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지기 전에 (Juste avant la nuit, 1971) 영화

"어두워지기 전에"는 1971년에 나온 범죄물로, 범죄물이라고 하지만 전문 범죄자나 연쇄살인범, 범죄 조직을 타파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직장인, 한 가정의 아버지가 저지른 한 건의 범죄에 대해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미셸 부케가 주연을 맡고, 클로드 샤브롤이 감독을 맡은 영화인데, 그러니 만큼 연출과 구성도 도전적이고 이야기도 그럴싸한 반전까지 곁들여서 풍성하고 재미난 영화였습니다. 샤브롤 감독의 60년대말, 70년대초 전성기 작업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기본 틀은 살인을 저지른 남자가 거기서 발을 빼고 빠져 나오게 되었는데,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포스터)

이 영화는 시작하자마 선정적인 살인 장면을 과감하게 들이 밀면서 시작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이탈리아산 지알로 연쇄살인마 영화만큼이나 자극적으로 출발 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침대 위에서 살해하는데, 어떤 사이인지 왜 저런 짓을 하는 지, 왜 두 사람은 이런 관계가 되었는지, 남자와 여자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려 주지 않고 바로 살인부터 밀어 붙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영화는 중반까지 천천히 문제의 남자와 여자의 배경과 삶을 차근차근 보여 줍니다. 그것을 지켜 보면서 범죄를 저지른 남자가 의외로 성실하게 세상 살아가는 일 잘하는 부유하며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편 그 여자는 남자와 어떻게 엮여 있었는지, 왜 그런 일까지 치달았는지도 남자의 삶을 보여 주는 가운데 하나 둘 까서 알려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하는 동안, 남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 남자가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양심의 가책 이야기는 굽이 굽이 넘어 가며 계속 커 집니다. 남자는 견디다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털어 놓을까 말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의 고민과 결단은 계속 이어집니다. 남자는 단계별로 새롭게 실토할 생각을 합니다. 관객은 “정말 털어 놓나? 정말 털어 놓나? 말하면 상대는 얼마나 놀랄까? 화를 낼까? 소리를 지를까? 남자를 후려 갈길까?” 아슬아슬하게 그 모습을 지켜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과연 사실이 언제, 어떻게 밝혀지는지, 남자는 이 일을 어떻게 정리하는 지 궁금해서 끝까지 따라 가게 하는 것이 이야기 재미의 한 가지였습니다.


(죄책감 주인공)

이 시절 프랑스 영화에서 잠시 불었던 유행 답게, 많은 대목에서 조용하게 별 음악도 없이 단지 남자의 표정과 대사만 차근히 보여 주면서 진행되는데, 이런 것이 이렇게 양심의 가책이라는 고민 분위기를 잘 살려 주었습니다.

장난스러운 기교로 재미를 더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간에 갑자기 쇠창살 같은 것이 화면에 확 나와서, “아 드디어 남자가 다 실토하고 감옥에 갇혔나보나” 생각하게 해 놓고, 화면이 멀어지면 그것은 그냥 대문 모양이 그렇게 생겼고 그 너머로 건너다 보는 것이었을 뿐임이 나오는 것도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뭔 공포 영화처럼 밀어 붙였고 출발을 아주 음산하게 한 것치고는 거의 절반까지는 아주 조용하고 진행이 느릿느릿하기는 했습니다. 내용도 이 즈음은 일상생활 묘사가 무척 많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크게 지루하지는 않은 것이, 이런 내용들이 다들 결말에 가면 복선이 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동안에도 꾸준히 남자의 양심 가책 이야기는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어서, 아주 휑한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 남자는 부유하게 잘 사는 사람이고, 특히 이 남자의 집은 현대적이면서도 화려하게 설계된 눈길을 붙잡아 끄는 것입니다. 이러니, 평화로운 일상, 남자의 흠잡을 때 없이 깨끗하고 좋아 보이는 삶과 숨겨 놓은 어두운 범죄가 대조 되어 서로 이야기를 살리는 효과도 꽤 있었습니다.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의 크리스마스)

죄의식 이야기만 내용의 전부가 아닙니다. 주인공 남자를 중심으로 남자의 부인과 남자의 친구도 다들 한 자락씩 이야기에 참여하면서 내용을 더 다채롭고 더 복잡하게 꾸며 주고 있었습니다.

우선 최고로 눈에 뜨이는 인물은 스테판느 오드랑이 연기한 남자의 부인입니다. 비중은 남자가 가장 높지만, 이 영화에서 결국 가장 특색이 있는 인물은 바로 이 남자의 부인입니다.

처음 등장할 때 보면, 스테판느 오드랑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가정의 상징입니다. 성실하고 아름답고, 부유한 집안의 안주인 역할을 잘 하고 있으며, 심지어 시어머니와의 관계까지 꿈처럼 좋을 정도 입니다. 게다가 항상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도 보살펴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흘러 가면서, 스테판느 오드랑의 모습은 죄를 저지른 남자는 대조되는 죄가 없는 성실하고 정갈한 인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남자는 가정적이고 헌신적인 부인을 보면서 더더욱 죄책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스테판느 오드랑은 겹겹히 더 많은 감정을 내뿜고, 이것이 영화 후반부를 뒤흔듭니다. 이제부터 이야기의 줄거리를 끝까지 전부 다 밝히면서 내용을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부인과 주인공)

우선 처음 남자가 살해했던 정체 불명의 여자는 남자와 바람난 여자로, 남자와 아주 친한 친구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더더욱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결국 남자는 자기 부인에게 자신이 자기 친구 아내와 바람났었다고 실토 합니다. 그런데 부인은 별로 화도 내지 않고 용서하고 다독거려 줍니다. 놀라고 충격 받은 정도도 무슨 조선시대에 배운 것인냥 보일 정도입니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면 애초에 남편에게 애착도 없고 남편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렇다고 너무 충격을 받고 남편을 혐오한다면 남편이 괴로울 것 아닙니까? 거의 예술과 같이 조절된 수준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드러날 만큼 안타까워 하지만, 남편에게 조금도 싫은 내색하는 느낌은 들지 안을 정도로 도리어 남편을 다독여 줍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영화의 스테판느 오드랑은 구시대 여성상에 지나치게 충실한 인물, 조선시대식 현모양처에 갇혀 있는 인물일 것입니다. 남자는 결국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부인에게 자신이 바람만 피운 것이 아니라, 바람 피운 상대를 살해하기까지 했다고 실토 합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괴로워하는 남자를 다독거려 주고 용서합니다. 남자에게 적당히 정황을 설명해서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사고였을 뿐이라고 위로해주기까지 합니다.

남자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자기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계속 떠들어대고, 부인은 계속해서 그것을 다독이며 자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줍니다. 부인은 더 이상 남자 보고 바람 피운 이야기나 살인 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남자는 자신은 “다 털어 놓고 참회해야 한다”면서 계속 이야기 합니다. 이쯤되면, 남편이 부인에게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죄의식 털어내자고 부인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남자는 자기 죄의식을 덜어 내지 못해 이제 죽은 여자의 남편인 자기 친구에게까지 모든 것을 털어 놓습니다. 그런데 친구조차 남편의 죄를 묻지 않고 그냥 덮고 넘어 가려 합니다. 친구는 주인공 살인 했다는 게 사실인지 믿을 수도 없는 소리라고 사고였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어차피 이제 다 잊고 묻어 놓은 일 헤집어 놓을 필요 없이 덮고 넘어 가자고 하는 겁니다.


(주인공과 오쟁이진 남편)

어떻게 보면, 이제 죄도 왠만히 고백했고 그런데도 별 처벌은 받지 않으니 그냥 넘어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남자는 여전히 자신이 속죄를 하지 못했다는 가책에 시달립니다.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결국 남자는 자수할 것을 결심하고, 그 전날 부인에게 자수할 계획을 털어 놓습니다.

그리고 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의 기묘한 상황이 다시 한 번 해설 됩니다.

원래 주인공 남자는 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부유하고 밝은 가정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다 친구 부인과 바람이 났고 친구 부인은 주인공 남자와 놀아 나며 그에게 위험한 일들을 제안했드랬습니다. 남자는 그런 행동을 하면서 정신적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이때 친구 부인은 남자가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쾌락으로 즐깁니다. 그동안 남자는 반대로 자기 마음 한 구석에서 자신도 자신의 그런 정신적 괴로움을 오히려 즐긴 것 아닌가 스스로 돌아 봅니다.

엉망으로 꼬인 심리 아닙니까? 어지간한 변태다 싶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흔히 보이는 일탈하고 싶은 심리의 묘한 느낌이란 것을 극도로 확대한 모양 같기도 합니다.

문제는 남자가 이제 살인을 저지른 후, 고백을 하는데, 그 고백을 듣고 욕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이 없으니 뭔가 후련해 하지 못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수를 하고 감옥에 갇히고 처벌을 받으려 합니다.

남자의 부인, 스테판느 오드랑은 당신이 감옥에 가면 처자식과 시어머니는 어쩌라고 그러냐고 자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남자는 결심을 굳힌 상태입니다. 부인은 남자를 만류하며 그 자수하겠다는 마음조차도, 남자가 그런 괴로움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꼬인 쾌락 아니겠냐며 따집니다. 이쯤되면 부인의 말이 날카로운 맞는 지적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말은 무엇인고 하니, 남편이 자수하기 전날 밤, 바로 그동안 남편을 그렇게 이해해주고 다독여 주던 부인, 스테판느 오드랑이 남편을 독살해서 없애 버린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남편은 감옥에 갇히지 않고 사라지고, 부인은 자기 남편이 바람 나고 살인을 저질렀다는 추문에서 손을 털어 버리게 됩니다. 결말 장면에서 해변에 앉아 시어머니와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부인의 모습은 지금까지와 전혀 달라 보입니다. 겉모습이나 옷차림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연을 알고 보는 관객의 눈에 화면의 모습이 다르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때껏 수동적이고 남편에게 매여 있기만 한 여성인 줄로만 알았던 부인이 한 순간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거의 반전처럼 보여 주는 듯 합니다.

부인이 아무 생각 없이 남편을 섬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부인이 남편을 이용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부인이 원한 것은 깨끗하고 부유한 가정과 그 안주인 역할이었고, 남편은 그것을 위해 부인이 선택한 부품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위협한다면 그 남편 역시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인이 무서운 사람이고, 남편이 불쌍한 중생이냐 하면 또 그건 전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이 가정의 모두가 다 원하는 것을 얻은 결말입니다. 남편은 그렇게 갈구하던 처벌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앞서서 부인이 자신을 처벌하기를 원했던 적도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아이들은 구질구질한 남편의 어두운 모습이 드러나는 일 없이 계속 평화롭고 부유한 가정에서 지낼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남편이 자수를 결심한 날, 부인이 주는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내막을 모른 채 부인에게 손을 뻗는 남자의 손과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는 듯이 하는 스테판느 오드랑의 모습, 그 멍한 눈빛은 이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을 하나로 엮어 한 장면에 다 담아 전달해 주고 있었습니다.


(스테판느 오드랑)

차분히 진행되는 이야기지만 초반에 잠깐 느릿느릿한 부분 이외에는 항상 긴장과 궁금증이 가득한 영화였습니다. 마지막의 고요한 꿈과 같은 해변 풍경이나, 첫장면의 범죄 순간처럼 화려하게 화면을 꾸며 촬영한 것이 눈을 휘어 잡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남자가 죄를 실토하는 장면에서 어두운 그늘 아래를 걷게 해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얼굴을 검게 가려 버려서 상상의 여지를 주는 연출도 기억에 남습니다.

주인공이, 횡령한 뒤 도주했다가 붙잡힌 자기 회사의 늙은 직원을 보고 기묘한 동정심을 느끼는 곁가지 이야기도 잘 들어가 있었습니다. 주인공 남자는 붙잡힌 늙은 직원에게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묻는데, 여기에서 별다른 추가 설명 없이도 주인공의 감정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이 저절로 느껴졌습니다.

그 성실하고 착해 보였던 늙은 회사 직원이 경찰에게 붙잡혀 끌려가면서 주인공의 물음에 마지막 한 마디를 합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지 않습니다. 대신, “지옥에나 가쇼”라고 합니다. 이 각본은 영화를 상징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주인공 남자가 갈 곳이 정말 지옥 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대사이기도 했습니다. 잘 맞아 떨어지는 굴곡 가득한 줄거리와 이야기의 독특함, 연출의 개성까지 잘 어울려 맞아든 영화였습니다.


그 밖에...
스테판느 오드랑이 하필이면 “엘렌(Hélène)”이라는 이름의 인물을 연기하고 당시 그 남편이었던 클로드 샤브롤이 감독을 맡은 영화로 60년대말 70년대초에 몰려 나온 4편의 영화 중 마지막 네번째 편입니다. 대강 엘렌 시리즈라고 부를 만한 영화들인데, 흔히 엘렌 사이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네 편은 나온 차례대로, “부정한 여인”, “도살자”, “파멸”, “어두워지기 전에” 입니다.

엘렌 시리즈 중에 첫번째 영화인 “부정한 여인”과 저절로 견주어지는 영화입니다. “부정한 여인” 역시 미셸 부케와 스테판느 오드랑이 교외에서 사는 부유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일군 부부로 나오는 영화입니다. 둘 다 미셸 부케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점도 같고, 미셸 부케의 극중 이름이 샤를이라는 점도 같습니다. 다만 “부정한 여인”에서는 스테판느 오드랑이 바람 나는 역할입니다. 두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같은 부부인데, 하나는 여자가 바람 났을 때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남자가 바람 났을 때를 보여 준다는 식으로, 두 가지 다른 경우를 보여 줬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중반에 주인공 친구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 주인공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자기 목격담을 전해 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주인공 친구는 괜히 의심하며 파헤치지 말고 그냥 묻어 두자고 합니다. 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그 후 말만 그렇게 하고 주인공 친구가 복수를 하기 위해 주인공에게 접근해 무슨 함정을 꾸며 끔찍한 사달을 내고 주먹질 발차기 칼싸움 총싸움 불지르기 깨부수기 대폭발 뭐 그렇게 이어지는 내용으로 흘러 가지 않을까 혼자 생각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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