돌아다니는지, 경찰의 심문을 빠져나갈 수 있을 지 없을 지, 목격자들이 알랭 들롱을 기억하는지 못하는 지, 지금 화면에 보이는 사람이 알랭 들롱을 배신하는지 하지 않는 지, 계속해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볼 건 수가 나옵니다. 이런 내용은 전부 알랭 들롱이 검거를 피할 수 있는지,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 운명에 바로 엮여 있어서 아슬아슬하게 보게 됩니다.


(형사에게 심문 당하는 주인공. 들킬 것인가 안들킬 것인가)

이 덕택에 영화는 계속 흥미를 유지해 나갑니다. 음악도 없고, 긴박한 편집도 없이 펼쳐지지만 궁금증은 생깁니다. 오히려 그 덕택에 망상 같은 이야기면서도 진짜 눈 앞에 벌어지는 일처럼 실감이 나고, 고요한 덕분에 집중력이 높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막판 지하철 추격전은 현란한 할리우드식 음악만 집어 넣으면 정말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의 추격전처럼 변할 내용에 가깝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옷차림도 빠뜨릴 수 없는 구경거리입니다. 60년대만 해도 과연 “패션의 도시, 파리”였구나 싶을 정도로 다들 하고 다는 모습이 21세기 거리에 나타나도 어울림이 빠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밖에...
"첩혈쌍웅" 이야기를 했는데, 한국영화에도 영향을 미친 영화입니다. 아예 나온지 얼마 안 된 당시에도 많은 특징을 따라한 영화가 나왔으니, 바로 1969년에 나온 "암살자" http://gerecter.egloos.com/3573263 입니다. 이만희가 감독을 맡은 영화인데, 재밌는 점도 있지만 부실한 점도 많은 영화입니다. 단적으로, 등장 인물들이 좀 꼬이는 바람에 알랭 들롱이 해야 했던 역할이 "암살자"에서는 여러 사람으로 분산 된 끝에 오지명에게도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장 피에르 멜빌 감독, 알랭 들롱 주연으로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에 나온 3편의 영화 중 제일 먼저 나온 영화입니다. 셋 중 주인공 알랭 들롱 한 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단순하다면 가장 단순한 영화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느긋하게 긴 장면을 잡아 내는 집중력에 걸맞아, 저는 가장 재밌게 본 영화였습니다. 알랭 들롱 나오는 영화 중에서도 아마 제가 맨 처음 본 영화였을 겁니다.

핑백

  • 게렉터블로그 : 암살자 2016-09-02 09:26:13 #

    ... 나왔던 알랭 들롱 나오는 프랑스 범죄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영화인 것입니다. 특히, 이 영화는 장 피에르 멜빌이 감독을 맡았던 유명한 영화, "한밤의 암살자" http://gerecter.egloos.com/5305813 의 영향 아래 있는 아류작이라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닙니다. 훗날 "첩혈쌍웅"도 "한밤의 암살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만, 그 이상으로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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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gerecter.egloos.com/5282255 1. 가장 좋은 연기를 보여준 영화: 한 밤의 암살자 (Le Samouraï, 1967) http://gerecter.egloos.com/5305813 이 영화는 과장하자면 알랑 들롱의 폼 잡는 모습이 영화 내용의 전부이고, 모든 줄거리, 연출, 소품은 그 폼을 잡기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할 ... more

덧글

  • 2016/09/02 10:5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9/05 08:2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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