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자 (Le Boucher, 백정, 1970) 영화

1970년작 “도살자”(프랑스 문화원에서 상영되었을 때, “백정”이라는 제목이 붙었던 적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는 요즘 많이 돌던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 숨겨져 있는 무시무시한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라면 시골 마을에 착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들 중에 위선자가 많고 끔찍한 풍습이 있고 무서운 과거도 있었고 사실은 경찰도 한 통속이고 뭐 이런 내용으로 흘러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아닙니다. 시골 마을은 그냥 계속 아름답고, 무시무시한 비밀은 말 그대로 비밀이라서 그냥 숨겨져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냥 85% 정도가 줄기차게 아름다운 시골 마을 이야기로 되어 있고, 무시무시한 비밀은 막판 15% 정도 밖에 안되는 느낌이었습니다.


(포스터)

줄거리는 어느 시골 마을 결혼식 하객으로 한 선생님과 한 정육점 직원이 만나 친해지는데 그 마을에서 연쇄살인사건도 한 켠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결혼식 장면을 느긋하게 보여 주는 것이 초장이고, 중반 대부분은 결혼식 장에서 알게 된 선생님과 정육점 직원이 이런 저런 일로 만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며 아주 천천히 가까워지는 내용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시작한 지 한참 뒤에야 살인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나오고, 그 후로도 막판까지는 살인 이야기는 그냥 배경처럼 가끔 한 두 마디 전해지는 정도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흔히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대표작으로도 종종 손꼽히는 영화입니다만, 저는 같은 감독이 작업한 다른 영화 보다 특별히 재밌게 본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결말은 살인범 정체 드러내기입니다만, 내용은 전체적으로 데이트 이야기에 대거 비중을 실은 독특한 구조인데, 결국 끝을 보면 딱히 독특할 것 없이 주인공을 제압한 악당이 뭔 제임스 본드 악당처럼 주절주절 친절하게 자기 사정과 계획을 다 고백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싱겁지 않나 싶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악당이 주인공을 갈구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렇게 주절주절 자기 사연을 들려 주는 것이라고 이유를 댈 수 있기야 합니다만. 뭐 모르겠습니다. 007 영화의 그 만화 같은 악당들도 사실은 마음 한켠에서 제임스 본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하여 범죄자의 정체가 드러나고 칼 부림하면서 육중하게 끝나는 영화이지만, 그 직전까지 내내 범죄물 이야기거리가 적은 것이 개성인 영화입니다.


(주인공)

물론 범죄물 이야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암시는 많았습니다. 선사시대 부터 계속된 인간의 사냥하고 싸우는 습성에 대한 암시라든가, 정육점 직원이 참전 용사로 싸우면서 험한 꼴을 많이 봤다는 이야기가 어둡게 나오는 것은 겹겹이 이야기를 쌓는 재료는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도 크게 색다른 소재는 없었고, 감정을 강하게 움직이는 내용도 적었다고 느꼈습니다. 참전 용사의 마음에 남은 상처 때문에 사람이 이상해지는 이야기라면 “람보”가 차라리 나을 겁니다.

평화로운 일상 생활 속에 아주 가깝게 숨겨져 있는 사악함, 죄라는 소재를 드러내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평화로운 일상 생활” 쪽 이야기가 다른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많았다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자면, 결정적인 칼부림 장면 보다도 중간에 나오는 초등학생들 춤 가르쳐 주는 장면이 더 길고 자세하게 나옵니다.

후반에 여자 주인공을 맡은 스테판느 오드랑이 직접 살인을 당한 시체를 목격하면서부터는 이야기가 범죄쪽으로 좀 기웁니다. 하지만, 그 역시 이 바닥에서는 평범한 정도였습니다.

범인인 줄 혼자 의심했다가, 의심이 풀렸다가 하는 장면을 긴장감 있게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매끄러운 솜씨이긴 합니다. “아, 설마 그 사람이 범인이란 말이야? 아닐거야. 아니겠지. 그렇지만 범인이라면 어떡하지.” 같은 구구한 대사는 한 마디도 쓰지도 않고, 말 없이 화면에 보이는 물체와 주인공의 표정을 번갈아 가며 보여 주는 것만으로, 관객이 직접 그 감정을 상상하고 추측해서 대신 느끼게 만들어 주는 매끄러운 재주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놀라운 볼거리라기 보다는 교과서 대로 진행했다는 정도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클로드 샤브롤이 감독을 맡은 다른 영화들과 견주어 볼 때 좀 더 가치가 사는 영화이지 싶습니다. 만약 그냥 무명 감독이 이 영화를 이렇게 연출했다면, “줄기차게 평화로운 장면만 나오다가 막판에 암담한 살인을 드러내는 점이 특이하네”하는 평을 받는 그냥 괜찮게 연출된 개성 있는 영화 정도에 머물렀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범죄, 죄에 대한 영화를 꾸준히 연출해 온 클로드 샤브롤이 참여한 영화들 사이의 흐름에서 비춰 보면 특색과 장점, 몇 가지 묘한 소재가 좀 더 눈에 띄게 될 것입니다.

장점을 꼽아 본다면, 일단 아름다운 교외 마을의 풍경과 정취가 잘 담겨 있다는 것부터 골라 볼만 합니다.


(결혼식에서 만남)

특히 결혼식장에서 처음 만난 뒤 귀가하는 남녀 주인공을 연속으로 화면에 담아 내면서 같이 걸으며 대화하는 장면을 4분 가까이 실시간으로 보여 주는 장면은 기억에 남습니다.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담아 보여주는 것 뿐이지만 분명히 뭔가 영영 기억에 남는 봄날 오후의 추억 될 것처럼 보입니다. 마지막에 쓰러진 범인을 주인공이 차에 태워 옮겨 가는 장면 역시 기억에 남습니다. 이례적으로 차가 출발해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전체 시간이 실시간으로 다 담겨 있습니다. 넉넉히 감정을 끌어 가기에도 좋았고, 실감 나는 느낌과 함께 다 끝난 뒤의 여운을 남기기도 좋았다고 생각 합니다.


그 밖에...
스테판느 오드랑이 하필이면 “엘렌(Hélène)”이라는 이름의 인물을 연기하고 당시 그 남편이었던 클로드 샤브롤이 감독을 맡은 영화로 60년대말 70년대초에 몰려 나온 4편의 영화 중 두번째 편입니다. 대강 엘렌 시리즈라고 부를 만한 영화들인데, 흔히 엘렌 사이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네 편은 나온 차례대로, “부정한 여인”, “도살자”, “파멸”, “어두워지기 전에” 입니다.

주인공을 맡은 스테판느 오드랑은 클로드 샤브롤이 감독을 맡은 많은 영화에 출연해서 영화를 십분 살렸습니다. 저는 스테판느 오드랑의 다양한 표정과 몸짓이 폭발한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이 영화의 모습은 소극적인 역할이라서 그런지 비교적 약하다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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